[드랍/나타유리] 언제나 세상을 사랑하세요

구금 2022-08-26 0

*가이드 버스 + 클저 세계관 짬뽕입니다 ~ ~ ~  

*가이드 버스 = 초능력을 가진 사람과 초능력을 가진 사람의 폭주를 접촉으로서 진정 시킬 수 있는 가이드가 존재하는 세계관 입니다 ~  ~ ~

*20년도에 재활용도로 쓰던 걸 마무리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대뜸 던지는게 아쉽기도 하네요 2년동안 글을 못 쓰는 거 보면 접을 때 겠죠 아무쪼록 낡은 글이라 부끄럽지만 아쉬운 마음에 올려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든 삭제될 수 있으며 그냥 나타유리 흥해라  ~ ~  ~ 외길 마이너 인생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 ~ 


*올린 상태에서 확인하니 나타 욕설이 많이 블러처리가 됐더군요ㅋㅋㅋㅋ 순하게 바꾸고 삭제했으나 다소 어색할 수 있습니다 ~ ~ 

 







N에게 있어 언제나 세상을 사랑하세요! 하는 회사의 문구는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본인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사랑이라는 그 추상적인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N은 슬로건이 붙은 게시판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이내 가볍게 비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 질난 맛에 살다가 머리마저 까진 건지. 상부놈들은 멍청한 게 틀림없어. 몇 분간 문구를 바라본 N의 감상은 자주 저에게 억지로 책을 들려주던 직장 동료의 취향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그 책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사랑에 눈먼 자들의 멍청함을 그린 책을 끌어안고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는 동료에게 취향하고는…, 하며 돌아선 경력이 있지 않은가. N은 이번에도 등지고 뒤돌아섰다.

 

사랑, 사랑, 사랑, 그놈에 사랑. 격리 생활을 조성하는 회사 내에서 사랑 타령하기에는 그 의도가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동료는 그런 회사 분위기를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만 N은 제 기분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구역질까지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물며 한 달 전 저에게 가이드를 붙여준답시고 억지로 각인을 시키려던 회사 아니던가. 제 동료는 미쳐도 단단히 돈 게 틀림없다. 머릿속 몇 주 전 강압적인 순간이 스쳐 지나가자 N은 닭살이라도 돋은 것처럼 으, 하는 신음과 함께 잠시 몸을 떨더니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제 일거수일투족을 회사에서 전부 감시하겠지만 이 방은 오롯이 N만을 위한 공간이니 말이다. 적어도 저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N은 진정이 됐다. 그리고 그게 N만의 생각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N에게는 특별히 지정된 가이드가 없었고 그건 N이 트레이너 휘하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 통제할 수 있다고 단언한 트레이너의 얼굴에 먹칠한 대가가 그에게로 날아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곧바로 감시 카메라가 딸린 독방으로 이송된 것은 물론이요, 트레이너까지 나서서 그에게 가이드를 붙여 주기 위해 혈안이었다. 이 녀석은 어떤가. 이 녀석은 어떤가. 그렇다면 이 녀석은 어떤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각인되지 않은 가이드 목록을 들고 독방에 들어온 트레이너는 꽤나 깜찍한 실수를 저지른 부하에게 특별한 꾸중 없이 가이드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N은 그게 불편했다. 차라리 전처럼 제 얼굴을 세게 내려치든가 배를 걷어차든가 이도 아니면 너 같은 약골이 폭주를 하는 거다, 같은 언행을 보여줬으면 했다. N은 그게 트레이너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우리들의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걸로 유니온에서 넘겨준 자료는 끝났다. 몇백 명 되는 사람을 다 싫다고 하는군.

그냥 그렇다고 하면 전처럼 또 이상한 방에 밀어 넣을 거잖아.

…그렇겠지.

 

트레이너는 N과 마주 앉아 차분히 제가 가져온 서류를 정리했다. N은 그 무거운 침묵이 끔찍이도 싫었으며 전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면 서둘러 제 방에서 나가줬으면 했다. 불행히도 자신의 안식처라 여기는 소중한 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바라는 것뿐이었고 아쉽게도 상대는 그러길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몇 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뭔, 같잖은 설교 같은 거라면 집어치워. 소름 끼친다고!

유니온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했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고 너를 받아들인 우리에게 되레 감사했다.

 

입을 연 트레이너는 요란 떠는 N에게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가 몇 주 전부터 머릿속에 두던 이야기를 술술 풀기로 했다. N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아침으로 먹었던 시리얼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매슥거림을 느꼈다.

 

유니온은 네가 행복한 여생을 보내길 바라고 있다.

 

웃기고 있네. 이딴 몸으로 만들어 놓고서 그렇게 바라면 뭐가 돼? N은 책상에 얼굴을 박고서 묵묵히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제가 알던 트레이너가 아니었다. 제가 망할 꼰대라고 욕하던 트레이너가 정말 맛이 가버리거나 너무 늙어서 풍부한 감수성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앞에서 오지랖을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3주 전 네가 일으킨 폭주에 대해 특별히 추궁하지 않는 거다. 이렇게 가이드 목록까지 보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너도 이제 성인,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앞으로도 몇십 년은 여기서 일해야 하니까, 그 기간 동안 계속 봐줄 수 없으니까, 뭐 그딴소리나 하려고 몇 주 동안 그 난리를 떤 거야? ?! 내가 가이드 없이 몇 년을 살았는데! 이제 와서 사람 취급해주겠다고 내가 감사합니다, 절이라도 할 줄 알았어? 웃기지 말라 그래!

 

N은 이윽고 제 속에서 울렁거리던 말들을 빠르게 내뱉었다. 뱉으면 뱉을수록 제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장에 매달린 경보등이 울리며 알려줬지만 뚫린 입은 멈출 줄 몰랐다. 갑자기 제 방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이 저를 붙잡으며 빨갛게 물든 벽으로 밀 때조차 N은 나불거리는 제 입을, 점차 과격해지는 몸짓을 제어할 수 없었다. N의 격리 기간이 열흘 늘어났다.

 

늘어난 격리 기간 동안 제 동료가 저를 위해 친절하게도 본인 취향의 책들을 잔뜩 안겨줄 줄 알았다면 N은 기필코 그 당시 트레이너의 애달픈 속마음을 얌전히 들어줬을 거다. 상부는 격리 기간 동안 또, 질리지 않고, 흥분한 저에게 경고 차원에서인지 배려 따윈 보여주지 않았고 N으로서는 지루한 시간을 서둘러 보낼 물건이 필요했다. 몇천 페이지가 되든 간에 N은 취향 한 번 구리네, 하고 뒤돌아선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어쩌면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는 그 사랑, 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N은 흔쾌히 동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제가 그 품 안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줘요! 당신의 품에 안겨 고동을 느끼고 싶어요!>

 

대체 어느 부분이 감동적이라는 건지…. N은 잠시 생각했던 감사 인사를 철회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역시. 저와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읽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N으로서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어째서 이 등장인물들은 사랑에 미쳐 있는가. 상대를 안고 입술을 부비다 쪽 소리가 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진리의 법칙이라도 있는 건가? N은 만약 그런 시대가 도래한다면 깔끔하게 세상과 연을 고하겠다고 다짐했다.

 

행위가 아니라 연결된 마음을 봐야죠.

 

책을 넘겨줄 때 그런 제 의문을 툭 하고 내던지자 되레 제 동료는 저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확고하던지 N은 괜히 입을 놀렸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았다. 제 동료는 특별한 일이 없었는지 N을 붙잡고 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며 명강의를 펼쳤다. 물론, N의 귀에 제대로 들어온 건 없었다.

 

가이드가 없는 건 마찬가지면서 뭔 말을 그렇게,

N. 가이드가 없어도 마음은 교류할 수 있어요. 실제로 저와 하이드는 가이드가 없지만 서로의 가이드가 되고 있어요. 전 하이드를 믿을 수 있고 하이드 또한 절 믿고 있어요. 그것도 하나의 사랑인 거예요.

 

제 동료는 미간을 찌푸린 저를 보더니 안 되겠다며 그냥 돌아가려는 걸 붙잡고는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 넘겼다. N은 비록 지루한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고역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제 동료는 이제 책을 넘겨주러 오기만 하면 곧장 감상을 물었고 또다시 탄생할 위대한 강의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적어도 줄거리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했다. 제 동료는 상부에게, 트레이너에게 무언가 받은 게 틀림없었다. 원체 사랑 타령하는 걸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저에게 어떻게든 가이드를 붙이고야 말겠다는 상부의 음흉한 속셈이 엿보였다.

 

머리는 좀 식혔나.

부잣집 여자한테 그 짓거리 시킨 거 꼰대지?

 

추가된 격리가 끝날 때쯤 안부 차 온 트레이너에게 물었을 때 옅게 올라간 입꼬리가 더욱이 그 증거가 되었다. , 아니오, 하는 답변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니 N으로서는 그 미묘한 변화가 확실한 답변이 되었다. 다시금 제 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게 느껴졌지만 N은 참기로 했다. 이번에는 참아야 했다. 이제는 신선한 산 공기도 아닌 도심 속 매연으로 가득 찬 대기조차 산뜻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사흘 후면 근신이 끝난다지. 너도 이제 이 방에서 원래 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테고.

용건만 말해. 또 성질나기 전에.

가이드 구했다.

, .

 

N은 덜컹 소리가 나게 의자를 뒤로 밀고 벌떡 일어나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지 제 앞에 앉은 트레이너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도 트레이너는 굴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되레 N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저 푸르른 눈동자 속에서 담긴 여러 의미를 트레이너는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에게 덤비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눌러 내뱉은 말이 나가, 라는 것도. 가지런히 제 옆에 붙인 주먹을 펴면 화를 참느라 생긴 손톱자국이 있을 거란 것도. 트레이너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애초에 트레이너에게 그런 N의 행동은 전부 예상된 반응 중 하나였다. N은 기특하게도 스스로 화를 삭이는 쪽을 택했다. 트레이너는 그런 N의 갸륵함에 맞춰 주기로 했는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등 돌려 나갔다.

 

N은 트레이너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가 일어나 쓰러트린 의자를 문으로 집어 던지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주먹으로 잭상을 쾅쾅 내리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제 동의도 없이 멋대로 일을 진행한 트레이너를 향한 배신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꼰대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른 사람이 날 멋대로 취급해도 꼰대는 그러지 말아야지. 가이드 없이 사람 취급 못 받은 몇 년을 꼰대가 모르는 척하면 안 되지. 심지어 그중 3년은 댁이랑 같이 지냈다고. N은 제 머리를 벽에 콱 막아 차라리 지금 드는 이 생각들이 전부 다 멈췄으면 좋겠다고, 기절해서 제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억이라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우 씨는 늘 그래요, 늘 아무런 말도 않고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죠! 저도 도울 수 있게 해줘요!>

 

웃기게도 제 동료가 건네준 책 중 언젠가 읽었던 문구가 N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역시나. 저와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트레이너는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N을 찾아왔다. 하기야 사흘 후 ─하루가 지나 이제는 이틀이 되었지만─ 면 만날 생면부지의 사람을 N에게 이해시키기에 빠듯한 시간이었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N과 마주할 가이드가 안쓰럽지 않은가. 툭하면 시비 걸고 투덜거릴 N을 조금이라도 납득시켜야 했다.

 

어제처럼 안부 인사라도 해주길 바라나? …뭐. 그런 것 같진 않군.

 

N은 삐딱하게 앉아 트레이너를 바라봤다. 만약 N이 학교에 다녔더라면 분명 분단 맨 끝 창가에 앉아 딴짓을 꽤나 해본 학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퉁명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만, 그런 N의 얼굴을 찬찬히 훑은 트레이너에게는 귀엽게 보였다는 점이 흠이었다. 사나운 문제아를 다루는 데 있어 전문가인 트레이너에게 불퉁스러운 반응은 애교에 그칠 뿐이다. N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쯤 저를 앙증맞게 생각할 트레이너를 생각하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어쩌겠는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겨주기는 싫고. 그렇다고 또 얼굴을 보자마자 골낼 수는 없고. 나름대로 찾은 타협선에 만족할 수밖에.

 

네 또래에 가이드로 발현한 지 몇 주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트레이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와 제 옆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고 N에게 쓱 내밀었다. 눈짓을 보아하니 네가 원한다면 펼쳐도 좋고 설명으로 만족하려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N은 잠시 제 앞에 놓인 봉투를 쳐다봤다. 담황색의 서류 봉투에는 특별히 무언가 적혀있진 않았다. 규격대로 만들어진 봉투에 규격대로 적힌 서류 더미가 들어있을 게 뻔했다.

 

나 같은 놈에게 제대로 된 가이드는 아깝다. , 그런 건가?

 

N은 지금 제가 부러 성질을 부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모난 말이 툭툭 나가는 걸 구태여 멈추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라도 화를 풀어야 저를 멋대로 떠넘긴 트레이너가 조금은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귀여운 투정이 아닌 까탈스러운 상처가 되길 바랐다.

 

유연성, 균형 감각 등의 신체 능력은 위상능력자와 맞먹는 인재다.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니 어릴 때 위상능력이 발현됐다는 장난을 자주 치고는 했다더군.

그새 면접 같은 거라도 했나 봐? 나 모르는 사이 둘이서 짜고 치,

N. 널 위해서다.

 

그런데도 자기를 아꼈기에 이렇게 행동했다는 걸 보여주려는 트레이너의 행동이 자꾸만 거슬렸다. 해명하려는 듯한 그 모습이 N에게는 되레 역겹게 느껴졌다. 나를 위한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N은 울컥울컥 튀어나오려는 울분을 참기 위해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밑으로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더군. 집안일 같은 것도 자신 있다 하고. 가이딩에 대한 교육은 유니온에서 일정 수준 수료했다고 어제 연락 왔다. …궁금한 건 없나?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관심은 무슨.

 

N은 제 앞에 놓인 서류 봉투를 트레이너 쪽으로 밀며 보란 듯이 팔짱을 껴보았다. 네가 암만 회유해봐라. 내가 그 놈이랑 손잡고 하하호호할지, 그놈이 울면서 뛰쳐나갈지. N은 그런 류의 내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남을 모질게 대하는 데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후 씨익거리든 엉엉거리든 방문을 열고 나갈 녀석의 뒷모습을 상상하는 N을 눈치챘는지 피식 코웃음치던 트레이너는 N이 내민 봉투를 챙기고서 자리를 정리했다.

 

나중에라도 궁금하면 개인 휴대폰 받고서 검색해봐라. 제법 유명한 사람이니.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트레이너는 내심 N이 가이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는 뜻으로 툭 내던진 말이었지만 N에게는 그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속내가 뻔히 보이니 생각대로 해주기 싫은 반항심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렇기에 N은 이틀 후 감시 카메라로 가득 찬 층에서 벗어나 저와 마찬가지로 가이드를 가지지 않은 동료들이 있는 층으로, 다시 널찍한 제 방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가이드는 무슨. N은 제 방에 두고 온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조각상과 책갈피를 꽂은 책에게 건네는 손길을 생각했다. 트레이너의 무전을 받고서 다시금 신서울의 거리를 뛰어다니는 하루를 생각했다. 역시. 가이드 따윈 필요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N 담당 가이드가 여기로 출근하겠네요?

 

제 동료는 능청스럽게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달라는 걸 번거롭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N은 제 동료가 가진 뻔뻔스러움은 가히 존경할만하다고 인정했다. 제 책을 제대로 읽었나 검사하는 것보다 들이닥친 일에 구미가 당기는 걸 숨길 생각이 없었다. 별 말없이 책을 건네받자 곧장 튀어나온 그 문장에 N은 허, 하며 기가 찬다는 걸 표현했지만 제 동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사진은 봤어요? 하고 묻는 상대에게 N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보긴 뭘 봐. 며칠 후면 질질 짜면서 갈 놈을.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봐요. 가이드가 생기면 여기서 생활하지 않고 바깥에서 생활할 수 있어요! 식단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린 적 많잖아요. 가이드 이용해서 도시로 나간다고 생각하세요. 귀찮아도 시간 맞춰서 먹던 안정제도 이제 필요 없어지는 거고 또…,

 

트레이너에게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료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회유를 보여줬다. N은 제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동료에게 약간의 동정심도 느꼈다. 그래봤자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저 몰래 한 쪽에서는 사람을 구하고 한 쪽에서는 갑자기 생긴 가이드를 받아들이라며 언질하고. 쥐마냥 은밀히 숨어서 모의한 꼴이 괘씸하긴 했지만 몇 주간의 노력이 며칠 만에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아 N은 그저 동료가 말하는 걸 묵묵히 들어줬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는 제 모습에 희망을 품는 동료의 꼴이 제법 우스웠다.

 

N이 제 가이드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 분명 오후 4시였다. 어제처럼 아침 식사 후 짧은 휴식이 끝나면 다소 지루하고 긴 신체검사 및 사내 만족도 조사를 빙자한 상담이 있었고 그다음 주어진 여가 사이에 가이드와의 미팅이 추가되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제 상담을 진행한 직원이 혹여나 전처럼 모르는 척이라도 할까, 직접 방까지 안내하는 수고를 보여줬다. , 기선 제압 그런 거라도 하는 건가? 이십여 분 동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이미 며칠씩이나 허송세월 보낸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고 어쩌면 트레이너에게 초장부터 기를 잡아야 한다느니 뭐니 같잖은 소리를 듣고서 그러는 건 아닌지 의심될 때쯤 문이 벌컥 열렸다.

 

늦어서 미안해요! 건물 워낙 넓어서 일주일 전에 안내를 받았는데 헤맸어요, 진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어, , 혹시 내가 또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죠?

 

벌컥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정말 헤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약속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는 걸 어필하듯 땀이 난 얼굴에 옆 머리카락이 슬쩍 달라붙어 있었고 아마 걸쳤을 거라 추정되는 재킷을 한쪽 팔에 올린 채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그런 허술한 모습에 N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관심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가이드의 모습과 터무니없이 달랐다. 우선 상상 속 N의 가이드는 트레이너처럼 투박한 몸에 제법 무뚝뚝했다. 그래, 사실 제2의 트레이너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벌처스에 들어와 폭주 사건을 몇 번 일으키고 난 후로 줄곧 저를 관리하던 건 트레이너였으니 말이다. 트레이너 외 나를 담당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싶은 마음이 뒤섞은 빈약한 상상력이었던 걸 지금에서야 깨닫고 말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그냥 평범한 민간인 아닌가. 신체 능력이 어마무시하다며? N은 트레이너가 남긴 말을 뒤늦게 곱씹었지만 그다지 도움되진 않았다. 지금도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상대가 본인이 찾는 사람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어벙하게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가방에서 멍청하게 뭘 찾는 건진 몰라도 N을 찾는 거라면 여기 맞아.

, 응응! 맞아, N을 만나려고! 네가 N 맞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동갑이니까 서로 말은 편하게 할까? 이름은 들었겠지만 S라고 불러줘! 각인되지 않은 가이드랑 위상능력자는 이니셜로 부른다며? 유니온에서 교육받을 때 듣고서 신기했다니까.

 

게다가 초짜 티를 팍팍 내는 꼴이 며칠이라고 계산하던 게 전부 틀렸다. 이건 딱 하루 안에 정리 가능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정말로 멍청한 건지 은근히 저를 욕하는 걸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는 게 보기에도 거북했다. N은 저렇게 소란스럽고,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어째서 트레이너 대신으로 뽑혔는지 의아했다. 여러모로 정반대의 사람 아닌가. 여성에, 시끄럽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조잘대며 테이블에 제 가방과 옷가지를 올리고 의자에 앉아 손부채질하며 열을 식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모든 게 짜증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가이드에게 기대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싫증난 게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저에게 이러저러 살가운 얘기를 할 거라 생각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긴 왜 와.

늦어서 미안해. 그래도 확실하게 받아왔어. 네 방 출입 카드. 그리고 네 핸드폰. 나한테서 받아 가라고 했다며.

 

저거 정말 멍청한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제가 내뱉은 말은 지각에 대한 꾸중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제 가방 속에서 슬쩍 키카드와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는 행동이 저를 다독이는 듯해 더욱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약 오늘 만난 가이드에 대한 평가서를 누군가 건네준다면 N는 온갖 항목에다가 1점이라고 표시하며 그렇게 생각한 이유까지 친절히 적을 수 있었다. 약속 시간 늦었으며 괜스레 친한 척하는 것 같은 모양이 영 아니다. 하고 말이다. 물론 상부에게 후자에 관한 얘기가 먹힐 리 없지만 말이다.

 

멍청아, 그게 아니잖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뭐하러 지원하고 자빠졌냐고. 난 가이드 따위는 필요도 없고 특히 너같이 헤실거리는 놈은 재수 없어서 더 꼴 보기 싫어.

 

NS가 떨어져 나갈 수 있게 직접 제 입을 떠벌려 주었다. 제풀에 나가떨어지는 게 아닌 손수 언질을 주면서 어쩌면 S가 유니온 측에게 어째서 담당 가이드를 그만두었습니까? 하고 질문받았을 때 N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더러워서 옆에 붙어서 담당하기에도 버겁고 본인 스스로 가이드도 필요 없다고 하네요. 하고 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담아 보냈다. N은 이런 모진 말을 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는 게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이왕 내쫓기로 한 거 쾅 소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책상도 한 번 내리치고, 삿대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최대한 표정을 찌푸리며 S를 가리켰다.

 

에이, 너도 담당 가이드는 없었다며? 우리 서로 처음이니까 둘이서 같이 해나가면 되지! 너는 N, 나는 S. 자석 생각나지 않아? 서로 밀어내지 말고 붙어 있자.

 

그런데도 S는 태연했다. 도리어 꽤나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며 삿대질을 하느라 마중 나온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이거 알아? E.T 영화에서 나오는 건데. 아무튼 잘 지내보자구.

 

N은 직감했다. 이놈은 무식하다고. 이도 아니면 미쳐도 단단히 돈 게 틀림없다고. 사람이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N은 맞부딪힌 손가락이 마치 벌레에 닿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내뺐지만 그조차도 S는 씩 웃어 보이며 다시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 저 손을 덥석 잡는다면 그거야말로 제 동료가 원하는 방향, 트레이너가 원하는 방향일 터. N이 어떻게든 S의 휘말림에 넘어가지 않도록 제 쪽으로 흐름을 가져오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S는 이미 팔을 쭉 뻗어 숨은 N의 손을 꺼내 기어코 악수를 하고야 말았다. N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가 어딘가 세게 부딪혀 멈춰버린 건 아닌지, 하는 의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벙하게 S의 눈을 바라봤다. S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방 구경해도 돼? 열쇠까지 가지고 왔는데 설마 방 구경 하나 못 시켜 주는 거 아니지? 저녁 먹을 때까지는 같이 있어도 되잖아. ?

, ? ?

야호, 된다는 거지? 그럼 인사는 이쯤하고 안내해주라! 여기 너무 넓어서 복잡해.

 

방방 흔들던 손을 뗀 S는 부산스럽게 제 가방과 옷가지를 챙기고 일어났다. N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서둘러 떠난 평온을 곱씹을 틈 없이 몰아치는 소란스러움에 적응해야 했다. 머릿속은 적색경보를 울렸고 N은 왜인지 모를 매슥거림을 느꼈다. 어제오늘 신체검사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아도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어쩌면 정말 제 속이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울렁거리는 건 또 뭐야. 갇혀 지낸 동안 안 움직여서 그런가.

 

N, 얼른 와. 네가 안내해줘야지. 나 여기가 몇 층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해.

 

S는 참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막무가내로 어리바리하게 앉아 있는 N을 보고는 문밖까지 나간 몸을 친절히 돌려 N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일으켜 세웠다. N은 그런 자잘한 스킨쉽에서는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제 등에 손을 댄다면 그건 뒤통수를 노리지 못한 멍청함이었다. 움찔 떠는 N의 반응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S N의 손목을 붙잡고 문 바깥으로 이끌었다. N은 이상하게도 그런 S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상해. 그 여자 맛 간 것 같아.

오밤중에 찾아와서 그런 소리 하는 너도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나?

 

N은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는 제 동료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정말 저도 그 S라는 가이드 때문에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자고 잘 시간에 이 방에 찾아왔는지 다시금 생각하니 무언가에 홀린 건 아닐까 싶었다. 제 동료는 혀 차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N의 눈을 성심성의껏 쳐다보며 똑같이 쯧, 하는 소리를 내주었다. 기계가 낸 소리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음을 낸 동료를 바라보니 저 자식은 끝까지 가이드가 생기지 않을 거라, N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성인이 돼서 청소년에게 가르침을 주지는 못할망정 뒷담이나 하려고 온 거라면 네 방으로 돌아가라.

저게 진짜.

우리 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생각 안 하나. 네 빈 자리 메꾸려고 쉬는 시간도 없이 일했다. 그런데 네 놈은 가이드를 만나고 와서 하는 말이 이상하다는 것뿐이라면 내가 해줄 말은 없을 거다.

 

제 동료는 그동안 해주고 싶었던 욕바가지라도 단단히 준비해두고 있었던 건지 옳다구나, 싶어 N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제 동료는 늘 그랬다. N은 비록 제 동료가 그럴 때마다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을 만큼 재수 없었지만 저런 모습이 있었기에 제 동료로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아주 명확하게 정의할 줄 알았다. 주변을 관찰하는 능력도 뛰어났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N은 그렇기 때문에 이 밤 중에 그를 찾아와 얘기를 꺼낸 거였다.

 

뭐래. 부잣집 여자는 찾아갈 때마다 계속 방에 있더만.

 

제 쪽에서 시비를 걸 지 않았더라면 얌전히 조언을 구하고 빠졌을 거다. 어쩌면 팁으로 아이스크림 5개 정도 얹어주면서 말이다. 비록은 개뿔의 비록.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은 꼬맹이는 건재했다.

 

네가 올 때쯤 숙소로 가 있으라는 트레이너의 명령이었으니 말이다. 덕에 빈 자리가 더 생겼다지. 이게 뭘 뜻하는 것 같나.

이제 너까지 나를 위해서니 뭐니 그딴소리나 할 거냐? 가이드 필요 없다고 계속 말했,

N. 가이드가 생긴다고 해서 여태껏 살아온 네 모습이 지워지진 않을 거다. 넌 여전히 늑대개의 N일 테고, 난 여전히 네 동료일 거다. 트레이너는 여전히 네 트레이너일 테고,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

 

N은 저 쥐방울만 한 꼬맹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디서, 무엇을 들었는지 몰라도 저 말은 과한 참견이요, 과한 오만이었다. 더군다나 N이 바란 조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N은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움켜줬다. 화를 삭이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만약 이 방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면 곧장 왜애앵거리며 적색 불빛이 마구잡이로 돌아갈 행동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N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의 근신은 안 되지. 안 돼. N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째서 근신 생활이 이어져서는 안 되는지를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습게도 쾅쾅 내려치는 제 발소리에 N은 다시금 화가 났다.

 

야호, 안녕. 좋은 아침! 오늘은 헤매지 않고 잘 찾아왔다. 그치?

이건 또 뭔….

 

간신히 화를 삭이고 일어난 아침 식사가 또 시리얼이라는 점에서 큰 불만을 느끼고 있을 때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게 그 화의 주 원인인 S라니. 운세 따위를 확인하는 게 꼴 사납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만약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면 최악이라고 꼽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S는 언제 회사에서 제 방 카드키를 받았는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S가 보고 있던 채널은 소위 막장이라 일컫는 아침 드라마였다. 중년 여성이 마주 앉은 사람에게 물컵에 담긴 물을 들이붙는 장면이 N의 눈에 보였다. . 차라리. 제 얼굴에 누군가 물을 끼얹었더라면 지금이 꿈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럴 사람은 제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오늘 오후에 네가 일 나간다고 해서 오전 중에 찾아오기로 했잖아. 잊은 거 아니지? , 맞다. 어제 네가 알려준 영화 봤거든? 재미있더라구. 원작인 책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혹시 빌려줄 수 있어? 물론! 내가 어제도 말하긴 했지만 책만 읽으면 자는 타입이라 얼마나 읽을 지는 모르지만, 노력해보려고.

 

S는 정말 소란스러웠다. N은 당장이라도 그런 S의 주둥이를 막고서 얌전히 있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조잘대며 다가오더니 덥썩 손을 잡고 흔드는 S의 행동에 다시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N은 또다시 S의 손짓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어렴풋이 지금 S와 소꿉놀이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 마주 앉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주고받고 하나의 주제에 의견을 나누고. 평화로운 일상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N은 텅 빈 머릿속에 생긴 하나의 문장에 집중했다. 달리 주목할 거리가 없었기에 N의 머릿속엔 평화롭고, 단조로우며, 느긋한 누군가의 주말이 점철됐다. 갑자기 욕지기를 느꼈다.

 

N! N! 괜찮아? 너무 덥나? 너 땀 나. 식은땀 아니야? 괜찮아? 오늘 일정 취소할까?

, 됐어. 됐다고…

 

S은 빠르게 N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이마를 훑어 슬쩍 맺힌 땀을 닦은 손길은 터무니없이 다정했고 찰나에 지나친 살갗은 기이할 정도로 시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입을 떠벌리던 S의 모습이 퍽 친절해 보였다. 저 입만 좀 다물면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군. N은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N 님 저, 들었어요! , 가이드님이 생기셨다고…!

 

몇 주 만에 만난 레비아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간신히 꺼낸 말이 겨우 저거라는 사실에 한결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런 헛소리는 어디서 들었는지 따져야 하나 잠깐 고민이 되었다. N은 목을 축이기 위해 들었던 물병을 다시 내려놓고 레비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기사 저 애 머릿속에 어떤 꾀가 숨어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지만 근래 제 뒤통수가 상당히 얼얼했기에 N은 지긋이 바라보며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 그러니까 제 가이드님이 알려주셨는데요…,

니 가이드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생각대로 레비아는 구태여 입을 떠벌리지 않아도 제가 원하는 답을 척척 내뱉었다. 그런 점이 참으로도 고마웠지만 그 입에서 나온 답이란 것이 썩 귀엽지만은 않았다. 얘 가이드가 대체 왜 내 가이드가 생긴 걸 알고 있냐고. 여러 번 두들겨 맞았다고 생각한 뒤통수가 다시 한번 얼큰했다.

 

, 그게 세하 님께서 저에게 한 번 물어보셨어요. 팀 내에 N이란 사람을 알려줄 수 있냐고, , 저도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왜 물어보시는지. 다음 가이드 회의 때 새로 오시는 분께서 N 님 담당이 되셨다고, 그래서 그때 알았어요.

가이드 회의? 뭐야, 그딴 것도 있,

참고로 제 가이드도 N에 대한 걸 물어보고 가더라구요. N, 가이드에 대해서 너무 공부 안 한 거 아니에요?

 

어느새 제 담당 구역 정찰을 끝내고 돌아온 하피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N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레비아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내가 언제 몰아세웠다고 그래? 하피의 반응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 잘난 입이 나불대길 바라며 N은 제 말을 끊은 하피를 쳐다보며 기다렸다.

 

그 눈빛 오랜만이네요! 이번 근신은 유독 심했던 것 같아요. 혹시 모르죠, 우리 상부에서 투자하고 있던 회사였을지도. 몇 개를 부셨더라? 아주 화려했다죠. 그 자리에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다고요.

헛소리 그만하고, 가이드 회의가 뭔데?

 

하피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평소보다 더 과하게 조잘댔다. 은근히 N을 질책하는 모난 말도 유쾌하진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벌어지는 입 모양에 N S가 떠올랐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말그대로 회의죠. 저희 컨디션을 서로 공유하면서 안정적인지, 스케줄 조정이 필요치 않는지, 지금처럼 팀 내에 새롭게 가이드가 생기면 팀 내 분위기를 전해주며 이런 사람일 테니 되도록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좋을 것 같다, 얘기를 주고받는.

 

유니온에서 가이드 교육을 받은 적 있던 하피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그 가이드 회의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했다, 뭐 그런 건가? 그럼 그 여자는 내 뒷조사를 해놓고서 아닌 척 했던거야? 태연하게 제 앞에서 너는 뭘 좋아하느냐, 떠들던 S의 모습이 생각나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이런 건 전부 형식적인 내용이고. 슬비 양의 얘기를 들어보니 근래는 가이드와 위상능력자의 신뢰 관계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해서 팀 내 새롭게 가이드가 생기거나 팀 내에서 누군가가 근신을 당하지 않는 이상 모이지 않나봐요. 이따금 문자로 안부 인사정도 하더라구요. 어머, 그러고보니 요새 자주 모인 이유가 모두 N 덕이네요.

 

아무래도 T처럼 하피도 속에 쌓인 게 몇 있었는지 은근히 N을 질타하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기사 근무 도중 T가 저에게 하는 책망을 들었을 때 잔업도 많았다는 걸 보니 분명 야근에 관한 문제일 게 분명했다. 필히 왜 그렇게 비꼬냐고 한다면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덕분에 제 아가들이 저장고에서 잠들었거든요, 말할 게 분명했다. 그조차 와인 몇 병 쥐어 주면 새로운 아가는 제가 잘 돌봐줘야겠군요! 하며 잠잠해질테지만 말이다.

 

, 저는 별 말 안 했어요. N 님은 일을 열심히 하신다는 거랑 취미 생활정도만 말씀드렸어요….

참고로 저는 생각나는대로 전부 말해줬답니다. , 그 눈빛. 이런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리웠나보네요.

 

끝까지 싱긋 웃어 보이는 저 미소가 이렇게나 아니꼬울 수가. 험악한 표정을 지을수록 더 좋아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N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가 짧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원체 사람 놀리길 좋아하니 반응해줄수록 제 기만 빠질 뿐이다. 그래서 N S가 회의에서 들었을만한 말을 생각했다. 레비아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없으니 아마 저런 식으로 말하며 별다른 얘기가 없었을 게 분명했고, 하피는… 저 잘난 주둥이를 얼마큼 떠벌렸을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생긴 몇 주간 과보호가 심하다느니 뭐니 투덜거리던 소리가 어느새 쏙 사라지고는 귀엽다는 평가가 줄줄이 나온 걸 보면 제법 합이 맞는 게 분명했다. 저에게 욱한 척하며 골려주는거야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가이드와 하피 사이 어떤 얘기가 오갈 지는 상상가지 않았다. 애초에 저는 하피의 가이드에 대해 무지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지고서 범생이스러운 말을 따박따박 뱉는다는 것 외에는 정말 아는 게 없었다. 레비아의 가이드에 대해서도 똑같았다. 염색을 자주 한다고 들었고 게임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가이드는 제 관심 바깥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이드님이 계신다는 건 멋져요! , 며칠 전에는 같이 영화관에 갔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어머, 그럼 저도 자랑 하나 해볼까요? 요즘 힘들다고 투덜거리니까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더라구요. 술 취한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2024-10-24 23:36:5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