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의 계승자 EP.2 신서울 5화 살아갈 자격
DianBurned 2021-05-16 0
24년도 개정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한기남이 모니터를 돌려 세 사람에게 내용을 보여주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들과 주소 등이 적혀 있었는데 이들은 과연 신도인 걸까? 아니면 구로의 난민이였을까?
정확히 알 순 없어도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은 명단을 보여주며 말했다.
"섬의 주민들은 관리자에 의해 기억을 제거당하고 섬에 들어옵니다. 일반적인 환경의 사람이 사라지면 주변인들이 그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하는게 보통이죠."
"대대적인 수색이 있었다면 섬의 존재가 훨씬 일찍 밝혀졌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없었던 이유가 늘 뭘까 고민했는데... 리스트를 보니 알겠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로의 난민 출신이였습니다. 식품이나 금품 등으로 유혹한 후 기억을 지우고 섬으로 보냈던거죠. "
"난민들은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니 행방이 묘연해져도 신고도 수색도 못하고 국가기관은 움직여주지 않았던 거죠."
한기남의 추측을 듣곤 자온은 옅을 한숨을 내쉬었다.
약한 차원종들은 생명 취급도 받지 못한 채 때론 짐승으로, 때론 장난감 취급을 받다가 너무나도 쉽게 죽임을 당하던 약육강식의 세상.
외부차원에서 보았던 광경과 별 다른 바가 없는 이곳을 비교하다 그만두며 말했다.
"그들도 사람인데 차별이라.... 여기도 참 험난한 곳이네요. 그나저나 그 미치광이들, 진짜 별 짓을 다하네요."
"그러게요. 참 영악한 놈들입니다. 이 리스트는 나중에 증거 제출 겸 해서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스트 안에 납치된 사람의 출신지, 이름, 연령이 적혀있었습니다. 아라나 희망이의 진짜 이름도 있을 가능성이 높죠. 희망이는 자기 과거를 어느 정도 기억하니 나중에 리스트 안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보라고 할 생각입니다."
"이름..."
"그건 그렇고 반금련씨의 일입니다만 신도들의 명단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더니 공짜로는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사업을 확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져오신 잔해를 가공해서 파는 형태로요."
그렇게 말하는 한기남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보였다.
"안색이 안 좋아보이세요, 한기남 씨. 아프신 거 아니시죠?"
"아프진 않습니다. 다만.... 이 사업을 진행하려면 아는 형님께 연락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호기롭게 나와서 형님의 손을 빌리기 참 그렇지만.... 어쩔 수 없네요.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이따 봐요, 아저씨."
휴대폰을 들고 한숨을 쉬며 한참을 고민하던 한기남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이쿠. 한기남 사장이라뇨? 실수로라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전 이제 그냥 백수예요. 사장님은...오히려 형님이시잖아요? 형님이 벌처스의 사장이 되시다니..하핫."
"우리도 아저씨 연락 끝날 때까지 잠깐 쉬자고요."
"그럼 저는 병문안 갔다올게요!"
"나는.... 산책 좀."
한기남이 통화하는 동안, 각자 볼일을 보려 흩어졌다.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좋은 생각을 하려 해봤지만, 형님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의 잡념은 쉽게 떠나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복수는 늘 생각해왔지만 형님이 돌아가신 그날은,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으니까.
형님의 온기가 흩어져 가는 그 순간이, 함께 살아왔던 따뜻했던 집이 불타는 광경이, 추억을 망가트리는 그들을 봤던 그날의 감정이 아팠으니까. 괴로웠으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날의 감정을 꽉 감은 눈 밑으로 억누르고, 억눌렀다. 그리고 찬찬히 눈을 뜨며, 다음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뭐하지... 잔해라도 좀 모아올까. 구로에서 가져온 건 너덜너덜하니..."
이전에 구로에서 가져온 잔해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고 작은 구멍이 여러개 나있는, 거칠게 찢겨져 대충 보아도 좋은 값을 받기 어려워 보이는 잔해들. 홧김으로 차원종을 찢어발긴 결과물이였다.
"에휴.... 화나면 거칠게 싸우는 버릇은 여전하니. 나도 은근 다혈질이란 말이지...."
스스로를 행동을 돌아보며 터덜터덜 걷던 와중,
"잠시 실례할게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보라색의 와이셔츠에 유니온 소속의 명찰이 달린 흰 가운을 걸친 여성이 보였다.
유니온 소속 명찰을 보곤 잠시 흠칫하는 와중, 여성은 내게 이어 물어왔다.
"혹시 당신이 희망 씨가 말하던 자온 씨인가요? "
"누구시죠? 희망이를 어떻게 아시죠?"
"자온 씨가 맞나 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정도연이라고 해요. 유니온 기술지원팀 소속의 연구자죠. 주된 연구 테마는 기계화 장기, 즉 인공장기에요."
"인공장기? 당신이... 희망이 수술을 맡는다던 의사신가요?"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죠. 저는 희망 씨를 치료하려고 왔어요. 엄밀한 의미에서 의사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직종의 종사자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제야 쭈뼛 세웠던 경계심을 누그러 트리며 인사를 건넸다.
"근데 굳이 제게 말을 걸으셨다는 건.... 뭔가 도와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맞아요. 희망 씨에 관한 거예요. 아시다시피 지금 희망 씨의 용태는 매우 위독해요. 당장 기계화 수술을 시작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죠."
"하지만 이 수술은 위상능력자조차 버터내기 어려운 수술이예요. 일반인인 희망씨의 경우....아무리 높아도 생존 확률은 절반이에요."
"절반...."
"게다가 천문학적인 수술비와 희망 씨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의지도 필요하죠. 다행히 수술비는 마련이 됐어요. 유니온의 임상실험 대상자로 선정된 덕분에요. 섬의 주민들과 은하 씨가 촬영한 영상 편지가 심사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해요."
"은하가 영상 편지를요? 풋. 그런 거 안 할 거 같았는데... 제일 열심히 했네. 혹시 그 사본 있으면 나중에 보여주실 수 있나요? 두고두고 놀리기 좋을 거 같은데."
"......"
".....농담입니다."
"음, 음. 그런데 어째서인지 수술이 결정됐는데도, 희망 씨 본인의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당신도 섬 주민들의 탈출을 돕고 희망 씨에게 살아 달라고 하는 얘기를 주민들께 들었어요. 시간이 된다면 희망 씨와 이야길 나눠봐 주시겠어요? 그 분이 삶의 의지를 보일 수 있도록요."
"뭔가 고민하고 있는 건가.... 그럴게요. 나도 그 녀석이 살아가면 좋겠거든요."
"고마워요. 이따 통신 단말기를 이용해서 희망 씨와 이야길 나눠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다시 만나요, 자온 씨."
"그래요. 희망이 수술.... 잘 부탁드립니다."
"네. 최선을 다하죠."
"이야기 끝났나 봐?"
정도연이 떠나가자마자, 반금련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와, 짠돌이 스토커다."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지? 그나저나 영상 편지라니... 그 머플러 꼬마, 그런건 절대 안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예요, 남의 뒤 캐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남의 얘기 훔쳐 듣는 취미라도 들렸어요? 역시 스토ㅋ....."
"이상한 오해 하지 마. 일부러는 아니였으니까."
"뭐, 마침 잘 됐네요. 잔해들 좀 많이 얹어 드릴테니 사람 하나만 찾아줄래요?"
"얘가 사람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 하네. 그래서 일단, 누구 찾는데?"
"일단은.... 이 세 사람부터요."
"어디.... [일비연]. [도새한]. [매지운]... 이 이름 다 비운이랑 같은 팀원들 이름이잖아?"
"네. 그들의 행방을 찾아....:"
"힘들 걸? 이 사람들 비운이 죽은 그날 이후로 실종 상태거든. 향후 흔적이 아예 없어. 증발이라도 한 건지 원."
"찾기 힘들다는 거군요..... 그럼 미하엘. 유니온의 총장인 미하엘 폰 키스크. 현재 어디있는지 좀 알아봐줬으면 해요."
"유니온 총장 미하엘 폰 키스크? 야, 그런 정보는 돈 한다발 가져와도 힘들어. 몇십 다발도 될까말까한 정보야."
"불가능하단 말은 안 하네요? 그럼 몇십, 몇백 이상이면 가능한 거죠? 돈, 열심히 벌 테니까 알아볼 수 있는지 확인해줘요."
아주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할 말을 끝낸 후, 위험지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털그르르르---- 드르르르륵------
"이걸론 부족하다고 하겠지. 다시 갔다올까...."
차원종의 잔해로 가득 찬 짐 보따리를 끌고 돌아오는 와중,
"아, 비둘기. 그러고 보니 희망이 고민을 들어달라고 했었지."
비둘기를 보고서 정도연의 부탁을 기억해내곤 희망이에게 연락을 걸기 시작했다.
《CONNECTING......CONNECTING......》
《COMPLETE》
"여, 희망이."
화면에 여전히 창백한 모습의 희망이의 얼굴이 비춰졌다.
"자온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뭐, 돈 버느냐고 그냥저냥. 너는? 듣자하니 곧 수술한다고 하던데?"
"네 그렇게 됐네요. 정도연 씨라는 분이 제게 수술 날짜를 말씀해 주셨어요. 처음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해서 거절했지만 운 좋게도 임상 실험 대상자가 되어서 무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조만간 수술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떤 거? 돈 빌려달라는 건 아니지?"
"하하, 아니예요. 자온 씨 돈 없다는 건 은하 씨께 들었는걸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 때렸다. 아니 사실이긴 한데 그게 왜 소문이 난 거야? 실 없이 던진 농담이잖아! 왜 내가 상처입어야 하는데!?
한방 먹은 표정을 본 희망이는 살짝 웃다가, 어두워진 표정을 띄며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한기남 씨가 제게 명단을 보내주셨어요. 내용은 섬 주민들의 리스트... 대부분 구로라는 곳의 난민 출신이라고 하네요."
"리스트를 보던 저는 그 속에서 제 진짜 이름을 찾아냈고 지금까지 희미했던 기억들도 모두 되찾아냈어요."
"오, 그거 잘 됐네.... 근데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네?"
희망이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다, 천천히 말했다.
"...자온 씨, 저는 같은 난민을 꼬드겨서 그 종교단체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인도하는.... 그런 쓰레기 짓을 하던 녀석이었어요"
"처음은 협박으로 인해 시작했지만... 일을 하면서 수수료를 받다 보니 눈이 멀어버렸죠. 결국 욕심에 더 많은 돈을 종교 단체에 요구하다...숙청당하게 됐죠. 그리고서 기억이 지워진 채 섬에 갇히게 됐어요. 제가 팔았던 다른 난민들과 같이."
"이런 제게 과연 살아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설령 살아난다 해도 앞으로 섬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자온이 먼저 입을 연다.
"......지난 번에 얘기해줬던 아이 기억해? 태양이였던 분을 잃은 아이 이야기."
"섬을 나가기 전에 해줬던 그 이야기 말씀이시죠? 그건 왜...?"
"이번은 그 아이가 그분의 뜻을 깨닫기 전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을 들려 주려고."
"차원종과의 계약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차원종들을 베고, 찌르고, 찢어내며 살아갔어. 복수에 눈이 멀어서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의 응용을 위해, 때론 그저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 싸우고, 죽여왔지."
"복수와 힘을 위해 수십 수백의 목숨을 해하고 생명을 모독하고 배척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아이를 만난 누군가가 물었지."
<정말 복수를 위해 삶을 살아갈 거야? 복수를 이룬다고 해도, 마지막에 공허함만 남을텐데.>
<죽은 네 가족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 거야?>
<상관 없어요. 이 끝이 공허하더라도, 제 죽음만이 남더라도 상관없어요.>
<잊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날의 어린 제게 맹세했는 걸요. 그 앞의 내 삶이 더럽혀지고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네 눈물을 위로해주겠다고.>
<내가 외로워도 상관없어요. 내 미래가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내 안식 따윈 바라지도 않죠. 그 아이의 눈물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난 더 추해질 수 있는 걸요. >
<그래. 그게 네 대답이구나.>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어둬. 언젠가 네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소중한 사람들이 생긴다면....네 대답은 분명히 달라질 거야.>
<어째서 확신하시는 거죠?>
<넌, 그런 사람의 눈빛을 가지고 있으니까.>
<복수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눈빛을 하고 있거든. 내가 아는 [교관]처럼 말이야.>
"....아이는 그 사람과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 했어. 그때 아이에겐 복수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뒤 아이는 태양이였던 그분의 뜻을 헤아렸고, 이제서야 그 사람의 말처럼 대답이 바뀌었지."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겠다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게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 아이는 수많은 생명을 끊으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니."
"그런 삶을 살기엔 아이의 길은 이미 피투성이로 더럽혀졌지. 생명을 모독한 길은 보답 받지 못하고 안식 따윈 주지 않을거야."
"그럼에도 살아가겠어. 내가 구해버린 생명들은, 이런 더럽혀진 나를 빛이라고 여겨주었으니까."
"내 복수를 잊은 건 아니야. 내가 저지른 죄를 잊은 것도 아니지. 언젠가 나는 생명을 모독한 벌을 받게 되겠지."
"그럼에도 살아가겠어. 아이들은 나처럼 빛을 잃게 두지 않겠어. 내가 구해낸 이 생명들을, 내 삶에 자그마한 빛이 되어준 아이들을 지켜주며 살아갈거야."
"너도 비슷하겠지. 더럽혀진 자신은 용서 받을 자격 따윈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과거를 부정은 하지 마.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너로 인해 상처 받은, 받았던 이들을 위해 살아가. 지금의 너도.... 아이들의 빛이잖아."
"물론 너 스스로가 그 길을 걷는 걸 고통스러워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 줘. 빛이 된 사람은... 뒤에 있을 이들을 위해 밝게 빛나줘야지."
"네 삶의 끝에서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 그렇게 언젠가 네 마음이 보답 받길 바랄게."
"나는 보답 받지 못하겠지만 너라면 언젠가 그 삶에 보답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옅은 미소를 보이며 긴 설득이 끝냈다. 자온의 설득에 잠시 얼 나간 듯 있던 희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온 씨.... 그래요. 살아갈게요. 아이들과 제게 부끄럽지 않도록, 저희를 구해준 당신들이, 저희의 빛이 되어준 당신들의 마음이 보답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갈게요."
"역시 여러분들은 참 다정하세요. 루시 양과 은하 씨도 저를 격려해주고 나가셨었거든요."
"뭐야, 은하도 한 마디 했어? 하여간 그 녀석은 궁시렁 거리면서 다해준다 말이지. 누구한테 모지리라고 할 처진 아니란 말이야."
".....어라, 은하 씨? 언제 오셨나요?"
"은하!? 미안해, 잘못ㅎ.....
순간 흠칫하면서 방어자세를 취하며 뒤를 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바람만이 살짝 불어왔을 뿐.
"뭐야, 없잖아? 희망이 너!?"
"후훗. 수술이 성공해서 만나게 되면 지금 받은 빚, 갚으시면 돼요."
"으이이... 너 꼭 수술 성공해라.... 이 빚, 꼭 갚아줄 테다...!"
"네. 꼭... 나중에 봐요, 자온."
존칭 없이 편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잠깐의 짜증이 바람과 함께 흩어진 감각이 들었고, 살며시 웃었다.
"...후훗. 그래...나중에 보자, 희망."
비둘기의 통신을 끊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
******
키....키긱. 웃기네.
빛이라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죄를 수없이 쌓은 주제에.
우리를 모조리 잠식하고,
힘을 위해 모든 것을 도륙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지 않은 채 방관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한 주제에.
그래. 즐겨 둬. 너는 이제 있을 일을 또 막지 못할테니까.
자책하며 죄업을 또 쌓아가겠지.
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
******
"자...그럼 이 세례를 받을 핑키는 누가 될까나?"
신서울의 어딘가. 누군가가 살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들과 주소 등이 적혀 있었는데 이들은 과연 신도인 걸까? 아니면 구로의 난민이였을까?
정확히 알 순 없어도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은 명단을 보여주며 말했다.
"섬의 주민들은 관리자에 의해 기억을 제거당하고 섬에 들어옵니다. 일반적인 환경의 사람이 사라지면 주변인들이 그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하는게 보통이죠."
"대대적인 수색이 있었다면 섬의 존재가 훨씬 일찍 밝혀졌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없었던 이유가 늘 뭘까 고민했는데... 리스트를 보니 알겠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로의 난민 출신이였습니다. 식품이나 금품 등으로 유혹한 후 기억을 지우고 섬으로 보냈던거죠. "
"난민들은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니 행방이 묘연해져도 신고도 수색도 못하고 국가기관은 움직여주지 않았던 거죠."
한기남의 추측을 듣곤 자온은 옅을 한숨을 내쉬었다.
약한 차원종들은 생명 취급도 받지 못한 채 때론 짐승으로, 때론 장난감 취급을 받다가 너무나도 쉽게 죽임을 당하던 약육강식의 세상.
외부차원에서 보았던 광경과 별 다른 바가 없는 이곳을 비교하다 그만두며 말했다.
"그들도 사람인데 차별이라.... 여기도 참 험난한 곳이네요. 그나저나 그 미치광이들, 진짜 별 짓을 다하네요."
"그러게요. 참 영악한 놈들입니다. 이 리스트는 나중에 증거 제출 겸 해서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스트 안에 납치된 사람의 출신지, 이름, 연령이 적혀있었습니다. 아라나 희망이의 진짜 이름도 있을 가능성이 높죠. 희망이는 자기 과거를 어느 정도 기억하니 나중에 리스트 안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보라고 할 생각입니다."
"이름..."
"그건 그렇고 반금련씨의 일입니다만 신도들의 명단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더니 공짜로는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사업을 확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져오신 잔해를 가공해서 파는 형태로요."
그렇게 말하는 한기남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보였다.
"안색이 안 좋아보이세요, 한기남 씨. 아프신 거 아니시죠?"
"아프진 않습니다. 다만.... 이 사업을 진행하려면 아는 형님께 연락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호기롭게 나와서 형님의 손을 빌리기 참 그렇지만.... 어쩔 수 없네요.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이따 봐요, 아저씨."
휴대폰을 들고 한숨을 쉬며 한참을 고민하던 한기남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이쿠. 한기남 사장이라뇨? 실수로라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전 이제 그냥 백수예요. 사장님은...오히려 형님이시잖아요? 형님이 벌처스의 사장이 되시다니..하핫."
"우리도 아저씨 연락 끝날 때까지 잠깐 쉬자고요."
"그럼 저는 병문안 갔다올게요!"
"나는.... 산책 좀."
한기남이 통화하는 동안, 각자 볼일을 보려 흩어졌다.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좋은 생각을 하려 해봤지만, 형님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의 잡념은 쉽게 떠나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복수는 늘 생각해왔지만 형님이 돌아가신 그날은,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으니까.
형님의 온기가 흩어져 가는 그 순간이, 함께 살아왔던 따뜻했던 집이 불타는 광경이, 추억을 망가트리는 그들을 봤던 그날의 감정이 아팠으니까. 괴로웠으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날의 감정을 꽉 감은 눈 밑으로 억누르고, 억눌렀다. 그리고 찬찬히 눈을 뜨며, 다음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뭐하지... 잔해라도 좀 모아올까. 구로에서 가져온 건 너덜너덜하니..."
이전에 구로에서 가져온 잔해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고 작은 구멍이 여러개 나있는, 거칠게 찢겨져 대충 보아도 좋은 값을 받기 어려워 보이는 잔해들. 홧김으로 차원종을 찢어발긴 결과물이였다.
"에휴.... 화나면 거칠게 싸우는 버릇은 여전하니. 나도 은근 다혈질이란 말이지...."
스스로를 행동을 돌아보며 터덜터덜 걷던 와중,
"잠시 실례할게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보라색의 와이셔츠에 유니온 소속의 명찰이 달린 흰 가운을 걸친 여성이 보였다.
유니온 소속 명찰을 보곤 잠시 흠칫하는 와중, 여성은 내게 이어 물어왔다.
"혹시 당신이 희망 씨가 말하던 자온 씨인가요? "
"누구시죠? 희망이를 어떻게 아시죠?"
"자온 씨가 맞나 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정도연이라고 해요. 유니온 기술지원팀 소속의 연구자죠. 주된 연구 테마는 기계화 장기, 즉 인공장기에요."
"인공장기? 당신이... 희망이 수술을 맡는다던 의사신가요?"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죠. 저는 희망 씨를 치료하려고 왔어요. 엄밀한 의미에서 의사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직종의 종사자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제야 쭈뼛 세웠던 경계심을 누그러 트리며 인사를 건넸다.
"근데 굳이 제게 말을 걸으셨다는 건.... 뭔가 도와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맞아요. 희망 씨에 관한 거예요. 아시다시피 지금 희망 씨의 용태는 매우 위독해요. 당장 기계화 수술을 시작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죠."
"하지만 이 수술은 위상능력자조차 버터내기 어려운 수술이예요. 일반인인 희망씨의 경우....아무리 높아도 생존 확률은 절반이에요."
"절반...."
"게다가 천문학적인 수술비와 희망 씨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의지도 필요하죠. 다행히 수술비는 마련이 됐어요. 유니온의 임상실험 대상자로 선정된 덕분에요. 섬의 주민들과 은하 씨가 촬영한 영상 편지가 심사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해요."
"은하가 영상 편지를요? 풋. 그런 거 안 할 거 같았는데... 제일 열심히 했네. 혹시 그 사본 있으면 나중에 보여주실 수 있나요? 두고두고 놀리기 좋을 거 같은데."
"......"
".....농담입니다."
"음, 음. 그런데 어째서인지 수술이 결정됐는데도, 희망 씨 본인의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당신도 섬 주민들의 탈출을 돕고 희망 씨에게 살아 달라고 하는 얘기를 주민들께 들었어요. 시간이 된다면 희망 씨와 이야길 나눠봐 주시겠어요? 그 분이 삶의 의지를 보일 수 있도록요."
"뭔가 고민하고 있는 건가.... 그럴게요. 나도 그 녀석이 살아가면 좋겠거든요."
"고마워요. 이따 통신 단말기를 이용해서 희망 씨와 이야길 나눠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다시 만나요, 자온 씨."
"그래요. 희망이 수술.... 잘 부탁드립니다."
"네. 최선을 다하죠."
"이야기 끝났나 봐?"
정도연이 떠나가자마자, 반금련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와, 짠돌이 스토커다."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지? 그나저나 영상 편지라니... 그 머플러 꼬마, 그런건 절대 안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예요, 남의 뒤 캐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남의 얘기 훔쳐 듣는 취미라도 들렸어요? 역시 스토ㅋ....."
"이상한 오해 하지 마. 일부러는 아니였으니까."
"뭐, 마침 잘 됐네요. 잔해들 좀 많이 얹어 드릴테니 사람 하나만 찾아줄래요?"
"얘가 사람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 하네. 그래서 일단, 누구 찾는데?"
"일단은.... 이 세 사람부터요."
"어디.... [일비연]. [도새한]. [매지운]... 이 이름 다 비운이랑 같은 팀원들 이름이잖아?"
"네. 그들의 행방을 찾아....:"
"힘들 걸? 이 사람들 비운이 죽은 그날 이후로 실종 상태거든. 향후 흔적이 아예 없어. 증발이라도 한 건지 원."
"찾기 힘들다는 거군요..... 그럼 미하엘. 유니온의 총장인 미하엘 폰 키스크. 현재 어디있는지 좀 알아봐줬으면 해요."
"유니온 총장 미하엘 폰 키스크? 야, 그런 정보는 돈 한다발 가져와도 힘들어. 몇십 다발도 될까말까한 정보야."
"불가능하단 말은 안 하네요? 그럼 몇십, 몇백 이상이면 가능한 거죠? 돈, 열심히 벌 테니까 알아볼 수 있는지 확인해줘요."
아주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할 말을 끝낸 후, 위험지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털그르르르---- 드르르르륵------
"이걸론 부족하다고 하겠지. 다시 갔다올까...."
차원종의 잔해로 가득 찬 짐 보따리를 끌고 돌아오는 와중,
"아, 비둘기. 그러고 보니 희망이 고민을 들어달라고 했었지."
비둘기를 보고서 정도연의 부탁을 기억해내곤 희망이에게 연락을 걸기 시작했다.
《CONNECTING......CONNECTING......》
《COMPLETE》
"여, 희망이."
화면에 여전히 창백한 모습의 희망이의 얼굴이 비춰졌다.
"자온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뭐, 돈 버느냐고 그냥저냥. 너는? 듣자하니 곧 수술한다고 하던데?"
"네 그렇게 됐네요. 정도연 씨라는 분이 제게 수술 날짜를 말씀해 주셨어요. 처음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해서 거절했지만 운 좋게도 임상 실험 대상자가 되어서 무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조만간 수술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떤 거? 돈 빌려달라는 건 아니지?"
"하하, 아니예요. 자온 씨 돈 없다는 건 은하 씨께 들었는걸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 때렸다. 아니 사실이긴 한데 그게 왜 소문이 난 거야? 실 없이 던진 농담이잖아! 왜 내가 상처입어야 하는데!?
한방 먹은 표정을 본 희망이는 살짝 웃다가, 어두워진 표정을 띄며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한기남 씨가 제게 명단을 보내주셨어요. 내용은 섬 주민들의 리스트... 대부분 구로라는 곳의 난민 출신이라고 하네요."
"리스트를 보던 저는 그 속에서 제 진짜 이름을 찾아냈고 지금까지 희미했던 기억들도 모두 되찾아냈어요."
"오, 그거 잘 됐네.... 근데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네?"
희망이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다, 천천히 말했다.
"...자온 씨, 저는 같은 난민을 꼬드겨서 그 종교단체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인도하는.... 그런 쓰레기 짓을 하던 녀석이었어요"
"처음은 협박으로 인해 시작했지만... 일을 하면서 수수료를 받다 보니 눈이 멀어버렸죠. 결국 욕심에 더 많은 돈을 종교 단체에 요구하다...숙청당하게 됐죠. 그리고서 기억이 지워진 채 섬에 갇히게 됐어요. 제가 팔았던 다른 난민들과 같이."
"이런 제게 과연 살아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설령 살아난다 해도 앞으로 섬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자온이 먼저 입을 연다.
"......지난 번에 얘기해줬던 아이 기억해? 태양이였던 분을 잃은 아이 이야기."
"섬을 나가기 전에 해줬던 그 이야기 말씀이시죠? 그건 왜...?"
"이번은 그 아이가 그분의 뜻을 깨닫기 전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을 들려 주려고."
"차원종과의 계약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차원종들을 베고, 찌르고, 찢어내며 살아갔어. 복수에 눈이 멀어서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의 응용을 위해, 때론 그저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 싸우고, 죽여왔지."
"복수와 힘을 위해 수십 수백의 목숨을 해하고 생명을 모독하고 배척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아이를 만난 누군가가 물었지."
<정말 복수를 위해 삶을 살아갈 거야? 복수를 이룬다고 해도, 마지막에 공허함만 남을텐데.>
<죽은 네 가족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 거야?>
<상관 없어요. 이 끝이 공허하더라도, 제 죽음만이 남더라도 상관없어요.>
<잊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날의 어린 제게 맹세했는 걸요. 그 앞의 내 삶이 더럽혀지고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네 눈물을 위로해주겠다고.>
<내가 외로워도 상관없어요. 내 미래가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내 안식 따윈 바라지도 않죠. 그 아이의 눈물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난 더 추해질 수 있는 걸요. >
<그래. 그게 네 대답이구나.>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어둬. 언젠가 네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소중한 사람들이 생긴다면....네 대답은 분명히 달라질 거야.>
<어째서 확신하시는 거죠?>
<넌, 그런 사람의 눈빛을 가지고 있으니까.>
<복수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눈빛을 하고 있거든. 내가 아는 [교관]처럼 말이야.>
"....아이는 그 사람과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 했어. 그때 아이에겐 복수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뒤 아이는 태양이였던 그분의 뜻을 헤아렸고, 이제서야 그 사람의 말처럼 대답이 바뀌었지."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겠다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게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 아이는 수많은 생명을 끊으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니."
"그런 삶을 살기엔 아이의 길은 이미 피투성이로 더럽혀졌지. 생명을 모독한 길은 보답 받지 못하고 안식 따윈 주지 않을거야."
"그럼에도 살아가겠어. 내가 구해버린 생명들은, 이런 더럽혀진 나를 빛이라고 여겨주었으니까."
"내 복수를 잊은 건 아니야. 내가 저지른 죄를 잊은 것도 아니지. 언젠가 나는 생명을 모독한 벌을 받게 되겠지."
"그럼에도 살아가겠어. 아이들은 나처럼 빛을 잃게 두지 않겠어. 내가 구해낸 이 생명들을, 내 삶에 자그마한 빛이 되어준 아이들을 지켜주며 살아갈거야."
"너도 비슷하겠지. 더럽혀진 자신은 용서 받을 자격 따윈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과거를 부정은 하지 마.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너로 인해 상처 받은, 받았던 이들을 위해 살아가. 지금의 너도.... 아이들의 빛이잖아."
"물론 너 스스로가 그 길을 걷는 걸 고통스러워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 줘. 빛이 된 사람은... 뒤에 있을 이들을 위해 밝게 빛나줘야지."
"네 삶의 끝에서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 그렇게 언젠가 네 마음이 보답 받길 바랄게."
"나는 보답 받지 못하겠지만 너라면 언젠가 그 삶에 보답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옅은 미소를 보이며 긴 설득이 끝냈다. 자온의 설득에 잠시 얼 나간 듯 있던 희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온 씨.... 그래요. 살아갈게요. 아이들과 제게 부끄럽지 않도록, 저희를 구해준 당신들이, 저희의 빛이 되어준 당신들의 마음이 보답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갈게요."
"역시 여러분들은 참 다정하세요. 루시 양과 은하 씨도 저를 격려해주고 나가셨었거든요."
"뭐야, 은하도 한 마디 했어? 하여간 그 녀석은 궁시렁 거리면서 다해준다 말이지. 누구한테 모지리라고 할 처진 아니란 말이야."
".....어라, 은하 씨? 언제 오셨나요?"
"은하!? 미안해, 잘못ㅎ.....
순간 흠칫하면서 방어자세를 취하며 뒤를 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바람만이 살짝 불어왔을 뿐.
"뭐야, 없잖아? 희망이 너!?"
"후훗. 수술이 성공해서 만나게 되면 지금 받은 빚, 갚으시면 돼요."
"으이이... 너 꼭 수술 성공해라.... 이 빚, 꼭 갚아줄 테다...!"
"네. 꼭... 나중에 봐요, 자온."
존칭 없이 편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잠깐의 짜증이 바람과 함께 흩어진 감각이 들었고, 살며시 웃었다.
"...후훗. 그래...나중에 보자, 희망."
비둘기의 통신을 끊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
******
키....키긱. 웃기네.
빛이라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죄를 수없이 쌓은 주제에.
우리를 모조리 잠식하고,
힘을 위해 모든 것을 도륙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지 않은 채 방관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한 주제에.
그래. 즐겨 둬. 너는 이제 있을 일을 또 막지 못할테니까.
자책하며 죄업을 또 쌓아가겠지.
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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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럼 이 세례를 받을 핑키는 누가 될까나?"
신서울의 어딘가. 누군가가 살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