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3장 7화, 고통
AI미스틱 2021-04-20 0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일시적인 현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주’가 부서진 이후 아주 잠깐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지, 팀을 짜서 순찰하게 되었으니 그곳에 엮인 하늘새는 네 명이었다.
“너희들 대부분이 초면일 테니, 지금이라도 인사해두도록.”
앞으로 함께 싸울 동료였으니, 유 주, 하 얀, 현단아를 빼고도 ‘세이지’가 남아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이였던 그는, 너무 아이처럼 대하지 말라며 웃음을 지었다.
“만들어진 지 꽤 됐으니까요.”
─인공 클로저.
그 역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다들 침울한 표정을 지었고, 동시에 그런 세이지에게도 제어 코드가 있을 거라는 말에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당에, 세이지는 그런 분위기가 개의치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제겐 ‘제어 코드’가 듣지 않으니까요.”
“진짜로? 어떻게?”
소마가 궁금하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서 물으니, 세이지는 살짝 검은 위상력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별로 좋은 건 아니죠.”
서늘하게 식은 목소리 속에서 잔혹한 피의 기운이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어비스’의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검은 위상력임에도 불구하고 품고 있는 피의 양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많았다. 그 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짓밟은 것인지, 살의조차 아닌 단순한 발현에도 핏물이 묻는다는 감각이 들 정도였다.
소마가 움찔거리며 물러나니 검은 위상력을 거둔 세이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끝이 아니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너는 어떤 방식으로 인해 태어난 거지?”
볼프강의 질문에, 세이지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는 기계처럼, 척척 잔해를 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순찰을 돌고, 위협이 있으면 배제할 뿐이었다. …그 위협이라는 게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있었다면 그럴 것만 같은 위험성이었다.
침묵을 고수하던 세이지는, 할 일이 끝난 다음에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클로저로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클로저로서 활동하게 된 이 삶에는 감사하고 있어요.”
“…클로저로서 태어나지 않았다…?”
“네. …그저, 힘을 옮겨 담을 ‘중간 과정’의 핵심축에 불과한 도구였으니까요. 클로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죠.”
“그럼 뭐를 위해서….”
쉿, 하라는 듯한 세이지의 제스처.
그 제스처 하나에 입을 다문 볼프강에게 고개를 끄덕인 세이지가 말했다.
“더 말하면… 내 소중한 친구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양해해 주실래요?”
“…그래, …그러지.”
이번에는 첫인사에서 비친 ‘피의 감촉’이 아닌, 끈적하게 파고드는 ‘살의’가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달라붙는 파리를 죽이는 듯한 가볍기 그지없는 살의였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위협이라 여겨졌다. …피의 감촉과 더불어 비치는 살의는, 상대를 거르지 않고 내세우는 것이었다.
살벌하게 내비치는 살의에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친했냐는 듯 사냥터지기 2분대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슬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저녁노을이 저물어갈 무렵.
사냥터지기 2분대가 지쳐 하품하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모습을 본 세이지가 그리 물었다.
“무슨 말이지?”
볼프강이 모른다는 듯 능청스레 그의 질문을 회피하였으니, 그의 앞에 다가선 세이지는 눈높이를 맞춘 상태로 재차 물었다.
“이젠 슬슬 알아야할 때가 아닐까요? …우리도, 단아 형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
“언제까지고 어른의 이야기라며 감추고 감싸고… …우리가, 언제까지고 지켜줘야 하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럼, 너희가 어른이겠냐? 헛소리 하지 말고….”
“진실을 알 수 없다면.”
볼프강의 웃어넘기는 듯한 목소리를 단절해버린 세이지는, 깊이를 모를 흑색의 눈동자로 그를 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걸까. 슬픔? 절망? 아니면 다른 무언가? …어찌 되었건 그가 가진 어떠한 무언가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결코 좋은 방향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우린… 나아갈 수 없어요.”
“…어디로?”
“더 올바른 길로.”
단호하게 말하는 세이지의 말투로부터 굳은 각오가 빚어 나왔다.
그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대로 쭉 감추고 있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이 확정된 진실이었다.
아이들과 놀 때의 넘실거리던 웃음마저 사라진 채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실로 어른을 비추게 하였다.
“너는….”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
처음 마주했을 때,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이상 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검은양의 일원이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에 끝내 자신에게 팀이 할당될 때까지 일반인으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그는.
“오랜만이야, 다들.”
“단아….”
어느샌가 같은 클로저가 되어,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큼하다, 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한 목소리였으나, 깊고 무겁게 깔린 목소리의 톤은 욱신거림까지 느끼게끔 할 정도였다. 뛰어다니는 심장의 고동이 귓가에 들리게 될 때 즈음, 제이가 입을 열었다.
“아는 사이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었죠.”
“동창인가? 감회가 새롭겠어… 동창이라….”
─감회가 새롭다…라.
감회는 새롭지만, 마냥 새롭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까요.”
그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있던 미스틸테인이 물었다.
“…화났어요, 형?”
자책, 그런게 아닌 다른 무언가의 감정이 서려있는… 분노.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새어나오는 강한 울림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걸 인지한 것도 놀라웠으나, 그 이전에 감정을 드러낸 스스로에 대해 미숙하다 여긴건지 봉을 쥐어잡은 단아는, 고개를 저은 채 허공을 뜯어냈다.
“순찰할 지역의 좌표는 알고있으니, 빠르게 이동하죠.”
“…뭐…?”
공간이 찌익, 찢어지는 광경. 그들은 일생 본 적 없으나, 단아에게 있어서는 이미 익숙해진 행동이었다.
쫘악 뜯어진 공간 너머에 새로운 장소가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모두가 깜짝 놀라고 있자니, 먼저 넘어간 단아는 그 너머에서 봉을 몇 차례 붕 휘두르더니 이내 말했다.
“통로가 안정됐으니 넘어와도 돼요.”
공간 좌표는 항상 흔들린다. 중력에 따른 공간의 일그러짐의 차이도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파동’.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빛’ 때문이었다.
그 빛은 공간의 통로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단아처럼 자체적인 공간 좌표의 인식이 불가능한 사람의 경우 안정되지 않은 통로에선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절단당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여태껏 대부분의 이동 속에서 단아 혼자서 이동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급할 때는 다른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는 일도 있었으나, 이 경우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목숨이 끊어질 위기였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딱히 급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거리가 멀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되었고, 그 탓에 통로의 입구 주변을 새로운 공간으로 차단해 외부 변수를 없앴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처음 보는 단아의 기술임에도 그를 믿은 걸지, 한 발자국 먼저 내딛은 세하가 넘어갔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넷도 넘어오자 그제야 통로를 닫은 단아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좌표 안정이 너무 느려… 좀 더 빠르고 안정적이게….’
“대단하군. 아직 인류 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인가?”
섬칫.
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 끼침에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로 가려진 통로 너머에서, 박수를 짝. 짝. 치면서 나타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성이었으니.
마치 타고 남은 재를 뿌려놓은 듯한 머리카락의 색과 광기가 차올라 흐르는 붉은 눈동자와, 미청년이라 부를만하건만, 그런데도 멀리하고 싶은 섬뜩함을 가지고 있는 그의 분위기는 마주하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본 검은양 팀의 다섯 명이 전원 전투태세에 들어갔으나,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아주 대단해. ‘공간 전이’…인가. 어떻게 한 거지? 자네의 위상 능력인가?”
“…당신은?”
“호프만이야. …인공 클로저를 만든 장본인이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을 해온… 괴물이지.”
제이의 설명에 대해, 호프만이 반박했다.
“괴물이라니. 내가 해온 모든 것은 전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였어. …그래,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였지. 그런 내 헌신을 끔찍한 일이라고 말해주지 말아 주겠나?”
“인류의 미래? …거짓말도 어설프게 하는군. 너는 자신의 흥미가 가는 모든 것을 실험체로 보고, 끔찍하다 못해 사악하다고 불러도 모자랄 정도의 일을 그토록 해왔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거냐?”
“흐음… 꽤 좋은 언변이긴 한데….”
“네 악행도 여기까지다, 호프만. …순순히 잡혀서 돌아간다면, 덜 아플 거야.”
제이의 말에 이제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은 호프만은, 그가 가리고 있던, 등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와의 대화에는 이제 흥미가 없어. …내가 흥미 있는 건… 그 너머의 클로저니까.”
“여기에 클로저가 몇인데, 마음대로 될 거라 생각하나?”
“대화하러 왔을 뿐인데, 꽤….”
“대화할 건 없어.”
그들의 대화 속에서 고개를 내려, 깊은 깊이의, 호박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로 짙은 색의 눈동자로 그를 바라본 단아는, 무기를 한 차례 손에서 회전시키더니 말했다.
“…당신과 대화할 건… 어디에도 없어.”
“이런, 이쪽은….”
“아무것도.”
쿠드득….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대지가 끌려 올라오는 듯한… 강한 분노를 내포한 소리가.
그리고 그 소리가 왜 나는 것인지 아주 잠시 생각해본 듯한 호프만은 “그것인가”라며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네 어머니를 복제한 게 내 소행이라고 생각되는 건가?”
“…….”
“유감스럽게도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아니.”
쾅!
봉의 밑단이 타일을 깨부수며 지상에 들이박혔다.
“아무래도 좋아.”
쿠구궁!
대지가 들어올려진다.. 호프만이 딛고있던 대지가, 원의 형상을 그리더니 강한 파열음과 함께 벽을 긁으며 올라간다. 그 기음과 순간적인 흔들림에 호프만이 순간 냉정을 잃어버렸으니,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아의 폭풍이 겨눠졌다.
그러나.
“이런, 그 친구는 중요한 친구인데.”
티잉….
“섬광탄…!”
쩌엉!
강렬한 빛과 소리의 파열음이 망막과 고막을 통해 전해진다. …전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빛도 소리도 차마 전달되지 못했으니.
그들을 감싸듯 돔 형태로 펼쳐진 특이한 막이, 소리와 빛을 완전히 차단해버린 것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검은양 전원이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고만 있자니, 정면을 가로막은 유리를 향해 단아가 말했다.
“옆으로 비켜.”
대기가 빨려들어간다, 몸이 끌려들어간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으니.
유리가 옆으로 비켜나는 순간 단아가 봉을 내뻗었다.
콰아! 공간을 찢어내는 공격이 흑색의 막을 휘감은 채 정면을 쓸어버렸고, 공격이 막을 휘감은 덕에 완전히 개방된 주변의 모습은 그저 공허한 모습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호프만은 독일의 고성에서 실험을 거의 완성했다. …자신을 반차원종화시키는 그러한 실험을.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호프만을 그리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차원종화했던 그의 힘을 겪어본 적 없는 단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반발했다.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어째서 잡지 않은 건가요? 도대체….”
“진정해. 어차피 용의주도한 놈을 지금 여기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우린 분명… 분명 녀석을!!”
“동생, 친구 좀 진정시켜봐.”
제이의 말에 단아를 어떻게든 말려보려고는 했으나, 아무래도 말을 듣지 않으려는 성싶은 단아는 콰앙! 봉의 밑단으로 지면을 내리쳤다.
사용되지 않는 곳이라고는 하나, 설치된 타일이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붕괴되는 모습은 말이 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이제 그만해!”
제이의 강한 외침에 숨을 들이켜며 멈춘 단아에게 제이가 말했다.
“왜 잡지 않았느냐고? …잡고 싶지 않아서 잡지 않은 게 아니야! …잡을 수… 없었던 거지….”
어디에 또 그를 엄호하는 클로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반차원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호프만과 싸우라고? 아이들을 저승길로 내몰라는 말과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실제로 그를 엄호하는 적은 있었고, 그 결과 다행인지 아닐진 몰라도, 함부로 덤볐다간 생길 수밖에 없던 부상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는 호프만과 총장, 이 둘과 싸우는 게 아니야.”
그들이 부리는 차원종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이 적이다.
그리고 그 적으로부터 부산을 지켜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부상자를 만들어내는 게 더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잖아.”
제이의 호통은 그야말로 맞는 말밖에 없었기에, 할 말을 채 잃어버린 단아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늑대개.
그들과 함께하게 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늘 졸려 보이면서도 동시에 말조차 많이 하지 않는 하얀이었다.
또한, 그런 하얀에게 불평을 늘여놓는 사람이 한 명….
“맨 뒤에서 따라오기만 하지, 아무것도 하는 건 없잖아.”
“그…그렇지만….”
그리고 그런 나타의 기분을 맞춰주듯, 어찌할 줄 몰라하는 레비아까지.
평소의 늑대개와 다를건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늑대개답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질적으로 비치는 사람이 한 명, 끼어있어서 그런 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은 순찰을 맡은 검은양과 사냥터지기와는 달리, 외곽지역의 탐색을 맡고 있었다. 외부에서의 활동 중에서도 전투에 가장 뛰어난 늑대개에 가장 걸맞은 임무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런 위험한 임무를 맡은 만큼 차원종과 가장 많이 싸움이 벌어지니.
결국 그녀와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였다.
“또 만나네요, 여러분.”
쌍도를 옆구리에 찬 채, 이번에는 누운 상태가 아닌 서 있으나 땅에 발이 닿지 않은 자세로 부유하며 다가온 그녀는 싱긋 웃은 채 자신들의 적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너는….”
세계를 찢어내는 듯한 붉은 빛을 가진 여우의 눈동자.
여우를 상징하는 듯한 모자를 쓴 그녀는 새어나온 머리카락으로만 간신히 ‘붉은’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특유의 두 자루의 검은 이젠 익숙해서, 굳이 눈여겨 비추지 않더라도 그녀가 ‘붉은 여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부유’를 상시로 사용하는 위상능력자가 많을 리가 없겠지….
“정말 당신들은…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군요.”
철컥, 두 자루 중에서 짧은 칼에 손을 대면서, ‘여우’가 말했다.
“계속 찾아오는걸 매일 봐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군요.”
─죽여볼까요.
‘솨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스산하고도 소름돋는 소리.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이토록 섬뜩했던 적이 있었을까.
치이이… 온 몸에서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발열’이나 ‘발화’ 능력을 가지고있는 위상력이 차가운 비와 마주하면서 김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콰르르릉….
웅장한 번개 소리와 함께, 살을 찢는 공기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뇌제’ 상태에서 움직이는 고속 이동. 몸에 부담이 크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서만 사용하며, 통상 이동의 경우, 번개를 두른 채 움직이는 것이었으나,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우’가 나타났다는 무전을 듣는다면, 이렇게 움직일 수밖에.
부산에 체류한 이상, 거점에 언터처블이라는 존재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트레이너가 움직일 수 없었으며, 그 탓에 유주가 대신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하얀은….”
과거였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겠건만, 그녀가 현재에 머무르고 있었던 탓에 그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빨라지는 뇌제와 다르게 몸의 한계를 알리듯 뼈가 삐걱이고, 근육이 흔들린다. 욱신거리는 온 전신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발걸음을 미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단지 그곳에 있을 하얀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격통을 버티며,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떨치며 비가 쏟아지는 부산의 외각지에 도착했을 때. 저 너머에서 풀풀 새어나오는 열기를 바라보았다.
‘하얀…일 리가 없겠지.’
비가 오고 있었다. 모든 지역에.
그리고 동시에,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팀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하얀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것은 끝까지 아껴야하는 것이었기에, 쓸 리가 없으리라 판단한 유주는 허공에서 멈춰서, 위상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된 이상, 섣불리 다가가면 안좋은 현상만 일으킬 수 있었기에, 응축된 위상력을 손으로 붙잡은 유주는,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천둥처럼 푸른 빛의 번개를 내쏘았다.
─콰아앙!!
지면을 휩쓸며 스쳐지나가는 살인적인 위상력의 양. 단지 위상력의 양만으로 그 색을, 그 형태를 뚜렷하게 만들 정도로 방대한 양의 위상력이 완벽한 ‘살상’에 목적을 두고 움직이니, 그것을 보고 무사할만한 인간은 많지야 않겠지.
물론, 어느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얼추 피할 수야 있겠지만.
번개가 스쳐지나간 곳에 스파크가 생기며 잔흔을 남기니, 정확히 아군과 적군을 가른 번개의 길 위에 내려온 유주는, 자신의 몸에서도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싸움은 여기까지야.”
“유주….”
“당신은…?”
6:1로 싸우고 있었으면서 막상 밀리고 있었는지, 비틀거린 하얀은, 녹슬고 그을렸으며, 동시에 낡아버린 칼끝으로 카각! 바닥을 긁으며 몸을 지탱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늑대개의 다른 팀원들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는지, 불탄 흔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려앉은 유주는.
철컥…
“여기서 그만둔다면 서로 손해도 없고, 좋지 않나?”
한 손에 핸드 샷건을 들고 있었다.
연사력을 포기하는 대신 파괴력과 관통력을 극한으로 압축시킨 벌처스 제 핸드 샷건은, 위상능력자에 맞춰 제작되었음에도 어린 위상능력자들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반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탄환마저 제작 금지가 되어있었기에 일종의 ‘협박’과 같은 역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협박 정도면 제 역할을 다한 정도가 아닌가. 유주의 무기는 아직도 제조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무지막지한 위상력을 견딜 무기가 있다면 우리 벌처스의 자랑일 겁니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다.
유주같은 위상력을 마구잡이로 난사한다면, 망가지지 않는 무기가 더 이상할 것이라고.
실제로 인류의 영웅인 알파퀸 서지수 역시 그 위상력과 특유의 전투법을 견디지 못해 무기가 자주 망가졌으며, 트레이너를 만났을 적엔 무기를 들지 않았던 이유가 ‘버틸 수 있는 무기가 없어서’라는 직접적 언급도 들었으니까.
그렇기에 무기 없이 S급,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영웅’의 앞에 선 유주는, 일종의 협박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자신을 향한 핸드샷건을 바라보던 ‘여우’는 이윽고 싱긋 웃더니 말했다.
“그래요, 그만두죠.”
“…꽤나 여유롭게 물러나는군.”
“그럼요. 괜히 싸워서 이득 볼게 없으니까.”
‘싸워서 득될 것 없다’고 말한 그녀는, 칼을 거두면서 말하기를.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들 전원 죽일 수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니까.”
“배려 고맙군. …그럼, 그 영웅님께선 왜 우릴 죽이지 않은 거지?”
“그건… 음… 그렇네요….”
─아마 그녀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굳이 하얀을 콕 찝어서 말하는 그 모습에 유주가 위상력을 흉흉하게 내뿜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은 ‘여우’가 말하길.
“그녀가 저와 같았기에 알 수 있었을 뿐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늘을 날았으니, 퍼엉! 하며 그늘진 웅덩이의 물이 튀어오를 정도로 강한 소음이 일렁였다. 무심코 귀를 막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봤자 좋아질 일이 없다는 것을 안 늑대개는 철수를 결정했다.
“…같다, 라니… 도대체 뭐가…?”
전장을 떠나며 유주가, 평소의 그답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면서 가녀린 목소리로 괴롭다는 듯 소리를 토해냈다.
그런 유주를 바라보던 하얀은, 그런 그의 곁에 바싹 붙어 따라가는 것 외엔, 어떤 위로조차 해줄 수가 없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에….
“안정되고 있어… 맥박이, 위상력이….”
눈 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
인류의 기술로는 범접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그들은 간단하게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마치 투명한 관 속에 가두어둔 듯, 실험관 속에 갇힌 여성의 변화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변화는 없었다. 그토록 날뛰던 비정상적인 위상력의 격류가 안정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검은 ‘이상’이 제어되고 있었다.
“…‘저거’는… 도대체 뭐지…?”
그의 ‘힘’을 의미하는 ‘검은색’의 머리카락.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는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턱을 괸 채 고민하고 있는 프레이 아델 로에게 호프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대부분의 실험이 거의 성공적이며, 끝에 다가가고 있는 그와는 달리 아직 걸음마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프레이 아델 로의 실험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총장은 일시적으로나마 협력하기를 요구했고, 미덥지만 이 모든 것이 인류의 꿈으로 다가올 것이다. 라며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검은 위상력의 추출은?”
“거의 완료되고 있지만… 완전히 접속하지 못하고 있다.”
“완전한 검은 위상력이라면 그럴 우려가 없다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세이지의 위상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쪽은 조금 달라. 단지 옮겨담을 그릇일 뿐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이곳에 있는 네 명의 2분대 대원 중 한 명이.
“검은 위상력 추출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그들이 검은 위상력을 사용할 때의 공통점이라면 흑발로 변화한다는 것 뿐.
전원이 흑색으로 물들었건만, 누가 추출에 문제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대로 계속 추출한다면… 한 달 내에 끝날 수도 있겠어.”
시간이 없었다.
이곳 역시 부산에 있는 이상… 쫓기는 몸이라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간 내에… 모든걸 끝내야만 한다.
AI미스틱입니다.
3월 30일의 ‘책임’에 이어 4월 12일의 ‘나를 위한 당신의 자그마한 선물’ 이후 8일만에 만나뵙습니다.
어비스의 주인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말씀드렸듯, 여러분들의 선택이 엔딩에 어떤 영향을 줄 수도, 혹은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이 여러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만, 자신이 원하는 선택지가 어떤 결말을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3장 6화, 책임에서 고르신 바가 없으셨기에 아마 제가 임의로 선택해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하버트 웨스트 호프만과 현단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좋은 대화는 아니었습니다만, 이 만남이 어떻게 또 흘러갈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겠죠.
그리고 동시에 ‘검은 힘’의 안정에 성공했습니다만… 어떻게 안정에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한참 나중이 되어서야 알 수 있게 되겠죠.
그럼, 3장 7화 ‘고통’.
부디 잘 즐기셨기를 바랍니다.
건강을 잃으면 천금도 무의미한 것이니.
코로나가 만연하는 이 시기, 여러분들의 건강에 빛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