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별을 찾아서
길을찾는 2020-10-26 9
‘...게임을 끊든지 해야겠어...’
얼마 전부터 최근에 이어서까지, 요즈음의 세하가 문득 깨닫고 마음까지 다 잡아보는 것이 놀랍게도 게임을 끊는다는 식의 다짐이었다. 만약 세하의 이런 속내를 슬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알게 된다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식으로 우선 믿지는 그냥 저냥 흘려들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7대 사건 중에 하나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세하가 하루아침에 자신이 지금까지 모은 게임팩을 다 폐기처분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요즘 사이 세하가 푹- 빠져서 지내는 유명한 배관공 형제 게임과 관련한 씁쓸한 한탄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설명하자면, 먼저 그 게임 자체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게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아이템 같은 걸 먹을 때, 캐릭터 위로 무슨 아이템을 먹었는지에 관한 표식이 뜬다. 세하가 하는 시리즈의 경우에는 색만 변할 뿐, 대개 별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최근에 산 게임이니만큼 세하는 전력을 다 해 그 게임의 난이도별 맵의 클리어에, 열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게임처럼, 스크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벗어나기까지 한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별 표식이 세하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딱 한 사람한테서 말이다. 골치가 아팠다.
...그 이외의 것은 없냐고? 없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 그 자체, 전부였다. 고작해야.
사람 머리 위에 느낌표 마냥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별 표식. 모든 사람에게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뭐...그 별이 빙글빙글 360도로 자유자재로 회전하는 것은 아니고 종이에 그려진 종이마냥 멈춰도 있고, 그 게임에서처럼 화려하게 안쪽까지 전부 채색이 된 것도 아니라, 눈을 일부러 그쪽으로 돌리지 않는 이상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존재감이 없을 것 같은 별이었지만, 그래도 세하의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현재 세하의 시야에서 별을 달고 사는 사람은 딱 한 명이라고 앞에서부터 언급하였다. 그런데 하필 지금 세하가 가장 신경이 쓰이고 눈이 가고 있는 상대 딱 한 명에게, 그 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세하는 힐끔- 자신이 앉아서 쉬고 있는 파라솔과 조금 떨어진 먼발치에서 슬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리를 쳐다보았다. 역시, 오늘도 선명하게 별이 잘 떠다녔다. 이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잘 보였다.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세하는 지금 이렇게 안절부절해하는 모습과는 달리 침착하고, 오히려 무덤덤하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냥 전날 잠을 잘 못 잤기에 일순 보이는 환각...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더니만...
하지만 그렇게 일주일이나 지났을 때...유리 위에 떠 있는 별은 세하에게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라며 갈구하듯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흔해졌다. 어느 날은 그냥 아무런 낌새 없이 불쑥- 유리와 대화하던 도중에 나타나 저도 모르게 세하가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때에 유리가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세하의 안부를 묻던 게 또렷하다.
거기서 시간이 좀 경과했을 무렵, 별은 이제는 상시 24시간 유리의 머리 위에서 도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아니했다. 세하가 무거운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현실성 없는 일에 대해, 아까 전보다는 조금 돌아온 이성이 현실적인 답변을 내놓은 탓이었다.
‘...아니, 그 게임을 끊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다 없어질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세하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지금 원인이라고 하는 것도 대강으로 추측을 한 결과물일 뿐, 그것이 원인인 것이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방금 전 세하가 생각한 ‘그만두던지 해야지...’ 하는 행동이 지금 저 별 표식을 없애는데 최적의 방식일 수도 있지만 아니라는 법도 없었다.
게다가 유리 위에 있는 저 별이...은밀히 탐문을 해 본 결과, 오로지 자신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세하가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데 더 한몫을 했다. 신체적인 문제일까 싶어 안과에도 가봤지만 시력이 정상이라는 말도 들었다. 딱히 시야에 저 별이 은근하게 거슬린다는 점만 빼면 세하도,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없을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으나...그래서 괜히 간 안과에서 은근한 망연자실만 더 받아서 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무겁게 내리쉬는 세하의 옆에 어느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사람의 손에는 음료 캔이 두 개 들려 있었는데, 그 중 콜라가 들어있는 캔을 세하의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동생,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저씨...”
제이였다. 제이는 피식- 웃으면서 캔뚜껑을 따, 그대로 자신이 든 캔의 내용물을 원샷했다. 얼핏 바깥 프린팅을 보니 제이가 마시고 있는 건 차디차게 마시는 건강음료인 것 같았다. 제이의 걸핏하면 건강을 챙기는 것을 생각해 낸 세하는, 그래도 자신에게 콜라를 준 제이의 나름대로의 센스에 감사하며, 콜라를 한 움큼 마셨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왔는지 콜라는 차디찼고, 캔에는 수증기 같은 것도 일련하게 맺혀 있었다.
“고민 있으면 이 형님한테 말하라고.”
“고민...이라기보다는 그냥 최근에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꽤나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이것도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별이 생기고 나서 유리에게서 거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바라보는 게 그냥 그 이유뿐일까, 그게 아니라면...
“좋아하는 거군.”
제이가 갑작스럽게 고백했다. 세하는 조금 어벙한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가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또박또박 발음까지 해가며 말해주었다.
“동생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로군.”
“...아닌데요.”
“부정을 할 거면 좀 빨리 대꾸하라고. 그런 여지를 남기면 좋아한다고 인정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
세하는 차라리 침묵을 하는 게 더 나았을까, 하며 가벼운 후회를 했다. 정말 이 사실은 현실을 부정해서라도 알고 싶지 않은 극비사항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예측은 했다. 내가 저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마치 몹쓸 마법에라도 걸려서 저 아이만 바라보는 병이라도 생겼나보구나. 얼추 인정을 해가던 단계여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을 좋아하나보네.’ 같은 말을 들어도 별반 충격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이건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보다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에게 먼저 내 본심이 들통이 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아저씨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
“어쩐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 말이에요.”
제이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까보다도 더 묘사가 상세해졌다. 마치 생생한 경험을 한 사람마냥. 그리고 제이는 한 가지에 더 놀랐는데, 세하가 말하는 묘사가 자신도 일전에 겪었던 것과 매우 비슷해서였다.
이런 제이의 억측은 얼추 맞았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제 막 유리에게서 별 표식이 보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어떤 임무 도중이었는데 약해진 지반 탓에 일대의 건물이 무너지는 2차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세하는 비교적 가벼운 잔해에 깔려 금방 의식을 차리고 일어섰지만, 무너지는 충격 속 유리가 떨어져나간 것이라고 추측되는 곳 건물 잔해들은 상황이 심각했다. 세하 때보다도 더 크고 무거워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날도 거의 저물어 이제 달이 창창하게 뜰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세하는 열심히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서유리! 서유리!
-...
-유리야...!!
-...
대답은 없었다. 셋 중 하나였다. 의식을 잃었거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거나, 자신이 미처 자신을 부르는 유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시간은 점점 흘러 완연한 밤이 되었다. 달도 떴고, 평소에는 야경에 가려져서 **도 못하는 별들도 잘 보였다. 그런데 그걸 느긋하게 감상을 할 여지가 있겠는가. 세하는 계속해서 잔해 속에서 유리를 찾아다녔다.
-유리야! 서유...콜록.
얼마나 목을 썼는지 막간에는 마른기침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동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후에 다른 곳에 임무를 하러 갔던 팀원들이 합세해 계속 유리를 찾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탈진한 지라 점차 몸이 한계를 버티지 못해 점차 시야마저 흐릿해가던 세하에게, 어떤 건물 잔해 위로 무언가 하나가 반짝 보였다.
누가 노란색 크레용으로 장난스럽게 갈겨만 놓은 듯한 별의 표식이었다.
...잘못 본 건가? 아니, 깔린 잔해 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묘하게 2D 같으면서도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3D와도 같은 별 표식.
최근 들어 세하가 유리를 바라볼 때마다 매번 봤던 그 별이었다.
세하는 그 지점으로 가, 별이 표시되어있는 곳 바로 위에서 유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크게 불렀다.
-서유리---!!
몇 초가 지났을까. 안에서 자그맣게 대꾸하는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환희로, 환희가 안도로 바뀌었다. 주변 동료들이 세하의 주변에 몰려왔다. 곧 구조대도 도착하여 유리를 안전하게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건물 잔해의 빈 공간 사이에 몸이 있었기에 가볍게 긁힌 상처만 있었다. 세하와 비슷한 경우로 탈진하여 몸에 힘이 없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었다.
유리가 무사히 바깥으로 나오자, 세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한계치를 맛보고 곧장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니 옆에는 유리가 간병인용 간이 의자에 앉아 다소곳하게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하와 같은 환자복인걸 보니 아마 둘은 탈진 상태로 인해 하루 정도 입원한 듯 했다.
유리는 세하에게 가장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세하는 이에 대해 ‘같은 팀이니까 당연하지.’ 라는 의례적인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이런 경우는 상투적으로 이런 표현을 썼던 것 같다.
심경에 변화가 생겨서요, 라며.
-그보다 세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어.
-...
-세하가 술래하면, 난 맨날 가장 먼저 잡히겠다.
-...농담도.
유리는 세하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칭찬으로 그런 말을 했겠지만, 세하의 입장에서는 농담도 그런 농담을 하냐...였다.
하지만 괜히...슬며시 기뻤다.
제이는 내용물이 들어있지도 않은 캔을 괜히 마시는 척 했다. 음료 한 방울이 제이의 입 속에 톡- 들어갔다. 껄끄러웠던 목이 그거 하나로라도 풀려 제이는 세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있었지.”
과거형이다. 제이에게도 아마 그런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사연으로 인해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마음은 안 접더라도 적어도 티가 안 나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세하에게 한 방 먹은 제이 차례였다. 제이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거 보면, 동생도 알고 있었나 보군. 동생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말이야.”
“내가 아는 거랑, 남이 직접 입을 통해 알려주는 거랑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고요.”
“그래서? 고백은 했어?”
세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대로 된 진심을 유리에게 전해주지는 않았다. 그 때 이후로, 그 별 표식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 더 눈길이라도 간다, 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처럼 세하는 유리를 좋아하는 자신을 자각하고 말았다. 자각만 했지, 아직 모든 걸 밝힌 것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제이는 거기에서 그냥 끝내버렸다. 하지만 세하라면...제이는 괜히 세하의 머리를 가볍게 툭- 내리쳤다.
“뭐, 동생이라면 잘 해내겠지.”
“...갑자기 어린애 취급 같네요.”
“동생은 나와 달라서 걱정 없다는 말이야.”
그래서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제이의 어른 된 조언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 직후, 세하가 유리에게 모든 것을 다 밝혀낸 건 아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래도 띄엄띄엄 말꼬를 유리의 앞에서 풀어냈다.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직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세하에게만 보이던 유리의 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작가의 말]
오랜만의 세유입니다. 인겜에서 유리가 ex자동 발사 쓸 때, 위에 별표식이 생기는 걸 보고 영감을 받아서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