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고하는 진혼곡 1화
PlaylMaker 2020-10-21 0
사방에서 불의 잔영이 튀던 곳, 그 중심에서.
이세하 요원이 외로이 서 있었다.
이제는 사람처럼 보이는 잔해를 안고 자신의 팔이 데워지는 것조차 인지를 못한 듯
이미 사막처럼 말라버린 눈물을 흘린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그의 표정에서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정도로 절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향하고 있는 대상이 사람을 향하고 있는지 차원종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위험해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오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자욱하여 빛이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힘겹게 붙잡고 있던 물방울이 결국 하나하나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지에 향한 불의 잔영은 산산이 흩어지고 있지만, 그의 칼날에 지펴진 증오는 아지랑이처럼 이제 막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하아...하아..."
소나기와 어둠을 헤쳐 골목길을 돌고 또 돌고 있다.
거리 곳곳에 공안이 깔린 탓에 좀처럼 도시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설마... 이렇게 대대적으로 차단선을 구축할 줄은...`
사전에 퀸으로부터의 전언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세하 요원은 고립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바로크 솔리드 웍스 사의 뒤를 캐고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이지만 그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고 여겨지기에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루나?... 내가 있는 위치를 어떻게..."
"저 몰래 여자 끼고 술 먹으러 간 사람이 궁금해할 건 아니죠?"
"그건... 오해다."
그가 슬며시 나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다시금 손을 움켜잡았다.
도대체 말을 하면 듣질 않으니 이렇게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이세하 요원은 완전무결한 나의 케어가 없다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빠져나가는 게 좋을까요? 이번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한점으로 돌파하지. 그편이 빠르니까."
"사양할게요. 혼자 주위 끌면서 저만 빠져나가게 하려는 속셈을 모를 줄 아나요?"
"......"
항상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이번엔 반박하지 않았다. 하여튼 이상한 가면을 썼어도 속은 다 보인다니까.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로는 평소 행동이 직선적이면 거짓말도 티가 잘 나는 법이라고 한다. 사실 선생님을 스스로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이번엔 저번과는 다르게 무언의 위화감이 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이동하고 작전을 펼친다? 언론 통제가 당연시되는 장소라고 해도 다소 부자연스럽다.
공안이 대대적으로 모일만한 중대한 사건이 있다면...뭐가 있을까.
2022년 현재, 이세하 요원은 인터폴에 황색 수배가 되어있다. 특이하게도 범죄자를 인도하는 적**배가 아닌 실종자로 분류되어있는데 여기엔 유니온의 입김이 일부 반영된듯하다.
그러니 이세하 요원에 대한 수색망을 좁혀오기 위한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다만 어떤 이유든 우리에게 있어 좋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유니온 소속의 클로**지 추적해오는 마당이니 이른 시일 안에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는 것보단 일단 모텔에라도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 시간이 더 지연되면 귀찮아질 게 뻔하니까요."
"....모텔?"
그는 내 쪽을 멀뚱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의아했는데 순간 머릿속에서 찌릿하고 신호가 왔다.
반사적으로 내 상체를 감싸 쥐며 말한다.
"무...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전 아직 미성년자라고요!"
"그러니까 문제라는 건데."
"...네?"
머리에 피가 몰려있는 걸 천천히 분산해보니 그가 한국에서의 모텔을 생각하고 말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남성과 어른에 가까워진 여성.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이라고도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성인이라는 걸 서류상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들어가지 못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여긴 사실상 법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구역이라 별로 상관이 없다. 설령 공안에 단속당하더라도 뇌물만 얼마 쥐여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괜히 착각해서 분위기만 무안해졌는걸.
"...그건 괜찮으니까 따라오세요. 신분 확인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가?"
"아...아무튼요! 저에게 이상한 짓만 하지 마세요."
"...... 한 적 있던가?"
그가 작게 속삭이는 것이 내 귀에도 들어왔지만, 일단은 빠져나가는 것에 주력하기로 한다. 평소에는 잘 보이던 모텔이 왜 지금따라 유난히 안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몰래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게 보이진 않는다.
일단 퀸이 전송해준 맵 데이터를 참고하여 경로를 찾던 중.
"헤에~ 이런 걸 사랑의 도피라고 하는 건가요?"
짙은 그림자 안에서 누군가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거미줄에 묶인듯한 불쾌함이 들어 닭살이 돋았지만, 우리를 추적해오던 클로저라는걸 인지하고 나서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윽...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울 여유 같은 건 없는데. 공안이 코앞까지 좁혀온 마당에 타이밍이 좋지 않다. 이세하 요원이 건블레이드의 손잡이에 손을 대려는 것을 일단 만류하고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한다.
"...아니거든요."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요. 사냥터지기 팀의 루나 아이기스 요원님."
위압적인 그림자에서 나온 여성은 클로저라고 하기엔 복장이 약간 미묘했다. 양쪽이 파인 홀터넥 드레스에 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은 채였다.
도저히 전투하기에 편한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갖춘 능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틈을 보이는 건 오히려 위험했기에 우선 방패를 들어 경계하기로 한다.
그래. 무슨 의도로 우리에게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생각대로 흘러가게 해주지는 않을 거야. 이세하 요원을 상처입힐 생각이라면 더더욱.
"용건이 뭐죠? 단순히 술이나 대접하고 싶어서 유인한 건 아닐 텐데요."
"우리 고객이 당신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왔어요. 어딜 그렇게 즐겁게 싸돌아다니시던지 쥐꼬리만한 단서도 없어서 덫을 놓았죠. 설마 이렇게까지 순진하게 미끼를 물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렇게 할 걸 그랬네요."
`미끼?`
만약 이세하 요원에게 흘린 정보가 우리가 찾는 것이 맞았다면 유니온은 그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대략적으로라도 유추하고 있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 오히려 알고도 묵과하고 있다면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세하 요원을 보호하는 것.
그의 마음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만한걸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유니온의 미래라고 불리던 전도유망한 검은양 팀의 멤버가 이미 사망한 클로저를 사칭하고 다닐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 된 것도 분명 그 영향이겠죠."
"난 더는 검은양이 아니야. 그리고...... 클로저 역시 아니지."
조금 전까지 대화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고 차가운 어조가 흘러나온다.
실제로 희망의 여명 작전 이후로 그는 나 이외의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심한 적대감을 표출해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할 만큼 충격적인 기억이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저 여성이 이세하 요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자, 여긴 저에게 맡기세요. 적의 증원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싸움할 여유는 없다고요."
"......"
복부에 손을 올려 만류해**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광채를 잃은 회색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대상을 잡아먹을 듯 압박한다.
저 여성이 이세하 요원을 일부러 자극했다기보다는 원래 성격이 남 눈치를 그다지 보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 부분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하여튼 쓸데없이 기 싸움이나 하고.... 우리팀 남자들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나는 형씨를 만나기 위해 입고 싶지도 않은 옷도 입었는데... 반응이 영... 취향에 안 맞는 걸까나?"
.... 저 여자도 정말 눈치 없네! 하긴 보자마자 독이 오르게 할 정도면 민감한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렸겠지. 예를 들면.... 가족이나 동료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이미 퀸에게 알파퀸이나 이슬비 요원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겐 떨치려고 해도 떨치기가 어려운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네가 어디서 왔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말해두지."
"......"
장난기와 여유가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셨다. 저게 원래 본연의 표정이겠지.
그늘 안에 있지 않아도 안면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표면적으로나마 설명해주는 지표가 되었다.
원래 관상은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감각에 의존하게 된달까.
"대한민국과 유니온은 나의 적이다. 그리고 클로저라는 직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지. 이세하가 아니다. 나의 이름은 에이스. 정의에 기생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자를 심판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 좋은데 ... 저 대사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나. 몇 번을 들어도 낯 뜨거워서 견디기가 어렵다.
제삼자가 보기엔 애니메이션에 취한 철없는 어른일지 모르나 이렇게 된 경위를 바로 옆에서 봐온 나는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언제가 될련지.
"푸훗... 이거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들었는데."
역시 예상했던 반응.
"생각보다 중증이네요. 아니면 반대로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그 녀석이 이 장면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벌써 기대가 되네요."
"기대하지 마라. 어차피 내가 이슬비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싸대기 몇 대만 맞으면 중2병 정도는 교정될 테니까."
『그 녀석』만 듣고 지칭하는 대상이 이슬비 요원님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상황이 점점 유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상극으로 보였던 둘도 의외로 맞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내가 뭐하려고 했더라....
소나기는 어느새 그쳤고 길거리에 깔렸던 경찰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구름 사이에서는 별이 드문드문 떠 있어 은색 유리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동안 바쁘긴 했는데 (게임으로)바빠서 안 썼다고 하기엔 핑계고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워서 못 썼네요. 참, 프리코네는 캬루짱이 주인공입니다. 배신자라도 귀여우면 용서해 줘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