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영웅의 아들

wjdrlfgns 2014-12-12 4

 

피어오르는 연기구름, 시끄럽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면서, 허리춤에 매둔 한 쌍의 총검(銃劍)을 꺼내들었다.

몸속에 가둬둔 거대한 기운을 일깨움과 동시에 총검에 힘을 주입하자 사방으로 푸른빛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문득, 원초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두 눈을 감고, 몬스터들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떠올렸다.

 

-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건 '클로저'뿐이라고, 나의 어머니께선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다른 차원에서 온 몬스터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이능의 힘을 사용하는 클로저 뿐.

재래식 무기가 통하긴 하지만 이능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 전설적인 클로저였다는 어머니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멸망의 위기, 차원전쟁을 종식시킨 위대한 영웅. 구원자라고 칭할 정도로 대단한 클로저.

 

어린 나는 하늘에 빌었다. 부디 이능의 힘을 주지 말라고. 나는 그런 힘 필요없다고.

안타깝게도 하늘은 소년의 간절한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 얼마 후에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이능의 힘을 깨우치고 만 것이다.

마치 영웅의 자식은 영웅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평범한 삶을 위해 힘을 숨기려 했지만, 어머니 앞에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한 힘. 잠재한 힘일 뿐이지만, 어머니는 대단히 자랑스러워하셨다.

정부소속 과학자들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역시 '영웅의 아들'이라고.

 

역겨웠다.

내가 원한 가정은 그저 평범한 가정. 때론 싸우지만 화목하고,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가정.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전설적인 어머니의 명예에 나를 대입시키는 무리들을 보면서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자랑하고, 장차 훌륭한 클로저가 될 것이라고, "역시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들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거의 광적일 정도로 '게임'에 미치게 된 것은.

일종의 자기보호 수단이었다. 어느 하나 미치고 싶은 게 필요했다.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던 게 게임이었을 뿐. 내가 게임에 미치면 어머니께서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잠재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것도 끝날 것만 같았다. 아기의 칭얼거림같은 어린 생각이다.

허나 당시의 난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영재라고 칭송하는 과학자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머니,

'장차 크게 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입에 바른 말들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서, 반항했다.

 

"클로저가 되기 싫어요."

 

그 말에 어머니께선 처음으로 화를 내셨다. 타오르지 않는 조용한 분노였다.

그 분노는 '어째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느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로부터 시민을 구한다.

시민을 구하려면 클로저가 되어야 한다.

클로저가 되려면 이능의 힘을 갖고 있어야 하고,

나는 특히 잠재력이 높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영웅의 아들'이다.

 

"너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그것도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사람들을 수호하는 클로저가 되어야만 한단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한다. 국민을 위해, 도시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를 희생시킨다.

그 대가로 사람들은 몬스터로부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옳은 논리다.

국민과 국가의 우선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니까. 하지만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영웅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짊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든 짐은 온전히 내 차지였고, 나는 그것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했다.

만약 중요한 순간에 잠재력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리라.

물론, 나의 어머니까지도.

 

"……클로저가 될게요."

 

"옳지, 착하다. 우리 아들."

 

거부할 수 없어서 강제로 클로저가 된 이후부터, 나는 변했다.

아니, 스스로 변하기를 선택했다. 더 이상 순진하고 말 잘 듣는 어린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보호였다. 사람들, 과학자들,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내게 부담감을 짊어지게끔 한다.

그 부담을 아직 어린 나는 짊어질 수 없다.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게 문제였다.

영웅의 아들이라는 것도, 대단한 잠재력의 힘을 가졌다는 것도,

이러한 것들 때문에 내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프로젝트 활동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검은양 프로젝트'라는 귀찮은 집단에 나를 넣은 어머니께선,

요원의 한 마디에 크게 속상해하셨다. 프로젝트는 대충하면서 하루종일 게임만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에, 잠재력을 조금도 일깨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저 용서를 구할 뿐이다.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지만 동료한텐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동료는 그저 동료일 뿐이다. 이 귀찮은 프로젝트에 어떤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여,

강제로 참여한 내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신랄하게 비난하는 녀석들일 뿐이다.

특히 '이슬비'라는 녀석은 틈만나면 나를 쪼아댄다. 사사건건 참견하고, 실수라도 할 경우엔 어머니를 들먹인다.

 

"영웅의 아들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대단한 잠재력이라매?

그런데 왜 꺠울 생각을 안해? 내가 너였다면 벌써 잠재력을 깨우고도 남았을 거야."

 

"그래, 열심히 해서 잠재력만 가진 나보다 강해서 좋겠다.  훌륭해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야."

 

"넌……!"

 

그녀는 발끈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후. 됐어, 말을 말아야지."

 

언제나 이렇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자기면서, 날이 선 목소리로 제 멋대로 말을 끊고 가버린다.

나랑 말싸움해봤자 얻을 이익은 조금도 없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니까.

하지만 하나만 제대로 알고 둘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클로저가 되기 싫다.

이런 힘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노력을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잠재력은 개방되질 않았다. 나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다. 그녀의 의도가 좋았던 어쨌던 간에.

 

-

 

어찌됐든 클로저가 되어,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검은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어머니께선 내게 희망을 품고 계셨다. 잠재력을 깨우쳐, 과거에 자신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 기약없는 바람의 종착점이 어디인진 모른다. 잠재력을 깨우치지 못하고 절망할 수도 있다.

혹은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크게 다칠 수도 있거나, 최악의 경우엔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있다.

언제든 중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곳에서

한 쌍의 건블레이드를 세게 쥔 채 몬스터들을 마주하는 것이다.

곧 푸른빛이 일렁이는 총검의 날이 쏘아지고, 녀석들의 주변에 이능의 힘을 흩뿌린다.

떨어지는 벚꽃처럼, 수면의 파문처럼 잔잔하게 뿜어져나간 빛은 녀석들을 꿰뚫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주변을 잠식하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폭포처럼 터져나간 푸른빛의 격류에 몬스터들은 자비없이 쓸려나갔다.

쉴 새 없이 건블레이드를 휘두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인가?

어떠한 이유로…….

 

끊임없이 질문했다. 답을 알고 있었지만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흐름에 맡길 뿐이었다. 뭐가 어찌되었든 이 길은 결국 내가 택한 길이다.

현재의 내가 걸어가는 길이다. 영웅의 아들, 큰 잠재력의 힘을 가진 클로저…….

하지만 게임에 광기를 보이는 중독자에 만사가 귀찮은 나무늘보같은 녀석.

수동적이며 소심하고, 반항적이며 감성적인 인간, 이세하.

 

오늘도 나는 만사가 귀찮은 표정을 짓고 게임 생각을 하며 몬스터를 처치할 뿐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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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컨셉은 '만약 내가 이세하고, 그처럼 영웅같은 어머니가 있고, 주변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면 어떨까?'였습니다.

 

이세하가 열여덟이고 A형, 검은양 프로젝트에 마지못해 참여했다는 점에서 발상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게임 중독에 '어떠한 이유'를 부여했습니다. 본문에선 자기방어로 적용했죠.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서, 그럴 자신도, 능력도 없으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말을 직접 실행한 겁니다.

 

PS. 어쨌든 가급적이면 단편이 낫다고 해서 한 편으로 된 글을 적었습니다.

늦은 밤이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두루뭉술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2024-10-24 22:20:5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