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中 Part 2] - 글씨체 수정

PlaylMaker 2020-03-26 3



#2 파이의 이야기

결혼식 첫날밤.

세하는 결혼식이 끝난 다음, 자신의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이를 의아하게 받아드린 파이는 방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세하씨,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

조용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 쪽으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약간 머뭇거리는듯하더니 천천히 문이 열린다.

"네... 누나. 무슨 일이신가요?"

상당히 기운이 없는 표정. 사실 무리도 아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생에게 결혼식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은 신서울을 구해낸 영웅의 아들이었으니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가 한자리에 모인 유례없는 자리였기도 했다.

파이는 세하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고서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세하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그렇게 도달하게 된 방에는 동방풍 문양이 이곳저곳 장식되어있었고 온돌 바닥에는 세하를 의식한듯한 두 사람분의 이불이 깔렸다. 난방이 잘되는 상석에 세하를 앉히고 청주를 내왔다.

"세하씨. 당신은 이제 제 지아비이십니다. 그리고 무릇 부부라면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많이 심란하시겠지만 마음을 다잡아주셨으면 합니다."

"......"

자신을 지긋히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한다. 결혼식에서 보여줬던 미소는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는걸 파이는 느끼게 되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불안해하던 사람은 세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힘드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저에게 의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부족한 몸이지만... 신명을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누나..."

"호칭도 이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는 더는 연인이 아니라 부부니까요. 무리하게 하실 필요는 없고 차츰차츰 바꿔보도록 하죠."

파이는 술잔을 들이밀었다. 세하는 바로 잔을 받았고 통째로 비웠다. 이어 파이의 것마저 입에 대기 시작했다.

"무리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이건 제가 마실게요. 작은 양의 알코올이라도... 뱃속에 아이에게는 해로울 수 있으니까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은 파이는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암흑에 잠긴 몽환세계에서 절망을 베어버린 한 줄기의 빛.
인류가 차원전쟁에서 패배한 IF의 세계를 구원한 영웅.

하지만 그런 모습에 끌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체절명의 과정에서 동료를 향한 헌신적인 의협심이 "의를 보고도 하지 아니하면 용기가 없음이라." 라는 파이의 가치관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또, 교제하게 되었다. 도중에 실수(?)를 저질러 아이가 생기긴 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동생이 정상적으로 자라왔다면... 이런 모습일까.`

초반에는 극구 부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생인 슈에 윈체스터와 이세하를 겹쳐 보기 시작했다. 딱히 닮진 않았다고 파이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은연중에 나오는 위화감에서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안기고 싶어?>>

<<... 누구냐?>>

<<이대로...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 자, 나를 받아들여.>>

소름 끼치게 기분 나쁜 울림이 파이의 내면에 퍼진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역겹고 답답한 기분. 하지만 이 목소리가 내면 안에 들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 요망한 것! 당장 내 안에서 사라지지 못할까!>>

<<어떻게? 이미 내가 네가 됐는데?>>

<<뭐라고?>>

파이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세하 위에 올라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만 이미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후였다.

"커...컥! 으으...."

세하가 몹시 괴로운 듯 힘겹게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오른팔을 들어 올려 보려 했지만 곧바로 제압을 당한다.

"사랑하는 그대여, 왜 저를 두고 다른 인간을 향해 연민을 품으시나요?"

"무...무슨 나는 그런 적 없어."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하나요? 그 핑크색... 주제도 모르고 내 임에게 꼬리 치는 그 년. 죽여버릴까? 죽여버려야겠죠? 아하하하!"  

광기에 물든 목소리. 눈동자는 이미 본연의 색을 잃고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색으로 머리가 탈색되는 것은 암흑의 광휘 인자가 염색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표.

세하가 뭐라고 하든 이 상태의 그녀에게 목소리가 닿을 리는 없다.

<<그만해! 더는 내 소중한 사람을 괴롭게 하지마!>>

내면의 세계에서 파이가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사검을 뽑았다. 하지만 형체를 얼마 유지하지 못하고 모래로 돌아간다.

<<뭐....>>

<<후후. 이제 검에게도 버려진 당신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선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요.>>

모래로 돌아간 사검의 잔해들이 암흑의 광휘 파이에게 도달하여 또 다른 무기로 변모한다. 차원력을 발휘할 힘을 잃은 파이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럴수가... 나의 업보가....>>

<<사랑이란 이해시키는 것이 아닌 굴복시키는 것. 제가 어떻게 사랑의 형태를 이루는지 영원한 얼음 안에서 지켜보도록 하세요. >>

심장을 노린 칼날이 파이의 품속을 향해 아무런 제지도 없이 파고든 절체절명의 순간. 

그림자에서 나온 건블레이드가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며 막아선다.

"**라."

제로 거리에서 살의를 목적으로 출력된 포격.

상대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분쇄해 버린다. 그런데 파이는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특유의 익숙한 자세, 무자비한 공격 유형. 그리고 건블레이드.

"세하씨?"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도 자신의 인격과 유사한 외형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탈색된 머리와 짙은 보라색의 눈동자. 암흑의 광휘 인자를 보유한 자의 특징이다.

"본체 녀석. 나에게 귀찮은 짓을 시키는군. 잴 것도 없이 그냥 다 부숴버리면 될 것을..."

자세히 보니 그가 들고 있는 무기는 건블레이드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파이의 힘의 원천이자, 동생에 대한 죄의 상징.
얼음의 사검.

인정받지 못한 자에게 가차 없이 응징을 가하는 양날의 무기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투우를 조련한 투우사(鬪牛士)처럼

"그래. 너인가? 그러길래 처음부터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의식을 뺏겼으면 좋았잖아."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항하지 말라니..."

오른손엔 건블레이드, 왼손엔 사검을 들고 있는 이 소년은 이 이상 설명하기도 귀찮은지 고개를 돌려 목을 풀고 있다.

"뭐 됐어. 어차피 다 잊게 될 테니까."

"자세한 설명을- 크..흑"

원래대로라면 자신에게 꿰뚫렸을 배가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의해 관통당하는 걸 바라본 파이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이대로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통증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 뒤로 눈물을 흘린 채, 자신을 꼭 껴안고 있는 이세하의 모습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말: 분량도 거의 없는데 너무 어렵네요 ㅜ 
2024-10-24 23:35:2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