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맨 27화

검은코트의사내 2020-02-28 1

 도저히 불가능할 거 같았는데 거짓말처럼 이루어낸 걸 본 트레이너는 충격이 컸다. 과거에도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성을 가진 차원종이라 해도 분노에 휩싸이면 어차피 짐승처럼 변하니까. 지금까지 그가 경험했던 전장에서 만난 차원종들은 전부 그런 부류였다. 

 트레이너는 레비아 내면에 잠든 인격이 드러나지 않은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의 영역 이상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걸 컨트롤 할 수 있었다. 석봉은 그걸 보고 자랑스러워했다. 세하 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충분히 강한 힘을 가져서 나타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놀란 얼굴로 물어본다. 레비아는 재확인을 위해 힘을 크게 방출했다가 다시 거두었다. 완벽하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힘의 기운을 느꼈는지 다른 늑대개 팀 대원들과 바이올렛도 내려왔다. 그들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레비아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조용히 흔들었고, 석봉은 트레이너의 질문에 답변한다.

"저는 방법을 제시한 거 뿐이에요. 레비아 씨. 거짓말 해서 죄송해요. 실은 제가 말씀드린 게임은 훈련과 전혀 관계없는 거였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든 건 레비아 씨를 도와드리기 위한 거짓말이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 한석봉이 제시한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석봉이 했던 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게임이 훈련과 관계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렇게 믿게 만들어서 그녀가 또 하나의 내면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루어낸 거였다. 도저히 불가능할 거 같은 일을 해낸 모습을 보자 바이올렛은 엄지 손가락을 물면서 몸을 떨었다.

"고작 그런 거짓말로 해냈단 말이냐? 이해할 수 없군."
"단순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어요. 희망은 두 가지가 나뉘어요. 진실된 희망과 거짓된 희망으로요. 절망에 빠진 자에게는 상황에 맞는 희망이 필요해요. 한 아이에게 부모의 죽음을 알리려고 할 때 실은 먼 여행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듯이 말이에요."
"거짓말이 마치 중요한 거처럼 말하는 군."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에서 나온 어느 현자가 말씀하신 거에요. 제 말은 중요하지 않아요. 레비아 씨가 이제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석봉이가 말하는 건 의미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썼다해도 지금 레비아의 폭주가 잠재워진 건 틀림없었다. 감시관에게서 받은 임무는 이제 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석봉은 갑자기 눈이 감기면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쿵!

"한석봉 씨!"

 바이올렛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인다. 레비아도 달려와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 트레이너는 쓰러진 소년의 모습을 보고 실처럼 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소년인데도 엄청난 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트레이너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위상력이 없어도 천재적인 과학 지식으로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 차원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민간인을.

*  *  *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숲을 걸어간다. 어디를 가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웃는 얼굴만 보일 뿐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벌레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걸어가다보니 어느 언덕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곳을 보니 나무들이 마치 잔디처럼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봐라. 석봉아. 세상은 이렇게 넓지 않니?"
"넓어요. 아빠."
"그래. 석봉아.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이 아름다운 숲만한 커다란 그릇을 가져야 한단다. 아무리 더러운 먼지가 날아와도 숲이 다 정화해줄 수 있는 그런 그릇 말이다."

 그릇의 의미가 뭔지 몰랐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지만 아버지는 새하얀 빛을 일으키며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찾으려고 하지만 허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아름다운 숲만한 커다란 그릇을 가지거라.

 그 말과 함께 내 눈을 눈부시게 하는 빛이 눈앞에 비쳤다.

*  *  *

 눈을 떠보니 천장이 보였다. 꿈을 꾼 모양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이 붕대로 되어있는 게 보였다. 혹시 내가 누구에게 단체로 폭행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벌쳐스 폭발 실험장에서 트레이너 씨와 이야기한 뒤에 곧바로 쓰러진 걸로 기억한다. 온 몸의 뼈가 살짝 아픈 느낌이었는데 사실은 심각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한석봉 님."

 레비아가 슬픈 얼굴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차원종으로 보이지 않는 순수한 얼굴이다. 누가 보면 사랑스럽다고 느낄 정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제가 그대로 쓰러졌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네요. 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행동 하지 말라고 했는데."

 레비아 반대편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를 무섭게 내려다보는 바이올렛 아가씨가 서 있었다. 상당히 화가 나신 건 이해하지만 너무 무섭게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석봉 씨. 온 몸에 뼈가 대부분 골절을 일으켰고, 장기 내에서도 출혈이 일어날 정도였어요. 일반 병원이었다면 평생 누워있어야 할 수준이지만 벌쳐스 기술 덕분에 살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벌쳐스 기술 덕분이라고? 그 기술이 그렇게 좋기라도 하나? 그러고 보니 통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나를 치료해준 건 틀림없는 듯 했다. 

"앞으로 이틀은 있어야 뼈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올 거에요. 그러니까 얌전히 쉬시고, 다음에는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치료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은 걸까? 어차피 내게는 봉급이 있으니까 그걸로 써도 되겠지만. 그건 그렇고 레비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저, 한석봉 님. 다른 분들이 놀라셨어요. 제가 힘을 통제하는 걸 보고 놀라운 일이라고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제 아무도 죽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해낸 건 레비아 씨지, 제가 아니에요. 전 그저 길을 제시한 거 뿐이죠."

 겨우 그런 걸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거다. 내가 커다란 활약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천장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제 그녀가 폭주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일도 없으니까 그걸로 만족했다. 벌쳐스 사장 님도 아마 놀라셨을 거다. 나를 죽일 의도로 그녀와 같이 있게 한 거겠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

"한석봉 님...... 저... 그러니까..."
"왜 그러세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띄면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왜 저러지? 쑥쓰러운 건가? 양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채 비비면서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다가 한손으로 가슴에 손을 댄다. 으음, 차원종이라고 하지만 몸매가 좋네. 아니, 이게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감정은 뭘까요? 갑자기 한석봉 님을 보니까 두근두근거리고, 몸이 뜨겁고..."
"어, 음... 저기...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아마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 거 같은데요."
"그... 그렇겠죠? 하긴,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이 힘을 낭비했으니까요. 그럼, 편안하게 쉬세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병실을 나갔다.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설마 차원종이 그런 감정도 가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이거 곤란한데. 나는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거절할 수 있을까? 

*  *  *

 병실을 나온 레비아는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힘을 너무 낭비해서 벌어진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느낀 그녀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나, 설마 차원종이 그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네요."
"하피 님."

 하피가 양팔로 가슴을 끌어안은 채 창가에 기대며 서 있었다. 레비아의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레비아는 그녀라면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어서 물어보았다.

"하피 님. 제가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된 걸까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요."
"가르쳐 드릴게요. 그건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 이라고요?"
"네. 차원종에게 그런 감정이 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엄청난 발견을 해버렸네요."
"사랑이 뭐죠?"

 간절히 묻는 레비아를 본 하피는 씩 웃어보이며 발걸음을 옮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알아보세요."

 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레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하피는 그녀의 변화를 보고 당시에 놀랐던 광경을 떠올렸다. 레비아가 자신의 본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만든 한석봉이라는 소년.

정말 재미있군요. 그 소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병원을 나왔다.

To Be Continued......
2024-10-24 23:35:1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