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라만차의 여자 - 1
서진권 2015-02-21 2
0.
밤이 깊었다.
나는 헤진 벤치에 홀로 앉아 위태롭게 움직이는 회전목마를 보고 있었다. 눈 앞 에는 여자 하나가 오래 된 엽서에서나 볼 법 한 낡은 목마를 타고 있었다. 몸매가 도드라지는 말끔한 검은 색 정장 위로 다양한 모양과 색채의 휘장들이 흐린 구름 뒤에 숨은 별빛 대신 멋들어지게 반짝였다.
여자는 금세 어둠속으로 사라졌다가, 이내 반대편에서 미소를 지으며 회전목마의 이상한 멜로디와 함께 등장했다. 목마가 나와 가장 가까울 거리가 되면, 그녀는 진달래 같은 웃음과 함께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금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사이, 나는 남몰래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듯 몇 번 되뇌어 보았다. 흔하디흔한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오늘 밤 만큼은 입 끝에서 기기묘묘한 감촉으로 맴돌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있을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 몰래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귓전에 작은 악마 하나가 노닐었다.
1.
무도(舞蹈)의 시작은, 며칠 전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에 들은 어떤 이야기에서 부터였다.
“저기, 경감님. 혹시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인가? 본디 나, 그러니까 채민우라는 남자는 그런 것 따위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보다 주변의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성가신 목소리에, 나는 읽던 책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인데 그렇게 호들갑인가?”
오랜만에 즐기는 식후의 휴식시간이었다. 평소 바쁜 와중에도 간간히 짬을 내어 읽던 소설에 이제 막 집중하려던 참 이었기 때문인가? 나의 말투엔 의도치 않은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어린 대원의 얼굴위로 순간 당혹감이 짙게 스쳤다. 나 역시 본래 그럴 뜻은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민망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해야했다. 특경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차라 아직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찌푸려진 미간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자신의 딱딱한 태도 때문에 휘하의 대원들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리더는 엄격하지만 동시에 부드러워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익히 듣던 관용구 앞에 서보니,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경사라고는 하지만 특경대에 배치 받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풋내기에 나이까지 어리다. 그리고, 여자다.
구제불능의 마초나 성차별주의자 따위는 아니었지만, 역시 여자 앞 에서는 물러질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는 게 남자다. 최소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굳은 사무실 분위기를 풀고자
“저기, 무슨 얘기인데 그러나? 한 번 들어볼까?”
하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이건 마치 일일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무뚝뚝한 가장이 화난 딸을 달래려 광대 짓 하는 꼴을 보는 것만 같다. 내 나름대로의 연기가 예상보다 효과가 너무 좋았나보다. 칸막이 너머로 대원 몇 명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짐짓 헛기침을 했다.
“저, 송은이 경정님 이야기입니다만.”
“뭐.......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그 인간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의 정신은 냉탕에 처음 내던져진 꼬맹이처럼 반사적으로 경기를 일으켰다. 이번엔 또 무슨 구설수에 휘말린 것 인가? 얼마 전 치료가 끝난 편두통이 지금이라도 다시 도질 것 같았다.
“도대체 뭔데? 자세히 말해보게, 빨리. 지금 당장.”
난데없이 안광을 쏘며 희번득거리는 나의 시선이 그녀에겐 부담스러웠나보다. 아니, 겁을 먹었다는 게 더 맞으려나? 느닷없는 나의 추궁에, 그녀는
“아무래도 직,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실 거 같습니다.”
라며 말을 더듬다, 이내 핸드폰을 꺼내 찍힌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찍힌 배경을 보니 서울의 어느 평범한 놀이공원인 것 같았다. 놀이공원이라.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언제였더라? 머릿속에 이는 잡스러운 생각들을 치우며 나는 나의 상사를 사진 속에서 찾았다. 그녀를 사진에서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손이 자신도 모르게 책상 위의 빈 캔을 집어 우악스럽게 우그러트렸다.
“저, 저기 영상도 있는데, 보고 싶으시면.......”
“경사, 자네가 폰으로 직접 찍은 거야?”
“그게,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썸네일로 먼저 올라가 있었습니다. 역시 모르시는 거 같아서, 저희도 그냥 있으려고 했지만 역시 경정님과 관련 된 일이고.......그래도 일단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 그만.......언,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 첫 문단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내 머리통을 책상에 수직으로 메다 꽂아버릴 뻔 했다. 덕분에 하마터면 부하에 대한 자해 및 협박 혐의로 시말써라도 쓸 위기에 처할 뻔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우선 안정부터 찾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사진 속의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혹시나 내가 잘못 본 것 이었으면. 하지만 역시나 내 눈은 죄가 없었다.
사진 속 에는 특경대원 복장을 입은 여자 하나가 유치원 꼬맹이들 사이에서 회전목마를 타며 희희낙락대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한 화질로 찍혀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한 듯 폰카로 동영상을 찍어대는 사람들도 같이.
지금 보니 송은이 경정은 혼자 좋다고 사람들에게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두른 완장에 친절이라는 두 글자가 마치 나를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대문짝 만 하게 박혀있었다. 우리 대장님, 시민들에게 참 친절하기도 하시다. 물론 나 만 빼고.
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관자놀이에 꿈틀대는 힘줄을 본 예의 경사가 순간 질겁하며 그 자리에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기분 따위는 지금의 내게 전혀 없었다. 나는 당장 그녀의 집무실로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있어야 할 사무실엔, 그녀 대신 햇빛을 머금은 먼지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 이었다.
“야, 경정님 어디 계셔.”
“아, 경감님. 안 그래도 저도 오늘 아침부터 백방으로 수소문 중입니다. 안 그래도 그 동영상인지 뭔 지 때문에 본청에서 찾고 난리도 아닙니다.”
내 얼굴을 본 당번병이 무슨 일 인지 다 알겠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자네 변명은 듣기 싫고, 일단 검은양 팀 사무소에 전화 해 봤어?”
“네, 해 봤지만 담당 관리요원 말에 따르면 오늘은 그 쪽 훈련일이라 아무도 없을 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필요 없고, 거기로 가 봐. 가서 두 발로 직접 찾아.”
당번병은 자기 딴에 뭐라 대꾸라도 하려는 듯 했지만, 이내 내 표정을 보고 단념 한 듯 눈 앞 에서 잽싸게 사라졌다. 그를 보내고 난 뒤, 나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다시 한 번 검은양 팀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가던 신호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지적이고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채민우 경장님. 오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
“네, 김유정 관리요원님.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 혹시-”
“저기,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 될 거 같네요.......일단 여기에는 안 계시는 것 같네요.”
그녀의 말 사이에 주저앉은 그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굳이 따로 묻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부하 대신 다시 한 번 송은이 경정의 행방을 물었다. 내의 질문에, 그녀는 작은 한숨을 쉬며
“안타깝지만, 이번엔 저희도 정말 모르겠네요. 저도 이번에는 감도 안 잡혀요.”
라고 대답하다, 이내
“설마 그 동영상 주인공이 진짜 송은이 경정님 이었어요?”
라며 도리어 내게 물었다.
어차피 부정할 수 도 숨길 수 도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저는 유리가 그 동영상 처음 보여줬을 때, 솔직히 특경대에서 자체적으로 대민홍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역시 언제나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람이네요, 송은이 경정님은. 일과시간에 놀이동산에서 회전목마를 아이들과 함께 섞여 타다니. 그것도 특경대원복 입고서 혼자서.”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는 수치심에 내 얼굴이 챌린저호처럼 공중폭발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녀에게 도저히 뭐라고 둘러 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제가 다 보좌를 잘못해서 이런 일이.......”
라며 말 끝 을 흐리고는 고개 숙인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