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여우를 만났을 때

설원 2019-11-24 6

※ 요호 하피와 요호 레비아의 좀 더 과거 시점 이야기

※ 세계관 확장 되는 건 기분 탓입니다.

※ 트레이너랑 지하세계(원더랜드) 여왕님 살짝 언급

 

 

 

 

 

 짤랑-

 

 “...”

 

 어디선가 들리는 신기한 이명 소리에 하피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하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활하게 퍼진 어느 들판, 그리고 그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었다.

 

 요즘 시기는 겨울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눈이 내린 자리에, 먼저 온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그 위로 새로운 눈이 쌓이는 계절. 눈이 쌓일수록 하피는 자신이 이 하얀 바다 위에 홀로 표류된 것처럼 고독이 느껴졌다.

 

 하피는 가뿐하게 눈밭 위로 올라갔다. 하얀 설원 위에 모습을 들어낸 건 꼬리 9개를 가진 검붉은색의 여우 한 마리였다. 본래의 하피는 인간 형상의 모습으로 자주 있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에는 오히려 여우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더 편했다. 인간의 형태일 때보다 훨씬 가벼워 눈에 덜 파묻히고, 네 발이 그런 눈밭 위를 더 빠르게 움직이는 데 수월했기 때문이다.

 

 하피는 눈밭을 한창이나 뽈뽈 뛰어다녔다. 잠결에 들었지만 소리가 분명 들렸다. 그것도 이 근처에서! 뭐, 근처라고 해도 하피가 간 거리는 족히 500m는 되어보였다.

 

 제법 먼 거리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눈밭에서?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워보였지만, 이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들은 하피 앞에서는 논외로 쳐야 했다. 일단 그녀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여우였고, 굳이 자세하게 따지자면 하피가 들은 소리는 청각에 의존하는 감각이 아닌 제6의 감각에 비슷한 것이었다.

 

 하피가 지상세계에서 안식처를 자리 잡은 뒤로, 가끔씩 하피와 같은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여우의 형상을 지녔으며, 둔갑술 같은 초능력을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지상세계에 나타났을 때, 일종의 부모 역할을 하는 존재가 하피였다.

 

 하피는 눈밭을 거닐며 생각했다. 얼마 만에 태어난 아이인지. 마지막으로 만난 아이가 자신에게서 독립한 것이 벌써 300년 전의 일이었다. 즉, 이번 존재는 매우 오랜만에 하피가 마주한 새로운 생명이었다.

 

 하피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 앞발을 이용해 눈을 파바박, 해쳤다. 그러자 키엥- 하는 여린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하피가 파낸(?) 것은 옅은 분홍색의 털뭉치였다. 당연히 하피보다 훨씬 작은, 아기 여우였다. 꼬리는 항상 이런 경우에 속했던 여우들처럼 한 개였다. 아기 여우의 상태를 잠시 훑어보던 하피는 아기 여우의 목덜미를 입에 물고, 다시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긴 시간 눈 속에 파묻혀 있었는지, 아기 여우는 갑작스럽게 옆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에 몸을 비볐다. 하피는 그런 아기 여우를 따뜻하게 보며주었다.

 

 이름은 무엇으로 지을까...항상 이럴 때마다 하피가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피는 타인의 애칭 같은 건 잘 짓는 편이지만, 평생 쓰면서 지내야할 이름 같은 건 잘 짓는 편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하피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 이한테 부탁하는 수밖에.

 

 

 

* * *

 

 

 

 “제가요.”

 “...”

 “여우를 주웠어요.”

 

 트레이너는 잠시 오랜 전우(戰友)의 얼굴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바깥 마실 잠깐 갔다가, 여기가 살기 편하다고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던 악우(惡友)가 이렇게 뻔뻔하게 자신의 앞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에서도 한 몫. 그리고 그런 악우가 여우를 주워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도 또 하나의 한 몫.

 

 트레이너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아주 옅은 분홍색의 털을 가진 귀여운 아이인데, 어떤 이름을 짓는 게 좋을까요?”

 “...너는 항상 내 이름 센스를 무시하더니만, 이럴 때는 굳이 나를 찾는군.”

 

 트레이너는 기가 털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피는 으쓱거렸다. 트레이너는 그래도 부탁받은 이상, 대충 행할 마음은 없었던 지라, 진지하게 대답했다.

 

 “‘레비아’ 가 어떤가?”

 “항상 느끼지만 정말 최악의 이름 센스네요.”

 “그렇다면 하피, 네가 생각하던 이름은 뭐지?”

 “음...이쁘고 깜찍하니까, ‘이쁜이’?”

 “...”

 

 그냥 둘 다 어느 부분에서 센스를 어디다가 갖다 버린 거 같은 느낌이 물씬 드는데. 트레이너와 하피 사이에 껴있는 제3자의 생각이었다. 빨간색의 화려한 제복을 입은 그 사람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잠시 뻐끔거리다가, 결론을 내려주었다.

 

 “트레이너 쪽 이름으로 해. 그게 그나마 낫네.”

 “레비아라니...어디 신화 속 괴물 같은 이름이잖아요. 그걸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한테 짓게 할 수는...!”

 “아무리 그래도, 이쁜이보다는 낫잖아?”

 

 빨간 제복의 여자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하피라고 할지라도, 이 빨간 여자의 앞에서는 조금 자신의 본성을 죽이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옛 상관 겸, 이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유일무이한 여왕 겸, 자신의 쌍둥이 자매이다 보니.

 

 여왕은 하피 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이 몇 번째 아이지?”

 “3번째 아이에요.”

 “3번째라...너, 진짜 지상으로 올라간 거 후회는 안 하지?”

 “후회는 평생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자매님 자리를 훔칠 마음도 없으니까.”

 “...”

 

 여왕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하피와 비슷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여왕 쪽이 훨씬 더 날카롭다 보니 이렇게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분위기는 금방 서늘해질 때가 많았다.

 

 여왕이 말했다.

 

 “어쨌든 볼일은 끝난 거지? 그러면 네가 그 사랑하는 지상으로 얼른 가버려.”

 “그래야겠네요. 여왕님 명령이라면 받들어야죠. 그래도 이 말 하나는 해주고 싶네요.”

 “...뭔 이상한 말을 하려고.”

 “오랜만에 자매님을 뵈어서 전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그야,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수 있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니까요.”

 “...”

 

 여왕은 아무 대꾸 없이 자리를 떠났다. 자신과 여왕의 관계는 이 정도 선이 아무래도 적당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서로를 미워한다고 하기에는 뒤틀린 애정이 약간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피는 떠나기 전에 트레이너에게는 그래도 감사함이 듬뿍 담긴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트레이너 씨.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셔서요.”

 “...결국 그 이름은 쓰지 않으려나 보군.”

 “뭐...고민은 해야죠. 제가 워낙에 변덕쟁이라서.”

 

 하피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 * *

 

 

 

 “당신의 이름은 레비아랍니다.”

 “레비아...”

 

 트레이너 앞에서는 온갖 불만은 다 토로했음에도, 결국 하피는 막내의 이름을 레비아라고 지었다. 아기 여우는 자신의 이름을 몇 번씩 곱씹어보았다. 하피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니요! 무척 예쁜 이름인 걸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다행이고요.”

 

 거짓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그 어느 신화에 나오는 괴물 같은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것인데. 이건 취향이니, 그러려니 하고. 하피는 지금 레비아의 털을 빗어주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자신의 끔찍한 빨간색보다 훨씬 예쁜 분홍색의 털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진 아이였다.

 

 “레비아는 참 귀엽네요.”

 “가, 감사해요...”

 “레비아는 이제부터 저랑 같이 지내면서 이것저것을 배울 거예요. 각오가 되셨나요?”

 “네에. 하지만 걱정이에요. 제가 장로님처럼 될 수 있을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걱정거리였을 수도 있지만, 하피의 입장에서는 이건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신묘한 여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피는 레비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레비아는 틀림없이 훌륭한 요호가 될 거예요.”

 “요호요?”

 “우리, 차근차근 다 해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또 인간으로 둔갑이 능숙해지면 마을에 내려갈 수도 있고...”

 “마을...”

 

 마을이란 말에 레비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레비아는 그대로 하피에게 물었다.

 

 “마을에는 무엇이 있나요?”

 “아주 재밌는 것들이 많아요. 나중에, 한 번 레비아를 마을에 데리고 가줄게요.”

 “감사합니다...! 저 너무 기대되어요. 마을에는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이 많은 것은, 어린애답네요.’

 

 이제야 자신이 맡아왔던 아이들과 공통적인 양상을 보이니 하피는 안심이 되었다. 3이라는 숫자는 적다면 적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많다면 많다고도 할 수 있는 신기한 숫자였다. 레비아는 3번째. 많은 여우들의 스승이 된 존재라고 했지만, 어쩌면 제자 둘을 배출한 건 적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피는 이런 가시밭길 같은 길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다녔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처음 지상에 왔을 때의 그 충격. 그로 인해 결심한 작은 바람. 그 바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피는 레비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레비아.”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여우도 혼자이면 외로움을 타지만, 여우가 또 다른 여우를 만나면 그 후에 외로움이라고 하는 손님은 잠시 여우의 곁을 떠나곤 한다. 이번에는 외로움이란 이름의 손님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다.

2024-10-24 23:28:0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