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와 노네임의 부산에서의 첫 만남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설화묵환 2019-11-23 1
저번 부산 팬소설 콘테스트에 올리려 했으나 용량 초과로 올리지 못했던 글 중의 일부로, 노네임에 대해 상상해 본 부분을 자른 것입니다. 노네임이 나올 시기가 가까워져서 한번 올려봅니다.
트레이너는 부평 깡통시장을 홀로 걷고 있었다. 6.25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통조림 등의 캔 제품들이 거래되어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이곳은, 차원전쟁이 끝난 지금 국제시장과 손을 잡고 대 차원종 무기며 위상병기, 전투식량 등 각종 전략물자와 정보들을 활발하게 유통시키는 전국 최대의 시장이 되었다. 새롭게 수리를 하고 현대화가 진행 중인 구역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물건들과 관광객, 시민들이 어우러지는 번화한 구역이었다. 반면 차원전쟁 이전의 모습을 간직한 뒷골목에는 벌처스에서 유출된 수상쩍은 부품, 유니온의 간부들이 빼돌린 보급물자, 밀수품, 위험한 차원종 잔해, 불법으로 얻은 정보, 뒷소문, 음성소득을 노리는 뜨내기, 빈민가의 부랑자, 불법체류자, 수배자, 사기꾼, 사이비 종교단체 등이 판을 치는 거대한 지하경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트레이너가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깡통시장의 뒷골목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개인장구의 정비와 조달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전투식량을 비롯한 각종 군용품을 파는 허름한 가게 앞에 잠깐 머물렀다.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들은 유정을 통해 조달받고 있었지만, 그는 유정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 후에도 벌처스 시절의 물자 조달 루트들을 그녀 몰래 유지하고 있었다. 유정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에는 너무 올곧은데다 이상주의였다.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물이 맑으면 큰 고기가 없듯이, 지나치게 정도만을 좇아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 법이었다. 그녀가 끝까지 그녀의 ‘최선’을 추구한다면, 언젠가 그들도 그들이 선택한 최선을 좇아 그녀를 떠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트레이너의 생각은 군용품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과 한 청년이 두 종류의 전투식량을 놓고 마구 떠드는 소리에 중단되었다.
“…아이, 그거는 파이다, 비싸기만 비싸고 맛도 별로라 카더마. 가격값 하는거 볼라카면 차라리 이게 낫지. 이거는 유니온 정품인데다 새로 나온 쌔거다, 쌔거!”
“그러니까 그거는 알겠고. 할매가 보여준 거는 와 또 이리 드럽게 비싸노 이 말이다. 유니온, 씨, 거서 나오는 거 중에 제대로 된 게 얼마나 있다고 카는데? 이거는 벌처스에서 나온 거다 아이가. 차라리 거 께 낫지 어데 유니온에서 나온 거를 갖다가.”
“아따, 야가 뭘 모르네. 야들이 예전의 유니온이 아니라니까? 내 안 카더나. 이번에 새로 나온 기라고. 맛도 영양도 뭐도 전에 거보다 배는 나아졌다 카더라. 바라. 유통기한도 이게 더 빵빵하다이가.”
“아, 씨…….”
한쪽 눈을 가린 헤어스타일에 연한 잿빛 눈을 지닌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등에 더블 배럴 샷건을 메고, 허리춤에는 핸드건 종류로 보이는 두 자루의 총기를 차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한눈에 청년이 위상능력자임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숱한 위상능력자들을 만나본 트레이너가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 청년이었다. …그렇다 해도 역시 대부분의 클로저들처럼 세상물정은 잘 모르는 건가. 트레이너는 청년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는 노인이 내놓은 전투식량을 본 순간 그녀가 물건으로 장난을 치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뒷골목은 불법이 일상인데다 속는 쪽이 잘못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레이너는 청년을 조금 더 지켜보다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 실례하지. 상황은 본의 아니게 보고 말았소. 당신이 고른 그 전투식량은 벌처스에서 최근 개발한 신형이오. 미군의 전투식량을 모델로 한 것으로, 구성품이 많아 편리성은 떨어지지만 맛과 보존성이 가장 좋기로 유명하오. 그리고 노인장이 권유해 준 것은 유니온과 계약한 민간업체에서 기존의 전투식량을 개선했다고 나온 것인데, 기존의 전투식량과 열량이나 맛, 보존성에는 큰 차이가 없으면서 포장을 바꾸고 가격은 배로 올렸다고 악평이 자자한 물건이오. 참고해 두시오.”
“예?”
청년은 적잖이 당황한 듯 눈을 끔벅이며 멍하니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에 트레이너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다른 클로저 팀들과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클로저들을 여럿 본 탓에 쓸데없는 조언이 늘어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트레이너는 눈을 꾹 감았다.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는 성격은 아니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당신이 저 노인장에게 속아 넘어갈 것 같아서 한 마디 해주는 거요. 보시오. 노인장이 권유해 준 것은 유통기한도 어딘가 이상하지 않소?”
노인의 앞에 놓여있는 전투식량의 포장지 하단에는 ‘2028. 01. 03’이라는 유통기한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중 ‘8’의 가운데가 수상하게 조금 번져 있었다. 청년이 유통기한이 표시된 부분을 문지르자 그의 손가락에 검은 잉크가 묻어나왔다. ‘2020. 01. 03’이라고 표시된 유통기한의 ‘0’을 교묘하게 ‘8’로 고친 것이었다.
“엇, 앗, 아, 아아! 뭐고! 진짜 이럴 끼가. 아, 할매!”
“아이 들키뿟네… 그래도 알제? 유통기한하고 소비기한은 다른 기데이? 알제?”
“이 노인네가! 하다못해 편의점에서도 날짜 지난 폐기는 달라 카면 돈 안 받고 주기도 하는데 어데…!”
펄펄 뛰는 청년을 앞에 두고도 노인은 태연히 낄낄낄 웃으며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아, 아깝구로. 묵은 재고 싹 넘기가 담뱃값이나 쫌 땡겨볼라 캤디마는 뭣이 굴러들어와가 망해쁫네. 보소. 말투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쫌 까리해 비는데, 어데서 오셨는겨?”
“노인장이 알 바 아니오.”
트레이너는 간단하게 대꾸하고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청년이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연신 꾸벅거렸다.
“아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망할 노인네가 돈독이 올라가…….”
트레이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이렇게 과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이들이 껄끄러웠다. 거기다 가까이서 본 이 청년은 어딘지 이상했다. 분명히 뜬구름처럼 가벼운 느낌으로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있는데도, 그 내면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된 것 같은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다리 하나가 달아난 의자 같은 청년이었다. 이 수다스러움이 청년의 진짜 모습 같기도, 진짜 모습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트레이너는 속이 텅 빈 채 혼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목각인형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이 손 놓고 이야기하시오. 고마워할 것은 없소. 별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예?”
청년과 더 얽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는 위상능력자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기본적인 소속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 총기를 보면 전투에 특화된 위상능력자로 보이는데, 혹시 유니온 소속의 클로저요?”
“예? 아, 아입니다. 아… 그게… 말하기가 쪼매 그런데…….”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저는 어데에도 소속이 안 돼 있고, 그냥 이리저리 댕기면서 하루 벌어 하루 묵고사는 놈이라예.”
클로저가 아닌 위상능력자… 게다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니. 트레이너는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다면 청년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민간 해결사인데다 유니온의 위상능력자 데이터베이스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능력의 종류도, 수치도 불분명하지만 상당히 강한 것만은 확실한데다,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결사라…
하지만 트레이너는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청년이 무엇이든 간에 세 팀과 적으로 만날지, 아군으로 만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어쩌면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청년이 처음부터 그를 노리고 연기를 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민간인들이 많은 시장이었다. 아무리 해결사라 해도 무고한 민간인까지 휘말리게 하며 일을 터뜨릴 배짱이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거기다 대낮에 보는 눈까지 많은 장소에서라면 더욱더. 트레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난 가보겠소.”
“예예, 한 번 더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시소~”
청년은 다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트레이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트레이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새 표정을 싹 바꾼 청년이 그를 냉정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
트레이너가 인파 사이로 사라지자, 헤실헤실 웃고 있던 청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갔군.”
“엉.”
노인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볼 때마다 아주 지기네. 어쩜 그래 태도가 무시로 바뀌노?”
“당신도 알지 않나. ‘나’는 내가 예전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다양한 ‘나’의 모습을 시험해 보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나름의 시도지. 방금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그다지 호들갑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군. 거부감이 들어.”
“그래그래.”
“어쨌든, 저 자가 말로만 듣던 벌처스 처리부대 대장인가? 역시 보통은 아니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뭐? 처리부대? 니도 참 큰일이다. 그마이 정보가 느려가 그짝 바닥에서 밥 묵고 살겠나? 딸린 식구들도 있는 기…….”
청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노인은 한 번 더 담배연기를 내뱉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전 울프팩 팀의 교관, 벌처스의 처리부대 대장이 점마다. 근데 지금은 또 뭣이 쪼매 다르더라? ‘늑대개’라는 팀을 델꼬 유니온에 있다대? 내 듣기로 이번에 한국에 임시지부장이 된 김유정이라는 처자 밑에 있다고… 가 때매 유니온이 요새 마이 시끄럽다 카지…….”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청년의 눈에 안광이 번득였다. 말을 살살 돌리던 노인은 그것을 본 순간 낚싯바늘을 드리우는 것 마냥 말끝을 흐리며 청년의 기색을 살폈다.
“김유정?”
“그래. 와. 니 아는 아가씨가? 얼굴은 반반하이 생깄더라마는…….”
“이봐.”
“또 와.”
“그 김유정이라는 여자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클로저 팀과, 거기 소속된 클로저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줄 수 있겠나. 그 자들이 여기 왜 왔는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당신은 비열한 사기꾼이지만, 정보를 모으고 가공하며 마음대로 다루는 그 능력만은 실로 굉장하지. 그쪽이 조금만 손을 쓰면 그런 것쯤은 하루 만에 다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노인은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꼬질꼬질한 백자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 싸늘한 표정으로 청년의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루? 야… 니 마이 컸다? 다 디져가는 걸 주서다 살려 놨디만 니가 내를 우습게 아네. 응? 쥐섀끼야.”
청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와 노인 사이에는 벼린 칼날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기를 수 초, 마침내 노인이 피식 웃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도 참, 조막만한 거한테 뭔 쫀심을 세우고 야단인지… 아무튼, 짜슥아. 하루가 뭐고? 하루가. 멫 분 만에도 가들 신상은 물론 오늘 어디 가서 뭘 했고 뭘 먹었는지도 다 털 수 있다. 대신에…”
“뭐지?”
“아까 금마가 초 쳐놓은 요 전투식량 재고 다 갖고 간다 카면 갈치주께.”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