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여우와 지하토끼

설원 2019-11-17 13

※ 인 원더랜드 나타 일러스트와 신서울 요호 레비아 일러스트 보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 요호 하피도 나옵니다.(엑스트라 수준이지만)

 

 

 

 

 

 이곳의 하늘은 가을만 되면 눈이 부시도록 푸르다. 단풍나무들이 붉은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시기.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나무에게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그 군락 지대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이 단풍나무 숲의 작은 굴에는 어느 특별한 꼬마 여우가 살고 있었다. 꼬마 여우는 항상 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커다란 자신의 두 귀를 이용해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별 다른 위협이 없다는 걸 어느 정도 알아차린 여우는 그제야 고개를 굴 밖으로 살짝 드러냈다. 그 다음은 한발 한발, 차근차근 굴에서 나오는 여우의 발걸음은 신중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보듯이, 꼬마 여우는 겁이 많았다.

 

 꼬마 여우가 이렇게 신중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나름 있었다. 이 산에서 흩어져서 사는 여우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산에 사는 여우들은 예로부터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것은 신법(神法)이라고 불리던 거 같았다. 어쨌든 하늘도 날고, 물건도 뿅! 하고 만들 수도 있기도 했지만, 가장 주목할 점은 인간의 형상을 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렇게.

 

 ‘아직 수행이 부족한 모양이네...’

 

 샘의 물을 거울삼아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여우는 아직도 자신의 수행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한 거 같으나, 머리칼과 똑같은 색의 여우 귀와, 허리춤에 차여진 같은 색의 여우 꼬리 2개가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을 없애야 산 밑에 있는 마을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여우 장로에게서 받을 수 있는데, 그 날이 지금 여우에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꼬마 여우보다 몇 백 년을 더 산 여우 장로 같은 경우는 아주 쉽게, 여우 귀와 꼬리를 없애는 인간 형상을 의태할 수 있었다. 신묘한 여우들이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은 많은 체력을 요한다. 특히, 본래 여우라는 것을 증명하는 귀와 꼬리를 없앤 인간의 형태라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여우 장로는 이것을 가뿐하게 해낼 뿐 아니라,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안 있어도 되는 이 산 속에서도 인간의 형태로 일상을 지내는 몇 안 되는 여우였다.

 

 역시 꼬리 9개 달리신 분은 다르신가보다. 자신은 아직 꼬리가 2개뿐이니 이렇게 엉성한 인간 형태도 많이 힘든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얼마 지나지 않아, 술법을 풀지도 않았는데 원래의 여우 모습으로 돌아왔다. 꼬마 여우는 여우 상태로 느긋하게 기지개를 폈다. 해가 하늘의 중간 지점에 있는 걸 보니 한낮임이 분명했다. 해가 점점 짧아지는 시기이지만, 그래도 바깥을 돌아다니기에는 늦지 않은 시간이기에 여우는 가볍게 산보나 즐기기로 했다.

 

 “짹짹-”

 “안녕하세요, 참새님. 오늘도 날씨가 참 좋지요?”

 

 물론 산책을 즐기면서도 만나는 이웃들에게 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꼬마 여우는 예의 바르기로 이 산동네에서 유명했다. 그래서 신묘한 여우들 중에는 조금 괴팍하기로 유명한 이들이 많아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여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꼬마 여우만은 예외였다. 심지어 꼬마 여우를 각별하게 챙겨주는 동물들도 있었다.

 

 꼬마 여우는 이때쯤의 계절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단풍나무 밑에서 뛰어노는 것이었다. 꼬마 여우는 가을의 붉게 물든 단풍잎의 색깔을 이 세상에서 가장 곱다고 여기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을이 되면, 틈만 나면 단풍색을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꼬마 여우를 무척이나 귀여워하는 여우 장로가 마을에 다녀온 어느 날은, 그와 똑같은 색의 장신구가 달린 방울 발찌를 선물해주었더랬다. 지금 꼬마 여우의 뒷다리에 있는 바로 그 방울이었다. 너무도 기뻐하는 꼬마 여우에게 장로는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라며 크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꼬마 여우는 값진 것은 아니라도 무엇 하나라도 장로에게 보답의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꼬마 여우는 무척 예의가 발랐다.

 

 그래서 선물 받은 지 며칠 동안 산을 샅샅이 뒤지면서 희귀한 약초나 버섯이라도 구하고 있는데, 좀처럼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이면 포기할 법도 하지만, 우리의 꼬마 여우는 예의도 있는데다가 묘하게 근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산의 이곳저곳을 다닌 지 나흘이 되던 날. 꼬마 여우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굴?’

 

 자신이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굴이었다. 이 산에서 굴이 희귀하지 않았지만 – 여우들은 대부분 1인 1굴이었다 – 이번에 발견한 굴은 무척 특별했다. 일단 입구가 너무도 새카매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측면에 있는 여우 굴과는 달리 땅바닥에 붙어 있는 굴이라는 점.

 

 마치 여우굴이 아닌 거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토끼굴? 이 산에는 토끼가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토끼굴을 발견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꼬마 여우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토끼굴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타이밍이 기막히게도 굴에서 나오고 있던 무언가와 딱!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으윽...”

 

 청명한 종소리 같은 것이 일순간 들렸다. 꼬마 여우와 굴에서 나오던 누군가가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상대방도 갑자기 굴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들이미는 걸 상상치도 못했는지, 연신 아픈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상대방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누가 거기서 머리를 들이밀어!?”

 “죄, 죄송해요! 굴 안이 궁금해서 그만...”

 

 꼬마 여우도 연신 아파오는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창 쓰다듬으면서 아픔을 중화시키고 있는데 문득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상대방이 물었다.

 

 “...잠만, 너 정말 여기 사는 여우야?”

 “네?”

 “나, 여우는 실물로 처음 봐서. 그런데 그림 속이랑 다른데? 꼬리가 2개잖아?”

 “...”

 

 여우는 자신을 보고 여우라고 하는 물체의 형상을 그제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얼굴에 비해 커다란 귀, 몸뚱이를 뒤덮고 있는 겨울의 눈(雪)과도 같은 하얀색 털. 우물우물거리는 듯 한 귀여운 입꼬리. 그리고 새빨간 두 눈동자.

 

 여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내가, 내가 200년 동안 살면서 토끼를 처음 보다니!

 

 “...그러는 토끼님은 정말로 토끼시군요.”

 “보시다시피 토끼잖아. 왜, 그 토끼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은?”

 “토끼 분을 처음 본 것이 맞아요. 이 산에는 토끼가 살고 있지 않거든요.”

 “...그랬군. 미안하다, 이러저러.”

 

 토끼는 사과했다. 여우냐고 물어보는 것이 미안한 건지, 아니면 머리를 부딪치게 한 것이 미안한 건지는 애매하게 끝을 맺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꼬마 여우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토끼라는 생명체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토끼님은 저기 굴 속에서 나오신 건가요?”

 “아, 뭐 그렇지.”

 “그럼 저 굴 속에서 살고 계셨던 거예요? 그런데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지.”

 “굴 속에서 사는 건 맞는데, 너처럼 여기 산에서 사는 건 아니야. 정확히는 굴 밑에서 사는 거지만.”

 

 굴 밑?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땅 속? 여우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토끼 또한 자신의 목적에 충실한 편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현실이 가늠이 안 가는 여우에게 토끼가 물었다.

 

 “나중에 차근차근 잘 설명해줄 테니까, 여기 사는 여우라면 혹시 알고 있어? ‘하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우 말이야.”

 “아...죄송해요. 그런 이름을 가지신 여우 분은 모르겠네요...혹시 다른 특징 같은 거 아시는 거라도 있나요?”

 “난 그 양반 실제로 ** 못해서 모르는데, 듣자하니 꼬리가 9개라던데.”

 “아, 9개라면...장로님이시군요.”

 “장로? 참 고리타분한 호칭이네.”

 

 토끼는 자신보다 몸집이 큰 여우에게 전혀 위축되지 않아했다. 그런 당당한 토끼와는 다르게 신중한 – 또 다른 말로는 겁이 많은 – 여우는 조금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토끼는 꼬마 여우에게 부탁했다.

 

 “그럼 혹시 길 안내를 해줄 수 있어? 하피...아니지, 그 장로라는 여우한테 말이야.”

 “장로님께 말씀이신가요? 알겠어요. 좀 길이 험난하니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안내자 없이 이 산을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토끼는 이 정도 상황인 것만도 감지덕지라는 표정이었다. 땅 밑에서 생활해왔다고 하니, 땅 위의 길은 조금 눈이 어두운 모양일까? 여우는 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 * *

 

 

 

 “트레이너 씨라...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여우 장로는 토끼가 꺼낸 이름을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여우 장로는 오늘도 역시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토끼가 ‘정말 여우 맞아?’ 라고 물었지만, 뒤이어 요염하게 흔들리는 9개의 꼬리를 보고 곧장 납득했다.

 

 “아무튼 꼰대가 당신 보고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내려와 달라고.”

 “그 답답한 지하로 굳이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은데...트레이너 씨가 여기로 올라와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냥 좀 가. 나 또 다시 왔다갔다하기 싫다고.”

 “우리 토끼 친구는 정말 솔직한 분이시군요.”

 

 여우 장로는 살포시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일어날 채비를 하는 걸 보니 지하에 내려갈 생각인 모양이다. 토끼는 트레이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피라는 여우는 말과 행동이 조금 따로 노는 동물이니,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말라고 했던 것.

 

 ‘그 말이 사실이네, 꼰대.’

 “자, 그럼 저부터 먼저 가볼게요. 우리 토끼 친구는 우리 막내님이랑 잘 놀고 계세요?”

 “...뭐? 나도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심부름만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토끼는 며칠 동안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자 여우 장로, 그러니까 하피는 왜 그렇게 놀라냐는 표정이다.

 

 “어머, 트레이너 씨가 안 알려주셨나요? 그 굴은 1인승이에요. 그리고 토끼 친구도 알 거 아니에요? 지하 세계랑 지상 세계 오르내리는 거 하루 정도는 걸리는 거. 본래라면 천천히 가도 될 텐데, 트레이너 씨가 토끼 친구를 보낸 거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인 거 같아서, 먼저 가려는 것뿐인데 이의라도 있나요?”

 “...”

 “이왕 지상에 온 김에, 느긋하게 지상 관광이라도 해보심이? 우리 막내님도 옆에 있을 테니,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진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럼, 씨 유~ 한 일주일은 걸릴 테니 느긋하게 여행 분위기를 즐기세요!”

 

 하피는 홍홍거리면서 눈앞에서 금방 사라졌다. 막내 여우와 함께 남아버린 토끼는 어안이 벙벙했다. 꼰대가 이런 건 설명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짐도 안 챙겼는데 뭔 일주일을 버티래! 절망하고 있는 토끼와는 달리 막내 여우는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막내 여우는 갑자기 맡게 된 손님이 살고 있던 그 ‘지하 세계’ 라는 것에 더 궁금증이 가는 모양이었다.

 

 “저, 토끼님...궁금한 게 있는데요...”

 “토끼님이라고 부르지 마. ‘나타’ 라고 불러. 그러는 네 이름은 뭐야? 나만 널 여우라고 부를 수도 없고 말이야.”

 “아, 제 이름은 ‘레비아’ 라고 해요.”

 “그래, 레비아.”

 

 통성명을 마친 토끼와 여우...아니, 나타와 레비아는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땅 밑 지하 세계에서 사는 나타와, 땅 위 지상 세계에서 사는 레비아. 둘은 서로의 나라에 각각 여우와 토끼가 없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했다. 나타 말로는 지하 세계에도 여우가 한 마리는 있었다고 하지만, 그 여우는 어느 날 지상 세계로 올라갔다가 거기가 마음에 들어서 정착하고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우가 레비아가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하피인 것이고. 하피는 그냥 오래 산 구미호가 아니라 조금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여우였던 것이다.

 

 레비아는 나타를 데리고 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타가 지상에 올라온 시기는 한창 가을이던 시기라서, 붉은색의 단풍잎이 산 곳곳에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단풍잎을 물끄러미 보던 나타가 말했다.

 

 “지상의 나뭇잎은 전부 다 저렇게 붉은색이야?”

 “아니에요,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길 겨울이 오기 전의 마지막 꽃피움이라고 하셨어요.”

 “겨울? 겨울은 또 뭔데?”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지하세계는 계절의 구분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나타는 가을이 뭔지도, 더 나아가 겨울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타는 단풍잎 하나를 집더니 중얼거렸다.

 

 “우리나라는 붉은색 잎은커녕, 붉은색 꽃도 없어. 하얀 꽃만 있어.”

 “그거 참 신기한 일이군요.”

 “그래서인지 선배 중 하나는 맨날 붉은색 페인트로 꽃을 칠하고 다녀. 여왕이, 흰색 꽃은 싫다고 해서 말이야.”

 

 나타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지하세계는 항상 일정한 기온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자라나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인지 몇 종의 식물들을 빼면 대부분 말라죽었다. 지하세계에 흰색 꽃만 있는 것도, 꽃이 피는 식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여왕은 몇 백 년 동안 같은 색의 꽃만 보는 것이 싫다며, 꽃에 페인트칠을 하라는 기괴한 명을 병사들에게 내린 것이었다.

 

 나타는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떠올랐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동화. 옛날 옛적에 꼬리 9개가 달린 여우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단조로운 지하세계가 너무 무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우는 지상과 통하는 구멍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상세계의 멋짐에 매료된 여우는 결국 지하세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라는 내용의 동화.

 

 이 동화에서 말하는 여우는 여우 장로, 하피였다. 처음 나타는 동화에 나오는 여우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렴풋하게 감은 왔다. 항상 초록색 잎의 숲만 보던 나타에게, 이렇게 붉은색 잎의 나무가 있다는 것, 그것도 이렇게 많이 있다는 건 처음으로 느끼는 충격이었다.

 

 나타는 레비아에게 말했다.

 

 “너는 운이 좋구나.”

 “네?”

 “이런 멋진 곳에서 살아서.”

 “그럼 나타님도 여기에서 같이 사시는 게 어떤가요?”

 

 아예 그런 일례가 없는 건 아니라서, 나타는 그래도 되었다. 하지만...

 

 “내가 안 돌아가면 꼰대가 벌을 받을 거야.”

 “...”

 “그건 좀...싫네.”

 “나타님...”

 “하나 위안이라도 얻었으니 되었어. 지하세계에서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니잖아.”

 

 위안이 생겼다는 그 말이 문득 쓸쓸하게 들렸다. 레비아는 나타가 지하로 돌아가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피는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고 했고, 오늘로 나타와 지내게 된 지 7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레비아는 나타에게 기념이 될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그러던 중, 레비아는 자신의 다리에 차인 방울 발찌가 눈에 들어왔다. 하피가 준 선물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레비아보다는 나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마침 방울의 장신구 색깔도 나타가 마음에 든다고 한 단풍색이었다.

 

 레비아는 나타의 손에 방울을 그러쥐어주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나타는 놀란 기색이었다.

 

 “이게 뭐야?”

 “방울이에요. 무언가 지상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는 기념품이 필요하실 거 같아서요.”

 “...”

 

 나타는 방울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뜻깊은 선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타는 겉으로는 차가워도 속은 깊은 토끼였다. 그렇기에 자신도 레비아에게 무언가 기념이 될 만 한 걸 건네주고 싶었다. 그러던 찰나에 윗옷 주머니에 넣어둔 나침반이 손에 걸렸다.

  

 나침반 – 회중시계처럼 뚜겅이 달린 동그란 모양의 나침반이었다 - 을 건네주는 나타에게 레비아는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물어보았다.

 

 “이게 뭐예요?”

 “나침반이라고, 방향을 알려주는 거야. 꼰대가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준 건데, 네 덕택에 가는 길은 눈에 익혀두었으니 쓸 일이 없어서 주는 거야.”

 “저에게...선물해주시는 건가요?”

 “...응, 뭐...”

 

 나타는 쑥스러움이 많기도 해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은 말끝을 저렇게 잘 얼버무렸다. 일주일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으면 긴 시간동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우정의 의미로, 둘은 그렇게 물건을 교환했다. 나침반을 목에 건 레비아가 웃었다.

 

 “고맙습니다, 나타님.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아냐, 꼭 안 그래도 돼...어차피 너한테는 쓸모없을 테니까.”

 “아니에요. 나타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인걸요?”

 “그렇게 따지면 네 선물이 훨씬 더 좋아.”

 

 나타는 방울을 흔들었다. 평온한 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이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제 나타는 떠올릴 것이다. 지상에서 보았던 풍경들.

 

 그리고 레비아도 같이.

 

 

 

* * *

 

 

 

 겨울이 지나가고, 봄, 여름, 그렇게 다시 가을이 왔다. 레비아는 나타가 준 나침반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녔다. 하피는 자신이 준 선물을 다른 이에게 준 것에 대해 약간 서운해 했으나, 그것이 그른 일이라고 레비아를 탓하지 않았다. 가끔씩은 그런 행동을 보인 레비아를 칭찬해주기도 했다.

 

 가을. 레비아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단풍잎이 온 산을 뒤덮는, 무채색의 세계가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뿜으려는 식물들의 절정기.

 

 레비아는 오늘도 가벼운 산보 중이었다. 가을에 하는 산책은 레비아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들떠서였는지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산 속 깊은 곳까지, 좀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찰나, 레비아는 듣고 말았다.

 

 딸랑-

 

 “...”

 

 두 귀를 의심하는 만드는 그 소리는, 레비아가 알기로는 방울 소리와 비슷했다. 이런 깊은 산 속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다니. 그 후로 하피는 똑같은 모양의 방울 발찌를 사다주었지만, 레비아는 이상하게 자신의 굴 속에만 둘 뿐, 잘 착용하지 않았다. 즉, 레비아의 방울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딸랑-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레비아는 바로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레비아의 뒤쪽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타가 서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타님...?”

 

 먼저 상대방을 부른 건 레비아였다. 나타는 자신이 준 나침반을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목에 걸고 있는 레비아를 보며 옅게 웃었다. 나타의 손에는 레비아가 준 방울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들려있었다. 소중하게 보관한 것이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신을 부른 레비아에게 나타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

 “다시 생각이 나서...”

 “...”

 “와버렸어.”

 

 무슨 말이 필요할까. 레비아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나타님.”

 

 그 날은 가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가을이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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