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의 이야기- 추석
일단아플거야 2019-10-03 2
"....."
티나는 한참동안 내부가 휑한 냉동고를 보고 있었다. 늘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차 있던 냉동고였다. 심지어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비싼 돈 주고 산 특제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티나는 왜 없는가에 대해 조금 고민을 하다가 이내 자신이 어제 평소보다 무리하게 훈련해서 동체가 더 과열되는 바람에 동체를 식히겠다고 무심코 아이스크림을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것을 기억해냈다.
"....없군."
혹시 모를 희망을 가지고 지갑을 꺼내보았지만, 지갑도 냉동고의 사정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백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지갑은 마치 '어림없는 소리!'라고 말하듯 자신의 빈 속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
실수다. 이건 명백히 전술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심각한 본인의 미스다. 최근 들어 이런 미스가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티나는 표정이 안 좋아졌다.
"티나 언니? 여기서 뭐해요?"
옆에서 들려오는 명랑하고 시원한 여성의 목소리. 돌아보니 그 곳에는 서유리가 한복을 차려입은 채 봉투 하나를 들고 티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유리인가.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지?"
"아니, 그게....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아보이길래..."
"별 것 아니다. 그저 전술적, 금전적 미스가 발생했을 뿐. 너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금전적 미스는 또 뭐래요....."
"그런 게 있다. 그보다 손에 든 그건 무엇이지?"
티나가 유리 손에 든 봉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종이 봉투 안에 뭔가가 두툼하게 들어가있다.
"아, 이거요? 지난번에 추석이었잖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안부인사를 가서 추석 용돈을 받았거든요. 솔직히 제가 부모님께 돈을 드려야야할 판인데, 꼭 주겠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그렇군. 서유리, 너는 좋은 부모님을 두었구나."
"아하...고마워요. 티나 언니. 근데 언니는 추석 용돈 안 받으셨어요?"
"나는 아직 받지 않았다. 애초에 받을만한 사람이...."
티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자신에게 추석 용돈을 줄만한 사람을 생각해내었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나에게 용돈을 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용돈이 생기면 앞으로의 아이스크림을 듬뿍 살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서유리. 이 은혜는 나중에 아이스크림으로 갚도록 하지."
"어,언니? 어디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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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너."
나타가 갑작스레 한복을 차려입고온 티나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Happy 추석이다, 나타. 이번 해가 끝날 때까진 3~4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남은 기간에도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뜬금없이 뭔 잡초 뜯어먹는 소리야? 이상한 소리 지껄일거면 저리 가."
"......."
"....뭔데, 그 제스쳐는."
느닷없이 다가와선 다짜고짜 시덥지도 않은 덕담이라니, 이 깡통이 드디어 고장이 난 건가, 싶은 나타였다. 게다가 덕담은 그렇다쳐도 갑자기 양손을 내밀고 빛이 날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뭐냐고.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에게 용돈을 다오."
"하아?!!"
"추석같은 명절에는 서로 안부인사나 덕담을 나누며 용돈을 주기도 한다는 군. 나도 너에게 덕담을 해주었으니, 넌 내게 용돈을 다오. 넌 덕담 들어서 기분이 좋고, 난 용돈을 받아서 좋고, 서로 윈윈(win win)이라고 본다만."
이건 또 무슨 개 짖는 소리인가. 덕담을 해주었으니 용돈을 달라고? 나는 덕담들어서 기분 좋고, 자긴 용돈 받아서 기분 좋으니 서로 누이좋고 매부좋고 아니냐고? 나타는 여태껏 티나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걸 여러 번 봤지만 이번 행동은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웃기는 소리하고 ****! 내가 너한테 용돈을 왜 줘?!!"
"우선 첫번째. 우리 늑대개 중 용돈 지출 내역이 가장 적은 게 나타 너다. 두번째, 넌 돈 받아도 쓸 일이 없다. 써봤자 값싼 과자나 라면을 사먹는 데 쓸 뿐. 세번째, 난 지금 앞으로의 전술을 위해 용돈이 매우매우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니 네가 가진 용돈의 일부를 나한테 다오."
"야 이..."
나타는 기가 차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늑대개 중에서 지출이 가장 적은 건 나타가 맞긴 했다. 레비아의 경우엔 요즘 옷을 산다고 지출 내역이 전보다 좀 나온 편이었고, 하피는 당연히 그놈의 술때문에 적게 나온 적이 없었으며, 트레이너도 요즘 들어--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출 내역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바이올렛은......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이런 날강도같은 녀석!! 되도않는 덕담을 해놓고 나한테 돈을 달라고?"
"말했지 않은가. 넌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그건 이전의 지출 내역으로 확인된 진실이다."
"됐거든? 내가 너한테 돈을 왜 주냐? 너한테 줄 돈같은 건 없으니까 저리 **!"
나타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저리 가라는 모션을 취했다. 물론 티나에게 있어 이 정도의 상황은 충분히 예측 범위 내였다. 비밀 무기를 꺼낼 때가 된 것같군.
"그렇군. 그럼 할 수 없지,"
"알았으면 얼른 꺼....으윽?!"
"기껏 힘들게 고안해낸 덕담이 무의미하게 되버리는 건 싫으니 무력으로 행사하겠다."
"이런 빌어먹을 깡통...이....."
나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뻗어버렸고, 티나는 조심스레 나타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빙고다. 역시 돈을 거의 쓰지 않았군."
나타의 지갑은 자신의 지갑과는 다르게 지폐로 빵빵했다. 나타의 지갑을 보며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든 티나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다 가져갈 것도 아니고 아주 일부만 가져갈 것이다.
"이 정도면 앞으로의 작전에 도움이 되겠군. 다시 한번 Happy 추석이다, 나타. 좋은 시간 보내도록."
티나는 대충 봐도 두꺼워보이는 지폐뭉치를 들고 그대로 자릴 떠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땅바닥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편히 자는 나타와 빵빵했던 속을 털릴대로 털린 그의 초라한 지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