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Line-마지막 선(10)
건삼군 2019-02-12 1
모든 것이 칠흑으로 물들은 가운데, 멀어져 가는 의식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나에게 들려왔다.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모습의 그녀가 서있었다. 긴 분홍색 머리카락에, 햇빛에 비친듯한 사파이어색 눈동자. 고개를 조금 숙여야지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 다가오며 아련한 감정이 비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멈출거니?
"..."
-너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거니?
"..."
-네가 이런다고 해서 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그러게."
-난 네가 살기를 바랬는데.
"...알고있어."
그녀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본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만지기를 바라며 손을 뻗었지만, 그러자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안개와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속에서, 나는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내 옆에 떨어져있던 건 블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슬비에게 닿지 못했던 것 처럼, 내 손은 건 블레이드에 닿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건 블레이드를 집기 위해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돌아갈 곳은 없다고.
처음부터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동료들을 잃고, 복수에 눈이 멀어 유니온에 쳐들어와 사람의 목숨을 처음으로 빼앗았던 그때,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처음으로 차원종이 아닌, 인간의 붉은 피가 내 건 블레이드를 물들였을 때 부터 나는 제이 아저씨가 그토록 넘지말라고 당부하던 선을 넘어버렸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이미 잘 알고있다. 복수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자의 말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게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면서도, 이 길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잃어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다시금 깨닫는 그 순간, 나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까지 될 필요는 없었다고.
무고한, 혹은 그러하지 않은 이들이 내 앞을 가로막을 떄 마다 그들의 목숨을 발판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내 모습은, 그저 끝까지 발버둥치고 숨이 끊어질때 까지 복수라는 이름의 저주에 사로잡혀 발악하고 있는 불꽃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결국 자기자신 까지 태워버리고 끝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지. 불꽃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이 빌어먹을 곳에서 사라질 수는 없다.
“...이 녀석...!”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멈춰버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끝까지 걸어갈 수 밖에는 없다.
“...타올라라.”
어두워지던 시야가 한순간에 푸른 화염으로 뒤덮힌다. 아까 까지만 해도 멀어져가던 감각들이, 순식간에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자 푸른 화염으로 타오르는 건 블레이드가 내 손에 쥐여져 있었다.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여주었다.
“벨리알! 엘리고스! 해치워!”
마검을 든 악마가 재빠르게 나에게 다가와 그 흉기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내 손에 응축되어 있던 위상력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주변을 푸른 빛으로 물들이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별이 최후를 맞이할 때 일어나는 초신성과도 같은 폭발은 그대로 거대한 도끼와 마검의 악마들을 집어삼켰고, 이내 잦아들며 주변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그렇게 악마들이 별의 폭발에 휘말려 소멸하자 나는 곧바로 검은 책의 사서에게 돌진해 건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칫! 좋아! 누가 먼저 죽을때 까지 해보자고!”
그러나 검은 책의 사서는 신속하게 책을 펼쳐 아까 검투사가 쓰던 것과 똑같은 마검을 소환해 내 건 블레이드를 막아내었고, 이내 검투사와 동화한 듯이 검무를 펼치며 나를 밀어내었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드는 마검들을 간신히 막아내거나 피하자 사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름끼치는 위상력과 함께 손에 들고있던 마검을 거대화시켜 내리쳤다.
“빌어먹을 마검, 받아봐!”
주변의 위상력들이 울부짖듯 진동한다. 마치 피의 붉은 빛을 띈 거대한 마검은 생명을 갈구하는 사신의 낫처럼 소름끼치는 사념을 퍼뜨리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내 직감이 내게 경고했다.
저건 피할 수 없다고.
불현듯 마검을 피하려다 그대로 거대한 힘에 짓눌려 버려지는 내 모습의 환상을 본 나는 정면돌파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깨달으며 가지고있던 대부분의 위상력을 건 블레이드에 불어넣어 휘둘렀다.
한계에 가까운 위상력이 불어넣어진 건 블레이드는 이내 모든걸 태워버릴 기세의 푸른화염을 도신에 두른 채로 살의가 가득한 마검과 격돌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화염과 붉은 살의가 격돌하자 내리치던 마검은 그 위력과 힘을 잃고 뒤로 밀려났고 내 건 블레이드도 마찬가지로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건 블레이드의 화염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전소.”
한계에 가까운 위상력이 담긴 건 블레이드를 타오르는 푸른화염과 함께 전력으로 휘두른다. 1격, 2격, 3격, 다 세지도 못할 검격이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열기와 화염으로 검은 책의 사서를 집어 삼킨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검격 앞에서 황급히 마검으로 막아보려 하던 그였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막아낸다 하더라도 그저 폭발검에 의해 밀려날 뿐이다. 내 특유의 위상력 특성이 더해진 방어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런 무식한 검격은 절대로 막아낼 수 없다.
분명 사서도 그것을 알고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절하게 막아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마검을 휘둘렀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아마 분명,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거겠지. 이미 잃어버린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나도 한때는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지켜야 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다. 이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사서를 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화염을 머금은 건 블레이드를 내리쳤다. 그러자 막대한 위상력이 방출과 동시에 폭발하며 지면을 푸른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내 굉음과 함께 사서의 마검을 부러뜨리고 사서를 밀어내었다.
그렇게 푸른 불바다가 된 주변에서 밀려난 사서는 온 몸에 입은 화상과 상처들을 지닌 채로 밀려난 사서는,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지 않은채 검은 책을 다시한번 펼쳐 무언가를 뽑아내며 말하였다.
“...마무리가 부족했군. 작별이다.”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침식시킬만한 위상력을 검은 책에 주입하고는 비장의 미소를 짓던 사서는,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한 검은 책을 해방하려고 하였지만, 검은 책이 폭주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보다 검은 책이 폭주하기 보다 한발 앞서서, 내가 순식간에 돌진해 사서의 멱살을 붙잡고는 건 블레이드를 겨눴기 때문이다.
“그래. 작별이야.”
무감각하게 울려퍼진 내 목소리와 동시에, 건 블레이드에서 방출된 푸른 폭발이 사서의 몸을 무자비하게 궤뚫었다.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사서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는 그저 무릎만을 꿇은 채 쓰러지기를 거부하였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강하게 만드는건지, 나는 알고있다. 하지만 이미 그런 사실들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미 지켜야 할 것들을 잃어버렸으니까.
불필요한 생각을 떨쳐내고 사서를 바라본 나는 이내 무릎을 꿇고 쓰러진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은 책이 붉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건 블레이드를 고쳐잡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검은 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이내 붉은 빛을 띄던 책은 사서의 손에서 떨어져 불바다가 된 지면에 추락해 푸른 색으로 불타며 사라졌다. 마치 주인과 운명을 같이 하듯이.
“...이제야... 휴가를 갈 수 있겠군... 조금 긴 휴가를...”
피가 섞인 말로 가쁘게 입을 연 사서는 그렇게 짧막하게 말하고는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영원히 침묵했다.
또 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과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것을 자각하며 건 블레이드를 바닥에 꽂아넣은 나는 밝은 조명으로 뒤덮힌 천장을 바라보며 쓰러졌다.
그렇게 거대한 도끼에 맞아서 날아갔는데 몸이 성할리가. 아까부터 쑤셔오던 옆구리에는 어느샌가 붉은 피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한계 이상의 위상력을 사용한 탓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발버둥치는 모습이 즐겁지 않은건 오늘이 처음이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간신히 숨만 가쁘게 쉬고있던 내게, 더스트가 모습을 들어내며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구리게 손을 갔다대고 차원종 특유의 기분나쁜 힘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아까도 몇번 느꼈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열기가 온 몸을 감싸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내게 질문을 건냈다.
“이세하, 나에게 있어서 넌 어떤 존재인 것 같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난감.”
“...그래, 맞아. 분명히... 그럴거야. 넌...”
더스트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그녀의 말이 흐려진다. 말을 중간에서 멈춘 그녀의 표정을 바라본 나는 그녀가 평소의 그 모든 것을 알고있는 악마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넌 장난감이야. 그저 날 즐겁게 해줄... 그저 그런 장난감.”
그 더스트가, 항상 보여주던 어린 악마의 표정이 아닌 인간의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로는 내가 그저 장난감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더스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난 저 표정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는 괴물, 그리고 나는 복수에 눈이 멀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초라한 불꽃.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게 더스트의 표정을 외면한 나는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걸 깨닫고는 기다리고 있을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자 끝인 남자를 죽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Hainsman님의 작품을 허락을 맡고 대신 업로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