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비와 세하 이야기(세하슬비)
흑신후나 2019-01-2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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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말해볼까?' 그런다면 뭐가 달라질까?
이제 조금 적응했다 싶으면 변덕스레 기온이 바뀌는, 조금 추운 1월의 겨울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거리를 걷고 싶었기에 혼자 거리로 나왔다. 며칠 전까지는 새해라 이리저리 다니는 사람 들통에 거리는 조금 부산하게 느껴졌다.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정하게 보였다. 누군가는 저들의 부모와 함께 단란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거리를 나왔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나왔을 것이다. 서로 무리 지어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가슴 한 부분이 쌀쌀함을 느꼈다.
“저기 있는 사람 슬비 아니야?”
“그러네? 슬비야!”
다가오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 몸을 움츠리려는 내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은 낭랑하고 한 명은 어딘가 귀찮은 목소리였다.
“어, 유리랑 세하구나. 어디 가는 길이야?” 뒤를 돌아보니, 역시 내가 생각한 목소리였다.
“마트 가는 길이야.”
“여기 소고기가 싸거든!”
“난 짐꾼으로 불려왔어.”
헤헤! 세하의 등을 치면서 상큼하게 웃는 유리였다. 세하는 못내 아픈 모양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더욱 추워졌다.
세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모두가 힘을 합쳐 데이비드를 저지할 때? 이리나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주었을 때? 어쩌면 처음 검은 양에서 그를 보았을 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세하는 상냥했고, 부드럽고 여렸다. 하지만 강했다. 처음에는 그저 부모의 덕을 잘 본 단순한 강함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는 오래지 않았지만. 끝없는 시련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챙겨주는 모습에, 굴하지 않는 모습에 나는 세하를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다 같이 저녁 먹자. 세하 집에서! 어때?”
“야, 결국은 우리 집이냐?”
“뭐 어때? 너희 집이 넓고 좋잖아?”
“우리 집이거든?”
“그래서 세하는 싫어?”
“그렇지는 않지만.”
옥신각신 이야기하는 유리와 세하였다. 이윽고 세하가 나에게 물었다.
“너도 올 거야?”
“뭐, 할 일도 없고, 가보도록 할까?”
“그래! 무엇보다도, 세하가 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고!”
“내가 요리하는 거야?!”
덕분에 홀로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걸음을 옮기는 세하를 따라 걸었다. 속도를 조금 내다 다시 속도를 줄였다. 자연스럽게 뒤로 걸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어느새 유리가 걸었다.
유리는 세하와 맞추어 걸었고, 나는 세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분명히 이제는 혼자 있지 않은데, 가슴 속이 더욱 추워졌다.
***
셋이서 즐길 것 같은 저녁 식사는 우연히 밖으로 나온 나타와 레비아가 합류하면서 규모가 커졌고, 후에는 유정언니를 만나면서 모처럼의 휴일이니 검은 양과 늑대개, 사냥터지기팀까지 모두 모이는 파티로 바뀌었다. 부족한 재료는 각자 사 오기로 하고, 우리는 먼저 세하의 집으로 갔다.
“그럼, 저녁 준비 할 동안 너희는 거실에서 조금 쉬고 있어.”
“우리도 도와줄게.”
“너희도 손님이거든? 손님한테는 일 안 시켜.” 세하는 웃으면서 말했다.
세하의 말에 밀려 나와 유리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푹신함이 전신에 미치며 피로가 퍼진다.
“좋다.”
“그러게.”
짧은 말을 끝으로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유리는 나에게 물었다.
“슬비야. 너는 세하를 어떻게 생각해?”
“무…. 뭐…. 뭐라니…. 따…. 딱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고 열이 뻗친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집의 난방과 부끄러움이 열을 더한다. 확 달아오른다.
“그렇구나.” 유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는 세하를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살며시 던져보았다.
“좋아해.”
가슴이 철렁인다. 달아오름이 멎고 냉기가 올라온다. 시리고 아프다.
“슬비야.”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유리는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나 오늘 세하에게 고백했어.”
철렁거리는 가슴은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앞의 유리의 모습이 흔들린다.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어떻게…. 됐어?” 눈동자를 내리깔고 부끄러워 뜸을 들이는 유리를 보며 나는 이 한마디를 내뱉으면 분명히 위험할 것이라고 인지하면서도 무심코 이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
옥상은 조금 추웠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오늘따라 더 그런 것 같다. 낮의 추위를 모아 밤에다 흩뿌린 것 같았다. 옅은 김을 입에서 뻗어내고 손을 비비며 달을 보았다. 추위와는 달리 달은 예뻤다.
파티는 종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활기차게 시작했으나, 점점 파티가 무르익으면서 유정언니가 사 온 맥주를 어른들이 마시면서 극한을 향해 달려갔다. 유정언니는 제이 아저씨에게, 엘리스 언니는 볼프강 아저씨에게 신세를 한탄하고, 다른 사람은 거나하게 취해서 잠들어 버리고, 그야말로….
“혼돈이었어.”
고개를 돌리니 세하가 보인다. 원래 하얀 세하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더욱 밝아 보였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세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맞는 것이 하나 없는 사이였는데.
“유리한테서 이야기 들었어. 고백했다며?”
한참을 머뭇거리고 생각하다 그만 입 밖으로 생각이 튀어나왔다. 조금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으면 그나마도 덜 했을 것을 그만 크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세하는 나를 보았다. 동그랗고 크게 뜬 눈이 꽤 당황한 눈빛이었다.
“들었어?”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머리를 쥐어짜며 부끄러워하는 세하였다. 그런 모습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밀려오는 마음이 무거웠다. 한 가지 의문점이 머리에 맴돈다.
“그런데 왜 거절했어?”
그리고 이 말을 꺼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
“어떻게 됐어?”
철렁거리는 마음을 잡고 나는 유리를 바라본다. 유리의 눈이 마주친다. 유리의 눈은 맑은 푸른색이었다.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까지도.
“거절당했어.”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왜?”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이 단어 하나였다. 더는 물어**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데.”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보는 유리였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얼굴을 파묻었다. 당황했다.
“유리야….” 말을 하다 말이 도중에 끊긴다. 유리의 말은 물기가 서려 있었다.
“있잖아.”
“굳이 세하 옆을 내게 주지 않아도 괜찮아.”
유리의 어깨가 흔들리고, 파묻은 얼굴은 떨린다.
“많이 좋아하지만, 너라면 괜찮아. 다른 누구도 아니라 슬비니까.”
그렇게 한참을 우는 유리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
정신은 다시 옥상으로 돌아왔다. 세하와 나는 옥상에서 주저앉아 달을 보고 있었다.
“추워. 덮어.”
세하는 모포를 덮어주었다. 모포는 집에서 많이 쓰는 모양인지 세하의 향기가 그득히 베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모포를 쥔 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들의 대화는 끊겼다.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도 다분히 정적이었고, 경직되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잡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물어봤지?”
왜 거절했냐고-. 세하가 정적을 깨고 말을 이었다. 세하는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달을 보는 것이리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세하는 눈을 내리고 나를 흘린다. 시선이 흘러 나를 보다 허공을 그린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무릎에 모은 세 하의 손이 꼼지락거린다.
“그 사람이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사람도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말이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시선이 다시 허공을 그린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말해주었다면 좋을 텐데.”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정적.
눈을 감는다. 이전까지의 일을 생각한다. 유리의 말을 생각한다. 세하의 말을 생각한다. 이전까지의 내 마음을 생각하고 다시 혼자일 때의 쓸쓸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조금 더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세하야.”
오랜 정적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좋아해.”
세하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달빛이 예뻤다.
“달이 예쁘네.” 세하가 입을 열었다.
“슬비야.” 그리고 세하가 운을 뗐다.
그 대답은.
***
유리는 머리를 지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슬비에게 안겨 울었던 기억까지는 있는데.
조심스레 없어진 슬비를 찾는다. 이윽고 옥상까지 왔다. 옥상에는 슬비와 세하가 있었다.
둘에게 다가가려다 몸이 멈춘다. 눈이 그들을 보고 뇌가 그들의 행동을 읽는다.
그래. 이제야. 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축하해 슬비야.”
서로의 입을 맞추고 있는 세하와 슬비를 보며 유리는 내려갔다. 정말 세하를 좋아했지만 희한하게 눈물을 나지 않았다. 분명히 아까 다 흘려서 그런 것이라고 유리는 생각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없는시간 쪼개서 써 봤는데.. 맘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말은 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맘을 다른 사람이 알려주길 바라는건 잘못된거죠.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상처가 될 수 있고, 그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것은 그렇게 사람들은 커간다는 것입니다.
'전해졌으면 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말하자!'가 이 글의 주제 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었군요. 염치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