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Re : Dead - Rebellion (2)
루이벨라 2019-01-18 5
※ 암광세하 x 암광(?)유리
※ 지인분 썰 기반
※ 전편 「Re : Dead - Rebellion (1)」 에서 이어짐
※ 호흡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3편으로 나눌 예정
※ Rebellion : 반란(反亂)
‘세하다...!’
세하와 다시 만난 유리는 멍청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상대방이 집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태평한 반응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손에 무기 같은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면, 아마 둘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 류의 친근감이 두 사람을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세하는 그 친근감을 인지하지 못했으나, 유리는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 손에 들어있는 무기는,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친근함을 다 부숴버리고도 남았다.
정신이 그래도 온전했던 편인 유리 때와는 다르게, 세하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죽기 직전에 한꺼번에 많은 힘을 받아들인 탓일까. 그 흉악하고 숨을 막히게 하는 힘이 죽기 직전의 세하를 살리고, 지금까지 일종의 인공호흡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확정된 사실인 듯 했다. 그래, 인간으로서의 세하는 분명히 죽었다. 그러니 지금 유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를 베어도 그저 인류의 평화를 지켜냈을 뿐, 이라는 얄팍한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것이 싫었다. 어차피 이제 망가져버려서 다시 태엽장치 속의 부품이 되지 못하는 거, 제멋대로 살기로 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기로 했다.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
아, 기억은 남아있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한 번 조금의 감정을 실어서 다시 말해보았다.
“보고 싶었어.”
“...?”
세하의 얼굴로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당연한 것이 아닐는지. 기억이 없다, 라는 전제 하에서 보면 지금 세하에게 있어서 유리는 처음 보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아는 듯이 굴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유리는 그제야 자기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이 말...그냥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어울리는 말은 아닌 거 같지만...이게 내 진심이야.”
“...”
“너도 죽기 직전에 나한테 그런 말 했잖아.”
“...?!”
세하의 가늘던 눈매가 갑자기 커졌다. 저와 같았던 보라색의 눈동자가 – 다른 점이 있다면 세하의 보라색 홍채가 더 검은색이 많았다 – 또렷하게 보이자, 유리는 씁쓸해졌다.
정말, 거기로 가버렸구나...
다른 점은 있었다. 유리의 경우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며 스스로 그곳으로 발을 딛었지만, 세하의 경우는...
그래도 이미 그 늪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늪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썩어빠진 밧줄 같은 구원도 없었다. 그냥 그 안에서 절망할 뿐이다. 그 절망을 하고 있다는 걸, 세하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마치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이리 무기력하게 만든 건 분명히...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서 줄 같은 걸 매달아 조종하는 이는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 기어코 꺼내려면 그 자를 막고 있는 벽을 치워야 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 벽은 세하였다.
싸우기는 싫었지만, 싸우기 싫다고 계속 피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유리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리는 총구를 겨누었다. 자신이 지금도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이에게 말이다. 이 기분, 참으로 좋지 못했다.
* * *
오랜만이야.
그 사람이 내게 처음으로 꺼낸 말입니다. 그 짧은 말 안에 담겨져 있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따듯함에 나는 그만 넋을 빼앗길 뻔했습니다. 뻔했다는 건, 마지막에 가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지만요.
그 사람의 따듯함을, 내 안에 있는 어떤 차가움이 가로막습니다. 차가운 피가 몸을 한 바퀴 싹 쓸어내리고 간 기분입니다. 그로 인해 몸은 형식적인 냉정함은 찾았습니다만, 그 뒤에 이어서 한 그 사람의 말은 그 차가움을 또 녹여주었습니다.
보고 싶었어.
익숙한 친근감을 가지고는 있다만, 오늘 나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꺼낸 이 말에 나는 당혹스러워해야지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놀라는 반응에 그저 옅게 미소를 지울 뿐입니다. 물빛의 눈동자는 한색(寒色)인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따스합니다.
...따뜻해. 이 말이 목에 걸려서 나오질 않습니다.
그 사람은 계속 자기만의 이야기를, 아무 관계가 없는 나에게 털어놓습니다.
이 말...그냥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어울리는 말은 아닌 거 같지만...이게 내 진심이야.
무슨 말? 그리고 무슨 진심? 약간의 호기(好奇)가 생깁니다. 그 사람은 어차피 말할 거였다는 듯이 바로 이어서 말을 해줍니다.
너도 죽기 직전에 나한테 그런 말 했잖아.
참 생뚱맞군요. 내가 죽었다니. 어이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도 중간에 멈춰버렸습니다. 다만 눈은 그러질 못했네요.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버렸으니까요.
죽었다, 라...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 열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요. 난 이 무지(無智)의 상태가 썩 마음에 들거든요. 만약 내가 그걸 벗어나려고 했다면 난 이렇게 많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베어 버리는 것도, 누군가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것도 하지 않았다고요...!
‘몰랐다’ 라는 것은 일종의 면죄부가 됩니다. 그 면죄부의 남용을 난 모르는 척 하고 있습니다. 내가 찢어서 써버린 면죄부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내 앞에 다가오는 건 끝이 없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아까 전에도 말했듯이 난 지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요, 난 아마도 죽어서 지옥에 갈 거예요. 구원은 바라지 않아요. 그저 이대로 어느 날 갑자기 스러져, 지옥으로 떨어질 거예요.
그거 참...동화 – 나쁜 놈은 벌을 받는다 - 같은 결말이네요.
철걱-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던 이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나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습니다. 역시, 그랬던 게 분명해요. 그리고 확신 하나가 더 생깁니다.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갈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나를 그 지옥으로 보내줄 적임자라는 것도 알아차립니다.
* * *
‘집중 하자.’
유리는 저에게 명령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굳어버린 채로 영원의 시간이 지날 갈 것만 같았다. 총구를 겨눈 이상, 이대로 가만히 벙 쪄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철걱- 방아쇠가 당겨지는 차가운 감촉과 소리가 참 좋았다. 훔쳐서 쓰고 있는 주제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유리는 위상력 강화 총탄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뚫고 지나온 적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은 탓이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만난 군대들의 무리는 유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배열은 엉망이었지만, 배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그들의 위험 등급이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총성 한 두 방으로는 이 호전적인 종족들을 구제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에 이들은 전투에 너무 많이 단련된 몸이었다. 조금의 인기척으로도 이들은 침입자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고속에 특화되어 있다 한들, 이 수많은 뱀과 이무기들 사이를 한 번도 들키지 않고 목적지에 안정하게 도착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서유리는 결정했다. 아예 모습을 드러내기로.
탕-!!
갑작스럽게 천장을 겨눈 적의 급습에 모든 이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그 앞에서 유리는 당당했다. 방금 전의 인간들의 무기에서 나는 소리의 출처는 유리였다는 듯, 유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높이 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의 등장에 모두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에, 눈치가 빠른 갈색의 이무기 한 마리가 용기 내어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이렇게 조우할 줄은 몰랐네.
유리도 약간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뜻밖의 조우라는 말에 이무기는 ‘저도 그렇습니다.’ 라며 긍정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조우를 원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아예 오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강행돌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면 더더욱이나.
부산하게 조용하던 군대의 천막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그건 인간 한 명의 출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 중 절반은 유리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아주 충직하게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비췬 전(前) 주군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위엄 있는 갑옷은 어디에 가고 꾀죄죄한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변변찮은 무기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상대를 눈빛만으로도 제압하던 당당하던 위광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아직도 군단에 소속된 이. 군단에 소속된 이들은 그곳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관례. 사사로운 감정만으로 유리를 대하기에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 성을 뒤덮고 있는 숨 막힐 정도의 먼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먼저 말을 건 갈색의 이무기가 말했다.
-전 당신에게 충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 힘이 있는 왕이 저 옥좌에 앉혀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도와줄 수도, 또한 돌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난 돌아갈 생각 처음부터 없었어.
단호하게 유리가 그 제안을 끊었다. 옛 주군으로서 마지막으로 건넨 친절이었기에, 그걸 무시당한 갈색의 이무기는 매우 불콰해졌다.
-앞서 말했듯이 난 당신에게 충성했습니다. 심지어 한 때에는 당신을 동경하기까지도 했죠. 하지만 그건 모두 저 왕좌 앞에서만 있었던 일일뿐, 지금의 당신은...
-그건 진심으로 충성한 게 아니야. 내 힘 앞에서 무릎 꿇고 꼬리까지 만 개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 ‘한 때’ 라는 표현...묘하게 거슬리네?
-...
유리의 오른쪽 눈썹이 하나 꿈틀거렸다. 예전에는 그 작은 노기(怒氣)에도 벌벌 떨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힘이 없는, 즉 위상력이라고는 쥐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
-...?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이무기는 금방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오소소 떨리는 이 몸이 그 증거였다.
유리의 말투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말 한마디마다 상대방을 얼어붙게 하는 무언의 냉기가 첨가되었을 뿐이다.
유리는 담담하게 자신의 현 위치를 알렸다.
-반란(反亂)이야.
-반란이요?
-그 시답지 않은 참모장이...감히 반란을 일으켰다.
‘감히’ 라니. 뱀과 이무기들은 그 ‘감히’ 라는 표현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대 용, 아니 자신의 주군은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고 잔뜩 놀리고 있는 참모장에게.
게다가 지금 여기에 있는 자들 대부분은 현 참모장에게 그렇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왕이 물러나게 된 게 교악한 참모장의 일이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은 죽느니만 못했다.
다시 커진 웅성거림을 – 이 때 사용하여 결론적으로 남은 총탄이 4발이다 - 유리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무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택해라. 너희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참모장의 손에 놀아날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면...
-그 뒤에 이어질 제안은 듣지 않아도 알 거 같습니다.
이무기는 짤막한 손을 유리의 손바닥 위에 포개었다. 유리는 빙긋이 웃었다. 자기 앞에 1자로 가지런하게 열린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분명히...
세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하와 유리는 다시 만났다. 저마다의 재회의 회포를 풀자마자 서로에게 날을 겨눠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참 우스울 따름이었다.
검과 총이 한껏 어울리는 발라드. 그 춤 속에서 총을 잡은 유리는 다시 한 번 검을 가지고 왔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리 급했어도 무작정 뛰어들다니...그래도 자신은 나름 침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세하가 관련된 일이기에 그 순간은 이성도 살짝 멈추었는지도.
유리는 세하와 몇 번이나 대련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세하는 힘은 넘치지만, 센스는 부족한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유리와 대련을 하면 도움도 된다고 하고 서로가 즐거웠기에 자주 어울리곤 했다.
사실 세하와 검을 맞부딪히는 건 먼 옛날의 일이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에도 있었다. 그 때는 유리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논외로 치자. 게다가 세하 또한 진심으로 싸우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세하가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어떻게...널...너에게...검을 겨눌 수 있겠...어...
-역시...난 이러는 편이 더 좋아.
“...”
유리는 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번에는 피가 터졌다. 쌉싸름하고 찝찝한 맛이 입가 부근에서 느껴졌다. 기억이라는 거 참 성가셨다. 그래서 유리가 궁전에서 있는 동안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성은, 싸우고 이길 수 있을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했다.
총알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총이라는 건 총알이 충분히 받쳐주어야 원거리에서 상대방을 견제하기에 좋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틈을 너무 많이 주었다. 게다가 세하가 쓰는 저 검은 보통 소재가 아닐 게 분명했다. 그건 비슷한 재질의 검을 써 본 유리가 장담했다.
세하가 묵직하게 베어 내는 검기와 불꽃을 유리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제3위상력을 쓰던 몸이라 정식 클로저였던 시절 때보다 반사 신경이 좋았지만, 제3위상력을 완전히 사용하는 상대방의 눈에는 굼뜨게 보였다. 다행히 유리에게 동체 시력이 남아있었다. 유리는 검의 날이 가까워질 때에는 튼튼한 권총의 총구 부분으로 일격을 막아냈다.
팅- 팅- 팅-
같은 재질의 무기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내는 소리가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고작이었다. 어느 쪽의 무기든 부수어지지 않았다. 사실 간단한 공식이었다. 휘두르는 자의 무기가 부수어지면 반격을 당한다. 막는 자의 무기가 부수어져도 반격을 당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계속 존재하는 한, 앞서 본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유리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반격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한들, 유리에게는 상대방과 같은 날붙이가 없었다. 똑같은 절댓값을 가진 양수와 음수가 만나서 0이 되는 것 같았다. 그 0이라는 숫자를 바꾸기 위해서는 한 쪽이 변화를 주어야 했다. 그게 상대를 구원하든,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거든.
‘잠깐만.’
유리는 잠시 생각을 했다. 아직 세하의 재빠른 움직임이 보이고, 그 내려치기를 아무 장비 없이 오로지 총 하나로만 막고 있고, 용의 위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쌩쌩하게 잘 다니는 걸 보면 아직도 유리에게는 제3의 힘이 약간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유리가 멍하게 세하의 검이 자신이 예전에 썼던 검과 비스무리하다는 걸 깨달은 시점부터 이미 답은 나왔는지도 모른다.
유리는 망설였다. 그 힘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유리는 아직 자신이 완전히 왕과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분 나쁘면서도 그걸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지금의 자신도 싫었다. 그러나 곧장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도 바로 들었다.
그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지 않으면! 이 나락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
세하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직후에 난 소리는 아까 전과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똑같은 날을 가진 날붙이가 맞받아친 소리였다.
챙-!!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더스트는 제법 재밌어진 변수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방금 전 유리의 오른손에서 검은 연기가 넘실거리는 거 같더니, 어느 새 유리가 애착을 가졌었던 도(刀)가 손에 들려졌기 때문이다.
‘선대왕이라고...아직도 그 증표를 가지고 있는 건가?’
그래도 살짝 놀란 더스트와는 달리 세하의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잠시 뒤로 물러나, 상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틈을 주는 자비로움을 보여줄 뿐이었다.
막상 자신이 쓰는 세검이 소환되자 유리가 더 당황했다. 설마 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미운 정은 들었는지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세하의 검과 비슷한 디자인의 세검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고마워. 이제야 조금은 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 같아. 유리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려나 보군.’
더스트의 제2막 감상이었다. 3막은 1막과 2막보다는 재밌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