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 넌 항상 바람 같았어
루이벨라 2018-12-13 4
※ 프린세스 프린서플 10화를 보고 써보는 글
※ 하피 아카데미 시절 날조
※ 다들 프리프리 보세요.
“어? 반장?”
“...어?”
오랜만에 딱 한 잔만 할까하는 발칙한 생각을 하며 들어간 포장마차에서 하피는 의외의 인물을 조우했다. 유니온 아카데미 시절, 늘 겉돌던 하피를 챙겨주던 이름보다 ‘반장’ 이라는 호칭이 익숙했던 아이였다. 자신도 소녀의 티를 확 벗었으니 그 직격을 반장 또한 받지 않았을 리는 없다. 예상을 했고, 실제로 먼저 알아차린 건 자기였지만 어른이 된 반장의 모습은 어색했다. 그래도 아카데미 시절 여유 있어 보이는 느긋한 눈매와 질끈 묶은 포니테일 모습은 여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색이 연분홍색과 노을색의 투톤이 되었다는 것, 눈동자가 탁한 벽안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피는 망설임 없이 반장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네, 반장. 그 옷차림을 보니...”
반장의 옷차림은 유니온 감찰국 복장이었다. 반장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유니온과 연을 이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장은 이런 모습을 하피에게만큼은 들키기 싫었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당연한 거 아니야? 아카데미에서 자란 학생이 어떤 길을 가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난 중간에 사라졌기에 잘 모르겠는데?”
“그 말투, 여전하네.”
몇 년 만에 재회를 한 것임에도, 친근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둘의 대화에서 두 사람의 친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 소문난 수석이었던 반장과, 아웃사이더였던 하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입방아를 찌고 다녔다. 극과 극의 둘이 잘 어울리는 것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소녀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둘은 뜬소문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하피는 자신의 흥미가 없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었고, 반장은 자신의 앞가림 하나 답답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이런 차이는 작긴 하나, 큰 부분이었다.
반장이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얼핏 소문으로 들었어. 신출귀몰한 괴도가 나타나는 것, 그리고 벌처스에서 그 괴도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것...”
“제법 많이 알고 있네? 그 시절의 이야기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 초커 때문이야?”
감찰국에 있으면서 위상력 조절 초커를 낀 이들을 적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친구의 얼굴 바로 밑에 위치해 있는 그 물건이 안 봤을 리는 없었다. 그저 동기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말에 하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 사실 걱정 되었어. 쪽지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다니.”
“아, 그 쪽지?”
하피와 반장이 말하는 쪽지는 별 거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떠나던 날 밤, 하피는 반장의 앞으로 간단한 쪽지를 남겼다. 그냥 짧게 ‘안녕’ 이라고 적었을 뿐이었다. 친구의 무심한 마지막 인사에 반장은 화가 났던 기억이 있었다.
“수학여행 때의 일을 생각해서 그냥 앞가림 없이 돌진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했거든.”
수학여행 때의 일이라고 한다면,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하피가 반장을 깨운 일이었다. 취침 시간은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반장을 이끌고, 아까 좋은 걸 보았다며 반장을 기어코 지내던 숙소의 지붕으로 데리고 갔다. 얇은 재질의 잠옷으로 쌀쌀한 밤공기를 맞이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짜증을 부리던 반장에게 하피는 하늘을 보라고 했다. 신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촘촘한 별들의 요람이 보였다. 반장은 은하수를 그 때 처음 보았다.
-좋은 게 이거였어?
-응. 이쁘지?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잖아.
-시시해. 이거 때문에 사람을 일부러 깨운 거야?
-시시하다니. 난 이 멋진 걸 반장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는걸~
내가 널 특별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피는 막 내색을 표했지만 반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굳건한 반장의 열의 덕에 하피가 득을 본 일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거의 땡땡이를 쳤으나, 반장이 끈질기게 가져다 준 프린트 덕에 어느 정도의 지식은 알고 나서 아카데미를 나갔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유니온의 관리를 받지 않는 위상능력자 신분으로 지냈을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때의 감사 표시는 해야 겠지? 이미, 많이 늦은 감사겠지만.
“그래도 반장 덕에 아카데미에서 그럭저럭 배운 것들이 많아.”
“그 프린트물 값, 갚으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갚을 거야?”
“이미 오래 전의 일이잖아.”
동시에 철이 없었던 시절.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표정을 짓는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숨이 막히던 시절이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새와 같은 하피는 그 답답한 우리를 싫어했다. 그래서 마음껏 날개를 펼치기 위해, 창문을 열어 밖으로 떠났다. 날 때 무거울 수도 있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몇 개의 허물은 벗어던져버리고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피는 자신이 참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반장과의 대화는 친근하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피는 그 벽을 조심히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 때 그렇게 떠나버려서 화났던 거야?”
“화 안 났어. 넌 원래부터 그런 아이였으니까.”
“거의 자포자기한 말투인데?”
“사실이잖아. 화 안 났으니 걱정하지 마.”
그 말을 하면서 반장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은하수를 보여주겠다고 하피가 억지로 반장을 지붕으로 끌고 갔을 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먼저 이끌고 가는 건 하피, 이끌리는 쪽은 항상 반장. 반장은 어쩔 수 없이 하피와 어울러주었던 것뿐일까? 그저 ‘친구’ 라고 불러주는 하피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반장은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던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이번에는 반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쪽지를 보았을 때, 화가 났기는 했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너답다고도 생각했어. 그래서 안도감도 느꼈어.”
“...?”
“난 네가 되고 싶었어.”
중간의 많은 부분이 생략이 된 거 같은데? 그래도 하피는 대꾸하지 않았다. 반장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듣는 소중한 친구의 속내에 반갑지 않을 이는 없었다.
반장이 말했다.
“넌 언제나 그랬지. 남들이 ** 못 하는 걸 보고, 그로 인해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었지. 사실 수학여행 때 본, 은하수...너무 멋졌어. 하지만 이런 치졸한 나한테도 자존심이라는 건 있었나 봐.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어. 널 인정하는 순간, 난 그만 무너져버릴 거 같았거든.”
“...”
“난 내가 너무 싫었어.”
반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집안, 평범한 부모님, 평범한 딸로 지냈어야 할 자신에게 어느 날 발현된 위상력. 그 때부터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에게서 이상한 광기가 스며드는 걸 반장은 느꼈다. 차원 전쟁을 겪은 부모님은 ‘위상력’ 이라는 힘이 얼마나 귀중한 자산인지 알았고, 소박하게 살려고 했던 삶을 딸의 덕으로 180도 전환해보려는 욕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기가 나빴다. 전쟁은 끝났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위상능력자들이 설 곳이 점점 줄어들었다. 반장의 부모님은 위상능력자 중에서 평범한 편인 염력을 구사하는 딸을 매우 못마땅해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뜻대로 끌려가기는 싶었다. 그 시절 소녀의 마음에 드는 자연스러운 생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반장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 후, 바로 감찰국에 들어가는 위엄을 선보였다. 철없던 시절의 자신의 반항은, 이제는 시도도 할 수 없게 너무 멀어졌다.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면서도, 그대로 끌려가야 했던 내가 얼마나 가증스러웠는지 몰라.”
“반장...”
“하지만 넌 달랐지. 넌 항상 바람 같았어. 나와 다르게, 자유롭고...”
그래서 그렇게 짤막한 쪽지만 남기고 그냥 떠나버리는 게 너답다고 생각했어.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어 볼까. 하지만 지금 이 꼬라지를 봐...반장은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온의 요원복을 가리켰다. 하피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자신이 그 때 창문을 열고 나가지 않고 아카데미에 그대로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이 간혹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직했던 자신의 친구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쪽지를 남기지 않고 반장과의 정식적인 인사를 했다고 치자. 만약 그 때 반장이 잡았더라면?(지금 태도로 봐서는 반장은 잡지 않았을 거 같지만) 아마 지금의 자신은 다르지 않았을까. 목에 있는 이 초커의 감촉을 모르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희망고문을 왜 하는 걸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앞을 보고 나아가야하는 건 항상 미래가 있는 방향이다. 과거는 절대 아니다.
반장이 먼저 자리에 일어섰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술값은 내가 내고 갈게.”
“잠깐만, 반장...!”
“오늘따라 술 생각이 나서 와 봤는데...잘 한 거 같아. 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반장은 하피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먼저 포장마차를 나갔다. 하피가 중얼거렸다. 왜 이런 데서는 제멋대로인걸까. 뒤늦은 반항심인 것처럼. 하피는 친구가 계산을 해주고 간 술을 홀짝 마셨다. 술이 너무도 달았다.
그 후로 하피도 소문을 들었다. 반장이, 유니온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이번에는 자신에게 맞는 바람을 찾으러 간 걸까. 그 후로 반장의 소식을 전해들은 게 없어서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하피는 반장이 자신에게 맞는 바람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장이 거의 습관처럼 말하던 말버릇 때문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내게 불어오면 항상 좋은 일이 생겨.
그 바람이 내가 되었기를. 하피는 그리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