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다(21)
건삼군 2018-11-28 0
“...옷을 너무 많이 산건 아닌가...”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소 여자들은 그거의 2배는 사거든요.”
어느덧 길고 길었던 옷 고르기가 끝나고 옷가게에서 나온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껏 불평을 뽐내었다. 그러자 슬비가 그렇게 딴죽을 걸며 내 불평을 제지했다. 그나저나 오늘 산 옷의 양도 많은데 이거의 2배라면 대체 얼마나 사댄다는 거야? 정말이지 여자들은 여러모로 대단하다니까...
속으로 감탄하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직 겨우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꺠닿고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할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기 떄문에 나는 그냥 집에 돌아갈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 한 그 순간, 나는 슬비가 바로 옆에 있던 카페를 바라보고 있는것을 보았다. 어쨰서 저렇게 카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일까 생각했던 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꼬르르륵]
배가 고팠기 떄문이다.
순간 슬비의 뱃속에서 새어나온 소리가 울려퍼진 탓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애써 그것을 모른척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는지 꼬르륵 소리는 한번으로 멈추지 않고 또 다시 울려 퍼졌다.
[꼬르르르륵]
아까보다 소리가 더 길고 큰 것은 기분탓일까,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슬비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점심 시간인데 들어가서 뭐좀 드실래요?”
“....네.”
결국 그렇게 해서 카페에서 점심을 먹게 된 나와 슬비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종업원이 지정해준 자리에 앉아 간단한 메뉴를 시키고는 음식이 나올 떄 까지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나저나 여자랑 같이 카페에 오시는게 익숙하신가 봐요? 아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것 까지 주문한걸 보니.”
“아니 뭐... 익숙한건 사실이죠.”
그래. 늘 항상 슬비와 함께 데이트 도중에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는 하였으니까. 그러니 여자랑 같이 카페에 오는게 익숙하단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슬비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내가 여러 여자들이랑 자주 놀러다녔다고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헤에... 그렇다면 연애경험도 있으시겠네요.”
“...네.”
“혹시 지금 여자친구가 있으신건 아니죠?”
“지금은... 없다고 할 수도 있네요.”
“아~ 헤어지셨어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 라. 아마 그럴거에요.”
...헤어졌었지. 다시는 못 만날 정도로 멀리...
“그게 무슨 소리에요? 혹시 여자친구분한테 소식이 없어요?”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게 자주 만나고 있어요."
벌써 몇번이나 우연히 만났으니까 말이지.
그래. 모두 맞는 말이다. 넌 날 기억하지 못하니 우리의 사이는 더 이상 부부나 연인이 아니고 운명의 변덕 떄문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헤어졌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고 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흐응... 아, 참고로 그쪽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건 아니에요. 그냥 연애사가 궁금한것 뿐이지.”
“네.”
새삼스럽게 핑계를 대는 슬비를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은 나는 슬비의 말을 작게 긍정하며 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슬비도 똑같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문한 음식을 가져온 종업원을 보고는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간단한 샌드위치, 그리고 슬비는 미디엄 사이즈의 딸기 크레이프를 먹기 시작하였다. 샌드위치는 그럭저럭 맛있었기에 나는 어느샌가 샌드위치를 다 먹었고 슬비는 어떤가 싶어 슬비의 플레이트를 확인하였다. 그러자 슬비의 접시에는 딸기 크레이프가 멀쩡한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혹시 입맛이 맞지 않는 걸까 생각한 나였지만 옛날에 잘만 웃으며 딸기 크레이프를 먹던 슬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대체 왜 먹지 않는걸까 알아보기 위해 슬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문심에 바라본 슬비의 얼굴은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였다. 마치 어떤맛의 아이스크림을 고를지 고민하는 어린아이같은 표정. 대체 무엇떄문에 저렇게 어쩔줄 몰라하는 걸까 생각하며 다시한번 딸기 크레이프를 자세히 들여다 보자 나는 금세 이유를 알수 있었다.
딸기 크레이프의 모습이 펭귄이였던 것이다.
“...저기 펭귄떄문이라면 다른거 시키셔도 되는데...”
“페, 펭귄떄문에 이러는 거 아니거든요?!”
“맞을텐데? 펭귄 좋아하잖아요?”
“아니에요!”
“아닐리가 없는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에요!”
“딱 보면 아는데요.”
사실 슬비가 펭귄 덕후라는 것은 그녀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알게된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날 기억하지 못하는 슬비에게 해봤자 의심만 더 사게 될테니 나는 그 말을 입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정말 다른거 시켜도 되요?”
“물론이죠.”
결국 펭귄에 굴복한 슬비는 나에게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부탁하였다. 역시, 슬비는 슬비다. 저렇게 솔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녀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것은 나다.
이렇게 서로와 다시 마주보는 것도, 서로와 대화하는 것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내게 있어서는 역시 행복보다는 슬픔, 혹은 아픔이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추억을 자극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분명 다시는 만날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녀를 다시 만났던 그날, 나는 너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너는 계속해서 운명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너의 곁에 있으면 좋은 게 없다는 것은 잘 알고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게 행복으로, 슬픔으로, 그리움으로 날 찾아오는 널 보면 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멀어질지, 아니면 다가갈지 정하지 못한 채 이렇게 영원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것은 나다. 오로직 나만이 세상에서 멀어진 채 과거의 시간속에 살고있다. 내가 없는것으로 그녀는 다시 삶을 되찾았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는 기적의 대가를 치뤘다.
“이세하씨?”
-세하야?
네가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다. 지금이라도 난 내가 누구인지 네게 말하고 네가 다시 날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고있다.
하지만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넌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한가지 뿐이다. 하지만 난 단 하나뿐인 선택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난 너에게서 멀어진다는 선택을 보류해보자 한다.
“제말 듣고 계신거에요?”
-내말 듣고 있는거야?
내게 허락된 것이 오직 지켜보는 것이라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슬픔이라 해도, 비극이라 해도,
나는 운명을 거역해 너에게 한 발자국 이라도 다가가 보자 한다.
Hainsman님의 작품을 허락을 맡고 대신 업로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