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먼지를 뒤집어쓰기 전(+ 공지)
루이벨라 2018-10-03 5
※ 암광세하 x 암광유리(유리 시점)
※ ‘먼지(진塵)시리즈’ 프롤로그(0편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 1편(먼지를 뒤집어쓰다)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3425/
2편(먼지를 털어내다 – Y의 경우)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3514/
3편(먼지를 털어내다 – S의 경우)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3606/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사방이 적이었다. 한 쪽에서는 인류를 배신한 반역죄의 신분으로,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되다 만 실패작, 반 푼이 신세로.
우리는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 로서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만큼 처절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나는 우화 속에서 나오는 교활하기 짝이 없던 박쥐의 신세에마저 공감이 가기까지 했다.
절망, 한탄, 분노, 허탈, 원망, 그리고 다시 절망...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겪어왔던 감정의 변화였다. 바람을 맞는 횟수가 많은 돌멩이가 점점 흙이 되어가듯, 우리 안에서 돌고 돌던 일종의 윤회는 반복할수록 그 안에 든 감정의 강도는 마모되었다. 이제는 잔상만 남아있고 형체가 알 수 없게 변해버린 감정인데도, 신기하게 그 감정에 의해 우리는 순수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무엇에 절망하는지, 어떤 상황에 한탄하는지, 누구에게 분노하는지, 가질 수 없는 무언가에 허탈한지에 대해 정말로 필요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 것들이라도 현재의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원이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겐 지금도 제일 중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에 가서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현재의 우리를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옛것을 취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많이 서투른 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걸 내 독단으로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래, 아마 나는 그 때부터 아마 그런 답지를 써내려가겠다고 막연하게나마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계기가 결정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세하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굳이 정해진 것 안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응?
매사에 가만히 있기만 했던 세하가 ‘처음으로’ 나에게 제시한 물음이었다. 그 말에 난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답은 없었다. 답이 여러 개일 뿐! 그 안에서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건 우리의 자유였다.
그 이후로는 간단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려운 거지, 우리는 서툴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켜 나갔다.
-세하는 지금 뭘 가장 하고 싶어?
-쓰러트리고 싶어.
일종의 실험극 같이 많이 엇나가는 대화의 형식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답을 찾았다. 우리가 내린 답은...
-누구를?
-원흉.
-복수하자고?
-그래.
그래, 한 번 시도해보자!
그렇게 ‘복수’ 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는 느릿하지만,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 * *
갑자기 받아들인 그 거대한 힘에 우리는 숨이 막힐 거 같았다. 폐부 전체에 재와 먼지가 담뿍 들어온 이 느낌. 담배 연기를 맡게 된 것보다 더욱 지독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감당해야하는 이 힘에 우리는 막막했다. 호흡이 고르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나’ 는 안 받아들여도 되었다. 애초에 그 남매가 장난을 치려고 눈독을 들인 건 세하뿐이었다. 다섯 중 하나가 희생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라며. 자비를 베푸는 척, 힘을 원한다는 전제 조건을 붙이면서 자원하는 이를 찾는 것도 미리 짜둔 각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최후의 1인은 처음부터 세하였다. 아마도 내가 반차원종화가 진행되기 직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그들조차도 세하만을 자신들의 인형으로 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늪을 향해 스스로 발을 들인 이유를 아직까지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못한다. 나중에서야 정신을 가까스로 차린 세하는 옆에 있는 나에게 왜 여기에 있냐고, 제대로 설명하라며 화를 냈었다. 후에 세하는 그 때 나에게 냈던 화에 대해 사과했다. 그 때의 자신은 아마도 제정신은 아니었을 거라고 소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럴 만도 했다. 비교적 어느 정도의 각오를 하고 의식을 치룬 나와 달리, 세하에게는 자신의 의사 따위는 처음부터 존중되지 못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였다.
어쨌든 우리는 동료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하고, 다른 차원으로 떨어졌다. 그것마저도 서러운데 여기서 살아남아**다는 어려운 과제까지 던져주었다. 가끔 보면서 들었던 정(情)을 봐서라도 생사 여부는 확인하러 와 줄게, 라며 우리를 만들어낸 남매는 책임감 없이 그냥 가버렸다. 우리에게 남겨진 건 각자의 무기, 단단한 갑주, 그리고 이때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들떠있고 야성적인 힘.
차분한 마음으로 앞날을 세우려고 해도 묘하게 다른 공기가 이상하게 심장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서 그마저도 어려웠다. 그러던 찰나에 세하가 눈을 떴다.
-아, 세하! 괜찮아?
-...여긴...
-...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우리 차원종이 사는 세계에 있어. 왜? 왜냐고? 아, 그게 애쉬와 더스트가 우리를 이러이러하게 만들었거든. 이런 대화가 조금 오갔다. 갑자기 세하의 눈에 이상한 섬광이 스쳐지나갔다. 그 직후,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세하야, 정신이 들어?
-왜, 왜, 왜! 왜! 왜 네가!
-...
앞서 설명했듯이, 세하는 나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눈은 초점 하나 없었다. 마치 내가 알 수 없는 무언의 힘, 감정 등등이 세하 안을 다 뒤집어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절규는 너무도 가슴 아프고 처절했다. 한참을 그러던 세하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졌다. 그러더니 짧게 미안하다라며 이번에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또 다시 절규했다.
그 후로 세하는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내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지만, 나를 내친다거나 서로 서먹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계속 같이 있었다.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더 상황을 나아가게 하는 데는 낫지 않나, 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정기적으로 우릴 찾아오는 남매의 쓸데없는 TMI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거 같진 않네?
-제 아무리 용의 힘이라고 해도 나누어 가지면 그렇지도 않나 보군.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한 거 같아. 안 그래, 애쉬?
-선대의 용과는 다른 알에서 태어났으니 그렇겠지.
아마 힘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이겠지. 남매의 결론은 항상 비슷하게 끝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 남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제 힘에 아직도 힘겨워서 숨을 헐떡이며 자신들이 내리는 명령을 하나도 수행 못하는 세하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침착하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고할 수 있는 내가 참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론상 나도 세하와 같은 꼴을 보여**다는 것이었다.
-이상해. 똑같이 힘을 나누어가졌다면서 왜 한 쪽은 멀쩡한 거지?
-우리들 말도 잘 안 듣는 거 같고. 둘 다 불량품이라니! 우리 계산이 잘못된 걸까, 애쉬?
-그럴지도 모르지. 뭐든지 시작품은 무슨 에러를 범할지 모르니까.
-아, 모처럼 큰 힘을 들여서 만든 인형인데...이래 가지곤 제대로 가지고 놀 수도 없잖아!
수많은 치욕을 감수하면서 대략적으로 커다란 정보는 다 얻었다. 그리고 가지고 놀 수 없다, 라는 전제를 깔기 시작하자 우리에게 들이던 흥미도 급속도로 식어갔다. 그게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걸 의미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수록,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걸 의미했으니까. 관심은 떨어졌다면서 그들이 세하에게 가끔씩 명령 같은 건 내리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계속 심각한 두통을 호소하던 세하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마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 내가 세하에게 물었다.
-아직도 머리 아파?
-...미안.
-너 요즘 들어 미안하다고만 말하더라? 나 화 안 났어. 후회하지도 않고.
뒷말은 살짝 거짓말이 가미되었지만,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거짓말.
-내 거짓말 티 나는 거 나도 잘 아니까 거기서 멈추자.
-...난...내가...정말 싫어. 구역질 나...
-난 진짜 괜찮아.
그 때는 이런 말들로 세하를 최대한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악한 재와 먼지에게 계속 의식이 사로잡혀 있던 그 시점에선, 세하의 본인의 감정에 대해 세하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내가 일일이 알려주고 깨닫게 해주어야 했다.
-사실 여기 자체는 싫어.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
살아남아야 한다. 변명 참 멋지다. 나는 얼마 전까지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함이 내가 살아가려 했던 길의 전부였다고 생각했지만...반전의 반전이 찾아온 건 숨기지 않겠다. 세하가 이리 힘들어하니, 그나마 정상인 나라도 세하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그런 마음이 든다고 일이 다 쉬워지진 않았다. 나의 몫도 힘든 와중에...
짐을 살짝 덜어내고 싶어서 아마 그런 말을 살며시 했는지도 모른다.
-선택도 해야 하고.
세하의 현 상태 때문에 나 혼자만 생각하기 급급했던 주제를 그때서야 세하에게 겨우 털어놓았다. 인간일지, 차원종일지. 아니면 계속 이렇게 방황을 하며 여생을 보내야 할지.
내 말을 들은 세하는 아직도 두통이 가시진 않았는지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난 정해진 대로 사는 거 싫어하는데.
-어...?
세하는 무덤덤하게, 그러나 앞으로의 일에 있어서는 강력한 파급력을 가져올 말을 그 직후 내뱉었다.
-굳이 정해진 것 안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 * *
자신은 지적인 토론을 즐긴다는 어느 차원종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 인간들은 오만해.
나약한 너희들이 모든 걸 할 수 있을 줄 아나 **? 그렇기에 헛된 ‘희망’ 따위를 품는 거야.
-그리고 경솔하기까지 하고.
게다가 그 ‘희망’ 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경솔함까지. 참으로 멍청한 생물이 아니던가! 그 차원종은 뱀 같이 생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곤 하나, 자신의 앞에 있는 우리를 조롱하는 의미처럼 보인다고 순간 생각해서, 질문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 그런 점이 이해는 안 가지만, 흥미가 나기는 하지.
학자라고 불러달라는 은색 비늘을 가진 뱀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타인이 보기에도 우리는 이토록 신기한데, 우리라고 안 신기할 법이 있을까. 역사상 유래가 없는 존재의 탄생은, 당사자인 존재 스스로에게도 혼란을 야기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건 이미 관심에 없는 축이겠지. 학자가 말한 대로 그들은 호기심만 있을 뿐, 우리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건 이 세계가 오로지 힘으로만 질서가 정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인간도 아니고, 차원종도 아닌 너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좋은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완벽한 반반(半半)이는 처음이라서 말이지.
완벽한...반반이? 이성을 잃을 뻔 했지만, 옆에 앉아있던 세하가 먼저 검을 스릉- 뽑는 걸 말리는 게 먼저라 내 기분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앞에 있는 잘난 차원종에게 화가 안 난 건 아니었다. 아니, 아까부터 심기를 건드는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똑똑하다니 정보를 얻기 위해 겨우 거슬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지, 나도 세하처럼 검을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수확은 하나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인간의 정보에 대해. 그들의 눈에는 우리는 참 옹졸하고 치졸해 보였다. 그렇기에 극소수의 인간은 이들을 ‘신’ 으로 섬기기까지 한 걸까? 그렇기에 이들은 우리를 장난감 같이 생각하는 걸까?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버려도 되는? 단순히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자신의 힘의 일부를 떼어주어서 경과를 관찰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런 자들과 계속 어울려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앞날도 같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신기하네. 너희들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럼 이제 너희들의 차례지 않나? 너희들은 우리, 용의 자식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용의 자식...
하나 더 알아낸 사실은 차원종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붙인 이름.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은 특정적이지 않다. 용의 휘하에 있던 이들 같은 경우는 ‘용의 자식’ 이라고 자신들을 칭한다. 그 밖에도 나라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내가 만나본 이들은 별 관심이 없어한다. 이들은 우리보다 덜 우호적이고, 덜 이기적이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그건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거 같았다.
-이해가 간다고는 할 수가 없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간.
-아까는 반반이라더니 인간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인간으로 보여?
-우리는 진화를 하며 살아가는 이들. 너희가 우리와 가깝게 될 순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다. 그 반대의 경우라 함은 오히려 진화가 아니라 퇴화이지 않은가?
발끈- 세하의 움직이려고 하는 검을 난 또 제지했다. 난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 들어본 적 없어?
-무슨 생각을 말이냐.
-너희가 그렇게 하찮다는 인간들에게, 왜 선선대의 용과 선대의 용은 패했을까? 라는?
-...
학자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침착했던 앞의 말들과 달리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를 조롱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답은 다 나왔다.
-아직 너희들의 분수를 모르는가 보군.
-그래. 그리고 너도 네 분수를 지금 모르지. 너, 지금 처형대에 있는 거 알아?
-...
그렇다. 지금 우리가 저 뱀과 이야기를 하는 곳은 우리가 ‘처형대’ 라고 이름을 붙인 절벽 위였다. 스스로 떨어져 죽는가, 아니면 우리의 검에 목숨을 맡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가 서 있는 장소. 저 뱀은 그 두 가지 선택지를 무시하고 대담하게 우리를 설득하리라는 전무후무한 선택을 했다. 그 용기에 우리는 칭찬했지만, 그렇다고 저 자를 살릴 마음은 없었다.
-우리에게 반란을 꾀한 죄. 우리의 목숨을 가소롭게 여긴 죄. 왕에게 거짓된 충성을 고한 죄 등등...죄가 이 뒤로 68개나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기로 하자.
-...너희 같은 인간이, 아니 반반이가 무엇을...!!
-네네, 그 반반이라는 자들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소감은 지옥에서나 듣겠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차원종을 향해 휘두르려고 힘을 주는 세하의 검에서 나는 손을 뗐다. 그 직후 가벼운 입을 놀린 뱀은 두 갈래로 찢어져버렸다.
검을 조금 휘두른 것뿐인데도 세하는 힘들게 숨을 토해냈다.
-휴...
-괜찮아? 손 잡아줄까?
-...
세하는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난 세하의 손을 잡았다. 손을 타고 세하의 힘이 조금씩 내게 스며들어왔다. 위상력이 순환하는 이 시간은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했기에 어느 누구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상상치도 못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우리는 먼저 같은 힘을 나누어가졌는데도 전혀 다른 상태의 우리 둘의 이상함을 의식했다. 재와 먼지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똑같이 찍어진 공장품 마냥 결과도 같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추론했다. 어쩌면 힘이 균일하지 않게 이어진 게 아니라면? 그리고 유독 세하만 힘들어하는 거라면? 세하 쪽에 들어간 힘이 더 많을 거라고 우리는 짐작했다.
애쉬와 더스트는 세하에게 ‘계약’을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아, 맞다. 차원종들은 계약을 하는 걸 아주 즐겨했다. 사사로운 일이라고 싶은 것에서도 계약서를 먼저 내미는 모습에 우리로서는 뜨악했다. 하지만 그 ‘계약’을 나와 세하 사이에서도 맺게 되었다. 그들 남매와 세하, 내가 맺은 계약은 일종의 주종 계약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가 그들 몰래 주종 관계를 맺어버린다면? 파기할 수 없게 아예 무기한 계약으로 말이다!
대략적으로 억측은 했으나 실현 방법을 몰라서 그건 그거대로 고생했다. 계약을 하긴 했으나, 아직 힘이 자기 혼자서 순환하지는 못해서 일정 시간마다 서로 손을 잡아서 순환을 시켜주어야만 했다. 번거롭지만 그 후로 세하의 두통이 많이 사라졌고, 나도 내 안에 있던 힘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전보다도 검을 휘두를 때 힘이 덜 들어가고 유연하게 동작이 나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이중 계약이라는 건 참 복잡하지만 쓸모 있었던 모양이다.
세하는 용의 위광이라는 것마저도 나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눈치였지만 쉽진 않았다. 아직 많이 미숙한 건지 그것까지는 옮기는 범주에 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아쉽다는 듯이 세하가 말했다.
-역시 위광은 안 옮겨지나 보네...
-그냥 세하가 다 가지고 있어. 왕인데 그 정도의 위엄은 가지고 있어도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계약을 할 때 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세하가 위(主)해. 내가 아래(臣)할게.
-뭐? 그, 그렇게까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이거 또한 내 고집이었다. 그리고 세하는 내 고집을 어려워했다. 그걸 알기에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그 선택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나중에서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았다.
힘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우리는 복수, 정확히 말하자면 원한에 의한 화풀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목적을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 남매가 우리에게 관심이 0에 가까워진 건 참 감사했다. 아마 더스트는 우리의 세력이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강해진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바라던 바였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왕’ 이라고 지칭하고 다니지 않아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 계단씩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 * *
그렇게 이어져서 현재. 고지까지는 앞으로 세 단계 쯤 남아있다. 지금 나는 한창 광란의 현장이 되어가는 파티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곧 다가올 위협에 대해 빨리 잊자는 듯, 일부러 더 크게 웃고 있었다. 그만큼 아무리 우리가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더스트에게는 여전히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실정이겠지.
‘출정식 전에는 이렇게라도 들떠 있는 분위기가 낫겠지...’
내일은 처음으로 더스트에게 대항을 해보는 역사적인 날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크지만 계속 웅크리고만 있다면 더 나아갈 곳은 없었다.
점점 극에 달하는 파티에 나는 심심했다. 축 처져 있는 분위기보다는 이렇게 떠들썩거리는 분위기가 훨씬 낫기는 한데, 옆에 비어있는 자리를 보자니 좀 기분이 침울해졌다.
‘세하는 오늘도 방에 콕- 박혀있는 건가.’
광대라도 불러야겠다, 라며 되지도 않는 제안을 내세워보기로 마음먹는다. 난 그들은 마저 본인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명을 내린 뒤, 먼저 빠졌다. 오히려 내가 없는 것이 그들에겐 더 큰 마지막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내가 향하는 곳은 세하가 이 성에 들어온 이후로 떠나본 적이 없는, 왕좌가 있는 방이었다.
세하는 요즘 웃지 않았다. 감정 표현도 점점 없어졌다. 내가 세하보다 늦게 난입을 한 탓인지, 예상대로 힘의 대부분은 세하가 가지고 있었다. 그 힘에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본능마저도 마비시키는지 세하는 점점 차가워졌다. 가끔 가다가는 서툴기는 했으나 그래도 표정을 짓곤 했던 세하가 그립기는 했다.
그래도, 그래도! 참 기특하게도 적어도 세하는 내 앞에서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이 점점 쓸모가 없어지는 것 같지만, 난 세하 또한 필사적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기쁠 따름이었다.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무례함을 보였는데도 세하는 아무런 불쾌함을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는 주종 관계, 안에서는 무어라 감히 말할 수 없는 끈 같은 게 이어져 있는 관계니까. 그리고 애초에 세하가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는데도 명성이 점점 높아지는 건 내 덕이기도 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왔어.”
“...”
“내일이야.”
“...”
“걱정 돼?”
세하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뭘까, 했는데 스윽- 손을 내민다. 위상력 순환은 아까 전에 다 했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그냥 손을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난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웃음이 나온다.
“가끔 솔직하게 하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
“아, 따라오고 싶어도 따라오지 마. 만약 내가 죽으면...”
세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전제하지 말라는 거 같은데, 만약의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에 그냥 내 할 말을 이어서 한다.
“네가, 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니까.”
“...”
“뭐, 만약의 경우야. 안 죽을 거니 걱정 마. 승리도 하고 올게.”
“...”
그제야 세하의 표정이 아주 약간 풀어진다. 그 모습을 보자니 곧 내가 없을 성 안에서도 곧게 있을 세하가 상상되어 안심이 된다.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잘 다녀올게.”
“...”
“걱정하지 말고.”
“응.”
내가 서너 말을 하면 꼭 한 마디만 하더라? 그래도 그 짧은 말이라도 들어서 다행이다.
이제야 진정으로, 실감이 난다. 우리가 결국 ‘우리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사실 작가의 말을 쓰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0편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1 ~ 3편에서 더스트가 자신과 계약한 반인반차원종이고, 둘이 1명분의 차원종의 힘을 나누어 받았기에 제대로 된 힘을 못 낼 거라 했던 예상과 달리 자신을 궁지에 몰리게 했던 이유를 궁금해 했던 묘사가 있었는데요. 독자님들도 더스트처럼 그 부분에 대해 궁금해 했을 거 같아서 올리는 일종의 프리퀄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세하와 유리의 인간과 차원종 사이에서의 갈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를 해보았습니다. 1편에서도 스쳐지나가듯 언급이 되어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의 세하와 유리는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기에 이러한 갈등이 없던 것은 아니다, 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몇몇 분들이 ‘세하와 유리가 나머지 검은양 팀원들과 만나는 스토리로도 이어지나요?’ 라고 물어봐주셨는데, 제가 이 글을 쓸 때의 목적을 ‘더스트를 쓰러트리고 끝낸다!’ 로 설정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습니다. 아니면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몇 개의 설정을 바꿔서 아예 장편이 나올 수도 있고요.(이 작품이 장편으로 쓰려했던 걸 설정 몇 개 바꾸어서 단편으로 빼낸 소설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전에도 언급했지만, 올해 열릴 예정인 클로저스 온리전에서 회지 냅니다. 세하슬비 1권과 세하유리 1권. 수량이 남으면 통판도 할 거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