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2-5
한스덱 2018-09-21 0
이 이야기는 실제 게임 스토리와는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
*
*
그리고, 그녀가 외부차원에 온 지 시간상으로 6일하고도 약 22시간 정도가 지난 지금, 그녀는 3시간 전에 내가 웅크린 채 앉아있던 그 벽에서 방금 전 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의 시선을 피해 숨어버렸다.
나는 3시간 전 그녀가 누워있던 침상에 걸터 앉은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시간의 흐름과 같이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무거운 적막만이 그녀와 내 머리 위를 꾹꾹 짓누르고 있었다.
왜 이런 참상이 벌어졌을까?
그녀가 내 안식처로 오기 전의 상황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는가? 혹시 잊었을지도 모르니까 간단히 설명드리면,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가 착각 때문에 고향의 정 반대편으로 차원 이동해버린 이후, 그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동분서주하면서 최대한 많은 정보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녀는 구조 요청을 보낼 통신기와 관련된 정보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 정보를 통해서 자신을 지옥에 가둬버린 장본인이 만든 형벌장까지 찾아간 그녀는 구조 요청과 구조 활동을 동시에 해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른 착각 때문에 어딘가로 또다시 차원 이동해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두 번째로 도착해버린 그 어딘가는, 참모장이 비명 대신 가쁜 숨을 간신히 내쉬던 죄수를 추방시켜버리는 장소다. 형벌장에 갇혀서 고문받다가, 박사가 쫓겨난 변방지역같은 유배지는 절대로 아닌 장소로 쫓겨난 그 가엾은 죄수에게 순식간에 다가오는 운명은 바로,
고통스러운 사형이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내 안식처의 정체가 실은 처형장이고, 나를 그 가엾은 죄수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사형 집행인으로 오해했다면, 대체 어떤 사형 집행인이 오른손이 잘려나간 채 의식을 잃어서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죽을게 뻔한 죄수를 정성껏 치료하면서 식사까지 대접해주는 친절을 배푸는지 잠깐만 생각을 해봐주길 바란다.
아, 난 인간이 아닌 차원종이니까 평범한 사형 집행인과는 다르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악마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온갖 고통을 겪다가 죽기 일보직전에 추방되어버린 죄수의 몸과 마음을 멀쩡하게 회복시켜줄만큼 따뜻한 친절을 베푼 후에, 절정의 행복을 느끼느라 방심한 그 죄수의 등에다가 비수를 꽂아버려서 그 죽음을 최악의 저주로 만들어버리는 참모장과 맞먹을만큼 사악한 사형 집행 악마말이다. 난 여러분이 했을지도 모르는 이 끔찍한 추측에 일단은 꽤나 그럴싸한 상상이었다고 답해주겠다. 만약 여러분이 내 앞에서 이 최악 중의 최악인 억측을 지껄인다면, 난 그 자에게 호의를 대접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
내가 수 많은 억측들 중에서 선정한 최고의 억측은 바로, 내 안식처는 사실 무기징역을 살게 될 비좁은 독방이고, 나는 그 속에서 무한한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쓸쓸하게 죽게 될 죄수라는 추측이다. 이건 그나마 정답에 가깝기 때문에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긍정적인 수식어를 갖다붙여도 억측은 억측일 뿐이다. 참모장은 죄수에게 무기징역이라는, 물리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과 동반되지 않는 형벌을 내릴 위인이 절대로 아니니까.
하지만 이 최고의 억측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담겨있다. 그건 바로, 내 안식처를 뜻하는 ‘독방’과, 내 정체를 뜻하는 ‘죄수’이다.
내 정체는 바로, 동굴 속에서 은거하던 도사가 아니라, 독방 안에 갇혀있던 죄수라는 말이다.
그럼 그 독방의 문을 단단히 잠근 좌물쇠와, 죄수가 탈출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간수, 그리고 평범한 죄수가 맞이해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사형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볼 여러분을 위해서, 작가만의 권한을 발휘해 이야기 속 시간을 3 시간 전으로 잠깐 돌려보겠다.
*
*
*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동굴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물 안 에서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개구리와 비슷했지만, 내부차원의 속담 속 생물과는 다르게 지금 그녀는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부만 바라보아도 우물 속의 비좁은 하늘보다 더 넓은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무려 지평선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경치를 말이다.
그 경치를 구경 중이던 그녀가 방금, 자신의 왼손에 든 건 블레이드를 땅에다 떨어트렸다.
그녀는 그 어떤 적들과 마주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무기를 놓아둔 몇 안되는 시간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건, 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보내던 시절이다. 그것 외에는 ‘외부차원에서 차원 간 통신을 하기 위해’와 ‘약 12시간 동안 의식을 잃어버린’을 포함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전투 중에 왼손에 부상을 당하면 아직 멀쩡한 오른손으로 무기의 손잡이를 잡았다. 두 손 모두 쓸 수 없다면 입으로라도 그 손잡이를 물었다. 다행히 이는 부러진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지독하게 무기를 잡았던 덕분에 차원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데다가 그 끔찍한 전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무사히 은퇴했다.
그런 그녀가 방금, 몸의 일부나 다름없었던 그 무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단 것이다.
인간의 전설 속 영웅같은 그녀가 처음 마주쳐버린, 그리고 무기를 놓쳐버릴 정도로 경악에 빠트려버린 그 사상 최악의 적은 당연히 내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적이 아닌 ‘방해물’일 뿐이다.
그 방해물이 사상 최악의 방해물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시야가 탁 트여 상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드넓은 경치와 같은 동굴 바깥의 모습은 바로 지옥이었다.
비유적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말 그대로 ‘진짜 지옥’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으로 가득했던 동굴 속과는 달리, 동굴 바깥은 사방에서 검붉은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 뿐만이 아니라, 지옥의 대기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이 검붉었다. 그 광경은 마치 검붉은 모래로만 구성된 사막에서 커다란 폭풍이 불어닥치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진짜 사막과 진짜 지옥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사막에서 부는 폭풍은 모래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지만, 지옥에서 부는 그 검붉은 폭풍은 시야를 전혀 차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옥의 광경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 검붉은 하늘 밑에선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그 검붉은 대기 속에서 숨을 쉬어버린 생명들이 맞이한 죽음의 흔적마저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옥의 대기와 마찬가지로 그저 검붉기만 한 황무지는, 검붉은 지옥을 구성하는 ‘그것’의 위력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할 뿐이었다. 생명과 죽음이 모두 메말라버린 평평한 대지위로 솟아난 건 나뭇가지처럼 삐죽 튀어나온 기둥들 뿐이었다. 지면 위로 솟아난 건 그 기괴하게 생긴 검붉은 선인장들 뿐, 산이나 언덕이라고 불러야 할만큼 높게 솟아난 지형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지면과 같은 높이의 동굴 속에서도 지평선을 쳐다보는걸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이만큼 검붉은 게 가능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검붉었던 그 광경은, 내부차원의 전설을 뛰어넘은 신화에서 나오는 지옥이 차라리 더 많은 생명을 가졌다고 믿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지옥이었다. 그 광경 속에는 하늘, 땅, 그리고 기괴한 기둥 말고는 ‘존재’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이 지옥 속에도 생명을 가졌거나, 혹은 생명은 없어도 지성은 가진 존재들이 분명히 있다. 그녀와 나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내가 동굴 안에서 구경하고 있는 그 광경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존재들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와 나의 구세주와도 같은 그 동굴은, 지옥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검붉은 빛만 한가득 받았는데도 검붉게 메말라버린 대지 위로 유일하게 피어나온 한 줄기의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 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에 적응해 살아남은 존재들마저 감히 다가오지 않는 지옥의 심층부에서 그녀와 내가 무사히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그 동굴 주변의 대지만이 ‘그것’의 악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기적 덕분이다. 그래서 그녀와 내가 보고있는 광경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면, 검붉은 물감으로만 칠한 그림에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 물감을 아주 약간 섞어서 하늘과 땅을 가까스로 나눈 지옥도였다. 그 동굴의 주변만이 멀쩡했던 이유는 나도 모른다. 맹세코 말이다. 나는 이 동굴의 정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석보다도 더 구하기 어려운 암석이 천지에 널린 상상을 초월하는 노다지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내부차원이 간직하기는 커녕 내부에서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게 행운의 여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축복과 같은, 외부차원만이 간직한 ‘풍경’이라는 단어로는 절대로 부를 수 없는 광경을 보고만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질리도록 쳐다본 나 역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