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Re : Dead (+ 팬아트 추가)

루이벨라 2018-09-20 6

※ 특요세하 암광유리

※ 한 달만의 세유(세하유리)

※ 지인분 썰 기반

※ 카가미네 린렌의 곡 Re : birthed를 보고 참고한 부분 

 

 

 

 

 

 가끔씩 똑같은 내용의 악몽을 꾼다실제의 기억인지악몽인지 이제는 구분도 가지 않는 일명 ’ 의 내용은 너무도 또렷하게 남는다.

 

 이곳저곳을 베이는 느낌살이 찢어지는 느낌근육이 지쳐버려서 굳어버린 느낌그리고 상대방의 손가락이 자신의 눈을 짓누르는 느낌까지도.

 

 처음에는 그 장면을 반복하며 본다는 사실에 께름칙했지만이제는 적반하장 식으로 오히려 이 꿈을 꾸고 나면 화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럴 때마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상처투성이인 자켓을 어깨에 걸치고 무작정 바깥으로 뛰어나간다새벽 공기라도 마시면서 전력질주라도 해야 가까스로 화가 누그러진다심장의 가빠른 주행이 무식하게 뛴 달리기의 결과인지아니면 화가 난 상태에서의 흥분인지 모를 때까지뇌가 억지로 착각을 할 때가지 늘 그렇게 뛰어야 겨우 누그러진다.

 

 그렇게 화가 잔뜩 나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왼쪽 눈을 단순히 흥미용’ 으로 앗아간 범인이 아니라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났다.

 

 왜 인간은 어떤 굴레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할까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항상 처음 겪어보는 것 마냥 심장을 움켜지면서까지.

 

 이런 거 건강에 좋진 않을 거 같은데...세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형식적으로나마 하지만그런 깨달음을 얻는다고 제 몸을 그 때서야 곱게 챙기진 않았다몸을 혹사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그게 참 슬픈 일인데이제 세하는 울 기력조차 없었다세하의 온몸에 있는 감정 세포 하나하나가 다 한 곳()에만 집중하고 있으니그 이외의 나머지 감정은 챙길 여유도 없다.

 

 그리고 어차피 자기는 한 번 죽었던 몸이었다다들 기적이라고까지 입을 모으던 회복이었다그 한 줌의 빛과 같은다시 주어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세하는 벌써부터 자신이 미래에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다 정리하고 있었다신이 주신 절호의 기회인데도 세하는 그 기회마저 이기적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짐을세하는 3년 동안 착실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 * *

 

 

 

 세하는 참으로 오랜만에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임무 때마다 계속 울리는 휴대폰이 짜증이 나서 아예 전원을 끄고 다니던 까닭 때문이었다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이런 거에 예속되지 않기로 결심은 했건만세 살 버릇 여든까지 못 간다고 이미 익숙해진 것들을 바로 내치기에는 세하는 아직 여러모로 미숙했다거의 꺼두고 다니는 이 휴대폰은 나약한 자신을 절실히 보여주는 증거품이었다.

 

 한숨을 쉬며 통화 내역을 쭉 살펴보았다엄마엄마엄마제이 아저씨유정 누나엄마엄마...항상 자신을 걱정하면서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자 하는 소중한 이들이었다여느 때와 같은 연락 목록이라 세하는 바로 휴대폰을 껐다.

 

 소중한 이들세하는 감히 그 가볍지 않은 단어를 쉽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들을 아끼고또한 좋아하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그렇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안 돌아가고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뭘까.

 

 세하는 서둘러서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였다이 마을에서 하루라는 시간을 더 허비해버렸다그리고 휴대폰을 잠깐이라도 키기라도 했으니위치 추적이라는 편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세하를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지금은 잡힐 때가 아니기에 세하는 그렇게 도망자 신세를 자처했다.

 

 ‘이번에도 소득은 없었....’

 

 얼마 없는 소지품 속에서 중요한 정보 등을 적는 작은 수첩을 꺼내 세하가 적어내린 것이다그리고 지도를 펼쳐 방금 전 자신이 머무른 마을에다가 표시를 하는 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벌써 한 달 가량이나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지칠 법도 한데 세하는 이 모든 게 무덤덤했다.

 

 떠나기 전 마을 빵집에서 산 딱딱한 빵으로 아침을 때우며 다음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이 지역 일대를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한 건 약 세 달 전이었다차원종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던 어르신이 많을 정도로 참 평화로운 대륙이었다어쩌면 소득이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세하는 끈질기게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다녔다.

 

 왜 집중 탐색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느냐그 이유는 지금 서 있는 대륙에 오고서 며칠이 지나서 들은 환청 때문이었다앞에서 묘사된 철저하게만 보이는 현재의 세하의 행동들로 봐서는 참 즉흥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오히려 그러는 게 정상이었다애초부터 세하가 이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 것도 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안녕?

 -여기야여기!

 -심심해...

 -그쪽에선 향수(鄕愁)의 냄새가 느껴지네!

 

 목소리는 그리운 내를 물씬 풍기며 세하에게 다가왔다그 때 마침 세하는 북적한 시장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 잘못 들은 거라고 처음에는 단정 지었다하지만 한 번의 우연한 것이두 번세 번...열 번으로 이어지면 그것은 필연적이 된다게다가 쐐기를 박으려는 듯이그 끝에 들리는 참 시끄러운 어느 소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까지.

 

 -꺄하하하하핫~~!!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세하는 망설임 없이 다음 여정의 목적지를 이곳으로 잡았다환청이자신의 오랜 여로의 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운명적으로 꽂힌 것이라면...이런 감으로 수집한 정보가 꽤나 많으니 그리 성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차원종이 거의 출현하지 않는 이 대륙에서 그래도 세하는 제법 검을 많이 사용했다평화가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서정작 차원종이 출현했을 때의 마땅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세하는 항상 그러한 현장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길에 눈앞에 걸리적거려서 처리한 것 뿐그럼에도 떠돌이 클로저가 있다는 소문이 마을마다 퍼져서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이제는 그런 행동을 줄여나가야 하나 고민도 했다하지만 그러기엔 차원종을 족치는 것도일종의 정보 수집이긴 했다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차원종은 극히 소수였다게다가 좋은 정보 – 세하의 기준에서 를 알고 있는 차원종은 그 안에서도 또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다한 달 동안 허탕만 치는 세하가 가여워서 하늘이 딱하게 여겼는지마을로 향하는 길에 큰 월척을 내려주셨다바로여기 와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하나인 더스트를 만난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세하를 만난 것치고 더스트는 심드렁했다오히려 본인이 맞는지 확인까지 하고 있을 정도였다고개까지도 갸웃거리는 더스트.

 

 “뭐야...이세하야?”

 “...”

 “무뚝뚝해졌네그리고 그 눈빛참 마음에 안 들어.”

 “더스트...”

 

 하도 말을 안 하다 보니 목이 다 쉬어버렸다그 점 또한 더스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아...이래서 난 인간이 싫어금방 늙고 죽어버리잖아?”

 “...”

 “지금 네 모습...참 싫은 거 알아죽지 못한 망령처럼 보여.”

 

 그렇게 보인다니...더스트는 정확히 짚어냈다더스트는 얄궂은 적이긴 하지만그만큼 더스트의 능력이나 정보력은 참 뛰어났다이런 더스트를 어떻게 회유할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냥 무력으로 불게 만드는 게 적당한 거 같았다더스트가 가진 세하에 대한 감정은 이제 팍식어버린 게 분명하니애초부터 더스트는 꾸준하고 끈질긴 애정을 붓지 못한다어린애 같으면서도 냉철하게 무언가를 분석하는동생보다는 확실히 성숙한 누나다.

 

 건블레이드를 꺼내며 세하가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

 “역시 목적이 있어서 날 찾아온 거지나도 그런 널 기다리긴 했는데...지금 널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팍 식네.”

 

 이제는 재미없는 장난감이라고 하는 상대에게도 끝까지 가지고 놀려는 심보가 참 경이롭기까지 하다의미 없는 감탄만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에 세하는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더스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이리로 온 건 너랑 비슷한 이유긴 하니까특별히 가르쳐주긴 할게.”

 “...”

 “이걸 맞고도 살아남는다면...말이야!”

 

 메마른 공기가 피부를 따갑게 때린다그 열기에 맞서세하는 싸워야만 했다.

 

 

 

* * *

 

 

 

 873번째다꿈으로 치면 앞에 써져 있는 숫자의 횟수실제 경험까지 포함하면 874번째.

 

 넝마가 된 자기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는데묘하게 높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처음으로 보는 건데...참 이쁘네.

 -쿨럭......차려...!

 -난 제정신이야오히려 네가 기절하기 직전 아니야?

 

 또각또각걸어오는 걸음은 당차다그 당참에 비해 자신은 지금 이렇게 겨우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게 전부상대방이 내뿜는 여유로움에 세하는 막연히 생각했다같은 인물인데 공기가 달라졌다라고.

 

 격렬한 싸움으로 그 당시 세하의 눈은 오롯하게본연의 황금색을 내뿜고 있었다몸은 만신창이이지만곧은 의지가 보이는 눈빛에 유리는 살짝 매료되었다그럴 리가 없겠지만이 눈을 보며 죽음을 맞이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무심코 세하의 눈을 향해 유리는 팔을 뻗었다.

 

 -세하눈 이쁘구나.

 -...

 -보석 같아.

 

 그래서 탐도 나그 뒷말은 의도적으로 뭉그러져서 세하는 그 부분을 잘 듣지 못했지만아마 그런 의미였으리라입술 선을 쓰다듬는 손길이 왠지 모르게 위협적이었다.

 

 -어느 책에서 보았어어느 소녀가 아끼는 검은 고양이가 있었어그런데 고양이에게는 눈이 없었대그래서 소녀는 고양이의 눈을 찾아주기로 결심했대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적합한 눈이 있으면...이렇게...

 -...

 

 불쑥곱게 뻗은 손가락이 길고 날렵하다그 손끝을 멍하니 보자니유리는 그 뒷말을 일부러 뜸을 들이고 말했다.

 

 -이렇게...

 

 꾸욱점점 왼쪽 얼굴에 자리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뽑아버렸다나?

 

 아마 그 때의 유리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진짜로 이루어질 거 같지 않으니반신반의하는 표정하지만 막상 이루어지자굉장히 즐거워하며 희열에 찬 얼굴.

 

 얼굴 한 쪽에서 느껴지는 한 번에 뭉텅이 째로 뜯겨져 나간 고통에 세하는 소리를 질렀던 거 같았다그런데 그 부분은 항상 회고 장면에서 무음 처리다어쩌면 배경음 취급그에 반해 범인은 태연하게 손바닥 위에서 공을 굴리고 있었다휘파람이라도 부는 듯입술을 살짝삐죽거리며.

 

 세하는 그러한 천진난만한 옆얼굴에서도 언뜻 광기를 엿보았다그게 본연의 순수한 얼굴과 겹치니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동일 인물...? 맞다동일 인물하지만 저런 표정을...지을 수 있다고아냐아냐아냐아니라고그럴 리가 없어저렇게 붉게 취하며 웃는 걸 할 수 있을 리가...있었다.

 

 있게 되다니이 믿기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체념아니면 반항그도 아니면...

 

 기억은 늘 거기서 끝난다그리고 이어지는 기억은 병원의 새햐안 천장을 보는 자신이상하게도 눈 한쪽이 가려진 듯세상의 반쪽만 보인다.

 

 꿈도 항상 거기서 끝난다천장을 874번째 보게 되자세하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그리고 중얼거린다.

 

 아최악이다.

 

 

 

* * *

 

 

 

 잠깐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또 그 꿈을 꾸었다이번에는 머리도 같이 아파서 잠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가만히 있었다.

 

 세하는 그 꿈 이후에펼쳐진 뒷이야기를 모른다자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일주일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데미플레인은 폐쇄된 지 오래였다그리고 그로 향하는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세하는 의식을 차린 당시기억이 온전치 않았지만 고통을 참으며 그 때의 기억을 곱씹어 본 결과앞서 꾼 악몽’ 의 장면을 100%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이제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능력이다자신이 의식이 없던일주일간의 공백 부분은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얼추 끼어 맞추면 되었으니 그건 가볍게 넘어가도 되었다.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세하의 부상은 너무 심각한 수준이라서 다들 – 심지어 서지수마저 – 희망을 약간 내려놓은 상태였다고 한다의식도 차리고회복력도 굉장한 편이라서 모든 이들의 입에선 쉽게 기적’ 이라는 말이 나왔다.

 

 세하는 그 말을 지금도 듣기 싫어한다.

 

 뜯겨나간 얼굴의 한쪽 부분에 대해서는 주치의는 유감을 표했다열심히 소독한다고 눈이 새로 생기는 건 아니었기에주치의는 조심스럽게 의안을 권유했다세하는 그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왼쪽 얼굴의 붕대를 풀은 날세하는 자신이 직접 구입한 안대를 착용했다.

 

 ‘나쁘진 않네.’

 

 보기 흉하진 않으니 그러면 되었다거울 속 자신이 너무 우울해보여서 그냥 외형 확인만 간단히 하고 바로 거울을 등지었다반쪽만 보이는 세상은 아직도 어색하지만세하는 열심히 적응해갔다꾸준히 먹어야하는 약이 생기긴 했지만그런대로 살면 되었다.

 

 이런 누더기와 같은 몸 상태와 이상하게도 말이 점점 줄어만 가는 세하가 걱정이 되었는지모두들 세하에게 은퇴도 권유했다세하는 그 제안 또한 거절했다그리고 어느 정도 상처에 새살이 돋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쪽지 하나만 남기고 가출했다.

 

 건블레이드 하나만 들고 나선 길이기에세하의 클로저로서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었다안대 낀 어느 클로저의 이야기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퍼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살았다가끔 거울이나 물웅덩이를 통해 보는 자기 얼굴은 자신도 낯설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이곳저곳에 날이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세하는 착잡한 생각도 했다.

 

 저 날이 사실 만져보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라고.

 

 하지만 이런 생활에도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더스트가 알려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세하가 행할 행동은 딱 하나였다.

 

 빨리서유리...유리를 만나야 했다.

 

 

 

* * *

 

 

 

 유리의 데미플레인으로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손님은 마침 유리가 제 손 안에 있던 장난감을 새롭게 교체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나타났다정중히 대해야할 손님이 나타났는데도 유리는 참 건방지게 왕좌에 비뚤어져 앉은 채로 그 손님을 맞이했다제 기억 속에 있던 세하와 많이 달라서 유리 또한 더스트와 비슷한 반응을 먼저 보였다.

 

 “세하...구나이렇게 보는 거 오랜만이네.”

 “...”

 “많이 무뚝뚝해졌네적어도 나한테는 말이 많았던 거 같은데.”

 “3년이란 시간이...흘렀어.”

 

 3시간에 대한 감각을 유리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차원종들에게도 주어진 수명이라는 게 있다다만 차원종은 인간에 비해 사는 수명이 훨씬 길었다인간에게는 3년이라는 시간이차원종에게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일 뿐이다그걸 반증하듯성숙해진 세하에 비해 유리는 소녀 모습 그대로였다정확히 말하자면 재와 먼지의 힘을 받아들이고용의 힘까지 흡수해버린 모습에서부터 그대로였다.

 

 유리는 제 손에서 열심히 굴리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왕좌 구석에 내려놓고정자세로 앉아 비로소 세하와 마주보았다예전보다 더 짙어진 한 쌍의 보라색 눈동자와만만치 않게 어두운 빛을 내뿜는 금색 눈동자 하나가서로 시선을 교차했다제가 3년 동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의 새로운 버전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의 입술은 위로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저거도 가지고 싶다...’

 

 분명 세하의 눈동자에는 매료의 힘이 있는 게 분명했다그 눈을 마주하는 상대는 그 물건에 흥미를 꼭 가지기 마련이니까저것도 꼭 가져야겠어...

 

 유리가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소유욕을 꾹꾹 눌러내고 있는 동안세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꼭 죽기 직전의 사람의 얼굴인 거 같아서, 3년 전 자신이 세하의 눈을 뽑기 전의 얼굴과 비슷한 거 같아서 유리는 잠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이든 데자뷰든 뭐든일단 유리는 싸우고 싶었다그래서 왕좌에 가볍게 일어나 몸 풀기를 시작했다.

 

 “그럼 우리 그 때처럼 싸우는 거야?”

 

 아주 신나하는 목소리다.

 

 “...”

 “실력은 많이 는 거 같은데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이 위광을 버틸 리가 없고.”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고 자세를 잡는 유리를 멍하니 보며 세하도 어쩔 수 없이 건블레이드를 잡았다호전적인 유리를 보며 세하는 감히 궁전의 주인에 대해 간단한 평론을 했다.

 

 너와 나는 많이 달라져버린 거 같아세하는 절실히 느끼고 있는데그걸 유리도 알고 있는지는 의문점이다이제 그건...별로 상관할 바가 아닌 거 같지만.

 

 스타트는 유리가 먼저 끊었다어느 새 고고한 왕의 거처는 로마의 결투장같이 변모해버렸다.

 

 두 사람이 검을 맞닿을 때마다마지막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그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유리는 몰랐지만세하는 아마 알고 있었다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느냐는 세하의 손에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유리가 매몰차게 세하를 내몰고 있는 거와 다르게세하는 충분히 반격할 여지가 있었음에도 유리의 공격을 맞는 게 고작이었다그 이유를 말하자면세하는 아직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서 세하가 더스트에게 정보를 요구하던 때로 돌아간다더스트의 뜨거운 열풍을 맞고도 쉽게 버틴 세하를 보며 더스트는 짧은 박수를 쳤다소원대로 모든 지 물어보라는 더스트에게세하가 물어본 질문은 역시나 이거였다.

 

 -서유리를 되돌릴 방법이 있나있으면 빨리 불어.

 

 살아남을 걸 축하한다는 더스트에게 세하는 제 할 말만 했다역시나 그거였냐는 더스트의 미소는 참 짜증났다아마 그 뒤에 한 더스트의 말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없어.

 

 서유리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돌아갈 수 있다면 기적이라고 하겠지애초부터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라고 하는 거야그리고 내가 아는 한은 기적은 이미 네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걸로 수명은 다 한 거 같은데 말이야세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더스트는 그런 세하의 얼굴이 더 구겨지는 걸 보고 싶었는지 자비를 베푸는 척비스 무리한 해답을 알려주었다.

 

 -그 애를 구하고 싶어그렇다면 구하는 방법은 딱 하나야.

 -...

 -죽여.

 

 죽는 것만도 못한 인생을 계속 살 바에는죽는 게 구원이지 않겠어그 말이 끝나자마자세하는 더스트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해서 세하의 그 때의 표정이 어떤지 잘 볼 수 없었다하지만 떨리는 어깨를 보니 아마 절망적인 표정일 게 뻔했다그걸 생각하니 짜릿해서 마지막으로그리고 즉흥적인 기분에 의해 아주 큰 정보 하나를 더 내뱉었다.

 

 -곧 궁전의 문이 열릴 거야.

 -...

 -잘 생각해보라고그건네가 정할 일이니까.

 

 더스트는 그렇게 바람에 실려서 사라지는 먼지처럼 가버렸다더스트가 완전히 가버리는 걸 알고 나서야 세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드디어 너무도 길었던 여정의 끝이 보였기 때문에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에그동안의 긴장이 풀려서 주저앉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그와 함께 깨져버렸다비어진 게 아니라 통째로 사라져버렸다삶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을 때에는 무엇을 하면 되는 걸까세하는 그걸 끝내 찾을 수 없을 거 같다고 직감했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장 더스트가 말한 대로 궁전의 문이 3년 만에 열렸다그 안으로 세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점은 유리와 싸우고 있는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위광을 버틸 수 있을 거 같냐는 유리의 말처럼 세하는 점점 체력이 떨어짐을 느꼈다그렇다고 이렇게 끝까지 밀리기만 하다가 죽지 않을 순 있었다세하의 전투 센스는 노련해졌으니까.

 

 근데 굳이 반격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만이 유리를 가장 존중하며 보내주는 방법이라는 더스트의 말이 너무 께름칙한 까닭도 있었다.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는 둘 다 인간인 상태로 남아서 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근데 하늘은 왜 일부러 이 최악의 시나리오만 있는 상황을 내려주셨을까믿지도 않는 신에게 원망을 한참이나 퍼붓고 싶었다.

 

 그 틈을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유리의 검이 곧장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세하의 가슴 부분을 찔렀기 때문이다그래도 무의식중에 인간 시절의 세하에 대한 마음은 남아있었는지 세하의 고통을 가장 최소화할 수 있게 급소 부분을 정확히 찔렀다.

 

 세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즉사하진 않았다.

 

 “쿨럭...!”

 “...”

 

 세하가 거칠게 각혈을 했다유리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는데도 여전히 살아있는 세하를 영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그렇다고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다시 찌르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어차피 급소를 맞았으니 지금은 숨이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곧 심장의 고동이 멈출 거니까자기가 일부러 또 손을 쓸 필요는 없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검으로 찔렀기 때문에 세하와 유리의 거리는 생각 외로 좁았다유리가 검을 빼내기 위해 뒤로 살짝 내빼자세하는 그럴 힘이 남아는 있었는지 유리를 세게 껴안았다갑자기 당한 일에 유리는 당황하며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는데그런 유리에게 세하는 여의치 않고 이세하’ 라고 하는 희곡의 마지막을 마무리 지을 문장을 써 내려갔다.

 

 “역시...난 이러는 편이 더 좋아.”

 “....”

 “내가 어떻게......너에게...검을 겨눌 수 있겠......”

 

 처음으로 좋아하고사랑한 사람인데그래서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널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기껏 찾아온 행운을 모두 투자했다근데 난 도박 운은 좋지 않나봐망해버렸어실패했다...그래서 이 허무감을 어찌 잡아야할지 모르겠다그래도 일단 유리 너를 만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내린 결정은...

 

 오히려 이런 편이 더 낫다고 세하는 감히 주장할 수 있었다아예 없어진 구멍을다시 메울 자신이 없었다.

 

 불행불행하진 않았다행복행복은 했다아주 먼 과거에.

 

 눈물은 나지 않는다아니흘리기는 하는데 모르는 걸까모든 감각이 다 희미해진다예전에 한 번 겪어보았던 그거다난 이렇게 또 죽나보다.

 

 마지막이니까마지막이니까이젠 다시 말할 기회도 없을 게 뻔하기에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 한 것들을 술술 고한다.

 

 “좋아해...”

 “...”

 “사랑도 하고...”

 “...”

 “...”

 

 사랑할 거야그게 마지막이었다세하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흐릿해서 유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약간은 아쉬웠다정말 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또 만나겠지만...일단 잠깐 이별은 고할게.

 

 안녕...

 

 세하가 전혀 미동이 없자유리는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곤히 잠을 자고 있는 듯눈을 곱게 감은 세하의 얼굴을 보자 유리는 혼란스러웠다이렇게 평화로운 얼굴이 있을까심지어 자신을 두 번이나 죽이고눈까지 앗아간 상대의 앞에서그리고 죽기 직전에 본인에게 한 말도 참 아리송했다.

 

 ‘좋아한다고사랑한다고?’

 

 원망을 해도 충분할 상대에게...그런 말을 하다니도대체 뭐야도대체 뭐냐고!

 

 인간의 시절의 서유리는 어땠을까대략적인 인간관계는 알다만그보다 더 깊은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감정 그런 게 말이다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막은 거 같은데방금 전 일을 계기로 그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리에게 소리쳤다.

 

 -안 돼그 호리병을 열어선 안 돼!

 

 그 누군가는 눈물 젖은 목소리였다게다가 착각인지 유리 본인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난 지금 최고의 권위를 가진 용이라고위광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내가 못할 일이란 건 없다고유리는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하는 충고를 무시하고 호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느낀 감정은 허무함허탈감게다가 주체할 수 없는 슬픔까지.

 

 “...게 뭐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열지 말라고 했잖아...

 

 누군가아니 유리’ 는 자신의 말을 어긴 유리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작은 호리병에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을 수 있었는지 참 신기했다그래서 3년 동안 겨우 숨겨놓은 이 엄청난 감정에 유리는 본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세하가 누워 있었다그 꼴을 만든 장본인은 유리 자신이었다.

 

 “....”

 

 싫다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도대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냐는 말이야아아아아!!!!”

 

 발악하는 그 비명이 너무 처량했다목소리에는 물기도 한껏 젖어있었다감정이 묵직해질수록 유리의 몸을 덮고 있던 무거운 갑주는 사라져 갔다그렇게 세하가 정말로 사랑했던 시절의 유리로 돌아간 유리는 세하를 힘없이 흔들었다.

 

 “일어나 봐...”

 “...”

 “내가 잘못했으니까...그러니까...”

 “...”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기적이다더스트가 세하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유리는 그대로 또 오열했다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도 캄캄하여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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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의 세유로군요.

올해에 열릴 예정인 클로저스 온리전에 회지 두 권(세하유리, 세하슬비)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마감 때문에 바쁘지만, 지인분의 썰(새드 엔딩이라고 본인 언급)이 좋아서 이렇게 써보네요.

온리전과 회지 관련해서는 조만간 또 글을 쓸 거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스토리(9,612자) : http://leesehaxseoyuri.tistory.com/113





(+팬아트 추가)



루온님 작품






이제님 작품
2024-10-24 23:20: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