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Good day to die, hero
Karmel 2015-02-15 116
눈부신 날이었다.
누구는 연금도 못 받고 매일 골골거리면서 지내다가 잠깐 바람 좀 쐬려고 나왔는데 정말이지 너무도 화창해서 우울해질 정도로 눈부신 날이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신논현역은 언제나 그랬듯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러시아워’라는 이름의 전쟁이 합법적으로 일어나는 시간은 지났음에도 거리엔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청춘을 만끽하며 짧은 치마 아래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다리를 자랑하는 불량여학생들과, 약속시간에 늦었는지 구두를 신은 발로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손목에 감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회사원과, 나들이라도 나왔는지 아들의 손을 꼭 붙잡은 엄마까지.
“……하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날에, 마치 자신이란 존재가 화가의 실수로 툭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이 된 것 같아서 한숨을 쉬었다.
흰 머리에 노란색 선글라스. 거기다 생기도 없이 부스스 떠서 며칠 안 감은 것처럼 느껴지는 머리까지. 이미 얼굴부터가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안 어울리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니, 중년이라고 하기엔 얼마 전에 생긴 주름에 유달리 푸석푸석해진 피부를 봐선 ‘중년’이란 단어도 허락받지 못할 것 같았다. 해봤자 ‘노년’ 정도일까. 그나마 앞에 ‘꽃’이란 접두사라도 붙으면 위로가 될 것 같은데.
차라리 옷이라도 잘 입고 나올 걸. 그런 후회가 들었다. 목 부분이 늘어나서 후줄근한 면 티에, 낡아서 이곳저곳 실밥이 터진 가죽점퍼, 거기에 가로로 쭉쭉 찢어진, 검은 청바지. 예전 기분 좀 내보겠다고 무리하게 입고 나왔는데 폭삭 늙어버린 얼굴 때문에 오히려 수상함만 늘었다.
뭐하는 거지, 도대체. 그렇게 자조하고 있을 즈음, 그의 귀에 또랑또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여기 이상한 할아버지 있어!”
순간 ‘할아버지 아니야!’라고 욱할 뻔했다.
경련하는 뺨 근육을 느끼면서 시선을 돌렸더니, 아까 보았던 모자(母子)였다. 아들이 날 가리키며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이 제 엄마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취급이라니, 이제 박물관에 보관되는 문화재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이 거리에서 A급 차원종인 ‘말렉’도 잡았던 몸인데, 그 정돈 해주지 않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의 자신이 절로 고개를 저었다. 연금도 안 주는 유니온이 그런 태평한 짓을 해줄 리가.
“그럼 못 써! 죄송합니다, 애가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 오글거려. 이런 틀에 박힌 것 같은 말은 대장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허리를 굽히는 아이의 엄마에게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한참 때도 애들에게 ‘아저씨’ 소리를 들었는데, ‘할아버지’란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거에 일일이 화내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가뜩이나 돈도 없어서 건강약도 못 먹고 있는데.
‘잘 가요, 할아버지!’라며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를 받아주고는 가로등에 기대며 슬플 정도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세하 녀석이야 대장이랑 결혼해서 티격태격 알콩달콩 잘 살고 있겠지. 요즘도 그놈의 중2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가끔 남자애들이 장난감 건 블레이드를 들고는 ‘별빛에, 잠겨라!’라며 노는 걸 보곤 했는데. 아마 본인은 그런 걸 볼 때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벽에 고속으로 머리를 박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대장은……풍문으로는 요즘 완전히 여왕 속성…? 그런 게 각성해버려서 전투할 때마다 ‘내 앞에, 무릎 꿇어!’라고 외치며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다던데. 하긴, 수습요원 시절부터 ‘무릎 꿇어!’라며 은연중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긴 했었지. 안드로이드도 ‘큐브’의 대장도 여왕을 동경하는 것 같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유리의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있어서 잘 안다. 같은 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힘을 다루는 게 능숙하질 못해서 꽤 걱정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 폭발적인 가속 능력으로 고속기동타격대라도 이끌고 있다나. 차원문이 열리면 5분 안에 달려와서 별명이 ‘5분대기조’란다. 그다지 독특한 별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 어디서든 5분 안에 달려오는 클로저라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미스틸테인――――테인이는 CF에 나올 정도로 인기를 모는 클로저가 되었다. 지금 여기서도 시선을 조금만 올리면 맞은편 건물 옥상에 붙어있는 거대한 TV에서 나오는 저 음식점 광고에서도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지난주였나, 오랜만에 연락 좀 했더니 근처에서 여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인기남답게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부러운 녀석. 이 아저씨는 이렇게 혼자 쓸쓸히 살고 있는데, 인기 많아서 좋냐?
……후우. 한숨을 쉬고는 작게 웃었다. 나이 먹어서 무슨 꼴불견인지. 신강고에서 그 나사 빠진 경정이 충동적으로 고백했을 때도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던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애초에, 이런 쓸데없는 걸로 기분 잡칠 거였으면 왜 나온 건지.
“……내가 바깥에 왜 나왔더라…….”
……이젠 치매까지 오는 건가. 점점 더 암울해져가는 자신의 상태에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떨어드렸다. 정말로 박물관에 가서 박제나 해달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이 아무에게도, 정말 슬프게도 단 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곤 나지막하게 숨을 들이켰다.
「위상력 호흡」.
공기 중에 떠도는 위상력을 흡수하는, 박심현 요원이 ‘반칙’이라 불렀던, 자신의 싸움방식.
이걸 왜 갑자기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투 상황도 아니고, 쓸 일도 없다. 그저 ‘난 아직 쓸모 있다.’라는 걸 확인하고 싶은 발악이었던 걸지도.
그리고 그 발악을, 약해질 만큼 약해진 몸은 질타했다.
“쿨럭!”
단 한 번 흡입했을 뿐인데, 벌써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소량이지만, 두 번 했다간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정말로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클로저로서는, 완전히 퇴물이군. 예전엔 그래도 싸울 수는 있었는데. 약도 없으니 완전 끝장인가. 애들 얼굴을 보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허탈한 나머지 ‘하핫…….’하고 웃어버렸다. 애들 앞에선 그렇게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살아왔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때였다.
“ 꺄아아아아아악 ! ”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렇기에 더 슬픈 날이, 한 여성의 비명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아까 자신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른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감싸며 몸을 웅크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엔――――――
“ 펀 치 ! ”
……난, 지금, 뭘 한 거지?
머리가, 이성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어느새 몸은 주먹을 곧게 뻗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을 즈음엔, 벌써 반대쪽 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퍼컷을 날리고 있었다. 그 주먹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위상력이 담겨 있었다.
스캐빈저 인간사냥꾼.
크기는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차원종이지만, 검을 휘두르는 녀석들은 충분히 일반인에게는 재앙이었다. 그것도 1마리가 아닌, 최소 10마리라고 한다면.
“왜 여기에 차원종이?!”
아니,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니다. 자신은 거기까지 해결할 능력은 없다.
그렇게 판단하곤 이를 악물었다. 벌써부터 몸에 부작용이 오기 시작했다. 「음이온 펀치」 한 번, 추가타도 안 썼는데 벌써 속이 흔들린다. 스캐빈저를 친 주먹이 얼얼하다.
“어서 도망쳐!”
“하, 하지만 벌써…!”
“……칫……!”
포위당했다. 음이온 펀치를 맞고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진 스캐빈저가 ‘키익, 키익!’하고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 어느새 나와 두 모자(母子)는 편의점을 등지고 스캐빈저 떼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5분이면 돼! 그 정돈 버틸 수 있어!”
‘5분대기조’라고 불리는 서유리. 검도 대회 결승에서 위상력을 각성해 반칙패를 당한, 검고 긴 생머리의 클로저. 믿을 건 그 아이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클로저야?”
이 상황에서도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에,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난, 클로저인가?
―――――――하, 난 뭘 고민하는 거지?
“……아아, 그래. 내가 지켜줄 테니까, 들어가서 기다려. 그리고―――――”
난 할아버지가 아냐. 그렇게 덧붙이곤 씩 웃어보였다. 언젠가,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향해 보였던, 그 실없는 미소를 다시 짓는 날이 올 줄이야.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그만두라는 몸의 항의를 머리가 묵살할 정도로.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 판단은 내가 한다!’였나? 막나갈 때마다 세하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후우……약빨 좀 받아볼까?”
마지막 한 병 남은 건강약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대사를 내뱉곤, 그대로 들이켰다. 얼마 버티지도 못할 발악. 아마 자신에게 죽는 날이 온다면 바로 오늘일 것이다. 어느새 30마리로 늘어난 스캐빈저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후우―――――.”
길게 호흡하여, 위상력을 끌어올린다. 한계까지. 몸이 비명을 지르지만, 머리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지금 기분 최고라고.
“――――――버텨라, 내 몸!”
「오메가3 러시」. 1초에 수십 번 내질러지는, 위상력을 담은 주먹이 편의점 문 앞을 가로막은 그에게 접근하던 스캐빈저들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된 공격에 공황에 빠진 차원종들은 당황해서 두 걸음, 아니, 세 걸음은 물러났고, 약 3초 정도, 글로브도 없이 주먹을 휘두른 중년의 남성은 피부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 주먹을 다시 되돌렸다.
절대 이곳은 못 지나간다. 지나가고 싶다면 그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허억, 헉, 쿨럭…! 허억, 헉……헉…….”
얼마나 지났을까.
30마리는 넘어가던 스캐빈저의 수는 어느새 4마리로 줄어 있었다.
마치 장판교의 장비가 빙의되기라도 한 듯, 남자의 주먹에는 위상력을 뛰어넘은 ‘귀기’가 서려 있었다. 분명 다리도 후들거리고 주먹도 피부가 다 벗겨져서 하얗게 뼈가 드러나고 있었는데도, 남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캐빈저가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눈빛은 날카로워져만 갔고, 주먹에 담긴 위상력은 강해져만 갔다.
그에 남은 스캐빈저들도 질려버렸는지 다가올 생각은커녕 자기들끼리 뭉쳐서 벌벌 떨 지경이었다. 그 많던 동료들이 저 빈약하고 너덜너덜한 주먹에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 그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쿨럭…! 유리야, 언제 오는 거냐…!”
‘5분대기조’라고 해놓고 벌써 20분은 지났다. 중간에 다른 차원종 무리라도 마주친 걸까. 아니면 사실 여긴 미끼고, 중간에 매복이라도 당한 것일까.
피를 토하고,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다리는 떨리고, 두 주먹의 감각은 점점 없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 그의 옛 동료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속도라면 벌써 도착해서 상황을 정리했을 텐데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신의 등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편의점 알바와 연신 ‘할아버지 파이팅!’이라며 자신을 응원하는 저 아이, 그리고 그 엄마를 지켰다는 것. 퇴물 중의 퇴물이라 불리는 자신도 무언가 할 수 있었다는 것.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그것」만큼은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걸」 쓰면 분명 자신은 죽는다. 지금도 스캐빈저 하나 잡는 데에 이렇게 힘이 드는데, 자신의 몸이 그 흉폭한 녀석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4마리쯤은,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한 걸음, 남은 스캐빈저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전진했을 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이렇게 생각했을 때마다 사건이 터졌던 거 같은데.
직후, 그는 탄식했다.
“……빌어먹을……!”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숫자는 단 하나.
“마나나폰……!”
새로 나타난 적의 이름을 원망스럽게 중얼거려본다.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뚱뚱한 배를 자랑하며, 어깨 위엔 스캐빈저 조련사를 데리고 닫히기 직전의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녀석은, 거대한 손으로 박수를 팡팡 치면서 남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던 터널이, 돌연 무너지면서 앞뒤가 막혀버렸다.
도망칠 체력도 남지 않은 상태. 편의점으로 도망치자니 저 녀석의 괴력이라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려버릴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고 저 덩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지금 이 몸의 상태론―――――――
―――――――하나, 있었다.
“하,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쩐지 날이 화창하더라니.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주머니에서 두 병의 약을 꺼냈다. 청색의 라벨과, 녹색의 라벨. 이걸 마시면 자신은 분명하게 죽는다. 더 이상 이런 눈부신 날은 ** 못하겠지. 애들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눈물이 나왔다. 예전에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칼바크 턱스를 쓰러뜨리고, 크리자리드 블래스터를 막고, 용을 쓰러뜨리고, 이후로도 수많은 사건에 휘말렸던 동료이자, 후배들의 얼굴이……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 힘내! 할 수 있어! 저건 그냥 돼지라고!”
우울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꼬마가 손을 번쩍 들며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속은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그 눈에 비친 것은 분명 푸석푸석한 흰 머리에 수경이라고 해도 믿을 노란 선글라스를 낀――――――――
“……하핫.”
슬픈데, 눈물이 나오는데,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나왔다.
서글픈데,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것은, 분명,
“ ――――――― 돌아와라, 나의 파워 !! ”
―――――그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이, 『영웅』이었기 때문이리라―――――
「다시 돌아온 나의 전**」.
급격하게 상승하는 위상력에, 공기가 터져나간다.
근육이 팽창한다. 혈관이 찢어지며, 온몸에서 비상이 걸렸다. 이미 세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치고 있었다. 미쳤냐고, 죽고 싶은 거냐고.
그리고 여전히, 머리는 그걸 묵살했다.
쿵 !!
왼발로 강하게 지면을 내리찍으며, 피가 흐르는 입에 미소를 띄운 그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한 번 버텨 보시지!”
직후 이어지는 것은, 주먹의 폭풍.
다 죽어가는 몸은 그래도 주인의 명령이라고, 입력된 커맨드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정확하게 동작을 이어간다. 뼈가 다 보이는 주먹이 단단한 마나나폰의 피부에 부딪혀 깨지지만, 연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 부서진 주먹에 실리는 위상력은 끊임없이 폭발하면서 마나나폰을 타격하고, 내부에 상처를 입힌다.
수십, 수백의 난타 후, 작렬하는 발차기. 위상력을 머금은 발목은 부러지면서, 최소 200킬로그램은 될 마나나폰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리고 그 마나나폰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번 일격으로 손목까지 부러지겠는걸.
콰아아앙!
태평하게 큰일 날 생각을 넘기곤, 주먹을 마나나폰의 배에 작렬시킨다. 물리적으론 아무런 피해도 없을 그 발악을, 사나운 기세의 위상력이 잔혹한 폭력으로 바꿔버린다.
지면에 박히는 마나나폰.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그 배에 이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오른팔을 휘두른다. 추가타다.
콰아아아아아앙 !!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 충격파에, 남아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4마리의 스캐빈**지 날아갔다. 이로써 남은 적은 0.
임무 성공이었다.
“……하핫……쿨럭!”
해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부작용.
다 깨어진 아**트 도로 위에 쏟아지는 거무죽죽한 피를 보며, ‘핫’하고 코웃음을 친 그는 그대로 가로등에 기댔다.
죽을 것 같다.
“와, 할아버지 짱 멋졌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편의점에서 달려 나와 남성 앞에 선 아이의 말에, 히죽, 웃은 그는,
“아아, 괜찮아.”
라며, 늘 그랬듯, 허세를 부렸다.
무리하지 말라고, 건강이 제일이라고, 늘 그렇게 말하던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다. 후회도 안 되는데 고민해서 뭐할까.
그래도, 허세를 부릴 거면 끝까지 부려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아이에게 물었다.
“저기, 사탕 하나만 가져다주겠니?”
“사탕? 응!”
곧바로 편의점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그는, 그래도 아직 움직이는 왼손으로 오래된 스마트폰을 들어 몇몇 글자를 쓰곤,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유달리 화창한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사탕을 사오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탕을 쥐곤 이로 포장을 벗긴 그는 입에 사탕을 물며 다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구경했다.
◈
“아, 정말, 다들 왜 보고가 없는 거냐고!”
설마 이 나이 먹어서까지 게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해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분홍색 머리의 여성은 정신없이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불평했다.
연락을 받은 것은 30분 전.
신논현역에 갑작스런 차원종의 출현으로 유니온과 신서울은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5분대기조’ 서유리가 출동했지만, 가는 도중에 또 다른 차원문이 열려 바로 전투 시작. 허겁지겁 남편이 출동했지만, 지금쯤이면 도착해서 상황을 보고했어야 하는데도 연락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리더인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정하고는 지금 이렇게 현장으로 가는 중인데,
“…응?”
5층 건물 옥상에 도착한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긴 생머리에, 푸른 치마에 블레이저를 입고 있는 여성. 보통 위상력을 쓰면 쓸수록 머리카락의 색이 변하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윤기 있는 검은 머리를 유지하는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주목한 것은, 그 옆에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이다.
한 명은 처음 언급한 동료와 같이 검은 머리를 가진 남성으로, 여성에 비해 두꺼운 검을 들고 싸우는, 자신의 남편. 전설적인
클로저를 어머니로 두고, 훈련생 시절부터 티격태격 싸우며 고운 정 미운 정 쌓으며 결혼에 골인한, 그녀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건 말쑥한 정장의 청년으로, 회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체형이 특징인, 전형적인 왕자님 스타일의 클로저. 손에 든 거대한 창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활동했던, ‘말 잘 듣는 남동생’ 포지션의 소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며 분홍색의 단발을 갸웃거린 그녀가 생각했다.
왜 다들 저렇게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거야? 유리는 왜 주저앉아 있는 거고? 아니, 차원종이 나타났는데 그이는 무기를 떨어뜨리고 있네? 테인이도 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 같고…….
결국 내려가 보기로 했다.
“뭐야, 여기서 뭐해?”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유리는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남편마저 고개를 떨어뜨릴 뿐.
그나마 테인이가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기에,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는,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부스스하게 뜬 흰 머리와 수경에 가까운 샛노란 선글라스. 피가 묻어서 빨갛게 물든, 다 헤어진 면 티셔츠에 중간 중간 잘려나간 가죽점퍼.
입가엔 피가 흥건하고, 한쪽 다리는 부러졌는지 각도가 이상했으며, 오른팔은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시선을 둘 수 없다. 그렇다고 왼손이 무사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라서, 대체 이 사람이 여기서 뭘 한 건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 아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신논현역이고, 차원종이 출현했다던 소식은 30분 전에 왔으며, 보고해야 할 그녀의 동료들은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저 이상한 남자 앞에는 펑펑 울고 있는 아이와, 아들을 감싸 안으며 같이 울고 있는 아이의 엄마.
무엇보다 온몸에 난 저 상처들과 아스파트의 균열……. 분명 전투의 흔적이다.
“제이……씨……?”
연락도 잘 안 하던 그녀의 동료. 별 소식이 없기에 잘 지내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여기 근처에 살았던 걸까? 옷은 왜 저렇게 낡은 걸 입고 있는 거지? 연금은 뒀다 어디에 쓰는 거야?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저씨,
왜,
어째서,
여기서,
그러고 계신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음.
믿기지 않은 현실에, 머리가 전력으로 활동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저 명령도 받지 않은 몸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강제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저, 씨…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건강이 제일이잖아요? 늘 입에 달고 살던 그의 대사를 떠올리면서, 그의 앞에 섰다.
가로등을 기대고, 입에 사탕을 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잔잔히 웃고 있는 그의 앞에.
털썩.
결코 알고 싶지 않았을 진실과 마주한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언제까지고 이상한 아저씨로 남아줄 줄 알았는데. 술 마시고 싶을 때 부르면 ‘무슨 소리야, 나 그런 거 끊었다고.’라며 빼고, 자신이 사겠다고 하면 마지못해서 어울려주는, 그런 삼촌 같은 존재였는데.
완전히 넋이 나간 그녀의 눈에 문득, 화면이 쩍 금이 간 스마트폰이 하나 보였다.
그다지 좋은 기종은 아닌데, 왠지 눈길을 끌었다. 마치 그녀가 그 자리를 볼 거라고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녀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그 사각형의 전자제품을 본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눈앞에 있는 남자의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화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 Good day to die,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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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소설 몇 편 보고 올려봅니다.
제저씨 소설은 명예의 전당에 없는 것 같아서...
쓰려고 했던 것보다 못 쓰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