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먼지를 털어내다 - S의 경우

루이벨라 2018-08-12 6

※ 암광세하 x 암광유리
※ 전편 『먼지를 털어내다 - Y의 경우』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3514/
※ Y의 경우에서 이어지지만, 결말이 약간 달라져서 유리가 패배했을 때 이후의 이야기





 -이제...끝인건가?
 -바아보오~ 그런 대사는 함부로 읊는게 아니라고~
 -뭐, 뭐야...? 네가 왜 여기에...?!
 -가끔은~ 머리를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요~ 잘 가, 서유리. 그동안 즐거웠어.
 "..."

 뇌리 속에서 플레이되던 영상이 그 부분에서 끊기자, 고요하게 앉아만 있던 소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의 눈은 흉흉한 보라색이었다.



* * *



 땅이 갑자기 갈라졌다. 게다가 연이어서 계속 터지고 있었다. 이거 하나로 영지 내의 차원종들은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왕이...화났다!

 이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차원종들이 공포에 떠는지는 지금 왕의 궁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구역에서조차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왕은 늘 평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희로애락의 조각, 아니 '점(.)' 조차도 안 보이는 이상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게 뻔했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왕이 실제로 보여지는 허상이리라는 주장도 있었다. 왕의 업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실, 온전히 그 옆에 꼭 붙어다니는 왕과 같은 갑주를 입은 여자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런 자가 땅이 갈라지는 위력만큼의 아우라를 뿜어낸 게 예사 일은 아니었다. 혹시 기쁘기 때문에 순간 힘을 제어하지 못한 걸까?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일으킨 지진의 강도가 못내 분에 겨워보였다.

 천재지변이 터지자, 왕의 측근(유리를 제외한)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왕의 방 앞에 모여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 하나가 이 문을 열어 왕과 직접 마주봐야 하는데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왕의 이런 태도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들 두려움만 앞서고 있었다.

 "이봐, 자네가 열어보게."

 붉은색 뱀이 푸른색 뱀에게 권유했다. 그러자 푸른색 뱀은 없는 손으로 손사레를 치며 마다했다.

 "무슨 말인가, 자네가...!"
 "어허, 아니 이건 당연히 자네가..."

 의미없는 입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문이 스스로 열렸다. 안에 있던 왕이 친히 연 것이다. 스스로 왕좌에서 일어나 문까지 열어 방에 나오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행동으론 진노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세하의 표정과 목소리는 의외로 평온했다.

 "뭐하나."

 그러니까 왜 내 앞길 막고 있냐는 것이다. 측근들은 황급히 길을 텼다.

 "어인...일로 이리 나오셨습니까?"

 그 중의 용기 있는 황색 뱀이 세하에게 물었다. 세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먼지 청소."

 예상하던 일이다! 여기서의 먼지는 당연히 더스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좋긴 하다. 사령관을 잃은 군대에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니 딱 알맞은 일이었다. 근데 마냥 좋아라하기엔 지금 컨트롤이 안 되는 듯한 세하의 위광에 전쟁터에 나가기도 전에 먼저 숨이 막힐 거 같았다. 그 중엔 벌써 힘겹게 기침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들의 왕의 이런 결정을 믿을 수 없었는지 이번에는 초록색 뱀이 친히 물었다.

 "직접?"
 "응, 직접."
 "친히?"
 "응, 친히."

 그리고 그 끝엔 너희들은 안 따라와도 된다, 라는 말도 남겼다. 세하를 따라가다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네 마리의 뱀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짜다! 진짜였다! 정말 직접, 친히 더스트와 붙을 모양이었다. 손에 쥔 검에서 먼지를 탈탈 터는 왕의 모습은 참 경이롭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왕이 정말 화가 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직접 출전하는 건 좋은데 움직일 때마다 쩌적쩌적 갈라지는 땅은 좀 조율을 해주면 좋겠다고 네 마리의 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오붓하게 기다리는 동안 단잠에 취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은 계속 울리는 진동 때문에 자연스레 고이 접게 되었다. 천재지변이라도 난 듯, 땅은 계속 흔들리고 하늘의 상태는 영 좋지 못하다. 천재(天災)라도 오려는 모양인가? 아니면 인재(人災)? 더스트는 후자일거라고 예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향해 유유하게 걸어오는 점 하나가 누구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너무 멀어서 점으로 보이는 그 자는 빠른 속도도 아니고, 느긋하게 자신의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혼자 온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이내 주변 상황의 처참함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는 더스트는 자신의 방금 전 발언을 곧바로 정정했다.

 "그건 아니겠지...하긴 저 정도의 걸어다니는 폭격기 수준의 뒤를 쫓아오는 멍청이는 없을 거야."

 더스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그 폭격기가 자신을 향해 오는 거에 대해서 생각 외로 참으로 태연했다. 한 명을 잡으면 나머지 한 명이 어쩔 수 없이 나타날 것이다, 라는 추측을 얼추 했기 때문이다. 한때 호기심을 가졌던 자이지만, 지금은 전혀 좋게 볼 수 없는 더스트는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본인이 힘을 쓰지 않는데도 맞닿는 공기가 후텁지근하다. 자신도 열풍, 열을 조종하는 자였다. 적어도 자신의 열풍보다 더 뜨겁고 메마른 것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그 생각이 어쩌면 바뀔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이 참 수치스러웠다.

 "열과 열...참 좋은 구경이 될지도 모르겠네."

 싸우는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에게는 메말라 죽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더스트는 갑자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세하의 열기마저 흡수하게 된다면 자신의 열풍을 당해낼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람은 움직이기에 상황을 변화시키는 건 비교적 쉬운 편이다. 반면 공기는 바람에 비하면 정적이다. 후자로만 상황 변화를 꾀하기에는 힘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그런 이 둘이 합쳐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참에 확실하게 짓밟을 필요도 있지. 싹조차 나지 못하게 녹여버릴만한 열풍을...!'

 완성시키는 것이지. 저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라 더스트의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 * *



 세하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토벌의 대상은 대담하게 세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호! 안녕, 이세하?"

 활기찬 저 말투는 누구를 따라한 게 분명하겠지. 안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 속과는 달리 세하의 입에선 냉담한 말이 나왔다.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예전의 정을 따지고 들어가면 인사 나눌 관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항상 동문서답의 대화가 오고갔던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저런 대사에 대꾸하는 거 자체가 힘 낭비였다.

 더 이상 대화에 어울려주지도 않고 검을 뽑는 세하를 보며 더스트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뭐야, 정말 날 죽이려 온 거야?" 

 당연한 건 왜 묻는지. 자신의 참모장과 연락이 끊겼을 때의 대할 수 있는 왕의 행동은 생각보다 범위가 좁다. 심지어 그 둘 사이가 돈독했다면 더더욱. 더스트는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작은 틈이라도 발견해야 왕의 공격을 유연하게 대처하거나, 오히려 역공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데 네 힘으로 날 정말 죽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
 "제 어미랑 달리 날 죽일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자가..."

 퍽-- 가느다란 섬광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그 직후, 더스트는 따끔한 감각에 제 오른쪽 뺨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그어진 생채기에 더스트는 자신이 세하에게 도발하면서 꺼낸 말이 모순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날...상처 입힐 수 있어?"
 "네가 친히 준 힘인데,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난 불사라고. 아무리 심한 치명상을 입어도 난 살아! 그런데 어떻게 날 벨 수 있는거지?"
 "내가 내뿜고 오던 기운이 단순한 열기뿐이라고 생각했나?"

 맞다. 용의 위광. 용을 쓰러뜨린 자가 다음 세대의 용이 되기 위해 선대로부터 물려받는 특권. 유리를 상대할 때는 위광의 기미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다. 애초에 위광은 온전히 세하가 다 가지고 있었다. 전장에서 한번도 모습조차 내보이지 않는 자의 정보를 완벽하게 알아낼 수가 없던 것이 분했다. 

 더스트는 자신의 실을 인정했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웃음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이건 과거의 자신이 너무 교만했다는 것에 대한 자조다.

 "힘을 반으로 나누었기에, 그 강력한 위광이라고 해도 별반 소용이 없는거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구나."
 "..."
 "전략이라면 좋은 전략이야. 하지만 동료를 희생해서 얻는 승리를 너는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상대를 더 조롱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자세를 잡는데 순간 휘청거렸다. 위광이라는 거, 이렇게 위압적이었던가. 더스트의 움직임이 점점 더뎌지는 걸 확인한 세하가 고했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많이 화난 상태라서..."
 "..."
 "힘 조절이 평소보다 더 안 될 거 같아."

 화난 사람이 그렇게 무덤덤하게 말하냐? 세하는 반차원종화가 되면서 표정의 대부분을 무뎌졌다. 대신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그의 감정을 대변해주었다. 더 섬세해지고 더 대범해졌다. 더스트는 이제는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말만 계속 내뱉었다.

 "내가 말했지? 난 불사라고. 난 죽지 않아!"
 "그래도 상처는 입잖아."
 "..."

 촌철살인의 말에 더스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에 세하는 또 확인사살을 하였다.

 "아파하잖아."
 "..."
 "난 그거면 돼."

 적어도 분풀이는 되니까.

 어떻게 된 게 둘 다 똑같은 말만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왜 화풀이 인형이 된건지! 더스트도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아까 전의 유리와의 막상막하의 전투에서 입은 데미지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아, 힘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그 전에 먼저 먼지로 만들어줄테니!"
 "내가 여기에 온 건 그러려고 온 건 아닌데."
 "이게...!"
 "그리고 아까부터 네가 불사라는 걸 너무 강조하고 있어서 말인데..."

 세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도 덤.

 "계속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죽지 않을까?"
 "..."
 "실험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

 가볍게 검을 드는 세하의 폼에서는 도저히 전투를 방관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 세하의 힘은 넘치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더스트는 살짝 버겁기까지 했다.

 시작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열이 세하에게 향하면서 막을 올렸다.



* * *



 쿵- 쿵- 불특정한 간격으로 일렁이는 폭발음과 흔들림에 유리가 눈을 떴다.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많이 아파왔다. 쓰러진 척을 했던 더스트에게 방심하여 허점을 보인 후로...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세하에게 더스트를 쓰러뜨리고 온다고 당당하게 말을 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세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자신의 군대들은 많이 뒤로 밀려났을까? 더스트에게 역공을 맞은 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잘 가늠이 안 갔다. 그래도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면 세하에게 무슨 일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라는 결론으로 도달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뭐 때문에 이 건물은 계속 흔들리는 거야?! 게다가 덥고 습하기까지 하고...

 덥고 습해? 잠깐, 이 열기는 분명 더스트 혼자만의 열기는 아닌 거 같은데?! 유리는 곧장 한 인물을 떠올렸다.

 설마, 그 인물이 여기에 있다는 확신은 안 들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그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니까 제외하기로.

 "가야...겠다."

 빨리 가서 확인해야하는데, 만만치 않는 전투를 치른 몸은 지멋대로 엇나갔다. 뼈는 비명을 지르고, 근육은 엄살을 피우고 있다. 그럼에도 가야만 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벽을 짚고 걷는데 1층씩 내려갈수록 열기는 후끈하게 유리를 반겼다.

 아무래도 지금 1층에서...누군가가 누군가와 지독하게 싸우는 거 같았다.



* * *



 계속 들리는 파찰음은 누군가가 벽에 부딪히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공기가 부딪힐 때마다 녹아내린 기둥으로 인해 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둘 다 압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더스트가 먼저 돌풍으로 견제를 하면 세하가 검 혹은 위광으로 그걸 내리깔고, 그 직후 접근해서 더스트에게 상처를 입히는 식의 전투였다. 꽤나 단순한 방식의 반복이었지만 세하의 1차 목적은 더스트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거였기에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덤으로 용의 위광이라는 것이 점점 더 더스트를 압박하니 버거워졌다.

 더스트가 손길로 작은 열풍을 내보내자, 세하는 가볍게 손으로 막기까지 했다. 열을 정점으로 조종하는 자에게 지금의 더스트의 열은 차갑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만큼 더스트의 체력은 지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화상을 입어 옅은 분홍색으로 부어오른 팔을 잡으며 더스트가 짜증을 부렸다.

 "정말이지...어미든 아들이든 날 방해하는 건 똑같네."
 "..."
 "어미는 '나' 를 형체가 있게 만들어, 상처를 입히기 쉬운 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들내미는 지금 내게 이렇게 반항하는 것이!"
 "반항한 적은 없어. 애초에 우리는 널 따른 적도 없고."

 휙- 세하가 검을 더스트를 향해 던졌다. 빠르게 날아온 것이 아니라 피했지만, 2차적으로 검이 꽂혀진 주변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그 불길에 더스트는 다리를 상처입었다. 더스트의 움직임이 확실히 둔해졌다. 여유 있게 던진 검에도 버거워하면서 숨을 내쉰다. 세하는 더스트에게서 이때까지 배운 말을 따라하며, 작은 여왕이라 칭하는 이를 조롱했다.

 "열풍을 다루면서, 열기에 약하다는 것이 참 우습네."

 사실은 열기에 위광도 같이 덤하고 있는 것이지만. 더스트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방향을 틀어서 협상을 시도해보자는 쪽으로 돌렸다.

 "그래, 내가 너보다 먼저 지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난 치유 능력도 없고. 하지만 그럼에도 난 죽지 않아. 넌 날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렇겠지."
 "너도 나보다는 아니지만, 지금 체력이 떨어지고 있잖아. 서로에게 있어서 손해일 뿐이니까 이쯤에서 휴전하자고."

 그리고 어느 날, 통수를 치면 되지. 너희들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세하는 더스트가 생각하는 '너희' 에 해당되는 자로, 자신이 직접 해본 일이기 때문에 일말의 싹을 바로 잘랐다. 대신 선택하게 해주었다.

 "죽일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의 선택이지만 물리적으로 못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하면 돼."

 왕은 두 가지의 선택권을 친히 주었다. 힘을 모조리 빼앗길래, 아니면 봉인당할래? 더스트는 둘 다 싫었다. 그러자 왕은 사근사근 웃었다.

 "그럼 억지로 할 수 밖에."
 "참으로...잔인하고 비정하시네!"

 이제 아무것도 안 통하지 않는 현실에 더스트는 쓰게 웃었다. 애쉬가 보고 싶어졌다. 자기와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자신의 동생이.



* * *



 유리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사실 2층 언저리부터 성을 흔들던 진동이 멎이기는 했다. 그래도 어차피 바깥으로 나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1층으로 온 유리는 낯익은 인영을 보았다.

 유리는 무심코 말이 나갔다.

 "어라...? 세하가 왜 여기 있는 거야?"
 "..."




(무니젱(@moonow_rwby)님의 팬아트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돌아본 그 인물은 진짜...세하랑 똑같이 생겼네? 유리는 자신이 지금 더스트와의 전투 후유증으로 인해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세하와 닮은 이는 유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유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잠시 멍해있던 유리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짜...세하?!"
 "내가 이세하가 아니면 누구겠어."
 "세하 네가...밖으로 나왔어?"
 "넌 그게 제일 신기하냐..."

 감동의 재회를 생각했건만 유리의 엉뚱한 발언에 세하는 내심 서운했다. 유리는 주위를 휘- 돌려보며 세하에게 또 물었다.

 "더스트는?"
 "이제 없는 존재...라고 치자."

 가정을 애매하게 하네. 그래도 일단 주변에 더스트가 없기는 했으니 믿기로 했다. 유리는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먼지 털어버린다고 했는데, 세하가 선수치네."
 "네가 도중에 쓰러졌잖아. 그래서 화가 나서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화...났어?"
 "응..."

 그래서 이렇게 성 안은 물론이고, 바깥 풍경이 처참한 거였구나...이래서 유리가 세하를 밖으로 되도록 안 보내려고 했고, 세하도 그걸 순순히 따랐다. 유리는 세하의 품에 쏙- 안겼다. 이건 수고했다, 는 의미의 포상. 세하는 그런 유리의 머리 위에 떨어진 먼지를 탈탈 털어주었다. 아무래도 무너지는 벽을 타고 내려오다가 묻은 거 같았다.

 큼- 유리는 세하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응? 위광이 좀 짙어진 거 같은데?"
 "착각일거야."
 "그리고 세하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좋은 거...아니었나?"
 "좋지, 당연히."

 그러니 앞으로도 말 많이 해주기. 그리고 얼굴 근육도 지금과 같이 풀어주기. 당장의 장애물이 딱히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면 해줄 수 있는 거지? 유리의 투정에 세하가 살짝 웃었다.

 "돌아가면 해줄게."

 세하가 저렇게 웃는 걸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눈물이 번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유리는 세하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행복하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하다.

 행복한 꿈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영원하기를.





[작가의 말]

39일만에 후속편이네요.
더스트를 토벌하러 간다, 라는 내용을 정했을 때부터 루트가 2개(예를 들어 'Y의 경우' 는 '유리가 처치한다' 인거죠)였는데 그걸 이제야 다 쓰네요.
기다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2024-10-24 23:20:0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