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나요 - 4-2. 미끼(Decoy)
TriaStellae 2018-07-14 3
※ 바로 이전 편인 4-1화에서 이어집니다..
이것을 보시기 전에, 이전 편인 4-1을 먼저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플레인게이트 안의 여러 차원들을 공략하다보면, 이 바이러스를 풀 수 있는 힌트가 나온다 이 말이지?"
지금까지의 대화를 쭉 정리하며, 무언가를 잔뜩 적은 수첩을 보며 이슬비가 말한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앳된 나이의 소녀는 자신의 마스코트인 동그란 안경을 고쳐쓰고서, 잠시 이세하와 서유리의 얼굴도 바라보더니 잔뜩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너희가 와서 망정이지, 만약에 너희까지 없었다면 정말 끔찍했을거야. 이게 다 닥터 그레모리, 그 녀석 때문이야!"
"흣쨔! 내 이름을 불렀어?"
갑자기 여러 대형 모니터들에 일제히 장난기가 넘쳐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심술궂게 키득거리며 혼자서 재미있게 웃고 있는 저 녀석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바로,
"닥터 그레모리!"
"오랜만이야, 검은양 팀. 너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마워, 닥터 최보나. 상으로 모든 바이러스를 풀어주겠어."
"뭐야, 몇 시간 전에는 분명 플레인게이트 내부 탐사를 해야만 풀어준다고 했잖아!"
"그거야, 이 초천재 그레모리 박사님께서 검은양을 부르기 위한 계략이지. 너는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주었어, 닥터 최보나."
"뭐야!"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검은양 팀은 이곳에 오지 않았겠지.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거든."
아까도 분명히 비슷한 말을 했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최보나는 그레모리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이유,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궁금함은 그녀만이 아니라 검은양 팀의 이슬비 역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고… 그런데, 너희는 왜 세 명 뿐이야? 그 약꼴 실험체랑 귀여운 실험체는 어딨어? 강아지들은 또 어딨고?"
아마도 제이와 미스틸, 그리고 늑대개 팀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그들은 뉴욕에서 김유정을 도와 별도의 임무를 수행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슬비가 설명한다.
"없어. 그들은 다 뉴욕에 있거든."
"흥. 아쉽게 됬어. 하지만 괜찮아, 너희 세 명만으로도 충분하거든."
"아까부터 혼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를 찾은 이유가 뭐야? 우리도 바쁘거든?"
"비싸게 굴지마, 이슬비. 어차피 너희는 나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게 될테니까."
"알 수 있게 말해!"
"좋아! 그러면 너희 세 명을 특별히 이 초천재 그레모리 박사님의 연구실로 초청하겠어. 빨리 오지 않으면, 또 다시 너희의 연구자료를 모조리 삭제시켜버릴거야?"
"…"
이슬비는 최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의중을 묻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임으로써 이슬비에게 허가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레모리를 향해 날카롭게 말을 쏘아낸다.
"닥터 그레모리, 이 친구들에게는 모두 다 이야기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검은양 팀이 네 연구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테니까!"
"후훗, 무서운 걸? 하지만 걱정마, 이건 나에게도 너희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만한 '거래'이거든. 자세한 건, 검은양 팀이 이곳으로 오면 말씀해주겠어. 그러면 어서 오라고, 그러면 잠시 후 보자고."
곧 모니터 화면이 제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레모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아무도 이에 대해서 말은 없었지만, 저절로 이 플레인게이트 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검은양 팀에게 쏠린다. 그리고 검은양 팀 역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도 아무말 없이 최보나만 바라볼 뿐이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최보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마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부탁할게. 이슬비, 서유리, 이세하, 부탁이야. 그레모리 박사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주었으면 해."
부탁이야, 라는 말을 끝에 덧붙이는 안경잡이 소녀는 이제 자신이 할 말은 다 한 것인지 더이상 아무말 없이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검은양 팀에게는 승낙과 거절의 기로가 주어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들이 여기에서 거절을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최보나의 친구이며, 또한 클로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출발할게. 세하야, 유리야, 가자."
"보나를 위해서라면!"
"보나를 위해서라면."
서유리와 이세하는 각자 같은 말을 짧게 대답하고서 리더의 지시에 순응한다.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검은양 팀은 차원문을 유지시키는 거대한 기계에 다가갔고, 그것의 교차하는 구조물이 맞물리는 순간 그들의 모습은 내부 차원에서 완전히 사라져 외부 차원으로 옮겨졌다.
검은양 팀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둡지만 약간의 빛이 비추는 외부 차원의 어딘가이다. 그들은 이곳을 플레인게이트라고 부르며, 이 안의 많은 영역이 내부 차원의 탐사자들에 의해 이미 정복되었다. 이 탐사에 참여한 검은양 팀에게는 순식간에 바뀐 눈 앞의 모습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외부 차원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이 베이스 캠프에는 많은 유니온 연구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일부 클로저 요원들이 상주한다. 이곳에 그들이 머무는 목적은 단 하나, 외부 차원의 생태 및 차원압과 PNA에 관한 연구이다. 위상력은 본디 외부 차원의 것이기에, 많은 부분은 외부 차원에서 그 연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플레인게이트는 바로 그 좋은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도 오랜만에 와본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회가 새로운 듯 서유리가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이다. 변한 것 같지만 변하지 않은 많은 것들, 바쁘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캐롤리엘의 모습이라든지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이빛나 박사의 모습, 그리고 눈을 감고서 조용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오세린의 모습은 변함없는 플레인게이트 안의 모습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모습은 이곳에 처음보는 기구들과 연구원들 그리고 새로 배치받은 듯한 클로저들도 있는 걸로 보아, 역시 바뀐 것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이슬비는 지적한다.
"새로운 사람들도 온 것 같고, 새로운 시설도 생겼어. 연구의 진척도가 꽤 빠른 모양이야."
"온 김에 캐롤리엘 씨나 세린 누나한테 인사하고 가는건 어때?"
이세하의 제안에 솔깃한 서유리는 동의를 했지만, 그에 반해 이슬비는 그와는 다른 생각인 듯 했다.
"우선순위는 그레모리에게 가는 거야. 그 후에 인사를 하러와도 늦지 않아. 더욱이 두 분 모두 바쁜 것처럼 보이고."
이슬비의 말대로 두 사람은 정말 바쁜 듯 했다. 원래부터 서포팅 업무로 일이 많은 오세린이나 캐롤리엘이지만, 특히 플레인게이트에 와서 그 두 사람의 능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잠까지 줄여가며 이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오세린은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의 초고위급 차원종들의 침공 징후를 항상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 유니온에서 정신간섭 능력에 특화된 클로저는 생각보다 없기 때문에 - 그녀가 하고 있는 업무는 버거울 정도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비교적 여유롭다는 이유로 그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결코 이슬비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슬비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세하야?"
"뭐 그야…"
이세하 역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상황의 중대성을 모르는 그도 아니었기에, 그저 말 없이 이슬비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으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전진기지와 비슷한 외부차원 주둔지를 벗어나 얼마 정도 걷자, 여러 차원으로 향하는 표지석들과 차원의 균열들이 보인다. 그중 가장 왼쪽 변두리에 있는 이상한 빛에 감겨 있는 차원의 균열이 바로 그레모리 박사의 연구실로 향하는 길이다.
플레인게이트는 외부 차원 중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들이 그레모리의 연구실로 찾아가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있을 중앙연구실까지 찾아가기 위해서 지나야하는 길목들이 귀찮을 뿐이다.
그들이 차원의 균열 앞으로 다가서자, 그들 앞에는 두 가지 길목이 나타난다. 왼쪽 길목은 지능개발 연구실, 오른쪽 길목은 신체강화 연구실로 각각 향하는 길이다. 어느 쪽이든 중앙 연구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할 길목이다.
가장 선두에 선 이세하가 동료들의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할래?"
그의 말에 반응은 둘로 나뉜다.
"역시 몸으로 떼우는게 좋지 않을까?"
"머리를 쓰는게 더 난이도는 낮았어."
서유리와 이슬비는 각각의 장점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서유리는 아무래도 몸을 쓰는 편이, 이슬비는 몸보단 머리를 쓰는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직까진 1:1, 이제 이세하의 한 표가 방향을 결정짓는다.
"그레모리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만일을 대비해서 몸보단 머리를 쓰는게 더 이득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음… 그건 또 그렇네…"
서유리도 쉽게 납득한다.
예전에 그들이 처음 그레모리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그들을 맞은 건 무척이나 난폭한 거대한 곰인형이었기 때문이다. 곰인형 위에 올라선 그레모리는 정말 죽일 듯이 그들을 쫓아다녔고, 넓은 듯 좁은 연구실 안에서 겨우겨우 피해다니며 무찌른 기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그 곰인형과 만약에 또 다시 접전하게 된다면, 굳이 이곳에서 체력을 소비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충분히 서유리 역시 공감한다. 그리고 이슬비 역시 이에 공감하는 바이겠지.
"그럼 결정한거다?"
"가자."
"머리 쓰는건 별로지만, 나오는 녀석들은 모조리 쓸어주겠어!"
세 사람은 차원의 균열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고, 왼쪽 길목 - 지능개발 연구실 - 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갔다.
그레모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차원의 눈부신 빛 때문에 밖에서 볼 때의 그들의 모습은 금세 사라졌지만, 그들은 어두컴컴한 이차원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고 있다. 이 기분나쁜 차원압을 견뎌가며 그들은 나아가야만 한다, 그레모리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 4-4
"언니, 여기까지 불러와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그렇게 됬어. 정말 미안."
잔잔한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서 두 여성이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은 특경대 복장을 한 단발머리의 여성이고, 또 다른 여성은 경찰 정복을 입은 비교적 장발의 여성이다. 단발머리의 여성은 이 근처의 국제공항을 지키는 수비대장 송은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아마도 그녀의 지인인듯 하다.
손님이 많지 않은 이 카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급격히 적막해진다. 공간을 두들기는 소리는 오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뿐. 그러나 이 적막감에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섬광이 한 번 퍼지더니, 이내 쿠구궁 하는 소리가 뒤늦게 귀를 때린다. 약하게 들리는 소리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천둥소리. 지금 인천 부근은 요란한 소나기가 한창 내리는 중이다. 그녀들이 만나서 이 카페로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소나기가 요란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후였다.
초여름 날씨이지만 싸늘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날씨였기에, 장발의 여성은 자신 앞에 놓인 머그컵 안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선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대화를 이어간다.
"하여튼 언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어요."
"미안, 솔지야. 딱 이번 한 번만, 응?"
송은이는 손까지 비벼가며 간곡히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녀가 솔지라고 부른 이 연하의 여성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녀가 이렇게 부탁하는 것일까?
"진짜, 딱 이번 한 번 뿐이에요?"
"응! 응! 진짜 고마워! 일이 다 끝나면, 강남에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됐어요. 스테이크나 얻어 먹으려고 이런 일 하는 줄 알아요?"
"물론 아니지. 특경대 정보국의 에이스 유솔지 님께서 설마 그럴리가. 이건 그저 내 마음이야!"
"뭐, 알았어요.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장발의 여성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자신의 수첩을 펴서 어딘가를 피고선, 그 안에 같이 꽂혀있는 삼색 똑딱이 볼펜을 들어 무언가를 메모하기 시작한다. 한참을 써내려가며 무언가를 메모하던 그녀는 송은이에게 무언가를 확인할 것이 있는 것인지 물음을 이어간다.
"언니의 말, 정리해볼게요.
최근에 미국에서 어떤 유소년 클로저 팀이 들어왔는데, 이것에 대해서 상부는 기밀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 그 팀의 이름은 '화이트 키즈'이고, 그들은 서로를 '프류스', '유카', '브레뉴'라고 불렀다. 총 5명으로 이루어졌지만, 한국에 들어온 건 여남남 3명 뿐. 이들을 신서울로 에스코트 한 후, 그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저번 주 금요일, 차원종이 출몰한 강남의 거리에서. 이들은 한국 경찰의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까지 했었다. 그들의 모습은 아주 잠깐이지만 지난 밤 KBC 9시 뉴스에서 송출됬었다..."
"응, 맞아. 거기에 덧붙이자면,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그 뉴스 영상 다시 봤는데, 분명 같은 아나운서가 전하는 영상인데도 그들의 모습은 삭제되고 대신 다른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지, 아마?"
"분명히 KBC 9시 뉴스에 나온 거 맞죠?"
"응. 내가 분명히 집에서 봤었어! 그것때문에 그 날 밤 잠도 설칠 정도였다니까?"
송은이의 언성이 높아간다.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듯 상대는 두 손을 펼쳐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는 다시 수업에 송은이가 이야기한 사항을 적어내려간다. 한 줄 정도의 문장을 완성하고서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져 들어간다. 송은이는 그녀를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만 기다렸다.
"은이 언니, 혹시 상부에 보고했었어요, 이 사항?"
"아니?"
"그렇다면…"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 것인지, 그녀는 자신이 작성한 문장 옆에 또 하나의 문구를 빨간색으로 짧게 쓰고선 동그라미와 별표를 친다. 그리고선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고선 질문을 이어갔다.
"언니, 혹시 화이트 키즈라는 그 팀, 거기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어요?"
"음… 그 애들이 차원종과 싸우면서 위상력을 쓰는 걸 봤는데… 그 프류스라는 남자애는 정말 차가운 느낌이었고, 실제로 얼음과 관련된 위상력을 쓰는 것 같았어. 그에 비해 유카라는 애는 전기나 빛과 같은 위상력을 사용했던 것 같고. 그리고 그 브레뉴는… 아마도 불과 관련된 위상력을 사용했던 것 같아."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얼음, 빛, 불이라… 마치 연금술이 떠올라요."
말만 흥미롭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실제로 흥미롭게 송은이의 말을 경청하며 필기하고 있다.
그녀가 말한 연금술이라는 것, 송은이도 그 말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고대과학의 시초를 열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를 4개로 보았다고 한다. 그것들은 각각 물, 불, 흙, 바람이다. 후대에는 이 4원소 위에 빛이 더해지게 되는데, 빛은 신성과 맞닿아있어서 그것의 이미지는 언제나 신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연금술은 바로 이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송은이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카라는 능력자가 빛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는 이 팀의 리더를 맡고있는 듯 하다. 이 가정이 옳다면, 남은 두 명의 팀원은 알 수 없지만 흙이나 바람과 연관된 위상력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추리해볼 수 있다.
"이거 마치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소설 같잖아?"
"이미 판타지는 더이상 판타지가 아니게 됬지. 위상력이 존재하는 한 말이야."
"그렇죠. 위상력은 우리에겐 마법같은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 감이 좀 와?"
송은이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 정도만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송은이는 이내 자신의 질문이 우문(愚問)이었음을 깨닫고 멋쩍은 듯 살짝 웃는다.
그녀는 그럼에도 송은이의 말에 반응해준다.
"그래도 꽤 흥미가 가네요. 이 흥미로운 팀 구성, 그리고 비밀리에 들어온 미국의 클로저들.
게다가 상부는 비밀을 지키라고 하고 있고, 유니온 마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냄새가 나요."
"그렇지? 정말 그렇지?"
"응. 엄청. 이 정도면 조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조심해. 상부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게 분명할테니까. 게다가 너, 본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송은이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자신이 부탁한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알아야만 했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오랜 시간을 생각한 결과,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 결정을 내리고서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특경대 내의 지인 중에서 바로 이 사람, 유솔지를 택한 것이리라. 더욱이 그녀가 일하고 있는 부서는 특경대 내에서도 대내외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담당하는 정보국이다. 그녀보다 더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라면 분명히 자신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고 송은이는 확신했다.
"좋아요. 나도 열심히 정보를 모아볼게요. 하지만 언니도 아시겠지만, 저희 쪽 일이 많은 데다가 상부의 눈치까지 봐가면서 해야하는 거니까, 빠른 시간 내에 답을 드리는 건 힘들 거예요."
"알아. 그래도 부탁해.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송은이의 마지막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선 그녀는 자리를 일어났다. 이제 이 카페를 떠날 시간이라는 뜻이겠지. 송은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다.
"저녁 먹고 가. 내가 살테니까."
"괜찮아요. 여기에서 서울까지 빗길 뚫고 달려야할테니까, 시간도 좀 걸릴테고,. 그냥 오늘 저녁은 넘길래요."
"에게? 진짜? 그러면 내가 정말 미안한데…"
"걱정마요, 언니. 지금 나한테는 밥보다 더 흥미로운게 생겼으니까."
씨익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작별을 고했다.
창문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번개의 섬광과 멀리서 들려오는 약한 음성의 천둥소리, 그것은 서서히 비가 그쳐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소나기가 거의 그쳐갈 무렵, 두 사람은 작별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또 한 사람은 신서울로. 각자 가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도대체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 가장 근본적인 호기심에 답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발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
.
.
"자, 마지막 문제야!"
"으으, 안 왔으면 했는데!"
머리를 쥐어싸며 서유리를 절망한다. 이번 문제는 그녀가 풀어야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중앙연구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지능개발 연구실은 입장한 사람의 수만큼의 문제가 나오는 데다가 각 문제는 모두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풀어야만 한다. 그것이 그레모리가 설정한 '규칙'이다. 장난기로 가득한 그녀 - 차원종 - 의 악랄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문제 나갑니다! 유니온의 클로저 오세린이 좋아하는 동물은 '상어'이다!"
"뭐?!"
당황스러운 문제이다. 동료인 그녀도 모르는걸 도대체 이 차원종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보다도 이런 문제가 어째서 지능개발과 관련이 있는거지?
점점 머리가 꼬여가는 서유리의 표정은 계속해서 어두워져만 간다. 만약에 이 문제를 틀리게 되면, 그녀는 홀로 그레모리의 클론과 싸워야만 한다. 비록 클론이라고는 하지만 엄청나게 강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싸우게 되는 최악의 상황은 정말로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맞춰야만 한다.
이미 문제의 답을 맞춘 이세하와 이슬비는 이미 연구실로 워프되어 그곳에서 그녀를 응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그녀에게 보일리는 전혀 없지만 말이다. 서유리는 동료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가 오세린과 함께 한 기억들을 되살려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떠올려야 한다.
"훗후후, 서유리, 너는 절대 이 문제를 풀지 못할걸? 10초 남았다구!"
"진정해, 서유리… 넌 분명히 알고 있을거야, 분명히…"
그 때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장면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세린이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그 옆에 서있는 박심현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다. 도대체 이것이 왜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일까?
잠시 기억을 되살려본다.
"5초 남았어!"
그레모리의 말이 들려올 무렵, 그녀는 박심현이 들고 있는 어떤 DVD의 케이스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엔 상어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상어가 나오는 영화인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기억해냈다.
"맞아! 상어야!"
"3!"
3초가 남았는지 그레모리가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저 멀리 떨어져있는 O 표시의 발판을 밟아야만 한다. 발만 들여놓아도 좋으니, 그녀는 반드시 그것에 닿아야만 한다.
"2!"
"늦지 않아!"
"1!"
"흐아아아아앗!"
한껏 기합을 넣으며 서유리는 자신의 모든 위상력을 발휘하는 기분으로 뜀뛰기를 한다. 마지막 스퍼트를 넣은 그녀의 발은 과연 발판에 닿을 수 있을까?
"정답은 O이었어! 자, 그러면 서유리, 네가 O 발판에 있는지 봐볼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레모리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웃음기가 사라진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뭐야? 운이 좋았나봐? 아쉽게 됬네.
뭐, 축하해. 어서 연구실로 오기나 하라구."
그녀의 발끝이 그레모리의 정답 발표가 들려오기 전에 O 발판에 닿았다. 최선을 다해 뛰지 않았으면 결코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쁨과 안도를 담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의기당당한 모습으로 연구실 끝에 생긴 차원의 균열로 걸어간다. 그곳을 지나면 바로 그녀의 동료들이 - 그레모리 박사와 함께 - 기다리고 있을 중앙연구실이다.
"어디, 한 번 가볼까?"
영롱한 무지개빛이 뿜어져나오는 차원의 균열 속을 지나자, 그녀는 어느새인가 익숙한 드넓은 공간에 도착해있었다.
바로 중앙연구실이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는 동료들이 있다.
"무사히 잘 통과했냐?"
"유리야, 정말 잘했어!"
두 사람의 환대 속에 서유리는 한 손으로 V표시를 지어보이며 한가득 얼굴에 웃음을 피운다.
이렇게 검은양 팀은 무사히 아무런 충돌도 없이 그레모리의 중앙연구실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맞이해야할 이곳의 주인은 이곳에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검은양 팀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레모리의 행방을 찾을 무렵, 어느 공간에서인가 거대한 곰인형이 튀어나오며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그레모리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후후… 짜안~ 그레모리 박사님의 등장!"
"사람을 불러놓고 이렇게 늦게 도착하면 어떻게해?"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구. 나도 이제 막 지능개발 연구실에서 이곳에 온 참이니까."
그 말인즉슨, 그레모리는 그들과 함께 지능개발 연구실에 있었다는 말일까?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그녀가 직접 들려준 목소리이었던 모양이다.
"좋아, 그레모리. 우리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뭐지?"
이슬비의 적대적인 톤의 물음에 그레고리는 말없이 무언가를 그녀에게 던진다. 그레모리가 던진 것을 받아드니, 그것은 문서 뭉치와 같았다. 대략 5페이지 정도되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내려가던 그녀에게 그레모리가 이야기를 전한다.
"너희 인간들의 차원에는 지금 난리가 나고 있지?"
"무슨 말이야?"
"왜? 저번 주만 해도 너희가 직접 겪었잖아? 그리고 유니온 너희 지부는 강북 쪽에 위상변곡률이 이상징후를 보이고 있다면서 그곳에 대규모로 클로저들을 배치했고."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 차원종일 뿐인 그가 어떻게 이렇게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구심이 검은양에게 들 무렵, 이미 그 생각을 간파한 그레모리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난 인터넷이라는 걸 자주 하거든. 거기 들어가면 모든걸 알 수 있지. 그 자료도 인터넷으로 너네 통신망에 접근해서 얻은 거라구?"
"야! 무슨 차원종이 인터넷을 하냐!"
"후후후, 이세하. 나는 네가 자주하는 리그 오브 챔피언이라는 게임도 알고 있지. 그거 정말 재미없더라. 그런걸 도대체 왜 하는거니?"
"뭐라고!?"
그가 즐겨하는 게임을 비난해서일까, 이세하는 금세 흥분해서 일장연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인간을 무시하는 그레모리가 들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저 귀만 몇 번 후비고선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희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군단의 침공의 이유, 그건 군단의 내분 때문이야."
"설마 너희의 총지휘관이 참모장을 몰아내기 시작했다는걸 말하는 거야?"
"오~ 제법인걸, 이슬비? 네가 어떻게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너희들이 우리에게 돌려보낸 아자젤, 그가 불사의 능력을 잃은 참모장 - 애쉬와 더스트 - 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그동안 쌓인게 많았나**? 여하튼 그것 때문에 우리 차원은 지금 난리가 난 상태이고."
"그렇다면 우리 차원에 나타나는 차원종들은 모두 살기 위해 넘어온 녀석들이라는거야?"
"요를 말하자면 그렇지. 목숨이 소중한건 너희나 우리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너희는 아니지만 말이야, 라고 짧게 덧붙이는 그레모리는 커다란 곰인형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는다. 그녀의 비웃음을 좋게 볼 리 없기에, 서유리가 발끈한 목소리로 몰아붙인다.
"야! 그레모리! 너도 마찬가지잖아! 솔직히 말해. 우리를 여기에 부른 이유, 그거 너를 지켜달라는 이야기지?"
"서유리, 너는 참 재밌는 친구야. 하지만 이 초천재 그레모리 박사님께서 너희 인간들 따위에게 도움을 요청할리는 없잖아?"
"그렇다면 뭐야. 왜 우리를 여기에 부른거야!"
"좋아. 바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지금까지 자기가 혼자 다 떠들어놓았다는 투로 이세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불평한다.
그의 불평에 이슬비가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치며 그의 불만을 제지한다. 이제부터 그레모리가 할 말에나 집중하라는 뜻이겠지. 그녀의 명령에 한숨만 푹 내쉬는 이세하는 마지 못한 표정으로 그레모리를 쳐다본다.
"참모장은 자신을 공격해오는 군단의 세력들과 맞서기 위해 일부 인간들과 손을 잡고 있지. 참모장은 그들에게 계속된 권력을 누릴 수 있도록 놀음해주고, 그들은 참모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그리고 그 인간들은 참모장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유니온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너희 - 신서울지부의 늑대개와 검은양 팀 - 를 제거하길 원하고 있지."
"누구야! 그 사람들이!"
"그건 알려줄 수 없지롱. 비록 군단 녀석들이 날 여기로 내쫓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희의 편인건 아니거든."
"그렇다면 뭔데! 경고만 하려고 부른거야?"
서유리의 호통소리에 그레모리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선 이슬비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 문서, 세 번째 페이지를 봐."
"응? 잠깐만…"
이슬비는 문서의 세 번째 페이지를 편 후, 그것의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레모리의 말에 집중하느라 문서의 두 번째 페이지의 중간 정도까지밖에 못 읽어봤기에 이제서야 읽는 것이다. 세 번째 페이지는 이 문서가 아닌 다른 문서를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보이는데, 지금까지 한국어로 적혀있던 것과는 달리 영어로 적혀있다.
더듬더듬 그 내용을 번역해가면서 이슬비는 그 내용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데이비드의 반역 사태를 진압한 공로로 … 신서울지부의 임시지부장으로 승진할 예정인 김유정(현 직급: 부국장)이 총본부의 개혁을 필두로 점차 유니온 내에서 그 영향력과 권력을 확대시켜나가고 있음.
신서울지부가 유니온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강화됨에 따라,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음.
이에 다음과 같이 신서울지부와 김유정의 실각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할 예정임.
김유정의 휘하 …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의 클로저들을 분리시킬 것을 총본부에 요청. 이는 에 의한 내부의 조치에 따름.CLASSIFIED
총본부는 이를 신서울지부에 하달하였고, 신서울지부는 이 명령을 김유정 및 관련 인물들에게 지시하였음.
그러나 김유정의 반발로 인해 5명의 검은양 팀원 중 3명(이슬비, 서유리, 이세하)만이 신서울로 복귀하였고 … 늑대개 팀은 아직 신서울지부의 승인을 받은 정규 클로저가 아니므로 강제 명령 조치가 불가능하여 여전히 뉴욕에 체류 중.
현재 뉴욕에 주둔 중인 김유정과 검은양 팀(2인) 및 늑대개 팀(6인+1인)의 해산 절차는 다음과 같이 시행할 예정.
1. '계획실행일'로부터 15일이 경과한 후, 을 기하여 김유정을 직권 남용의 죄목으로 긴급체포.
2. 클로저 J는 강제 은퇴 후 감찰국에 의한 감시 조치.
3. 미스틸테인은 코드 명령 초기화 후 사냥터지기 팀으로 재배치하여 활용.
4. 늑대개 팀의 신서울지부 등록 및 요원 승인 절차를 원점무효화하고 수배령을 재활성화함.
5. 신서울로 복귀한 검은양 팀 3인은 을(를) 통해 제거. CLASSIFIED은(는) 계획실행일로부터 수일 내 검은양 팀과 접선 예정.CLASSIFIED
6. 세부 계획은 내부 결재에 의한 수기 문서로 작성하여 전자문서로 등록하지 않고 관계자들의 대면보고로 진행.
이 문서는 유니온 에 의해 업무분과 위원회에서 검토되고 집행결정이 하달되었음을 확인함. 끝.CLASSIFIED
기안: … CLASSIFIED … CLASSIFIED (협조: CLASSIFIED메리 )CLASSIFIED
결재: … CLASSIFIED … CLASSIFIED (최종결재권자)CLASSIFIED
시행일자: 2020년 5월 20일
문서번호: 보안문서 2020-.』5926호
아마도 이건 어느 문서의 끝부분인 듯 하다. 하지만 끝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내용이 모두 들어가있다. 이것은 김유정의 실각을 위해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당사자에 속하는 검은양 팀은 마치 무언가에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이슬비가 번역한 내용을 의심하며 이세하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문서를 받아 마찬가지로 읽기 시작했다. 읽어내려간지 1분쯤 되어 그는 분노에 휩싸여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다. 패닉에 빠진 검은양을 향해 그레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말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분노를 겨우 참아가며 이세하가 물어왔다.
"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야?"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이야기해줘. 부탁이야."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내 역할은 너희에게 위협을 주는 것으로 끝이니까."
"제발…! **, 이럴 때가 아니야. 지금 당장 유정 누나에게 연락해서…"
언성을 높여가던 이세하의 말을 끊고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게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이세하를 제지한다.
"아냐, 그만 둬, 세하야."
"왜!"
"문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어. 이 사람들, '유니온 내부 사람들'이야. 우리는 이미 놈들에게 감시당하고 있겠지. 특히 유니온 통신망을 이용하게 되면, 놈들은 더욱 쉽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챘다는 것을 알아차릴거야."
"그러면 휴대전화라도 사용하면 되잖아!"
"뉴욕 일대 전화가 먹통이야. 듣기로는 뉴욕의 전화 기지국들이 모두 파괴되어서, 몇 달간은 통화가 안될거래."
"그러면 어떻게 해! 놈들이 알아차린다고 할지라도, 누나에겐 알려야지. 아저씨나 테인이나 모두 위험한 상황인데!"
그의 말이 사실이다. 이대로 놔두면 김유정은 위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알아차린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 계획은 더욱 신속히 그리고 거침없이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슬비는 신중을 기하여 처신할 것을 요구한다.
"네 맘은 이해해. 하지만 섣불리 움직여선 안돼. 그건 너도 알잖아."
"망할 어른들! 그깟 조직 내 권력이 뭐라고!"
이세하는 들고있던 문서 뭉치를 세차게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것으로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그는 연신 크게 소리만 질러대며 화를 삭힌다.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서유리가 바닥에 내던져진 문서를 다시 주워들어서 이슬비에게 다시 건네준 뒤, 그레모리에게 묻는다.
"이 정보를 준 것에 대한 대가도 있겠지. 너, 분명히 아까 우리가 보나와 있을 때, 이 만남을 '거래'라고 했으니까."
"용케도 잘 기억하고 있군, 서유리. 맞아, 이제 나도 너희에게 요구할 것이 있어."
"말해봐."
"참모장의 졸개 녀석들이 너희 차원에 나타날 때, 놈들의 파편이나 샘플들을 모아와줬으면 해.
요즘들어 우리 차원의 구석진 곳에 있는 어두운 놈들이 슬금슬금 나타나서 참모장의 졸개 녀석들을 타고 퍼져나가고 있는 모양이거든. 군단도 그 오염위상에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한 건 몰라도 돼. 너희는 그저 내 지적 충족을 위해서 일하면 되는거야. 여하튼 너희는 놈들의 샘플을 모아서 나에게 가지고 와. 아참! 그리고 너희에겐 거부권이 없는거 알지?"
완전히 막무가내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오염위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외부차원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듯 하다. 그저 차원종들의 처리 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샘플 수집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라 그레모리가 검은양 팀에게 전해준 소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애초에 같은 가치가 성립되지 않는 거래는 무척이나 불공평하다. 그런데도 이것을 거래라고 부르는 그레모리의 속내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에 궁금함을 품은 이슬비가 물었다.
"그레모리, 정말 그걸로 끝인거야?"
"왜? 뭘 더 원하는거야?"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넘겨주는 것에 비해 네가 요구하는 건 너무나도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그런거야."
"말했지? 나는 내 지적 충족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나는 군단 녀석들을 마음대로 죽이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너희는 가능하잖아? 그러니까 너희에게 부탁한거야."
"좋아. 그런데 아까 보나 앞에서 했던 말, '시간이 없다'는 건 도대체 어떤 뜻이지?"
"후후… 그건 차차 너희도 알게 될거야. 불과 몇 달 안으로 말이지! 내가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정말 그레모리스러운 말이다. 그리고 그녀다운 이유이다.
더 이상 그녀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슬비는 연구실 밖으로 나가는 차원의 균열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유리야, 세하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
"응. 그래."
"… 우선은 돌아가야겠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각각 달랐지만 서유리와 이세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그녀의 말에는 동의했다.
그레모리는 그들을 공격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 역시 굳이 싸우지 않고 돌아간다. 무엇보다도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기에, 그들도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 쉬어야만 한다.
작별인사도 남기지 않고, 검은양 팀은 연구실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숨긴다. 차원의 균열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레모리는 홀로 중얼거린다.
"너희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화이트키즈'를?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 같아,
아아, 정말 기대되는걸? 군단의 원수녀석들이 서로 적대시하고 싸우는건 정말 재미있는 구경이지. 안 그래, 곰곰아?"
소녀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차원 안으로 멀리멀리 퍼져간다. 그 소리가 검은양 팀에게 닿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은 외부차원을 빠져나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기분 나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 4-5
외부차원을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검은양 팀은 과연 그레모리에게서 얻은 정보를 최보나에게 보고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사항은 당분간은 그들만 아는 비밀로 남겨두고, 그들끼리 이 위기를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나가기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사전 논의에 따라 이슬비는 최보나에게 그레모리가 자신들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그들은 호출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새로운 무기들인 곰인형 군단의 위력을 체험하고 왔다고 보고했다. 그 말에 무척이나 최보나는 놀라했다.
하지만 그것의 엄청난 위력에 압도되는 것 같았어도, 그레모리가 자신의 연구를 목적으로 신서울에 나타나는 군단의 차원종들을 제거하고, 그 샘플을 수집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자신들을 놓아주었다고 추가로 말하자 최보나의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다만 그녀가 그레모리를 향해 불평을 쏟아놓긴 했지만 말이다.
이슬비의 뛰어난 상황대처능력으로 어떻게든 어려운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검은양 팀은 퇴근을 명령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일부터는 다시 플레인게이트로 돌아올 필요 없이 다시 학교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그레모리가 부탁했던 것을 들어주기 위해 신서울 곳곳에 출몰하는 차원종들을 소탕하는 역할을 다시금 맡게 되었다.
요컨대 다시 평상시로 돌아온 것이다.
플레인게이트를 벗어나기 전, 최보나는 강북의 위상변곡률이 이상한 수치를 보이기 시작했음과 강남의 위상변곡률은 점차 안정되어가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차원종들이 강남에 여전히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의하면, 조만간 검은양 팀은 강북으로 파견지원을 나가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상부 - 요원관리국 - 의 의사에 달린 것이지만, 신서울의 클로저들이 지난 강남사태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음을 생각하면 검은양 팀의 도움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강북 쪽으로 파견지원나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이것에 대해 검은양 팀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을 노리는 유니온의 어딘가의 어두운 손길을 신경써야만 하는 그 압박감을 상시 느껴**다는 것에 불편해할 뿐이다.
그들은 강남역 근처에서 헤어질 때까지도 여전히 어두운 표정은 감추지 못했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왠지모를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누운 이세하가 자신의 방의 불이 꺼질 때까지, 그의 집 앞 골목에서 한 명의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들을 감시하는 자가 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유독히 빛나는 머리의 색을 뒤로하고 익숙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발걸음을 돌린다.
그는 어느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그의 휴대폰의 화면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은 다름아닌, 지난 금요일 KBC 채널의 저녁 9시 뉴스의 한 보도이다. 분명히 수정되어 사라졌어야할 어느 사람들의 모습이 1초도 못되는 시간동안 지나간다. 그리고 남자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시정지 시킨 후 그들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남자는 바로 그 장면을 캡처하여 자신의 휴대폰에 남긴 후, 휴대폰의 LCD 화면을 끄고 이어폰을 끼고선, 천천히 천천히 골목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기나 긴 6월 15일 월요일은 그렇게 다음 날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거의 5달 만에 다음편이라니...
방학 때 이번 겨울에 딸 자격증을 위해 공부 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게임도 제대로 못하고 들어가서 시간만 채우고 있어요. 시간이 부족한건 학기 중이나 마찬가지라, 소설 쓰는 것에도 역시 어려움이 많습니다.
정말이지 대학원도 힘든건 매한가지네요...ㅋㅋㅋ
그래도 시간이 나는 방학 때 열심히 써야할 것 같은데, 엉엉... 역시 이 소설은 제 뇌내 망상으로만 남겨뒀어야 했나봐요.. 하지만 열심히 써야겠죠.
때때로 제 안부 물어봐주시고, 메일이나 쪽지로 제게 말을 걸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편은 많이 침체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항상 이런 분위기는 아니고, 이번 편은 정말이지 제목 그대로 미끼를 던지기 위한 편이에요.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까지는 고요한 것처럼, 이번 편도 정말 무난하게 그리고 조용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얼른 주요인물들이 조우하고 스토리가 훅훅 전개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더 열심히 써야지 큭...
무덥고 습기 가득한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길 빕니다.
오늘도 이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