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만우절 이벤트] 어느 평행세계의 이세하
루이벨라 2018-04-25 9
※ 2018 만우절 이벤트 스토리 검은양 버전 참고
01.
"다녀왔습니다."
"왔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집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맞이해 세리는 잠시 움찔거렸다. 어? 오늘은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던가. 당분간은 일이 많아 야근을 '별 수 없이' 해야 한다는 문자를 남겼으면서, 이리 뻔뻔하게 집에 있다는 게 어찌보면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야근만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자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은 일이니까. 세리의 아빠, 이세하는 너무 여유가 없어서 지켜보는 제3자가 오히려 더 초조할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깜짝 선물 같은 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길게 잡아끌어야 했다.
일단은 이런 상황, '전혀 예상치 못해서' 매우 '기쁜'(연기가 아니다, 실제로도 기쁘다.) 목소리로 이세하에게 말했다.
"아빠? 언제 오신 거예요? 야근이시라면서!"
아, 너무 오버했나. 마지막에 좀 악센트가 이상하게 들어갔다. 이세하는 다행히도 그런거 신경을 쓰진 않았다.
"오늘은 좀...일찍 일이 끝나서."
말을 하던 도중 붙어버린 줄임말에 뭔가 석연찮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나마나 이세하가 바득바득 우겨서 일거리를 만든 걸, 보다못한 주변 동료들이 억지로 서류뭉텅이를 압수조치하여 귀가 조치를 시켰던 게 불 보듯 뻔했다. 핑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런 거겠지.
-사랑하는 딸이랑 시간 좀 보내봐!
이런 핑계는 의외로 잘 먹혔다. 세리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 100%의 확률로 이세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걸 보면! 계~속 써먹어서 약빨이 떨어질 법도 한 이 핑계를 이세하가 거부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반대로 따지자면 지금 이세하에게는 세리 뿐이라는 거다. 마음 한 구석이 석연찮다.
이세하의 이런 성향 덕에 같은 고민을 공유하게 된 아빠의 오래된 동료들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다고 했다. 일 처리 능력은 지금이나 과거나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예전에는 그래도 평온한 들판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한숨 쉬어가면서, 풀들이 적당히 자란 풀숲을 잘 걸어다니는. 그에 비해 지금의 이세하는, 마치 앞에 가시밭길밖에 없는 길만 고집해서 가는 느낌이라고. 세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세하의 삶은 그렇게 변했다.
-세하가 워커홀릭이라니...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얼마 전, 과거의 아빠를 찾겠다고 몰래 시공간 여행을 하던 중, 평행세계에서 만난 아빠의 '옛 동료' 의 말에 비교해봐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세리의 입장에서는 워커홀릭이 아닌 아빠를 전혀 상상할 수가 없는데.
"피곤하지? 저녁 차렸으니까 같이 먹자."
여기 있는 두 사람 중에서 제일 피곤한 건 이세하일텐데, 목소리에는 그런 낌새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저녁도 참 푸짐하다. 갈비찜이며 잡채 등등...죄다 손이 많이 가는 메뉴 뿐이다. 맛있겠다, 라고 맞장구를 쳐야할 타이밍인데 너무 속이 상해서 볼멘 말이 나가버렸다.
"아니, 피곤하실텐데 낮잠이라도 주무시지..."
늘상 잠이 부족하여 소파에 앉아서 쪽잠을 자는 이세하의 모습이 떠올라 세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자신을 보며 옅게 웃는 세하의 눈밑의 다크서클이 진하다. 딸의 다그침에 이세하가 내뱉은 대꾸는 참 대단하기 그지 없었다.
"잠이 안 와서."
새빨간 거짓말도 잘 치시네요. 잠을 맨날 기절하듯이 자는 사람이...세리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걸 캐치한 이세하가 그 부분을 톡, 건드렸다. 자자, 그럼 표정은 그만 짓고 얼른 밥이나 먹자, 라는 일종의 신호. 잔소리하고 싶은게 산더미였지만 세리는 군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음식은 참 맛있었다. 이세하의 요리 솜씨는 뛰어난 편이었다. 그 평행세계에서 만난 또 다른 아빠의 옛 동료도 이렇게 극찬했다.
-세하는 요리 완전 잘하거든! ...무지 맛있었어!
그래, 그런 점은 닮은 것도 같네...평행세계였으니 당연한 건가?! 이 맛있는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 말고는 없다는 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아빠 앞에서 슬픈 표정 짓지 않기로 결심했잖아...!
"아빠."
"응?"
"내일도 일 나갈 거예요?"
"어...아마도."
뒤에 아마도는 왜 붙이세요. 십중팔구 갈 거면서! 세리는 다급해졌다. 이리 나가게 냅두면 적어도 보름 간은 일에 치여서 사람답지 않은 몰골로 다닐 게 뻔했다. 너무 급해서 세리는 이세하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딸의 강경한 태도에 이세하는 살짝 당황한 눈치이다.
최후의 수단, 잔뜩 어필해라. 쉽게 말하자면 투정 부리기.
"내일 말고, 모레에 일 나가시면 안 돼요?"
"모레에?"
"내일 어차피 저...특별한 약속도 없고...오랜만에 아빠랑 레이드하고 싶어서요. 하루종일!"
하루종일을 강조하는 딸의 모습에 이세하는 잠시 난처해졌다. 이세하는 딸의 이 애절함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 많은 일감(물론 이세하가 자처해서 만들어낸 게 대다수였지만)들을 강제 압송한 후, 제대로 쉬고 와! 라고 엄포를 한 게 이걸 노렸던 걸까.
하루 정도는 뭐...괜찮지. 이세하는 KO패를 선언했다. 사실 세리와 시간을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세하의 입장에서는 세리의 이런 태도가 참 반가웠다.
"그래그래, 내일은 쉴게. 오랜만에 게임 실력 늘었는지 볼까?"
"두고봐요! 적어도 절반 정도는 이겨줄테니!"
"아주 좋은 각오구나."
잘하면 밤샘할 거 같기도 하다. 그게 나았다. 일에 치여사는 것도 다 잠을 최대한 적게 자려고 하는 것이다.
잠들면 꿈을 꾸니까. 그게 싫다.
0.5.
"꿈을 꿔요."
꿈? 상대방의 무언의 반문에 세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잠이 들면, 항상 같은 꿈을 꿔요."
그 꿈이 뭐죠? 상대방은 아픈 점만 콕콕 집어낸다. 그 앞에서 세하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무도 없어요."
나 빼고. 나만, 살아있네요. 주변엔 아무도 없어요. 잠시 침묵. 상대는 뒤이어 세하가 할 말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 여기서 끝내야지.
"그게 꿈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전부?
상대는 어색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다. 뭘 더 캐묻고 싶은 걸까, 이 생명체는. 세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데. 속마음은 늘 보이지 않게 조심. 세하는 답지 않게 웃었다.
"없어요. 그게 끝이에요."
-슬픔?
슬프냐는 물음이다.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슬픈가, 라고 자기에게 반문도 해보았지만 답이 없다.
그걸 상대는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다.
-감정, 없음?
"..."
감정은 분에 차고 넘치는데. 차라리 저 말처럼 없었으면 더 나았을지도...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구나.
"..."
-겁쟁이구나.
"말 참 잘 하네요."
갑자기 그 '생명체' 는 유려한 인간의 말을 구사했다. 일부러 그랬다는 건가. 괜히 화가 돋는다.
더 나눌 말도 없다. 세하는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났다.
-바보구나.
촌철살인(寸鐵殺人). 아마도 저 생명체의 특기인지 자신을 피하는 세하에게 마지막까지 가차가 없었다.
-피곤할텐데.
"..."
-육체는 이미 한계일텐데.
"..."
-근데 마주하는 것, 인정하는 게 제일 싫은가봐.
겁쟁이구나. 아니면 살기 위해 이러는 건지도. 그것도 아니면 둘다 포함.
저 자가 최강의 인류 중 한 사람이라니. 겉과 속이 다른 모양새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표정을 지을 수만 있다면 한껏 비웃는 비소를 내리꽂아주었을텐데. 안타깝다.
"말 다 했으면 이제 가도 되나요?"
-또 보겠지.
"다신 안 올건데요."
잇새로 내뱉는 으름장은 흡사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원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세하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 봐서는 넋두리 비슷한 걸 하러 온 거 같은데...본인은 또 아니라고 하겠지.
본인 스스로 참 안타까운 길을 택한다.
세하는 그 후 정말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아 이 말은 결국 흐지부지한 혼잣말이 되었지만.
02.
"오, 세하! 어제 잘 쉬었어?"
"네, 덕분에요..."
덕분에...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잘 버텼지만, 그래도 일을 쉬었으니 쉬었다, 라는 표현이 맞긴 하다. 종국엔 결국 자버리고 말았지만. 눈을 떴을 땐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음습한 꿈을 또 꾸었더랬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다.
"그런거치고 다크서클 진한데??"
"잘 잤어요...평소보다 30분 더 잤다고요."
"그게 인간의 수면량이냐?"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건강 좀 챙겨, 세리가 항상 네 걱정해 등등. 여기서도 잔소리를 듣는다. 일할게 많아서 먼저 가볼게요, 라며 이세하는 겨우 자리를 피했다.
드디어 혼자가 된 이세하는 자기 책상 위에 널부러진 방대한 양의 서류를 보았다. 그제에 자기가 돌아가기 직전과 한 치의 거슬림없이 똑같다. 그 뜻은 자신은 일처리를 할 게 아주 많다는 뜻이었다. 아주 좋았다.
사실 오늘도 주말이긴 했지만 세리와의 약속대로 이세하는 딱 하루만 쉬고(딱히 휴식을 취한 건 아니다. 기를 쓰고 자려하지 않았으니)다시 일을 하러 나왔다. 남들은 황금 같은 주말이라고 하지만 이세하에게는 이제 요일의 개념따위는 없었다. 하루하루가 그냥 24시간을 가진 덩어리라는 존재 정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피곤이 쌓이는 건 매한가지. 약이라든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에 대한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나는 신호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잠을 잔다. 피곤이 풀릴 정도의 최소한으로만.
이세하는 수면제를 꺼내 삼켰다. 유일하게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약 기운이 돌기 기다리며 이세하는 간이소파에 몸을 누웠다.
몽롱하다. 이번에도 아무런 꿈도 꾸지 않기를. 아니 꾸게 되더라도 깨어났을 때 기억이 나지 않기를.
이럴 때만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라는 존재는, 참 얄미웠다. 이세하는 어느 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 잠에서도 꿈은 꾸지 않았다.
00.
모든 이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한 사람의 평화는 끝나버렸다.
거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꿈꾸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