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비 온 뒤 푸름

루이벨라 2018-03-22 7

※ 시즌2 임시본부 챕터 1 시간대

※ 봄비를 맞이하며 써본 글






 먼지가 뒤덮인 뉴욕 중심부에 시원한 비가 내렸다. 늘 흐릿한 하늘만 봐서인지 비 오는 지금도 꿀꿀하게만 느껴졌다.

 비가 잘 오지 않는 계절답지 않게 비는 장대같이 쏟아졌다. 비가 장맛비같이 와서인지 뉴욕의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폐허가 된 거리에 일반인들이 있을리도 없었다. 그야말로 고요하다.

 이 거리에는 나 밖에 없었다. 참 좋은 적막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장댓비를 맞는 건 차가웠다. 옷이 젖어들어 달라붙는 감촉이 싫었지만 잠자코 맞고 있었다. 지금 기분에선 비를 계속 맞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틈인지 비가 더 이상 내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비가 그친 건 아니었다. 투둑 투둑- 계속 비가 떨구워지는 소리도 들리고 비로 인해 보이는 풍경이 흐릿한 것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
 "무슨 일 있어?"

 우산을 나에게 씌워주는 이는 서유리였다. 서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내가 가끔씩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내가 비 오는 날마다 이러는 행동에 대한 이유를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님 어차피 걱정시켜보았자 소용 없다는 상황을 많이 봐서일까. 늘 이런 질문을 하는 서유리에게 항상 하는 첫 대답은 친절하지 못하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냥..."
 "비를 맞고 싶어서, 라고 항상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더라, 세하는."
 "..."

 그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세상엔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기 마련이다. 서유리에게 필사적으로 숨기고자 하는 이유는 말을 하면 걱정만 끼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습관적으로 비를 맞는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알려준 건 아니다. 서유리가 직접 알아낸 것이다.

 투둑- 투둑- 비가 오는 소리가 참 따갑다. 조용한 대화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서유리가 먼저 물꼬를 튼다.

 "...실망했지?"
 "어..."
 "나도 이렇게 충격적인데 세하는..."
 "..."

 대상이 과감히 생략되어있는데도 잘만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 상황에서 생각나는 '그 곳' 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유정 누나의 당혹스러운 얼굴과 적의 냉소가 같이 겹쳐 보였다.

 입안이 쓰다.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믿어버린 존재, 하지만 그 존재에게 당해버린 배신감. 본래 있던 것에서 뺏겨버리면 원래 없었을 때의 자국보다 더 한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그러쥐으며 아파한다. 그게 너무 싫다.

 그럴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하나의 그릇이 내 안에 있는 거 같다. 근데 그 그릇은 도통 차오르지 않는다. 비라도 많이 맞으면 좀 채워질까. 아니,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비를 맞는다. 딱 한 번의, 따스한 품의 온기를 잊어버리지 못해서. 그걸 물고 늘어지는 난 참 바보다.

 다시 말을 먼저 거는 건 서유리다.

 "...참 조용하네."
 "응..."
 "비가 오니까 더..."

 쓸쓸해...말끝을 흐렸지만 분명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비슷한 단어겠지.

 "세하는 안 추워?"
 "...추워."

 춥다며 왜 들어가지는 않는걸까. 서유리가 내 볼을 갑자기 꾹 누른다.

 "세하 얼굴이 그리 굳어있으면 참 무서워."
 "...굳어 있어?"

 무언가가 확 깨어났다. 물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수면 위로 나온 기분. 확- 깨어나는 기분이다. 잠시 당황해서 얼굴선을 잠시 훑어만지는데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풀렸네."
 "...너, 일부러...?"
 "찡그리기만 해서는 마음만 심란하잖아."
 "..."

 언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거 같은데...그 때는 나와 유리의 상황이 서로 바뀌었던 거 같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 그리 억지로 웃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그 때는 유리가 너무 아슬아슬해보여서 화까지 약간 내면서 했던 충고인데, 지금의 난...

 솔직히 할 말이 없다.

 괜히 멋쩍어 서유리의 손에서 우산을 쥐고 있는 손잡이를 대신 받았다. 내가 키가 더 크다 보니 내가 우산을 들고 있는 게 더 여러모로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있지만...나 때문에 이렇게 무의미하게 서 있는 거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비를 맞는 건 아니지만 이런 형태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빗줄기도 서서히 잦아든다. 비가 그치려는 모양이다.

 "비 그치려나봐."
 "...응."

 아직 완전히 그친 건 아니라 잠시 동안 더 서 있었다. 유리는 괜시리 헛기침을 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 어깨 정도는 기대게 해줄 수 있는데?"
 '그거 내 대사였는데...'

 심술로 한 번 무리한 조건을 내보였다.

 "...몇 시간이라도?"
 "음...까지껏 해줄게! 특별히 세하는 허락해 줄게!"

 아, 참 티없다. 마치 비가 내린 직후의, 지금과 같이 푸른 하늘 같다. 우산은 더 이상의 할 역할은 없었기에 접어서 물기를 탈탈 털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세상의 모든 먼지가 다 씻겨내려 간 듯, 보이는 풍경은 한층 더 색이 선명해져 있었다.





[작가의 말]

제가 비가 오는 배경을 쓰는 걸 참 좋아합니다.

제 글에 나오는 세하나 유리의 독백 부분은 실제로 제가 생각해본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http://leesehaxseoyuri.tistory.com/92

2024-10-24 23:19:0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