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비가 오는 날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루이벨라 2018-03-15 6
00.
비.
비가 오는 날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들이 통통 튀어 오르는 소리. 잎사귀를 타고 빗방울이 미끄럼틀을 타는 소리. 지면을 악기의 몸통 삼아 선율을 타고 내려오는 빗소리.
비가 오는 날, 이런 소리에 쌓여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쓸쓸하지 않았다. 동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막 고립이 되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혼자 있고 싶은 날이 가끔씩은 있지 않은가. 비가 오는 날은 그 적막감을 즐길 수 있는 적합한 날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혼자 집을 보는 것도 외롭지 않았다. 저 빗속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 덕에 고립되어있다, 사무치게 외롭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가진 나 자체가 너무 우스웠지만.
적막하지만 외롭지 않은, 적막하지 않지만 조용한 이 느낌.
이러저러한 이유로 난 비가 오는 날을 퍽이나 좋아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좋아한다.
예전에는 빗속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속삭임이 이제는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비 오는 날을 다르게 좋아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어린 시절 그 빗속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마 이 녀석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세하유리] 비가 오는 날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
01.
“어, 비다.”
“그러네.”
오늘 아침에는 엄청 해가 쨍쨍했는데...! 여름이고 장마철이기도 하니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인 모양이었다. 원래 장마철에는 접이식 우산을 가방 안에 가지고 다니는 게 기본이었겠지만...요 며칠 동안은 장마철답지 않게 맑았다. 그러다 보니 가방의 무게를 더 나가게 하고, 공간만 차지하는 접이식 우산 따위는 오늘은 쿨하게 빼고 오는 길이었다.
“너 우산 있어?”
“없어.”
“그래...?”
옆에 있는 일행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걸 알자,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뭐, 지나가는 소나기라면 금방 그치겠지? 그나마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오늘따라 왜 둘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맞아. 검도부 연습 때문이었지...! 유리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럼 옆에 있는 검도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하는 왜 자신과 같이 남아있는 걸까? 그건 자신이 억지로 부탁을 해서 검도부 연습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하, 하지만 뒷정리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라고 말을 했으나 괜찮다며 도와준 세하 책임도 조금은 있을게 분명했다.
“...비다.”
“그러게.”
단 둘이 있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클로저를 하면서 둘이 같은 임무에 배치된 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무슨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로 단 둘이 있어본 건...아마 처음이지 싶었다.
“...비다.”
“너 그 말 지금 세 번째 인거 알아?”
“그렇지만...”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걸. 이 말을 내뱉으면 세하가 화를 내려나.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유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낀 먹구름으로 보아 소나기라고는 해도 금방 그칠 거 같지는 않았다.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 우산 좀 가져다달라고 부탁을 할까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방과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은 날이니까. 오늘 검도부 연습을 한 것도 모처럼의 클로저 임무가 없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방과 후 할 일이 없는’ 세하를 붙잡아서 검도부 연습을 부탁한 거고.
...이렇게 보니 나 조금 못됐네...?
폰을 꺼내 동생에게 연락을 하려던 유리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 때문에 같이 남아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는데 의리 없게 나만 갈 순 없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옆을 흘깃 쳐다보니 세하는 멀뚱히 바깥의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자투리 시간마다 게임기를 꺼내서 게임을 하던 녀석이...지금은 그야말로 게임을 하는데 딱 좋은 시간과 핑계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게임을 안 한다? 유리는 세하가 혹시 무슨 재밌는 거라도 보고 있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유리의 눈에 보이는 건, 비에 젖어가는 운동장뿐이었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유리는 본인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세하야.”
“...”
“...세하야?”
“...”
“이세하!”
“...?! 까, 깜짝이야!”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세하에게 유리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로 세하를 다시 불렀다. 그제서야 세하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바로 옆에 서서 그렇게나 몇 번이나 불렀는데...저 놀란 반응을 봐서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던 게 분명했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뭐?”
반 박자가 늦은 대답이었다. 아직도 그 무언가에 온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유리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했다.
“아까부터 무언가를 그렇게 열중하고 보고 있어서...뭐 재밌는 거라도 있나 싶었지.”
“...아.”
이번에도 반 박자 늦은 짧은 감탄사였다. 하지만 유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상대방한테 제대로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상대방 나름 답을 해주려고 한 걸 보면.
“...그냥.”
“그냥?”
“비 오는 날의 습관이야.”
무언가가 많이 축약된 답변이었다. 유리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 같았다.
02.
“옛날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했어.”
“그렇구나.”
아예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는 세하의 말에 유리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유리 자신은 해가 쨍쨍한 날을 제일 좋아했다. 그러니 이렇게 비 오는 날을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있는 세하는 좋아한다고 했다. 이래서 사람 마음은 겪어** 않으면 한치 앞도 모른다는 거구나. 왜인지 모르게 깨달음을 얻었다.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던 날이 많았어.”
“...아.”
어렸을 때, 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리는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싶었다. 유정에게 들은 바와 옆에서 지내본 결과 세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극도로 싫어하는 거 같았다. 일부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걸 입 밖으로 내뱉게 한건 아닐까. 가시방석인 유리와는 다르게 세하의 반응은 달랐다.
표정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목소리 하며...
평온하고 차분한 상태였다. 심지어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상상했던 세하의 반응과 전혀 달라 오히려 유리가 당황했다.
“...괜찮았어?”
“응?”
“...아니...혼자 있었다고 했잖아...”
“괜찮아. 익숙했거든.”
익숙했거든. 이 말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 걸까. 세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원래부터지만 난 항상 세상에 동떨어져있다는 기분이 들었어.”
“...”
“눈 색도 그렇고, 내가 가지고 있는 힘도 그렇고. 평범하지는 않았잖아.”
그게 어린 시절의 엄청난 상처로 남았을 거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평범한 사람들도 세상에 동떨어진 기분이 들잖아.”
“...그런가?”
“그래서 좋았어.”
그 때만큼은 나도 그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사람마다 가끔씩 혼자 있고 싶은 날이 있잖아. 비 오는 날은 그러기에 적합한 날이지.”
“...”
“혼자 있어도 그렇게 외롭지 않은 날.”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어. 적막하지만 외롭지 않은, 적막하지 않지만 조용한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하지만 막 외롭지는 않았어.”
“...?”
“그거 알아? 비가 오는 날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 거.”
“빗소리?”
“응, 빗소리. 그것도 있고.”
빗소리라고 맞받아칠 때 문득 세하가 웃은 거 같았다. 잔잔하게, 지금 내리고 있는 빗소리처럼 잔잔하게.
“같은 빗소리라도 어느 것에 맞닿아 떨어지느냐에 따로 미묘하게 다르거든. 그리고...”
“그리고?”
“...아니야. 아무것도.”
왜 말을 하려다가 말까. 그리고 그 이후로 세하의 잔잔한 표정이 흐트러졌다. 잔물결이 이는 호수에 누군가가 돌멩이를 던져 물결이 분산되어진 걸 보는 기분이었다.
...세하의 그 잔잔한 표정...좋았는데...유리는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이번에는 세하가 먼저 이야깃거리를 내뱉었다.
“계속 비 오네.”
“응.”
“집에 동생들 있어?”
아까 폰을 들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있을 거야.”
“동생한테 우산 가져다 달라고 해.”
“...나만 우산 쓰고 가기에는 미안하잖아.”
“같이 쓰고 가면 되잖아.”
...아, 그래도 되었다. 하지만 우산 하나로 둘이 가기에는 비좁기도 하고 세하와 유리의 집 방향은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둘만 가기에는 우산을 가지고 나온 유리의 동생들 시선도 있었다.
...근데 왜 내가 동생들 시선을 의식하는 거지? 유리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일부러 다른 곳으로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유리는 헛기침을 했다.
“그냥 이대로 있자.”
“하지만...”
“오늘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세하 네가 말하는 빗소리라는 거 한 번 들어보려고 해.”
유리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세하는 놀란 눈치였다. 왜, 나한테는 그런 감수성 없으면 안 되는 거니?! 하지만 유리의 그런 생각은 잠시 지나가는 괜한 기우일 뿐이었다. 세하가 아까와 같은 그 잔잔한 얼굴이 된 걸 보면 그닥 놀리고 싶은 심상은 아닌 거 같았다. 오히려 유리가 이해해주어서 고마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다시 마음잡고 들어야지.”
“...”
“...”
세하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세하의 눈꺼풀 뒤로는 무엇이 보이는 걸까. 분명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류의 것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세하가 저런 평화로운 표정을 지을 수 없을 테니까.
그 날 이후로 유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세하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03.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건물을 나오던 유리는 감탄사같이 말을 내뱉었다.
“어? 비 오네.”
“그러게.”
뒤따라오던 세하도 유리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한 굵기기는 했지만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때처럼, 비가 온다. 그 때처럼, 세하와 단 둘이 있다. 유리는 세하의 옆얼굴을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 옆얼굴을 보니 그 때 세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좋아한다 했지?”
“응? 어...”
그 때와 같은 반 박자 늦은 대답. 그 때가 떠올라 유리는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우산 없지?”
“...어.”
“그럼 그 때처럼!”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노래 부르는 듯, 유리의 말에 세하는 피식하면서 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비 오니 좋다.”
“비 오는 거 좋아했었나?”
세하의 물음에 유리는 미소지어보였다. 세하가 좋아하는 유리 특유의 쨍한 미소였다.
“좋아하게 되었어.”
“...흠.”
뭐야, 그 애매한 반응은...? 유리는 상당히 자랑스럽게 말을 했는데 세하의 반응이 생각 외로 덤덤하다. 유리는 두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자 세하가 검지로 볼 하나를 찌르며 푸흐흡 웃었다.
“뭐야, 복어 같이.”
“흥이다!”
“알아, 안다고. 꼭 ‘그 때’ 같지?”
알고 있었다. 둘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바로 부부동심일체! 라는 건가? 아, 아직 우리 결혼까지는 안했지. 그럼 연인동심일체라고 해야 하나.
세하와 유리 둘 다 ‘그 때 같다.’ 라고 표현은 하지만 다른 점이 한 가지는 있었다. 둘 다 그 때보다는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린 것,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인 것. 그래서 또 다른 하나의 소중한 인연으로 넘어간 것.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조용한 빗소리는 변함없었다.
“소나기다.”
“장마철이니까.”
“흐응, 그러네...”
유리는 그 이후로도 비가 오는 날마다 귀를 기울였지만 결국 세하가 말하려다 만 그 ‘무언가’ 에 대해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이 힌트라도 하나 주었으면 이렇게 마음고생 안 했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세하에게 재차 물어보기에는 그 때의 세하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니까. 세하가 가슴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때처럼 세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평온한 표정.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여유까지 느껴지는 표정. 아직 세하에 대해서 모든 걸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보다, 처음으로 비를 기다리는 그 때보단, 지금 이 자리, 이 시간대에 자신의 옆에 있는 세하는 훨씬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보며 그냥 웃고만 있는 유리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세하가 유리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마워.”
“응?”
“아니야. 그냥 갑자기.”
모든 게. 그냥 고마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이 있어주는 걸 행복해해주어서. 나만 행복하지 않아서. 너도 행복해해서 고마워. 그냥 너랑 같이 있는 이 시간 자체가 행복해서 정말 고마워. 더 이상 아파하는 거 같지 않아서 참 고마워.
이 많은 말을 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까. 자신은 그래도 세하보다는 솔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고맙게도, 세하는 유리의 고맙다는 말에 답변을 해주었다. 마음을 담아서.
“나도 그래. 고마워. 모든 게.”
내 옆에 있어주어서. 나와 같이 있는데도 그렇게 행복하게 웃어주어서. 항상 그렇게 꾸밈없는 얼굴로 웃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서유리.
어쩌면 세하가 어린 시절 빗속에서 들었던 누군지 모를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마 유리였을지도 모른다. 유리를 만난 이후로 그 목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지켜주고 대신 채워준 건 유리였다.
난 아마 날 꾸밈없이 봐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비 오는 날에만 들렸던 목소리. 이제는 계속 옆에 있어주면서 들을 수 있었다.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지금도 세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하지만 적막하지 않은 적막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연인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세하는 다시 한 번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I find peace in the rain.
난 빗속에서 안정을 찾아.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