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팩, 잊혀진 어금니 (1)
벨리에나 2017-12-31 2
[(0)편과 이어집니다]
7년 전,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한 집.
국가적 인물이 존재하는 곳이지만 이 집을 방문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다. 그 인물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관련 인물은 그곳에 방문할 수 없다. 알파퀸 서지수. 최강의 클로저로 불리는 그녀가 사는 집. 평범한 이웃 대신 이웃을 빙자한 감시요원이 태반이며, 그나마 있는 평범한 이웃도 감시 때문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다.
타다다닥.
한 아이가 책가방을 멘 채 거리를 달려가고 있었다. 소년은 이 거리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소년이 이토록 달리는 이유는 오늘은 엄마가 일찍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마치자마자 쉼 없이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은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주방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대신 식탁에는 항상 쪽지 한 장이 있다. 엄마가 남겨놓은 쪽지.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언제 돌아올 수 있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 소년의 하루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된다. 가끔 주방에서 소리가 들려 뛰쳐나가보면 이미 현관 쪽으로 향하던 엄마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을 결코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소년은 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본 게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 만나고 싶어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그런 엄마가 오늘은 집에 와있다.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었다.
"엄마?"
소년은 신발을 벗으면서 엄마가 자주 신던 신발이 있음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소년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엄마, 서지수가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나오고 있었다.
"엄마!"
"세, 세하야?"
세하라고 불린 소년은 가방을 내팽개치며 서지수에게 달려갔다. 서지수는 세하를 꼭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엄마가 보고 싶었어?"
"응, 응...... ."
서지수는 세하를 진정시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세하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아직 덜 마른 은발의 머리가 물기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세하는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마냥 신기한 듯 말도 없이 방긋 웃고만 있었다. 서지수는 다시 한 번 세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기특하네, 우리 세하. 엄마가 없어도 혼자 잘 있었어?"
"응! 엄마, 혹시 피곤하지 않아?"
"으, 응? 어, 조금? 하도 돌아다녀서 말이야. 조금 피곤하네."
세하는 작은 몸으로 서지수의 등으로 넘어가서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서지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하야...... ."
"엄마, 피곤할까봐, 보건 선생님한테, 여쭤봤어. 이렇게, 목 뒤나 뒤통수...... ."
서지수는 자신의 뒤에 있는 아들을 붙잡아 빙글 돌려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곤 세하의 머리에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말이야, 우리 세하랑 있을 때가 정말 편하고, 좋더라. 세하도 그렇니?"
"응! 그래서 말인데, 엄마. 이젠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엄마가 힘들면 내가 밥도 하고, 빨래도 할게. 응?"
"정말? 세하가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당연하지!"
"좋아, 그럼 엄만 우리 세하만 믿고 일 그만둔다?"
"어...... 그래도 살아가려면 조금이라도 일은 해야하지 않을까?"
"아이구, 우리 아들!"
한참을 그렇게 대화로 시간을 보내던 모자는 저녁 쯤 되서야 조금 떨어졌다. 서지수는 세하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예전 일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다.
"세하야, 엄마가 옛날 일 얘기 해줄까?"
"또 전쟁 때 얘기야?"
"어, 엄마가 전쟁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어?"
"응. 저번에 험상궂은 교관 아저씨 얘기를 끝으로 동료 얘기는 다 해줬어."
"와...... 다, 다 기억하고 있구나. 음, 그럼 무슨 얘기를 해줄까...... ."
고민하던 서지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한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세하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니 감시는 조금 누그러들었겠지. 나도 한 번 정도 얘기하고 싶었고...... . 뭐, 커서 세하가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
"아, 그래. 한 사람 더 있어."
"한 사람?"
"응. 교관 아저씨가 오기 전에 우리 팀을 이끌던 교관에 대해선 말한 적 없지?"
"어, 응. 그런 사람은 처음 들어봐. 책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어."
"좋아, 오늘은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줄게. 그 분은 엄마가 울프팩 팀에 배속되기 전엔 선배였고, 동시에 선생님이었어."
세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초기 클로저 중 한 명이었거든. 워낙 위급한 때라 선배 같은 사람은 클로저이면서 동시에 클로저들의 선생님 역할을 맡아야했어. 그러던 도중 울프팩 팀이 결성되었고, 선배가 교관이 됐어. 험상궂은 교관 아저씨도 선배에게 배웠고 말이야."
노을이 붉어지다가 점차 어두운 하늘에 먹혀갔다. 모자의 집은 이미 거실 불을 켜둔 상태여서 밤이 침범하지 못했다. 서지수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엄마는 선배에게 많은 걸 배웠어. 클로저의 기본 소양은 물론이고, 각종 전투에서의 대처법. 무엇보다 외부 차원에 대한 지식은 선배를 따라갈 수 없었어. 따로 적어놓기도 했는데 그 양이 백과사전을 능가해. 지식 뿐만 아니라 선배는 정말 강하셨어. 울프팩 팀 전원이 덤벼도 못 이길 정도였다니까?"
"와...... . 얼마나 강한 거지?"
서지수는 과거의 일을 얘기할 때 목소리가 한결 편해진다. 세하는 서지수가 하는 얘기를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하며 서지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강력한 사람이 있는데 왜 엄마가 세계 최강의 클로저일까? 어린 세하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더 이상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정지을 수 없었다. 순진한 세하는 서지수의 말이 끊길 때 질문했다.
"음, 엄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 분이 엄마보다 강하다고 했잖아? 근데 왜 세계 최강의 클로저가 엄마야?"
서지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세하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려주는 게 꺼렸던 것이 아닌,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 험상궂은 아저씨가 교관으로 온 이유는 선배가 교관을 그만 두고 떠났기 때문이야. 바로 떠나신 건 아냐. 그 아저씨에게 우리 팀을 어떻게 이끌어야하는지 다 설명해준 뒤 떠나셨지. 그 뒤로 연락이 안 되다가 엄마의 마지막 임무 때 만났어."
서지수는 세하의 머리에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우리 팀은 적의 함정 때문에 몰살 당할 위기였어. 엄마는 다른 곳에서 잡혀있다가 탈출하면서 팀과 합류했었고. 우리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선배 덕분이야. 그 분이 우리 팀을 구해주셨어. 그때 세하도 엄마 안에 있었으니 세하도 구해진 거구나."
서지수의 목소리는 점점 떨렸다.
"그 분은......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어...... .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이미 왼팔과 왼다리를 잃은 상태였어...... . 엄마는......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빙글 뒤돌아 흐느끼고 있는 서지수를 꼭 안아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이세하, 이세하! 정신 차려! 이세하!"
임무 중 신호가 끊기며 행방불명된 동료 이세하를 찾기 위해 현장으로 파견된 서유리는 어느 공장 지대에 쓰러져있는 이세하를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가 깨우고 있다. 이세하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강한 힘을 가진 서유리가 몇 번이나 흔들자 이세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 앞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얼굴을 붉히기 전에 그는 서유리를 조금 밀어내며 말했다.
"너 때문에 죽겠어. 그만해도 돼."
서유리는 밝게 웃었다.
"일어났다! 죽은 줄 알았잖아!"
이세하는 뒤통수를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야? 왜 네가 날 깨우고 있어?"
"너 임무 중 실종됐었어. 널 찾으라고 파견된 요원 중 한 명이 나였고. 너야말로 왜 쓰러져 있었던 거야?"
"차원종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그만...... . 잠깐만, 이럴 때가 아냐! 주위에 차원종이......?"
이세하는 자신의 말을 철회해야했다. 주위는 평야였다. 차원종은커녕 흔적조차 없었다. 서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왔을 때는 너 혼자 여기 떡하니 누워있던데?"
"...... 여기, 공장 지대였어. 웬만한 아파트 단지보다 컸어."
"그러고 보니 오다가 표지판에 그렇게 적혀있던데...... ."
두 사람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에 쓸려간 것처럼 주변은 쓸쓸한 평야였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유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라도 오셨던 거 아냐? 항상 빌딩을 날려먹어서 고생하셨다며?"
"엄마는 대정화 작전에서 클로저들을 안내 중이셔. 그, 험상궂은 아저씨는 아닐까?"
"유정 언니랑 함께 계셨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
서유리는 이세하를 일으켜주면서 말했다.
"아무튼 엄청 강한 사람인가봐. 규모만 보면 아주머니랑 동급일 것 같은데."
"...... 엄마만큼이나......?"
갑자기 이세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과거의 어떤 얘기가 그의 뇌리에 스쳤다. 서지수급,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자.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 아니, 잠깐만. 그 분이 돌아가신 걸 본 사람이 없잖아?
이세하는 차원종에게 기습을 당해 정신을 잃던 그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 한 번에 쓰러지진 않았어.
잠깐 서있다가,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어.
그래.
그 사람 모습이 어땠지?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었고...... 왼팔을 들었어.
맞아, 그리고 왼팔이 이상했지.
빛을 반사하여...... .
마치 기계인 것처럼.
"...... 유리야. 나 엄마한테 가봐야겠어."
"응? 병원은?"
"엄마가 먼저야."
플레인게이트 깊숙한 곳.
이너포탈 앞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서지수는 무언가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힘이 그녀에게 무엇보다 익숙했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
"아들이다!"
서지수는 반가웠으나 이세하의 다급한 모습에 서지수는 곧장 경계태세를 취했다.
"무슨 일이야?"
이세하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서지수는 이세하를 진정시키며 근처에 함께 앉았다.
"자, 진정하고. 무슨 일이야?"
"...... 임무를 수행하다가 습격을 당해 기절했었어. 분명 공장 지대였어. 유리가 와서 날 깨워줬는데 일어나보니까 평야가 되어 있었어."
"신기한 일인걸. 그, 늑대개 팀 대장이 한 일 아냐?"
"그 사람은 유니온 임시본부에 있다고 했어. 내가 쓰러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는데...... ."
이세하는 떠오르는 모든 것을 서지수에게 설명했다. 서지수의 힘, 혹은 그 이상, 기계 팔 등등. 서지수도 어렴풋이 눈치 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들. 엄마가 말했잖아. 그 선배는...... ."
"그 분이 돌아가신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 이세하, 그만해."
서지수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화나기 직전의 목소리였다. 이세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러날 수 없었다. 지금 같은 혼란한 상황에 필요한 사람은 노련한 클로저다. 서지수가 존경했던 사람이라면 필시 이 상황을 해쳐나갈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 왜 그러는 거야?"
"이세하!"
"그 분 얘기할 때만 어두워져. 왜 그러는 건데? 그 분을 존경한다면서? 존경한다면, 그 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조금이나마 살아있을 가능성을 찾아야하는 거 아냐?"
서지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세하는 몇 대 맞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더욱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도, 그때 엄마 안에 있었어. 나도 그 분에게 구해진 거야. 그런 고마운 분이 아직 살아계시다면, 난 찾겠어. '레전드' 클로저, 맥스."
서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이세하의 눈에 비친 서지수는, 과거의 엄마 같았다. 슬픔에 견디지 못해 울먹이는 모습. 그때의 모습과 같았다. 이세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엄마는 그 분을 보고 싶어한다.
"누님."
막 작전에서 복귀한 제이(J)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서지수는 눈물을 급히 훔치며 뒤돌았다.
"왜 그래?"
"다녀와요, 누님.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뭐......?"
제이는 손으로 제스쳐를 취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솔직히 나도 그 분 뵙고 싶어. 하지만 팀에서 그 분과 가장 친밀했던 게 누님이잖아? 그러니 누님이 다녀와봐. 누님이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하지."
"...... 나 없는 사이 은근슬쩍 땡땡이 치려는 건 아니고?"
제이는 헛기침을 하며 뒤돌았다.
"어이구, 허리야...... . 비가 오려나."
서지수는 제이의 허리를 치려는 시늉을 한 번 하면서 제이를 쫓아냈다. 그러곤 얼른 뒤돌아 이세하에게 다가갔다. 이세하는 바짝 긴장하며 서지수의 말을 들었다.
"이세하."
"으, 응...... ."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서지수는 씨익 웃어주며 아들의 가슴을 툭 쳤다.
"이젠 엄마보다 낫네."
"그, 그런가?"
서지수는 이세하와 팔짱을 끼며 플레인게이트로 나가는 포탈로 걸어갔다.
"아들이랑 단 둘이 해외여행도 가보겠네."
"응? 어디 있는지 알아?"
"그 분의 기계의수를 만든 곳이라면 뻔하지. 오랜만에 잘생긴 후배도 보러갈 겸 독일이나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