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세하 - 에필로그
WinterFlower 2017-11-17 0
10년 후—
“슬비 요원님, 준비되셨나요?”
“네, 준비됐습니다. 언제든지 프로그램을 시작해 주세요.”
이슬비는 기계장치에 둘러싸인 채 훈련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불빛이 들어오고 현실의 그녀가 의식을 잃기 직전에 최보나
박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레모리 박사가 어떤 장난을 쳐놨을지 모르지만, 정당한
거래로 받은 프로그램이에요. 수년 전부터 저희 세계에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해요.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최보나 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슬비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곳은 그레모리가 만든 프로그램
안이었다.
“여긴…”
가상 프로그램에 접속하면 수 초간 상황판단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슬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그 후유증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십 초가 지나고
그 단위가 분에 이르렀지만, 이슬비가 보는 풍경을 달라지지
않았다.
“뭐야…이건…”
이슬비가 보는 풍경은 신서울의 어느 방 안이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그리울 수 밖에 없는 얼굴이
가득했다.
“유리, 테인이, 제이 아저씨….”
이슬비는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다 이내 한 사람이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슬비는 그를 찾아 헤맸다. 그는 방
어디에도 없었다. 이슬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이슬비는 자신이 본 남자가 십 년을 찾아 헤맨 그 사람임에
확신했다. 건물을 빠져나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이슬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어느 장소를 향했다.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곳으로
갈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세하!!!”
그녀의 외침에 어느새 그녀가 찾아 헤매던 사내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춘 곳은 언젠가 그 사내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장소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구나—”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바이러스에 걸린 듯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흑발이 희게,
그가 입고 있던 교복이 언젠가 그가 즐기던 RPG 게임에서 나올
법한 갑주로 변했다. 이슬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슬비.”
이세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았다. 이슬비의 기억 속의
이세하와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뭐야, 왜 네가 이 프로그램 안에 있는 거야. 왜 이 많은 데이터
중에서 너만 자아를 가진 거야?
이 프로그램은 분명—“
“그레모리가 만들 것일 테지. 그녀는 나의 나라로 다시 돌아오려
하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인간계엔 재밌는 것들이 많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레모리는 나의 자아를 프로그래밍 해서 이 가상현실에 넣은
거야. 이곳에서 나는 완전한 힘을 쓸 수는 없더라도 이 가상현실을
나의 의지대로 조종하는 것은 가능해.”
“그거 말고!”
이슬비는 소리 질렀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이세하는 생각했다.
“너의 나라라니? 눈동자는 왜 그런 색깔이야? 그 우스꽝스러운
옷은? 자아를 프로그래밍했다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이세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고독하면서도 고고한,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차원종들의 왕이 되었어. 인간과도 차원종끼리 싸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젠 시간이 얼마 없어.
나의 차원압에 눌려, 곧 최보나 박사는 위험하다는 판단하에
너를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끄집어낼 거야.”
“잠깐—“
“슬비야.”
이세하가 이슬비의 말을 잘랐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너에게서 어머니의 힘이 느껴져.
설명해줄 수 있겠어?”
“… 선배님께서 나에게 위상력을 물려주셨어. 십 년 사이
그 정도로 과학이 발달했어. 그녀는 이제 일반인이야.
더이상 위상능력자가 아니게 되셨어. 그리고 이젠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계셔.”
“너에게 짐을 지웠구나.”
“아니야, 네가 이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기에 이렇게 한거야.”
“고마워, 슬비야. 이제야 어머니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계시는구나.
그런 너에게 염치불구하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이슬비는 더이상 흐르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먼 훗날, 인간의 땅을 탐내는 차원종이 나타날
거야. 그것은 분명 왕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존재(나)일 테지.”
이슬비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꼈다. 그것은 최보나가 자신을
가상 프로그램에서
강제 로그아웃시키려는 신호였다.
“언젠가 네가, 조금 더 강해져서. 나에게 닿을 수 있게 되는 날에.
앞으로 일 년, 오 년. 또다시 십 년이 지나더라도 기다릴게.”
이세하는 이슬비에게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왕)는 철처럼 차가운 손에 인간(이세하)의 따듯한
감정을 담아 이슬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 위로
따듯한 눈물이 묻고 이내 식었다.
“그날에 '네가' 날 죽여줘.”
이세하는 그리 말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지직’거리며 사라짐과 동시에 새하얀 배경이 나타났고, 곧
이슬비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슬비 요원님! 괜찮으세요?!”
최보나는 이슬비의 얼굴에 씌워진 기계를 벗기며 말했다.
최보나는
이내 이슬비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슬비… 요원님?”
이슬비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슬비는 자신의 허벅지를
적시는 눈물을 십여 년 만에 본다 생각했다. 이슬비는 문득
이세하, 그리고
서유리와 함께 다녔던 학교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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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 않은 펜픽이었습니다! 원래 3화 분량만 확보하려 했지만
2 화 플롯을 짜는 와중에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2배나 되는 분량이
뽑혔네요. 지인이 절망 가득한 스토리를 읽고싶다 해서 시작된
글이지만 희망찬(?) 절망을 좋아하기에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네요.
짧고 부족한 글 읽어주신 (제 지인을 제외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P. S. 사실 세하x슬비보다 라인이 확실한 제이x유정을 더 좋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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