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고 어려진 세하와 슬비, 네 번째 이야기.
토이코 2015-02-12 25
내 작고 어려진 세하의 욕실탐방, 그 두번째 이야기.
욕실 안으로 들어서며, 슬비는 머리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세하에게 물었다.
"세하야, 너 혼자 씻을 수 있겠어?"
슬비의 말에 세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신있게 말했다.
"우냐아! 잘 씻을 수 있어! 세하도 다 커써!"
자신있게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가슴을 툭툭 치는 세하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은 슬비는 세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못씻는구나.'
보통 애니매이션이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러지 않는가, 자신있게 말하며 특기분야야! 라고 말해놓고 와장창 망쳐놓는 그런 시나리오. TV로 인해 사회 생활을 교육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슬비는 TV의 상식을 완전히 믿고 있었고, 그 때문에 멋대로 세하의 발언을 추리한 슬비는 세하를 직접 씻겨주기로 결심했다.
욕실의 구조는 여느 가정집과 다를바가 없이 구성되어 있었다. 작은 3칸짜리 수납장과 벽면에 붙어있는 새하얀 욕조, 세면대. 그리고 변기. 변기의 커버를 덮고 세하를 그 위에 올려놓은 뒤, 슬비는 부엌의 찬장에서 부드러운 새 행주를 꺼내와서 따뜻한 물을 적셔놓고는 세하에게 건냈다.
"슬비이. 이게 뭐야?"
따끈따끈하고 물기가 흠뻑 적셔져 있어 찰박찰박 거리는 행주를 만지며 세하가 묻자, 슬비가 웃으며 말했다.
"세하야, 슬비는 이제부터 씻을 준비 해야되니까. 세하도 옷 벗어서 잘 개켜놔야해. 알았지? 맨몸으로 있으면 추우니까 다 벗고나서는 꼭 그거 덮어야 해. 알았지?"
"응응! 아라써!"
그러면서 뒤로 돌아 주저하지 않고 자켓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해친 후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 것 까지 목격한 후. 슬비도 씻기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욕조의 물 배출구에 마개를 끼워놓고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한 후, 젖어서 축축한 와이셔츠와 치마를 벗어 세면대 위에 잘 개어두고 수납장에서 거의 써 본적이 없는 커다란 샤워 타월을 꺼내 몸에 두르고, 머리는 뒤로 쓸어넘겨 머리끈으로 질끈 묶었다.
속옷을 벗어야 할까… 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상당히 무리인듯 싶었다. 작고 어려지긴 했어도 한때는 동급생이였던 세하인데다가, 그 대상이 또 남자라면 아무리 좋아하고 어리다고 해도 거부감 같은것이 들기 마련인지라, 2차 방책으로 속옷은 벗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슬비! 슬비이! 이거 봐!"
변기 커버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자신을 어필하는 세하의 목소리에 슬비가 타월이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잘 고정시키며 뒤로 돌자, 따뜻하라고 덮어준 행주를 목 뒤로 넘겨 망토처럼 둘러매고 있는, 어린이들이 자주 하고 논다는 이른바 '슈퍼맨' 놀이를 하고있는 세하가 보였다.
평소같았으면 귀여워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겠지만 현재는 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였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하의 맨몸에 슬비의 얼굴이 한순간에 달아오르며, 재빠르게 방금전에 물기를 닦은 수건으로 세하의 몸을 감싸고 세하를 들어올렸다.
"세세세세하야지금은 그런 장난 치면 안 돼. 알았지?"
"우, 우냐? 슬비 어디 아……."
"아프지않아아프지않아전──혀 아프지않아일단들어가자욕조에물이가득!"
슬비의 행동에 당황하는 세하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고 슬비는 이제 물이 가득 차오르기 직전인 욕조의 수도꼭지를 잠궈두고 세하와 함깨 욕조로 들어갔다. 자신이 들어가 앉음과 동시에 넘쳐 밀려나는 물이 매마르고 차가운 욕실의 바닥을 한번 휩쓸고 지나갔고, 그와 함깨 차가워져 있던 세하와 슬비의 몸이 함깨 따뜻해지면서 입에서 절로 감탄이 세어나왔다.
"하아아…… 따뜻해…."
"냐──아……."
세하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들고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이러고 있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기에, 슬비는 한쪽 무릎을 들어올려 그 위에 세하를 앉혔다. 세하는 욕조 안에서 차가웠던 몸을 녹이며 욕실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슬비의 차림새를 보고는 자신도 행주를 이리저리 돌려 슬비와 마찬가지로 온몸에 둘렀다.
"똑같다! 헤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세하를 보며 슬비도 함깨 웃어주었고, 세하가 물장구를 치며 와아── 하면서 노는 동안 슬비는 생각에 잠겼다.
'세하는… 일단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긴 한걸까? 아직 저 현상에 대한 재대로 된 정보도 없고.'
유정의 직속상관인 데이비드 국장이나, 세하의 어머니인 알파 퀸은 무언가를 알고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이 현상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기 보다는…… 일부러 대화를 피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재미있으니 지켜본다' 는 것 처럼.
'……사실 세하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도, 나야 좋은거지만.'
입가까지 몸을 담궈 입에 머금은 공기를 부글부글 내뿜는 세하의 모습을 보며 생긋 웃고는, 슬비는 도로 생각에 빠졌다.
'이것과는 별개로 아직까지 불안정한 강남의 위상변곡률도 마음에 걸려. 칼바크 턱스의 가방 사건 이후로 쇼핑몰이나 인근 지역에서도 최근엔 계속 색다른 차원종이 출현하고 있고… 이게 전부 칼바크의 계략인걸까? 작고 작은 위상변곡률이 모여 커다란 나비효과를 만드는…… 차원전쟁의 발발이라던가. 그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는 징조의 초기증상일지도…….'
생각에 빠져있던 슬비는 힐끔 세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예상 외였지. 그 크기. 어린아이 치고는…… 성숙과 미성숙의 중간 단계랄까. 신체의 크기와 성격, 그리고 일부 특징들만 불완전하게 변환된걸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내부 차원이 아닌 외부 차원의 새로운 능력이니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어라?'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복잡하고 황당한 머릿속 생각에 지레 놀라며 벌떡 일어나는 슬비와, 몸을 받혀주던 지지대가 사라지는 바람에 물 속으로 풍덩 빠져버린 세하. 세하가 빠지는 소리에 놀라 슬비가 급히 주저앉으며 세하를 꺼내주자, 세하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한 표정으로 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세하야 괜찮아? 물 안먹었어?"
"……아, 우… 으으…… 우으으으………."
급기야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슬비가 허둥지둥 놀라며 세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와와왓! 세세세하야미안해! 슬비가 잘못했어. 응? 아, 이, 이따가 슬비가 세하 옷 만들어줄게!"
"……오옷?"
적당한 변명거리와 관심사를 만들어낸 슬비의 말에 세하가 관심을 갖자, 슬비는 작전을 구상할 때 보다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며 변명의 주제의 일탈성과 이 변명의 필요성을 순식간에 검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세하는 옷이 전부 젖어버렸으니까 입을 옷이 없잖아. 슬비가 새로 사거나 만들어줄게! 어때?"
"……우우… 아, 알았어… 슬비가 주는 선물이라면……."
'새로운 옷' 이 관심사가 아니라 '슬비의 선물' 에 관심을 가진 세하의 마음을 안 슬비는 조금 기분이 멋쩍어지는 것을 깨닫고 왠지모르게 가려운 뒷머리를 살짝 긁었다.
"저기… 미안해, 세하야. 용서해줄거지?"
다시 한번 되묻는 슬비의 말에, 세하는 눈가를 슥슥 닦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양이처럼 울부짖었다.
"우냐!"
그 말에 슬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활짝 웃었다.
어떻게 보면, 슬비에게 A급 차원종보다 훨씬 무서운 것은 S급 차원종도 뭣도 아닌 '세하에게 미움을 사는 것' 일지도 모른다.
이후 세하의 머리를 감아주던 도중 비누거품의 무서움을 모르는 세하가 실수로 눈을 떴다가 비누거품이 눈으로 들어가 비명을 지르며 엉엉 울어 슬비의 애간장을 태웠던 사건이나, 바디 워시로 몸에 비누칠을 하던 도중 세하가 슬비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다가 미끄러져 슬비의 타월을 잡고 욕조로 떨어지는 바람에 놀란 슬비가 비명을 질렀다던가 하는 사소한 사건들을 뒤로 하고 목욕을 재개한지 약 한 시간. 슬비와 세하는 상쾌한 기분으로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하아, 상쾌하다. 그렇지 세하야?"
"좋다아…."
슬비는 수납장 안에 항상 넣어두는 흰색 운동용 면티와 노란 핫팬츠를 입고 있었지만 세하는 마땅한 옷이 없어 또다시 새로운 행주를 꺼내와 몸에 덮고있는 상태이다.
이후 방에 들어온 슬비는 한가지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세하에게 옷을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때문인데, 슬비도 양성 기관에서 훈련 후 자유시간에 여러가지 취미 활동에 도전해보았기 때문에 재봉 또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옷을 만든다는건 도전 자체가 다른 것, 뜨개질이라던가 십자수같은 것은 어느정도, 숙련도로 따진다면 중고급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정교하게 옷을 만든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지금 옷감을 사러 나간다거나… 세하의 옷을 사주기에는…….'
머리 위에서 우냐─ 하고 울고있는 세하의 크기를 생각해본다면…… 생후 2~3개월 즈음의 강아지의 옷을 사준다면 딱 맞지 않을까.
그렇게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참을 생각하고 있던 도중 옷장을 보았을 때, 슬비에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한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까──《검은양》팀에 소속된 후 며칠이 지난 후, 스킬큐브를 담당하는 유니온의 과학자. 정도연이 자신을 부른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아, 어서와요. 당신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발명한 신제품의 테스트를 겸해주었으면 해서 부른것이예요."
"신제품……?"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옆 탁자에 놓인 서류파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도 아시겠죠. 유니온에서 직접 제작한 코스튬에 대한 성능을. 코스튬의 성능을 향상시킬수록 착용자의 신체능력을 확장시켜주는, 이른바 강화 외장같은 것이죠."
"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업무파일에도 적혀있을 뿐더러 새로 얻은 지식은 잘 메모하기 때문에……."
"당신은 역시 클로저가 아니라 연구원이 되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꼼꼼한 관찰력과 지식 습득력, 그리고 노력으로 습관화된 복습력은 저로서도 참 부럽네요. 아, 어쨋든 코스튬의 안타까운 단점이라고 한다면, 일반 옷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착용자와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착용할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번에 새로 개발한 코스튬은 첨단 과학 기술이 적용된, 당신도 영화에서 많이 본《형상 구현 코스튬》이예요."
"형상 구현이라면… 혹시 착용자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옷이 변화하는 형식인가요?"
정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췄군요. 당신이 말한대로 착용자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옷의 크기가 자유롭게 조절되요. 하지만 여러가지 미세한 기계부품들이 옷에 장착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세한건 보면 알거에요. 이곳에서 나가서 좌측으로 가다 보면 제 물품 보관소가 나와요. 거기서 F-27번을 찾으세요."
그렇게 테스트용으로 받은 코스튬이지만 정말정말 입기가 꺼려졌다. 덕분에 아직도 그 옷의 착용감이나 전투시 불편함, 개선점은 이미 하나를 찾았지만… 어쨋든 착용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정도연 씨를 피해다니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 옷이 드디어 임자를 찾은 것 같았다.
"…세하야?"
"으응? 슬비이, 왜에?"
아직 슬비가 들고있는 옷을 못 본 세하의 목소리를 평온하기 짝이 없었지만, 잠시 후. 세하는 으냐아아아악! 하며 비명을 질렀다.
"스… 슬비! 슬비! 슬비이이! 그건 아닌 것 같아!"
"괜찮아, 세하야! 어울릴거야!"
"으냐아아아아악!!"
……이게 정녕 아이의 옷을 입히는건지, 인형 옷 갈아입히기를 하는건지 모를 것 같은 광경. 세하는 입기 싫다며 슬비의 염동력으로 공중에 떠오른 채 바둥거리며 거부하고 있고, 슬비는 흰색 프릴이 줄줄히 달린 분홍색 원피스를 들고 세하에게 입히기 위해 그녀답지 않게 이성을 잃은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후, 원피스를 입고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세하의 모습을 보고있던 슬비가 휴대폰의 카메라 어플리케이션을 작동시켜 사진을 한 장 찍고는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애니매이션에서 이런 장면을 보고 코피를 흘리는 남주인공의 증상을 이제야 알았다나 뭐라나…….
사실, 슬비가 세하에게 원피스를 입힌 것은 충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불과해 제품의 테스트 기록을 남기자는 목적에 불과했지만, 세하의 모습과 원피스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귀여울 것 같아 후에는 정말 어두운 욕망에 불타 저질렀다…… 는 것은 영원한 슬비만의 비밀이였다.
잘리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