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외출
루이벨라 2017-09-16 6
※ 서지수가 나온 이후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세하도 자식 바보면 재밌을거 같아서 써본, 아빠와 아들의 가까워지기 프로젝트 외전
※ 네이버 카페에서 따로 연재중인 2세 장편을 기반으로 쓴 외전입니다. 따라서 그 장편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몇몇 등장합니다.
※ 지인분이 멋진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유성아, 잠깐 이리로 좀 와볼래?"
"...뭔일인데요."
토요일. 학교를 가지 않는데도 나가려는 채비를 하는 유성을 현관에서 서유리가 불러세웠다.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뒷짐을 지고 있는 서유리를 보면 꼭 불안감이 솟았다. 예를 들면 엄청 귀찮은 심부름을 시킨다거나, 아니면 기습으로 껴안기 시도를 한다거나...
그리고 그 예상 중 하나는 적중했다.
"자, 이거."
"...이건."
서유리에게 유성에게 건네준 건 유니온 클로저의 요원증. 물론 서유리의 것은 아니었다. 요원증에 프린트 되어 있는 사진은 제 얼굴과 똑 닮은 어떤 이의 얼굴이었고, 코팅된 이름란에는 '이세하' 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단숨에 짐작이 갔다. 이세하가 요원증을 두고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토요일인데도 출근이라니...월급쟁이는 힘들구나, 싶었다.
"...아빠 오늘도 출근하셨어요?"
"응. 복구가 막바지가 되어가니 주말에도 호출되는 모양이야."
"...지부장이 뭔 할일이 있다고 주말에도 불려나가는지."
"...너, 지금 지부장이란 직책 은근 까내리고 있다? 의외로 결재할 서류들이 많다는 이 말씀!"
전(前) 지부장 서유리 요원님의 말씀이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있는 유성을 서유리가 두 어깨를 팡팡 치면서 떠밀었다.
"그럼, 부탁할게~"
"...꼭 이거 드리러 가야해요?"
"응. 왜? 아빠 싫어?"
이세하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유니온 내부에서 이세하와 만난다는 게 싫다고나 할까...지부장의 아들이라는 조명을 받는 것도 근래에 들어서 귀찮아 안 그래도 유니온 본부에 잘 안 가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세하랑 같이 유니온 본부에서 세트로 있다고 생각을 하면...더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괜히 툴툴거리는 목소리 톤으로 나가버렸다.
"...싫은 건...아니고..."
"그리고, 나보다는 우리 하늘이가 가져다주면 세하 엄~~청! 좋아할걸?"
"..."
"세하, 보기 보다 아들 바보라서 말이야~"
...엄마도 아들 바보 같은데요? 부부는 닮는다고 하던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뭐, 이세하의 침착함을 서유리가 닮은거고, 서유리의 풍부한 감성을 이세하가 닮은거지만...유성이 보기엔 좀 이상한 비율로 닮아버린거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
"...네, 네."
거절한다면 서유리는 분명 눈물을 글썽일 것이다. 그 앞에 붙이는 말이 뒤늦은 사춘기가 온건가? 일 게 뻔했다. 아니, 그 소리 들을 바에는 그냥 눈 감고 이세하한테 빨리 요원증만 주고 오는 게 나았다. 자신은 서유리, 엄마의 눈물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근데 요 근래에는 서유리가 그걸 써먹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나마 유성이 자신은 지금 사복차림이라는 것에 위안을 얻기로 했다. 요원복을 입으면 더 비교당하기 쉬워지니까.
* * *
"그럼 오늘 서류는 이게 끝인건가?"
"네, 지부장님."
"확실히 복구가 거의 끝나가는 느낌이 들기는 하네."
유니온 신서울 지부의 지부장, 이세하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황금 같은 주말, 물론 밖은 쌀쌀해지고 있는 11월의 날씨였지만 그래도 주말에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당분간은 주말 출근은 사양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지부장님."
"요새 한창 바쁘지 않아?"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딱딱한 박민아의 대꾸에 이세하는 피식 웃었다. 한창 설레야할 예비 신부가 이런 서류 지옥에 있다는 거 자체가 조금 말이 안되는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이젠 얼추 끝나간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저맘때쯤 어땠더라. 이세하 본인도 엄청 바빴던 것 같았다. 이 나라 저 나라로 다 불려다녔기 때문인지도. 이상하게 결혼 직전에 많이 바빴다.
"그럼 이제 슬슬...퇴근해볼까?"
"점심 식사 전 퇴근이라니, 오늘은 정말이지 천국이네요."
애초에 주말에는 출근을 하지 않는게 제일 천국이겠지만. 이세하는 겉옷을 챙겼다. 오늘은 간단하게 일을 끝낼 것이기에 일부러 사복을 입고 왔다. 지부장실을 나가니 마침 복도를 지나고 있던 여자 요원 3명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뿔싸, 였다. 왜인지 쉽게 풀려날거 같진 않았다. 그리고 그건 현실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세하 지부장님!"
"모두들 좋은 아침...아니, 점심인가 이제?"
"지부장님, 이제 퇴근하시나요?"
"부럽네요...저희는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그래도 그래도! 이세하 지부장님 같은 훌륭한 분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조잘조잘거리며 제 이야기를 퍼붓는 요원들을 보며 이세하는 난감해했다. 안 그래도 3세대에 해당되는 유니온 요원들은 이세하에 대한 환상이 매우 큰 세대였다. 뭐, 학교에서 제2차 차원전쟁의 종식을 해준거나 다름 없는 위인이자, 한번 들어가면 절대 살아돌아올 수 없는 멈춰진 공간에서 멀쩡히 살아돌아온 사람으로 배웠으니...현(現) 클로저 중에서 강자에 속하는 건 틀림없으니. 하지만 이세하는 자신에 대한 3세대 요원들의 환상에 엄청난 거품이 끼어있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옆에서 자신을 도와줄 박민아는 빠른 퇴근에 흥이 생겨 벌써 남자친구를 만나러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난감했다.
'...어?'
그리고 그 순간 이세하는 자신을 이 상황에서 탈출시켜줄 박민아 이외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저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신과 똑닮은 인물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들이다!'
"아들!"
아들! 이라는 외침에 이세하를 둘러쌓던 요원들은 그제서야 유성의 존재를 인식했다. 유성은 정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에요? 설마 세계 최고의 클로저가 고작 이런 상황에서 매우 난감해하고 있는거에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유성이 이세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걸 알아챈 요원들은 급히 식은땀을 흘리며 이세하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곧바로 사라졌다. 소문에는 유성이 3세대 유니온 요원들 중에서 제일 서열이 높다고 하던데...그 말이 사실인 거 같았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르게 좀 아랫사람을 무섭게 대하는 것도 같고.
자신의 한뺨 앞까지 다가온 아들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아래였다. 그럼에도 키에는 상관없이 일단 사람을 주눅들게 만다는 눈빛은 여전했다. 아, 이 눈빛 때문에 3세대 요원들이 유성을 무서워하는걸까? 싶은 이세하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아들!' 이라고 하지 말아주실래요?"
"미안...내가 너무 설렜나? 근데 어쩐 일이야?"
창피해하는건가.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유성을 유니온 안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짝반짝거리는 제 아빠의 눈동자를 보면서 유성은 그제서야 서유리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이거, 놓고 가셨다길래."
"...아, 요원증?"
일부러 요원증을 전달해주러 여기까지 와준 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부러 놓고 온건대."
"...네?"
"오늘은 그렇게 할 일이 많지 않아서 일찍 집에 갈 수 있었거든.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사복 차림이잖아?"
"...그럼 지금 퇴근하고 계시는 길이었어요?"
"응."
자신의 대답과 동시에 이세하는 유성이 자신의 이마를 짚는 걸 보았다. 저 태도로 보아하니 유성 자의로 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타의, 아마도 서유리가 심부름을 시킨거겠지. 아들에게 왠지 미안했다.
"그럼 헛수고한거네요."
"그, 그런가?"
그런 가시 돋힌 말을 아무렇게나 하지 말아줄래? 상처 받는단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약속이 있어서."
"앗, 저기 자, 잠깐...!"
약속이 있다는 사람 함부로 붙잡는 건 아니었지만 이세하는 그럼에도 이 말을 내뱉었다. 급박하게.
"오랜만에 시간도 있는데 아빠랑 같이 시간 보낼래?"
"..."
* * *
그리고 약속이 있다던 유성은 그걸 곧바로 승낙했다.
"..."
"..."
일단 거리에 나오기는 했지만 할일이 없었던 부자(父子)였다. 아니, 그 이전에 유성이 이걸 승낙할 줄은 몰랐다. 이세하 자신도 오늘 자신이 점심 시간에 아들과 함께 거리에 나와있다는 걸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패닉은 아니지만 긴장되었다. 오랜만에 보내는 아들과의 시간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5살 꼬꼬마 아들이 아닌 자신과 키가 비슷해진(그렇지만 유성이 키가 더 작다) 20살의 성인인 아들...무엇부터 해야하나...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 15분. 점심 시간이니 일단 요기나 하면 되겠지, 싶어서 유성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밥 먹고 나왔는데요?"
"...아."
철벽투성이 아들이었다. 여기서 1차 좌절.
"그래도 뭐 먹고 싶은거 없어?"
"딱히..."
"하나 정도는 있을거 아니야?"
아무거나 말해도 돼. 고급 스테이크여도 돼. 그냥 아빠가 다 사줄게! 2차적으로 좌절하긴 싫었다.
끈질긴 이세하의 설득(?)에 철벽의 방어를 자랑하던 유성의 입에서 드디어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이스크림."
"응?"
"...아이스크림...먹고 싶다고요..."
너무 귀여운 대답이라 이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풉, 웃어버렸다. 그래서 아들의 질책의 눈빛을 잔뜩 받아야했지만.
옛날에도 아이스크림 좋아했는데 그거 여전하구나...싶어서. 드디어 자신이 아는 아들의 부분이 나온거 같아서 긴장이 풀려 웃어버린 것 뿐이었다.
"..."
"아, 미안미안."
"..."
"근데 그냥 그거여도 돼?"
겨우 웃음을 멈춘 이세하가 물어본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소박한 꿈? 인거 같아서. 유성은 아무 대꾸 안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전방의 유명 아이스크림 가게를 향해서. 괜찮다, 라는 암묵적인 대답이었다. 이세하는 피식 웃으며 아이스크림 가게로 같이 향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맛으로 드릴까요?"
"초콜릿."
"초콜릿이요."
둘이 동시에, 똑같은 맛으로 주문하자 점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당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세하가 먼저 물었다.
"초콜릿 좋아해?"
"...네."
"이런 입맛은 날 닮았네."
"...초콜릿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먼저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유성이 가게에서 나갔다. 언뜻 보기는 했지만 유성의 양쪽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워하는건가? 그 모습에 저절로 아빠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 * *
11월의 거리는 평화로웠다. 복구가 거의 끝났는지 예전의 거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얼추 복구되어가나 보네요."
"모두들 많이 힘 써준 덕분이야."
"지부장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지부장이라고 해도 뭐 별게 있니? 그냥 난 앉아서 서류 결재한것 밖에 없는데."
그래도 수고하셨잖아요. 주말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혹은 새벽에 귀가하는 경우도 많으셨고. 이 말은 굳이 추가하지 않기로 했다. 혀끝을 감도는 초콜릿의 맛에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는 유성을 보며 이세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리 큰걸까? 키는...확실히 좀 더 커야하겠고...적어도 자신과는 비슷한 키가 되어야할텐데...원래 입이 짧은 아이니, 이렇게 커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겨야하나? 등등의.
문득 유성이 이렇게 자신과 있어도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분명 괜찮다며 먼저 있다는 선약을 파기하고 자신과 같이 있어준거에 대해선 솔직히 기뻤지만 사회생활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부모의 흔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루온님 제공 : https://twitter.com/RUONSky0603 이쁜 그림 그려주서서 감사합니다! ^^)
"...근데 약속이라는 게 뭐야?"
"네?"
"오늘 약속 있어서 나온거라며."
"...아."
이제 앞에 있던 약속은 별 상관이 없다는 듯이 무심한 톤으로 유성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형 만나기로 했었어요."
"아, 찬이?"
친형이 없는 유성이 앞에 이름을 안 붙이고 '형' 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찬이밖에 없었다. 둘은 친구이면서도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까. 이세하도 찬이를 몇번 만나보았다. 유성과 다르게 유(流)하지만 강단이 있는 아이였다. 제 아빠를 쏙 빼닮은 찬이를 이세하도 좋아했다.
"나 오늘 약속 못 간다, 라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일방적인 파기 아니야?!"
"아빠가 밥 좀 먹자고 해서 약속 못 간다, 라고 했어요."
"...아."
찬이에게 나중에 아무래도 밥 좀 사줘야할거 같았다. 눈치가 이렇게 있어주다니! 뭐...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성과 찬이에 대한 아빠의 인식은 엄청 다르니 찬이도 이해해주는 걸수도.
"이런 말도 하더라고요. 아저씨한테 마음껏 받아먹으라고."
"...마음껏 받아먹으라고 한게 고작 아이스크림이었니?"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는데 떠오른게 이것밖에 없었다고요...!"
"하긴, 아이스크림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
이세하가 작게 동의를 하자 유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귀여워...누구 아들인지 정말 귀여웠다.
...아, 혹시 서지수가 이세하를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이세하는 서지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들이 정말 귀여웠으니까.
물론 자신은 유성이 같이 이렇게 쌀쌀맞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세하 자신도 서지수 같이 막 애정표현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오르네요."
"옛날 일?"
"아마 아빠가 행방불명되고서 난 이후의 일일거에요."
뜨끔. 자신이 지울 수 없는 가족들에게 대한 과오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멈춰있는 이세하를 뒤돌아보며 유성이 물었다.
"...아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로 다 사라질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상처가 될지도 몰랐을 일인데. 그 일을 아들 입에 직접 오르게 하다니...하지만 유성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살풋 웃기도 했다.
"옛날에는 원망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
"아빠 잘못도 아니고."
그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되었다. 아빠 잘못이 아니다. 그 말 하나로 마음이 얼마나 따스해졌는지 모른다. 언젠가의 서유리가 이런 말도 했었더랬다.
-그리고 이때까지 못했던 거면,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히 하면 돼. 물론 나보다는 아이들 위주로! 그리고 나도 세하처럼 못난 부모라서 나도 열심히 할거야. 그러니 우리 라이벌이네?
-좋은 의미의 라이벌이네.
여전히 차가운 아들의 태도이지만, 그 안에는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유성이 하려던 말을 가볍게 다시 이끌어올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야?"
"아...! 그래서 할머니가 저랑 누나를 보살펴주었는데요."
할머니라면 서지수였다. 엄마가 손주들에게 무슨 짓을 한건가? 갑자기 불길해졌다.
"그때 할머니가 저랑 누나 껴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막 귀엽다느니 포근하다더니 땃땃하다더니...특히 저한테 더 그랬어요. 좀 크고 나서는 제가 거부하기 시작했지만."
"그, 그래?"
아, 엄마...설마 나 어렸을 때 했던 걸 이제는 손주들에게도 하시는겁니까?! 하지만 정작 하이라이트는 유성의 그 뒷말이었다.
"근데 그때 할머니가 말한 아들 냄새보단 못하다는 건 뭐에요?"
"..."
아, 어머니...
* * *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둘은 거리를 한참 동안 돌아다녔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네."
"그러게요."
"그러고보니 유성이는 추위 잘 안 타?"
"잘 견디는 편이에요."
몸 속에 냉기가 있으면 추위를 더 탈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세하는 여름을 견디는 건 무척 힘들었다. 반대로 겨울은 잘 견디는 편이었다. 열기로 인해 몸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뜨거운 편이기 때문이었다.
"너도 나처럼 여름 나는걸 힘들어하는 거 아닐까?"
"여름도 괜찮아요. 몸이 일반인보단 차가워서."
"윽...그거 부럽네."
"하지만 지금도 자칫하다가는 동상에 걸려요."
예전부터 감정 조절이 서툴러서 이따금 손에 눈꽃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몸이 항상 냉하니까...바깥에서 오는 냉함인지, 내 안에서 오는 냉함인지 구별이 안 가거든요."
"...아."
"그래서 겨울도 그냥저냥 버티는거고요. 추워도 늘상 추운거니까."
그 춥다는데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게 참 대단하다. 뭐, 아이스크림은 원래 추울 때 먹는 음식이었으니까 말을 말자.
유성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이세하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서 머졌다. 앞서서 말했던 자신의 과오 중 하나가 또 있었다.
"...그거 괜찮아?"
"괜찮아요."
"...미안."
"아빠는 왜 저한테 미안한게 많은건지 모르겠어요."
이세하가 가리킨 건 유성의 목에 차있는 초커 형식의 목걸이. 위상력 억제 장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목걸이에 가려져 안 보이지만 그 초커 주변을 타고 가늘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 저번에 기기가 과열을 받고 터져서 생긴 화상의 흔적이었다. 위상력 억제 장치를 하고 다니기에 표가 많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세하는 그 초커를 볼때마다 그런 사실이 억지로 각인되어지는 거 같았다.
"...그러게. 왜 아빠가 나한테 항상 미안하다고 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네."
"...할아버지가요?"
"응. 5살 전에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 라...그건 어쩌면 이세하에게 아빠란 존재와 같이 자신에게도 먼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5살 전이라면 이세하는 자신보다 더 본인의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을 수도 있었다.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닐런지. 하지만 이세하의 표정은 괜찮았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세하의 공백기를 말했던 얼굴과 같은 표정이리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아빠는 항상 미안하다고 하셨던 거 같아. 아빠가 돌아가고 난 직후에는 그걸 엄마한테서 한동안 들었지."
"..."
"이해도 못하고, 듣기도 싫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이해는 안가. 그냥 어렴풋하게 알겠다는 것 뿐이지."
내가 직접 아빠한테 말하지 않는 이상.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그래도 이세하보단 작은 탓인지 이세하가 유성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던 유성의 머리가 헝클어졌다. 이세하의 이런 태도는 싫었다. 하지만 손길 자체는 싫지 않았다.
유성이 제일 싫어하는 건 아까 '미안하다' 라고 말했을 때의 그 아파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정말 싫다고요.
"전 미안하다는 말 하는 거 싫어해요. 그리고 미안하다라는 말 듣는 것도 싫고요."
"...내가 너무 미안하다는 말 많이 했었니?"
"...아마도 그렇게 느꼈던 거 같아요."
"응, 앞으론 그런 말 안할게."
그럼 줄여야겠네. 미안하다, 보다는 고맙다, 라는 말을 더 할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마음속으로 작게 다짐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풍부한 대화를 나눈 이세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거의 다 복구된 신서울을 아들과 함께 본 것도 한 덕이었겠지만. 복구가 끝나간다는 건, 이런 식의 기회가 늘어나게 된다는 걸 의미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것...같은 것도 참 위안이 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하며 이세하는 유성을 보며 말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집에 가볼까?"
"네."
(보너스 01.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점원 : 어머, 두분이 꼭 닮으셨네요! 혹시 형제 분이신가요?
세하 : 네? 아, 그, 그렇게 보이나요?(내심 기쁘다)
유성 : (단칼)아뇨. 아빠와 아들 사이입니다만.
점원, 세하 : ...
유성 : 그리고 제가 '확.실.히' 어려보이지 않나요?(빠드득)
(보너스 02.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가족들)
유성 : 아, 그러고보니 엄마랑 누나한테도 줄 아이스크림을 살거 그랬어요.(둘다 아이스크림 좋아함.)
세하 : 아, 그러네.
유성 : 다시 돌아가서 살까요?
세하 : 응, 그러자.
그리고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돌아가서 아이스크림 파인트 사이즈를 사왔다.
(보너스 03. 누나와 남동생의 대화)
유성 : 내가 아빠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다니...쇼크야.
세라 : 하하하하...!! (세하와 유성이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빠가 유독 젊어보이긴 하지!
유성 : 누나는 그런 오해 없었어?
세라 : (정색)...난 그래서 아빠랑 같이 거리를 다니는 엄청 배짱있는 행동을 하지 않아.
유성 : ...현명하네.
(보너스 04. 부부의 대화)
세하 : 오늘 아들이랑 비슷한 나이대로 사람들이 봐주었다.
유리 : 오오, 기분 좋았겠네?(세라와 같이 세하와 유성이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세하 : 나중엔 우리 넷이서 외출할까?
유리 : (정색)...난 패스할게. 아들 둘에, 딸 하나 딸린 엄마로 보이고 싶지 않아.
세하 : ...
(보너스 05. 다음번 찬이와의 약속)
찬이 : 여~별아!
유성 : 응, 하이.
찬이 : 아저씨에게 뭐 잔뜩 얻어먹었냐?
유성 : 딱히. 아 그리고...(주섬주섬)
찬이 : 응?
유성 : (골드카드를 꺼내며)오늘 형 만나러 간다니까 아빠가 챙겨주시더라. 이걸로 형이랑 맛있는거 먹고 오래.
찬이 : ...진짜 너희 아버지 통 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