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Striker-이세하 Ep-9 힘조절
Sehaia 2017-08-11 4
그게 무슨 소리야, 틀림없이 렌즈는 끼고 있었을.......
없다.
없다. 없다. 렌즈가, 눈이, 검은색이, 그림자가, 검은 막이, 없다. 없다.
잠깐, 말도 안 돼. 어디지? 분명 끼고 있었을 텐데, 아니, 장난치지, 마. 없을 리가, 없잖아. 아니야, 멍청아. 없다고. 뛰면서, 흘린 거라고. 평소엔, 떨어지지도, 아니야, 않는 게, 떨어진 거라고.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니고, 너, 눈, 없는 거, 렌즈, 없어서, 시끄러워, 괴물, 노란 눈, 입, 그대로, 다물어, 나온다고.
‘서, 선생님, 왜 이런 괴물이 우리랑.......’
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야, 갑자기 왜 그래?”
“시끄러! 내, 내, 내 렌즈 어디에 있는 거야!”
“어, 검은 컬러렌즈 말하는 거라면 방금 너가 밟았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들어 올려 확인해 본 신발 밑창에는 평소 끼던 검은 컬러렌즈가 산산조각이 난 채 파편만이 가까스로 박혀있었다.
안 돼. 지금은 여분의 렌즈도 없다고. 빨리 이걸 가려야.......
“야, 뭔진 모르겠지만 머리 이리 대.”
“네 말에 맞춰줄 여유 따위.......어?”
갑자기 시야가 가려진다. 머리를 뭔가 부드러운 것이 사선으로 감기며 오른 눈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눈을 감은 것도 아닌데, 햇빛은 더 이상 눈에 소풍조차도 나오지 못한다.
“왠지는 몰라도 그 눈, 보이고 싶지 않은 거잖아? 붕대로 감아놨으니 진정하고 숨이나 제대로 쉬어. 얼굴에 핏기가 없다.”
“.......흐읍.......하아. 평소에도 붕대 들고 다니다니, 안전의식이 너무 투철한 거 아니냐.......아니, 아냐. 덕분에 살았다. 고마워.”
“마지막 말이 없었으면 확 벗겨버릴까 했지만, 됐어. 넘어가 줄게.”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운 이슬비의 음성에 반항기를 거친 이성이 방탕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덤으로 돌아온 탕아는 방금 전까지의 추태를 부끄럽다는 듯이 머릿속에서 펼친다.
“나 참, 갑자기 남의 어깨를 콱 붙잡질 않나, 위상력 컨트롤을 가르쳐 달라질 않나, 발작을 일으키질 않나. 병원에 가서 프로포폴이라도 맞고 온 거니?”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익숙한 모습이 뜀뛰기를 계속하던 심장을 조금씩 진정시킨다. 평소 같았으면 한마디 받아쳐 줬겠지만, 오히려 지금은 귀에 익숙한 잔소리가 고양된 정신을 내리누른다.
“음, 하지만 이걸로 좀 알 것 같네. 음음, 그런 거였어.”
갑자기 무언가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멋대로 무언가를 납득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옆에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팔짱을 낀다.
“자네, 위상력 한계를 종종 넘겨본 적이 있는 게 아닌가, 왓슨, 아니 이세하 군?”
어울리지도 않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연기를 할 거면 사냥 모자도 쓰지 그래, 아니 잠깐. 뭐?
“유난히 새치가 많이 보인다 싶은 자네의 머리카락. 방금 보인 노란색 눈동자. 그건 전부 위상 능력이 발현한 뒤 위상력 한계를 넘기면 나타나는 변색 현상이지.
그리고 자네의 방금 반응으로 볼 때 사실 자네의 양 눈은 이미 변색이 끝난 노란색이며, 평소에는 검은 컬러렌즈로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네. 아마 머리카락은 흰색으로 변색됐겠지만, 그 또한 염색으로 숨기고 있는 거겠지. 간단한 추리라네, 왓슨, 아니 이세하 군.”
어차피 추리고 뭐고 그냥 있는 사실을 나열한 거에 가깝다고 해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렇게 의기양양하다는 듯이 연기 톤을 유지하는 데, 괜히 찬 물을 끼얹지는 말도록 하자. 별 반응이 없자 조금 실망한 듯 파이프 담배를 다시 사라지게 하고는 유니온 센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어, 어?”
“얘가 진짜 어벙해졌네. 저기, 머리를 붕대로 감았어도 너 진짜 머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위상력 컨트롤 가르쳐달라면서.”
아, 맞다. 눈 때문에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내가 얘 찾으러 온 건 그거 배우러 온 거였지. 뒤늦게 회전을 재개한 머리와 다리가 이슬비의 뒤를 쫒는다. 평소와는 다르게 ‘비품실’ 이라고 적힌 곳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주변 연구원을 불러 세운다.
“안녕하세요, 검은양 팀의 이슬비입니다. 위상력 측정기와 훈련용 위상 변환기를 받아가고 싶습니다.”
“그거라면 이 안 쪽에 있으니 가져가렴. 나중에 제대로 반환만 해 줘. 위치는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에 다시 나온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딱히 없는데, 어디 있는 거지? 아, 염력으로 어디에 넣어뒀나 보군.
“다 챙겼다. 그럼 훈련장으로 가자.”
“그건 그렇고, 괜찮겠냐? 너 할 일 많지 않아?”
“자기가 도와달라고 해 놓고선?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제대로 익히기나 해.”
그러면서 타박타박 걸어가는 것이 평소보다는 어째선지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믿음직해 보인다. 어래, 얘 키는 분명 나보다 훨씬 작을 건데. 160cm도 안 될 건데, 오늘따라 왜 이리 커 보이지? 머리에 붕대를 감아서 그런지, 눈이 나빠졌는지, 아무튼 뭔가 이상하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 안과나 가 보도록 하자.
“그건 그렇고 그 눈, 조금 아깝다.”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왜, 너 같은 칙칙한 성격에선 나올 거라고 생각 못할 정도로 화창한 노란 색이잖아. 순간 너가 해바라기라도 보고 있는 줄 알았는걸. 렌즈 빼고 다니면 인상도 좀 나아지지 않으려나?”
“.......냅두셔.”
“어련하시겠어. 딱히 강요는 안 해.”
피식 웃으며 먼저 걸어가는 이슬비를 보며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웃는다. 그 말을 듣고 살짝 기분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건,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쓸데없이 웃고 있는 얼굴을 어서 평평하게 피도록 하자.
도착한 훈련실 문을 열고 허공을 더듬더니, 손잡이가 달린 새하얀 기계 하나와 둥그런 구체를 꺼낸다. 매 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4차원 주머니 같아서 되게 편리해 보인다. 허공 한 번 쓱 하면 뭔가가 툭툭 튀어나오다니, 어릴 적에 엄마와 같이 본 마술사는 사실 위상 능력자가 아니었을까.
“그럼 시작하자. 위상력은 우리 몸 전반에 걸쳐서 기초 신체 능력을 늘려주고, 모으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돼. 그렇지? 다만, 그 미세한 컨트롤을 숨 쉬듯이 하려면 이걸 기억해야 해. 위상력은 네 몸의 일부라는 거.”
뭔가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하더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살짝 기대했던 만큼, 맥이 빠진다고 할까, 그래서 라는 기분이다.
“당연한 얘기지. 하지만 넌 눈을 감을 때 신경 써서 감니? 아니잖아. 넌 지금 눈을 감았다 뜨려고 눈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불필요한 힘도 들어가고 힘의 배분이 제대로 안 되는 거야.
즉, 위상력을 컨트롤 할 때 가장 중요한 1단계는 위상력 조절을 무의식에 맡기는 거지. 위상 호흡법이라는 방식은 반대로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쓰지 못하지만 말이야. 그럼, 먼저 너 위상력을 간단히 측정 좀 해 보자.”
말을 마친 이슬비는 책상 위에 올려둔 측정기를 들어올렸다.
“음, 측정기는 그냥 거기서 측정하고 왔으면 좀 편했으려나. 이미 갖고 와 버린 이상 뭐, 그냥 쓰자. 일단 이거 들어봐.”
시키는 대로 측정기를 든다. 가만히 보니 체력 측정할 때 애들이 쓰던 악력 측정기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그럼 여기에 손을 넣고 꽉 쥐면 되는 건가?
“그래, 거기에 손을 넣고, 꽉 쥐는 순간에 위상력을 주입하면 돼. 측정은 두 번 할 건데, 일단 먼저 네가 평소에 건블레이드에 불어넣는 수준으로 주입해 봐.
왠지 어제 아저씨랑 했던 배팅이랑 비슷한걸.
눈을 감고 손끝에만 감각을 집중하고, 말하는 대로 손잡이 부분을 세게 쥔다. 잠시의 정적 후에 삐익 하는 소리가 난다.
“그럼 어디, 봐봐.......어, 어머. 이건.......좀”
야,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지 마. 엄마한테 성적표 보여줄 때보다 더 창피하다. 제 딴에는 표정을 숨기려고 한 듯한데, 원래 감정을 잘 못 숨기는 거에 더해서 얼굴이 차마 형용 못 할 표정을 하고 있다. 그, 그렇게 심각한 거냐.
“계측된 위상력의 총 수치는 높은데, 균일도는 낮은데다가 힘이 주입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어. 여태까지 위상력을 어떤 식으로 끌어낸 거야......”
제발. 그만해. 더 이상 내 얼굴을 들지 못할 말은 그만둬 줘.
상당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 답답한 정적이 잠시 흐른다.
“그.......그래. 그럴 수도 있지.”
확인 사살을 아주 제대로 해 주시는군. 차라리 독설을 해라, 독설을. 어정쩡한 위로가 더 마음이 아프다는 걸 모르는 거냐. 그렇게 따스한 눈으로 보 지 마. 차라리 평소의 벌레 보는 눈으로 보라고. 정신을 놓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럼, 다음은 한계 수치 측정이야. 측정 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느긋이, 천천히 너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상력을 주입해봐. 측정 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은근슬쩍 두 번 말하지 마, 비참해지니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붙들었지만, 더 이상의 패배감은 사양이다.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해 보자.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눈을 감는다.
가슴 속에 있는 피를 몸 전체로 회전을 시킨다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조금씩 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감각 끝에 뜬 눈에 흩날리는 푸른빛이 비친다. 회전하는 피들이 팔에 쏠렸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계측기를 쥔다. 이윽고 다시 삐익 하는 소리가 울린다.
“그럼 어디, 봐봐.......어? 어, 어?”
뭐냐, 이번에도 처참한 거냐. 만약 그렇다면 진짜로 울어버릴 것 같은데.
“아니, 무슨 잠재량이 이 정도, 아니, 진짜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여태까지 전투는 전부 이 무식한 양을 갖고, 아냐, 말도 안 돼. 그럼 진짜 세 자리 수의 곱셈을 덧셈만으로 처리한 거나 다름없잖아.”
전선이 끊어진 앵무새 장난감처럼 횡설수설하는 이슬비는 또 신선해서, 나도 모르게 그냥 지켜보고 있게 됐다. 계측 수치가 좀 궁금하긴 했지만, 이건 나름 감상할 만한걸. 평소엔 재미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망가지면 그 존재만으로 이런 개그가 되는구나.
한참이 지나서야, 쇼크를 받아 비틀거리는 몸과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한숨을 쉰다.
“너, 이번에 똑바로 교정 좀 하자.”
“예.......”
아아, 작아진다. 쪼그라들어 버려. 난쟁이가 되어 버릴 거야......
“너무 기죽지 마. 지금 기초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이 정도면, 내가 기초 정도만 잡아줘도 훨씬 낫겠네. 아니, 안 잡아주면 이건 곤란해. 하지만 위상 잠재량은 정말 말도 안 돼. 내가 가진 양의 거의 1.3배는 될, 아니 이거 기계 멀쩡한 거 맞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투가 빠르고 거칠어서 뭔 소린지는 잘 몰라도, 어쨌든 위상력 교정만 잘하면 된다는 것 같다. 짜증난다는 듯이 뾰로통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오히려 평소의 짜증난다는 표정이니 익숙해서 차라리 보기 좋다.
“일단 혹시 몰라서 가장 높은 수치의 훈련 도구로 들고 왔는데, 정말로 이게 필요할 줄은 몰랐어. 암튼 이거 받아.”
얘답지 않게 툴툴거리는 걸 멈추지 않으며 옆에 있던 공을 넘겨준다. 버튼이 하나 달린 걸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공이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겉보기엔 너무 단순해서 무식해 보이는 기계다.
“이건 기초 훈련 도구야. 그 버튼을 누르면 숫자가 나타날 건데, 위상력의 세기를 수치상으로 나타낸 거지. 그 수치에 알맞은 위상력을 주입하면 소리가 나면서 숫자가 바뀌어.”
“그런데 내 위상력이 어느 정도의 세기인지 어떻게 알아?”
“그 숫자를 보고서 알아서 익혀.”
생각보다 더 무식한 기계였다.
“보아하니 의심만 하고 있는 모양인데, 위상력을 수치상으로 익혀놓으면 편해. 얼마 정도를 끌어내서 쓸 지를 머리로 숫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적으로 방출할 수 있게 되지. 그러니, 지금은 좀 힘들지 몰라도 최종 목표는 10초안에 숫자를 10번 바꾸기 정도이려나.”
“그게 가능하긴 한 거냐?”
“못 믿겠으면 줘 봐.”
영 미심쩍은 태도로 넘긴 공을 받아들더니 시계를 가리킨다. 그러고선 ‘시작’을 말하며 버튼을 누른다. 초침이 8번 움직인 순간, ‘종료’를 외친다. 그 동안, 신호음은 정확하게 10번 들렸다.
“봤지?”
음. 할 말이 없군. 이럴 때 한 번은 못해줘야 재미가 있잖아.
“그게 어느 정도 된다면, 그 때부터 순간적인 위상력 조절은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 그건 집어넣고, 여기. 네 건블레이드.”
“지금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짬 날 때마다 계속 손 안에 쥐고 연습해. 일단 무기에 위상력을 두르는 것 먼저 보자. 조금 불안하거든.”
너무하시네. 그렇게 처참한 기록을 낸다면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돌직구만 던지는 거 아니냐.
떨떠름한 기분으로 건블레이드를 들고 한 번 붕 휘두른다. 그래도 손에는 익었다고 나름 휘두르는 감각은 좋다. 그럼, 어디 한 번 해 보자.
평소와는 다르게 위상력을 의식하고 두른다. 이런 건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소리를 들으면 아무래도 내 평소 한 행동에 별로 자신감이 안 생긴다. 의식하지 않는 편이 좋다곤 해도,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그래도 확실히 무기와의 적성은 좋은 편인가. 계측기에 두를 때보다는 모양이 훨씬 깔끔하네. 어, 아니, 잠깐만. 신체의 흐름이랑 무기의 흐름이 따로 놀잖아. 멈춰 봐.”
동작을 멈추자 허공에 다시 손을 뻗더니 평소 쓰던 나이프를 꺼낸다.
“위상력을 무기에 두른다고 하는 건 그냥 단순하게 밀어 넣는 게 아니야. 넌 건블레이드를 가지고 발포하는 데 신경을 너무 쓰고 있잖아. 그건 지금은 잠깐 잊어. 네 위상력 특성이 ‘발화’라면, 위상력을 잘 두르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력이 올라가. 너무 폭발을 일으키는 거에 신경을 쓰면 집중하기가 힘들어져서 오히려 곤란하다구.
위상력을 무기에 두른다는 건, 의수를 끼운 몸에 위상력을 두르는 거와 비슷하다고 봐야지. 건블레이드를 들었다면, 그만큼 팔의 길이가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돼. 이거 잘 봐.”
말을 마치더니 나이프에 위상력을 두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위상력의 흐름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손에서 뻗어 나온 위상력이 별 다른 위화감 없이 나이프를 타고 흐르며 다시 손으로 회귀한다. 나이프의 끝은 위상력으로 둘러져 있는 것이 질 좋은 숫돌에 간 칼을 연상시킨다. 원래 저렇게 날이 서도록 두를 수도 있던가, 위상력이라는 게.
이윽고 묘기를 펼치듯 허공에서 하나씩 나이프가 더 나타나는데, 그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처음과 똑같은 수준으로 위상력이 둘러져 있다. 이윽고 6개째가 나타나자 그제야 멈춘다.
노력을 조금 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군. 굉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쥐고 있던 나이프도 허공에 띄우더니 그것들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던 나이프들이 벽에 일제히 날아가 박히는데, 그 사이의 간격이 1cm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우엔 계열이 ‘염력’이니까, 능숙해지면 이 정도려나? 이 이상 나이프를 꺼내는 건 비효율적이라 삼가고 있지만.”
“뭔가, 굉장한데.”
“그러면, 한 번 다시 해 봐. 의식하지 말란 말은 안 할 테니, 그냥 내가 방금 보여준 흐름을 흉내를 낸다는 정도로도 괜찮으니까.”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한 번 제대로 해 보자. 들고 있던 건블레이드를 45도 각도로 들고선 손에 힘을 흘려 넣는다. 몸의 흐름이니, 무기의 흐름이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오히려 방해다, 방해. 그보다 이미지 하기 쉬운 처음 했던 말인 의수를 떠올린다.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려면 의수.......
잠깐, 의수?
하, 뭐야. 생각 외로 쉬운 방법이 있었잖아.
“게임기, 마우스, 키보드. 부서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야, 남이 도와주고 있는데 또 게임 생각이나.......어?”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엔 게임기 많이 부숴먹었지. 엄마가 울고 있던 날 달래려고 처음 사 온 그 게임기는 선물 받은 당일에 부숴먹었다. 게임이 절정에 치달을 때, 나도 모르게 손에 위상력이 몰려 악력이 강해진 탓이었다.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하나를 더 사 오신 엄마는 그 때 힘조절을 하는 방법을 먼저 익히라면서 게임기 크기 정도의 송판 하나를 쥐여 줬다.
“양 손으로 눌러도 깨뜨리지 않을 정도로 이 송판을 단단하게 만들어보렴. 게임은 그 후야?”
한시라도 빨리 게임을 하려고 세게 누른 송판이 안 부서질 리 없었고, 그 때마다 엄마는 송판 하나를 다시 갖고 왔다. 몇 번을 해도 부서지는 송판들이 옆에서 한 가득이 되어갈 무렵,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등 뒤로 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엄마 손 느껴지지? 따뜻하지? 그럼, 게임기한테도, 송판한테도 따뜻하게 온기를 나눠주렴.”
우리가 가진 이 힘은, 남을 위해 나눠주기 위해 있는 거니까.
그제야 부서진 송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힘에 부서져 버려 비참하게 방 한 구석에 밀어놓은 송판들의 조각들이 눈에 밟혔다. 덤으로, 날 괴롭히다 밀쳐져 병원에 실려 간 아이의 망가진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내가 가진 힘의 크기다.
“아, 아아.......죄송해요.......”
“옳지, 옳지. 힘이 센 건 잘못한 게 아니야. 하지만 그 힘으로 누군가를 상처를 주면 안 된단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만큼 강하다고 믿어.”
부드럽게 웃으며 모은 양반다리에 날 앉힌 엄마는 말했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날 밤, 난 밤을 새서 게임기로 게임하다 잠이 들었다.
그 후에도 힘이 절제하기 힘들 때마다 게임기는 종종 부숴먹었다. 그 때마다 엄마가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사오고, 송판으로 연습하던 나날이 반복되었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이후에는 안심하고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뭐야, 잘 할 수 있었잖아?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이슬비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자신도 이 정도로 쉬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이렇게 가지런히 정돈된 형태로 위상력을 모아본 건,
게임기와 엄마, 사람 외엔 해 본적이 없다.
하물며, 무기라는 관념이 강했던, 날 그렇게나 괴롭히던 건블레이드엔 더더욱.
“평소보다 위상력이 안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흐름도 완벽해. 처음 측정할 땐 균일도도 낮았는데, 이번엔 어디가 딱히 모자라다는 느낌도, 넘친다는 느낌도 없어. 뭘 어떻게 한 거야?”
“그냥, 게임기에다가 하던 대로 하던 것뿐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던 표정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손을 입가에 가져가더니 생각에 깊게 잠긴다.
“아아, 그러고 보니 평소엔 게임하면서도 게임기를 깨뜨리는 걸 본 적이 없네.......왜 이상하다고 생각을 못한 거지.......”
힘이 쭉 빠져서 물끄러미 건블레이드를 보는 이슬비를 놔두고 건블레이드를 바라본다. 이대로 힘을 좀 더 실으면, 방금 그것처럼 날을 세울 수 있으려나?
“한 번, 시험해볼까......”
다시 한 번, 전신의 위상력을 끌어내서 건블레이드에 덧씌운다. 어라, 잘 안 되네. 그럼 조금만 더 끌어내서 그 위에 덧씌우면 그만이지.
아니, 좀 날이 서면 안 되냐. 한 번만 더 덧씌우자.
이거 건블레이드는 길어지는데, 왜 날은 안 서는 거야. 날 좀 잘 세워봐.
아, 자꾸 길어지지만 말고. 위상력 소모가 심해지잖아. 이거 말고 날을 세우라고.
.......어?
“너 뭐하는 거야!”
나이프보다도 날카로운 이슬비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다. 어느새 벽에 닿을 정도로 길어진 건블레이드, 아니, 건블레이드에 덧씌워진 위상력이 웅웅거리며 빛을 낸다. 원래 이게 이렇게 길어지던가? 근데 이상하다......좀 피곤하......
“어서 길이를 줄여! 쓰러지고 싶어?”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감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건블레이드에 둘러놓은 위상력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수마가 몸을 억지로 질질 끌며 꼭두각시마냥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풀린 다리가 이성의 종막을 고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이슬비가 보이는 시야를 가리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비추기 시작한다. 무거운 눈꺼풀이 비추는 시커먼 세계에 걸맞게, 그저 암울하기 짝이 없는 과거.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유니온에 불려갔던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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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losenea입니다. 이번 편으로 승급퀘(를 빙자한 훈련)이 시작되었지만, 단 에피 하나만에 세하의 과거 회상으로 넘어갔군요. 사실 승급퀘 쓰는 건 예전부터 로망이었습니다. 수습 승급도 그렇고, 정식 승급도 그렇고, 세하의 고뇌라고 할까, 그런 부분들이 잘 드러낼 수 있는 파트기 때문이죠. 물론, 다음 화부터 나올 세하의 과거는 제가 지어내는 것이지만요. 그러나 직접 쓰는 만큼 굴려먹을 대로 굴려볼 테니, 기대(각오)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난히 설명충 같은 에피 였습니다만, 재밌게 즐겨주셨으면 좋겠네요. 재미있으셨다면 댓글과 추천 하나씩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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