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손을 뻗었다
루이벨라 2017-04-23 9
※ 츠별(@cheubyeol)썰을 바탕으로 써보았습니다.
※ 이번엔 썰 2개를 혼합하여 써보았습니다.
언젠가 한번, 아무도 없는 동산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누워본 적이 있었다. 누워서 쭉, 손을 뻗어보면 위로 펼쳐져있는 하늘에 손이 닿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있으면서 말이다. 괜시리 뻗어본 손이 멋쩍어서 주먹으로 하늘을 쥐는 시늉을 해보았다. 당연히 손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하늘을 동경하는 시절이 있었다. 잡힐거 같이 보여도 항상 높이 솟아있는, 그리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런 하늘을 동경했었다.
지금의 나는 위를 올려다보는 게 싫었다. 올려다보면 항상 나를 비웃는 '그 녀석' 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를 향해 손을 뻗는 것도 싫어졌다. 손을 뻗으면 '그 녀석' 과 손이 맞닿기 때문이다.
손을 잡아버리면, 난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에.
* * *
이렇게, 손을 뻗으면 바로 맞닿을 수 있는 위치에서 녀석과 내가 있었다. 녀석은 항상 나를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우리와의 거리는 하늘과의 거리와는 달리, 닿으면 바로 손이 맞닿은 위치에 있었다. 녀석은 항상 내 옷자락 하나라도 잡으려는 듯 연신 손을 아래로 뻗는 상태였다. 하지만 녀석의 손이 닿는 곳은 한끝 차이로 나와 맞닿지 않는 거리였다.
-정말, 우습단 말이야.
무심코 올려다본 녀석은 체셔 고양이 같았다. 어느 동화에서 나오는 그 고양이는 나무 위에 올라서서 크게 웃음을 띈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은 꼭두각시 줄 같은 것에 묶여있는 점이었다.
녀석은 언제나 나를 회유하기 바빴다.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지려고 할때마다 녀석은 나를 더 비웃듯 크게 비웃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마다 녀석이 나에게 뻗는 손길은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너, 손을 뻗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지 않았나.
"너같은 녀석에게 손을 뻗는 건 취미로 한적이 없어."
-단호하네.
키득키득. 기분 나쁜 웃음이 공기 중으로 퍼졌다. 정말, 기분 나빠.
녀석을 처음으로 만난 곳은 국제 공항에서 한창 작전을 수행 중이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 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 이후였다.
-안녕?
나와 닮은 녀석, 큐브에서 보았던 차원종이 된 이세하라고 칭했던 홀로그램과 똑같이 생긴 녀석을 좋게 볼리가 없었다. 나는 그런데 녀석은 친근하게 나에게 인사를 걸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녀석은 또 말을 걸어왔다.
-날 그딴 홀로그램과 똑같은 존재로 취급하는 거 같은데, 난 엄연히 '너' 라고, 이세하.
"..."
그때 보았던 홀로그램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 차원종이 된 이세하, 라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녀석은 마저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단순한 홀로그램의 오작동으로만 생긴 현상인거 같아? 천만에. 난 오래전부터 네 속에서 존재해왔다고?
"..."
-이렇게나, 욕망을 억압하고 살면 안되지 않나, 이세하군?
자신을 '나의 억압된 욕망' 이라고 소개하는 녀석. 난 녀석이 싫었다. 좋아할리가 있나. 녀석의 적안은 큐브 안에서 보았던 차원종이 되라고 권유한 홀로그램과 똑같았다. 게다가 녀석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해댔다.
"...그렇게 묶여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거지?"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런 이유가 녀석의 몸에 칭칭 감겨있는 꼭두각시 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상만 보면 녀석은 줄에 의지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여유로운 태도가 정말이지 궁금했다. 나의 작은 대꾸에 녀석은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이 '줄(Strings)' 이...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내가 그쪽으로 손을 뻗지 않는 이상은."
난 절대 손을 뻗지 않았다. 뻗는 순간 녀석은 내 손을 잡아채며 줄을 끊어내려 할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녀석에게 져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나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서 왜 이렇게 가까울까, 궁금증도 들었다. 하지만 그 답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찾으려고 해도, 이미 늦어버렸다.
* * *
작게,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 몸을 최대한 웅크릴 수 있을만큼 웅크렸다.
욕지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처리했던 안드로이드의 안에 인간의 두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점에서부터 나는 데이비드와 이리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뜻밖의 사실을 내게 전했다.
-알파퀸, 서지수의 두뇌 말이다.
이 말을 하던 이리나가 아주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게 기억난다.
이리나의 이 한마디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이성의 퓨즈가 다 끊기는 걸 느꼈다. 이리나의 말이 진실인지 따지러 간 대상자에게는 회피와 다름없는 말만 듣고 왔다. 그 회피뿐인 답변에서 하나는 확실할 수 있었다. 이리나가 한 말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이봐.
말 걸지마.
-이봐, 이세하.
말 걸지 말라고!
녀석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몸을 웅크렸는데도 녀석이 나의 등을 만질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이렇게 작게 웅크린 건데. 녀석의 손이 닿을까봐.
-거봐, 내 말이 맞았잖아?
"..."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했더랬다. 하지만 그 이후, 녀석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멈추었다. 옛날에는 올려다보아도 마음에 걸릴게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올려다보면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기도 한 녀석이 먼저 보였다. 그게 싫었다. 내 안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게.
그리고 그런 녀석이 '나' 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이세하.
"..."
녀석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올려다본 녀석을 묶고 있는 줄이 반절은 줄어든 기분이 들었다. 녀석은 내가 힘들어할 때와 마찬가지로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네 손따위 잡지 않을거야, 라고 말할 정도의 기운은 나한테 있었다. 기운은 있었다. 하지만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녀석을 향해 위로,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이 손을 잡으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나를 내몰는 것이 되었다.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더 최악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 더...! 잡고도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최악으로 떨어진다면...그 사람들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고, 엄마를 조롱한 사람들 말이다.
시야가 흐려졌다. 아, 나 울고 있는걸까. 아니면 의식이 끊기는 걸까. 의식의, 의식 속으로, 그 의식의 더 깊숙한 곳으로 의식을 잃는걸까. 녀석의 손과 맞닿은 거 같았다. 줄이 툭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잃어버리기 직전 어렴풋하게,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나를 묶고 있는 줄은 없어(There are no strings on me)."
녀석을 감싸고 있던 줄은...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엄청난 위상력 수치가 감지되어서 <검은양> 과 <늑대개> 팀이 출동을 하였다. 세하는 연락이 닿지 않아 끝내 같이 오지 못했다. 굉장한 위상력 수치, 게다가 제2위상력이 아닌 제1위상력이라기에 애쉬와 더스트와 같은 S급 차원종의 습격일지도 몰랐기에, 모든 병력들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뉴욕 거리. 대충적인 적은 후퇴시켰지만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여 차마 복구는 되지 못한 모습이었다. 자신들이 뉴욕으로 온 뒤로 계속 보아오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약간 신경쓰이는 점이 있다면 엄청난 온도에 잔뜩 그을린 잔해들의 모습이었다.
"♪~"
"...!!"
"...?"
이런 아수라장에 어울리지 않는, 맑고 고운 음색의 노랫소리였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그 노래가 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점점 더 목소리가 가까워지면서 희미하게 들리던 노래도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였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며 박수까지 직접 치면서 유유히 걸어오는 주인공은...
이리나와의 접촉 이후,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던 세하였다.
"세하...?"
"이세하, 너 거기서 뭐하는거야?!"
슬비와 나타의 부름에 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세하의 눈을 본 팀원들은 모두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서클렌즈를 낀 검은색 눈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연의 금색 눈동자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붉은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세하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하는 상대방을 한껏 비웃고 있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어라...? 너희들이 여기엔 어떻게...?"
"이, 이세하...너 그 모습은 도대체..."
"뭐, 상관은 없으려나."
세하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건블레이드를 오른손에 고쳐잡았다. 그 행위는 명백히...공격을 시도한다는 뜻이었다. 세하의 행동에 팀원들은 당황하면서도 반격 자세를 취했다. 자신들의 팀원들을 향해 검을 잡은 세하의 표정은 근래에 들어서 제일 밝은 표정이었다. '세하' 가 말했다.
"축하하려 와준거지? 새로 태어난 '나' 를 말이야."
그렇다면,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이렇게 축하해주러 온 이들에게는, 그만한 감사함을 표해야겠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 오랜만이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http://cafe.naver.com/closersunion/232296
[작가의 말]
1. 체셔 고양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 체셔 고양이 맞습니다.
2. '하늘을 우러러 본다' 는 표현은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차용했습니다.
3. 큡세하가 말하는 '나를 묶고 있는 줄은 없어(There are no strings on me)' 대사는 피노키오 혹은 울트론의 대사입니다.
4. 마지막 부분에서 세하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부분은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