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루이벨라 2017-03-12 2
※ 짧음주의
※ 처음 써보는 세슬주의
※ '그분' 께 헌납하는 세슬입니다.
따뜻한 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도 향긋한 봄내음이 물씬 느껴졌다.
봄. 생명력이 싹트는 계절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의 난 봄을 참 좋아한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보낸 잠깐의 보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봄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난 그중에 특히 봄을 싫어했다. 쓸쓸했으니까. 아니, 꼭 봄이 아니더라도 어느 계절이나 다 나에게는 쓸쓸했다. 봄이 되면 소풍을 나오는 가족들의 모습이며, 여름에는 같이 피서를 간다는 가족들의 모습이며...어느 계절이든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은 늘 보였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차원종에 의해 모두 돌아가셨다. 사실 그 때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내가 많이 어리기도 했고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기억난다. 쓰러져있는 부모님 앞에서 아직도 버티고 있던 차원종의 모습,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내 안에서 흐르던 이상한 감각...
그 찰나의 순간은 카메라에 녹화된 듯 떠올리면 항상 눈앞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이상한 기분도 같이 느껴졌다. 그 힘을 '위상력' 이라고 부르고, 차원종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된건, 이미 모든 사태가 끝날 때였다. 난 그날 목놓아 울었다. 내 안에 있는 이 힘이 증오스러워서. 왜, 왜...! 왜 그때 하필이면 각성하게 된걸까. 부모님이 날 감싸기 전에 각성했더라면, 지금 내 삶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예 나한테 이런 힘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편이 더 좋았을까. 난 부모님을 지킬 힘이 있었다. 그 힘을 내가 쓰지 못해서 부모님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건 봄비가 추적추적내리고 있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 * *
"슬비, 찾았다!"
"아, 유리야."
바람을 쐬고 있자니 저 건너편에서 유리가 보였다. 유리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날 쏙 품에 안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이 품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없어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 말이야."
"에에, 그럼 내가 괜히 방해한거야?!"
그건 아니었다. 가끔씩, 이렇게 가끔씩은 말이야, 혼자서 생각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그냥 마음의 정리라고나 할까. 나의 말에 유리는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살풋, 미소를 지었다.
"심각한 일은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이렇게 봄바람을 맞아보고 싶었어."
"헤에, 그렇구나. 그럼 나도 슬비 옆에서!"
유리가 자리를 털며 내 옆에 앉았다. 신서울에서 이렇게 높은 언덕을 가진 곳은 별로 없다. 난 이 장소를 좋아했다. 홀로 생각할 것이 많을 때면 난 언제나 이 장소를 찾았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장소는 이곳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리 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세하가 알려줬었어."
봄볕은 바람과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노곤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리가 방금 전에 말한 '세하가 알려줬었어' 라는 말에서도 그런 류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세하가...
하긴 내가 신서울에 오면 항상 이곳에 온다는 건 세하가 가장 잘 알겠지. 내가 몇번이나 여기에 있던걸 데릴러 와주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고보니 그 세하를 만난 것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마 오늘 같이 따뜻한 볕이 도는 날이었다.
* * *
-네가 이세하니?
-...
불성실한 태도. 그게 처음 내가 세하를 본 첫인상이었다. 알파퀸의 아들. 이 말 하나로 내가 세하에게 걸었던 기대감은 많았다. 알파퀸같이 훌륭한 클로저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세하는...부러움 그 자체였다.
-오늘부터 <검은양> 팀의 리더를 맡은 이슬비야. 잘 부탁해.
-...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난 세하에게 '알파퀸의 아들' 이니까, 적어도 기대되어지는 게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첫만남에서 사람의 눈도 안 마주치고 게임기에만 열중하는 그 행동이 마음에 들었을리가 없었다.
그래도 임무에 집중하면 좀 달라지겠지, 라는 마음으로 간 임무에서는...아니 자기가 쓸 무기에 대한 설명서를 읽지도 않았는지 영 서툰 모습 뿐이었다. 여러모로 기대와는 달라서 그날 저녁, 임무를 끝내고 세하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로 불렀지만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 사실은 잘 듣고 있는 거 같지도 않았다.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이었으니까 - 세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말을 자르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어차피 뭐, 그거잖아.
-...
-날 보는 게 아닌, 내 뒤에 있는 알파퀸, 우리 엄마를 보는 거잖아.
상당히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기대도 안했어.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랬으니까.
상처를 받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먼저 가버리는 세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하가 어렸을 때 당했던 것들, 상처받았던 것들 등등. 자료를 읽던 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너무 내가 이기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상처는, 어쩌면 당연한 걸수도 있었다,
그 일 이후, 세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가지 깨닫게 되었다. 세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원망하지를 않는다는 것, 오히려 존경하고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참 대단한거 같아, 라는 식의 말을 꺼낼 때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세하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이 없는 아이도 아니었다. 데미플레인으로 무리하게 가서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는 한참을 말렸을 정도로 어떨 때는 무모하기까지 한 아이였다. 그리고 난 그런 세하가...
...싫지 않았다.
임무를 하면서 점차적으로 확신도 가졌다. 처음에는 못마땅했다. 싫지는 않았다. 점차 의지가 되어갔다. 자꾸만 그쪽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깨달았다. 내가 저 이세하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을 안 쓰게 되었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게 하나의 죄의식과도 같았다. 그래서 몇번이고 부정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마음을 깨닫고 말을 했던 날 - 소위 말하는 고백 - 에 세하의 그 붉게 피어오른 홍조가 기억 난다.
-그, 그러니까...이슬비...다시 한번 말해줄래?
-말했잖아. 나, 너 좋아할지도...모른다고.
바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사실 그 자리에 곧장 들었어도 나도 세하처럼 다시 되물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줄래? 꽤나 시간이 지난 후, 뉴욕 사태가 끝나고나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Yes' 였다.
그 후로 몇년 간,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뉴욕에서의 데이트, 첫키스, A급 요원 취임식 등등. 분홍색 리본으로 묶어서 고이 모시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리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도, 유리도, 세하도. 아니, 어쩌면 세하는 알고 있었던 거 같았다. 미리 예감을 한듯이 유리에게 부탁한 것들이며, 나에게 썼던 편지 등등.
참...여러모로 치사한 아이다.
* * *
"근데, 세하가 언제 그런걸 유리, 너한테 알려주었어?"
"아, 세하가 알려준게 아니야. 그냥 우연히 중얼거리는 걸 내가 들었을 뿐이야!"
손사레를 치는 유리를 보며 살짝 웃었다. 아니긴. 세하가 알려주었을 게 100%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겠지.
슬비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그것도 그렇다. 유리에게 말한 슬비를 잘 부탁해, 절대 말하지 말고! 라니.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펑펑 울 줄 알았다. 그런건 직접 자기 입으로 밝히라고. 왜 제3자에게 듣게 만드는건데. 진짜 바보라니까. 이런 불평들을 입으로 내탭고 난 뒤에 난 결국 유리의 품에 안겨서 울고 말았다. 숨이 가쁠 정도로 울었다. 진짜...바보라니까. 무모한데다가 사람 걱정만 엄청 시키고!
지금도 가끔씩 사람들이 묻고는 한다. 괜찮니? 라고. 괜찮다, 라...난 괜찮았다. 처음에는 안 괜찮았다. 그런 일을 겪고서 어떻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이 말을 듣는 즉시, '전 괜찮아요' 라며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마음 속도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슬비야, 이번에도 세하한테 갈거야?"
"응. 오늘은 아니고 내일 정도에. 신서울에 있는 시간은 1년 중에 몇번은 안되니, 올때마다 보러 가야지."
"난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슬비 너도 내 곁을 떠날까봐 걱정했어."
"내가 왜 클로저를 그만두겠니. 마음이 아팠던 건 사실이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반대 상황으로, 내가 죽고 세하가 살아있었다면 세하는 클로저를 계속 했을까, 그만두었을까. 내 생각에는 세하는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두사람의 몫을 해**다며 열심히 살아가지 않았을까.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아이니까.
"그럼, 우리도 그만 돌아갈까."
"응! 오늘 우리 환영식 해준다고 유정이 언니가 빨리 오래."
"빨리 가야겠네."
이세하, 당신이 존재했던 세계에서...나는 잘 살고 있어. 아니지, 지금의 난 아직도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 같아. 만났던 기간은, 같이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 동안 나한테 많은 걸 알려주고 갔잖아. 나 혼자였다면 게속 몰랐을 것들. 그것이 아직도 내 마음에 있는 한은 아직도 네가 살아있는거 같아.
잘 살아볼게, 네 몫까지. 두 사람의 클로저 몫으로.
[작가의 말]
처음 써보는 세하슬비네요. 이제 레비아랑 바이올렛만 남은건가...
조만간 비슷한 주제로도 세유 쓸거에요...!
http://cafe.naver.com/closersunion/228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