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Autumn's grief
카페인의노예 2016-10-23 3
'또, 이 꿈인가.'
소녀는 혼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작은 무릎을 한껏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채, 가녀린 어깨가 흔들리는 이 모습을 지금껏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이 소녀를 안아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저 소녀가 울게 만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소녀가 바라던 것들-밤의 하늘을 가르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괴도, 혹은 성의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거나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는 모험가, 그 중에 무엇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다.
지금 여기 서 있는 여자는, 그저 너의 부서진 파편 중의 하나에 불과한 걸.
***
"지금, 그거 고백인가요?"
하피는 눈 앞의 차원종을 빤히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매케한 먼지도, 코 끝에 지독하리만치 맴도는 그을린 냄새도 지금 이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방해할수는 없으리라.
"그렇다, 하피. 인간의 여자여. 그대는 진심으로 이 몸을 매혹시켰다. 나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인간의 꼭두각시가 되어 죽음을 바라게 되더라도 그대는 살아가기를 바란다."
맘바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껏 하피가 만난 남자들은 입에서 온갖 사탕발림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이 하피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저 가벼운 하루밤의 여흥을 위한 달콤한 속삭임. 하지만 그런것에 속는 척 넘어가주는 것은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 일수록 그 높은 콧대를 눌러주는 것이 재밌었다.
세 치 혀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 쉽게 넘어가는 그런 여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하지만 맘바는?
그의 말은 사탕발림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아니, 굳이 비유를 한다면 투박한 돌맹이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아이가 선물이랍시고 강가에서 주워온, 조금은 신기한 모양을 가진 돌을 받은 느낌.
하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자기 기준에서 그나마 가장 괜찮은 녀석을 선택하는 그 시간 동안에 오롯이 상대만을 생각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쩌면, 그가 한 말은 그 자신이 한 최고의 고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피는 애써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요? 자신은 죽어도 괜찮지만 나보고는 계속 살아가라니."
"미안하다. 이 몸은 이런 상황에 익숙치 않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른다."
그래요, 그 모습이 지극히 당신스럽네요.
꾸밀 줄도 모르고,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못한다. 최선을 다해 숨을 고르고 상대방에게 일단 마음을 전하고 본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움직이고 본다.
'어린애 같지만...... 싫지는 않은걸.'
하피는 혀로 살짝 입술을 핥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까. 마음같아선 조금 애를 태우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만약에 그로 인해 안절부절 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왠지 불쌍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로 즉답을 내릴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니까. 당신과, 아니 그 누구라도 나는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때마침 그녀의 호출기가 허리춤에서 요란스럽게 울렸다.
"미안하지만 이만 실례할게요. 호출이 왔네요."
하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더운 바람이 얼굴을 향해 훅 끼쳐왔다.
슬슬 그 분의 계획이 시작되는 것일까. 무엇이든 좋았다.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스릴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몸을 맡길 수 있다면, 그렇게 꽃잎처럼 져버릴 수 있다면.
"늦었네요, 하피."
"죄송해요, 감시관 님. 잠시 맘바 씨의 상태를 살펴보고 오느라 늦었네요."
"괜찮아요. 당신이 이유없이 늦을 사람이 아니란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차원종의 **를 관찰하는건 흥미롭네요. 저렇게 변할 수 있다니."
홍시영의 눈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 처럼 빛나고 있었다.
곤충의 다리와 머리를 떼어내는걸 보면서 그걸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잔혹함을 숨긴 눈빛. 그것을 하피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것을 봐 왔으니까.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하피?"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시관님."
"후후, 그래요. 저 차원종은 분명 언젠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거에요. 하지만 하피, 당신만은 계속 내 곁에 있어줘요. 알았죠?"
"물론이에요, 감시관님. 전 당신의 그림자니까요."
홍시영의 말이 살며시 귓가에 내려앉으며 하피의 머리속에 있던 맘바에 대한 생각을 남김없이 쫓아냈다. 덩굴처럼 온 몸을 옭아매는 그것은 멋대로 움직이면 가시가 그녀의 살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오로지 홍시영의 의지대로 움직일 때만, 그 가시는 몸을 눕힌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에게서 벗어나는건 할 수 없을 거에요. 설령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말이죠.
당신은 나의 완벽한 악몽이니까.
***
희뿌연 밤안개를 뚫고 달빛이 창가에 맴돌고 있었다.
하피는 임무 중 잠깐 들린 가게에서 슬쩍 한 술병을 꺼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고, 이런 날이면 더더욱 잡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잔이 없는건 아쉽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런건 사치에 불과하겠지.
코르크 마개를 열자 향기가 그녀를 유혹하듯 코를 간질였다.
그 손길에 몸을 맡긴 하피는 잠시 눈을 감고 음미한 뒤 입으로 갖다댔다.
혀 위에 부드럽게 감기듯 내려오는 액체를 잠시 입에 머금은 뒤 천천히 목 안으로 넘기고 뜨거운 열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이렇게 오늘도 하루의 미련과 기억을 씻어내야지.
그래도 맛을 보면 꽤나 고급에 속하는 위스키 같았다.
하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혀로 핥은 뒤 이내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어차피 안주 따위는 혀 끝에 남는 여운을 지워버리는 조잡한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바람을 쐬려고 밖을 나가니 맘바가 어딘가를 응시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 아니, 저 차원종은 잠도 없는걸까?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하여 살며시 그의 뒤로 다가갔지만, 이내 그가 눈치를 채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피?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이런, 들켰네요. 그보다, 맘바 씨는요? 안 주무시나요?"
"이 몸은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아니, 우리 동포들은 모두 잠을 잘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시 시선을 도심으로 향했다.
딱딱히 굳은 그의 얼굴에서 하피는 그가 자신의 주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묘하게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고백한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자기가 옆에 있는데 다른 사람 생각이라니. 긴장도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긴장하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걸까.
도심 속 불길의 기운을 담은 바람이 불어오자 하피는 뭔가 생각난 듯 아랫 입술을 혀로 핥았다.
"맘바 씨, 나랑 같이 춤 출래요?"
"춤이라니, 이 몸과 함께 말인가?"
"물론이죠. 지금 여기엔 당신과 저 밖엔 없는걸요?"
"하지만 이 몸은 인간의 춤이란걸 모른다."
"괜찮아요.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내가 알려줄게요. 어쩌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지막이 될 지 모르잖아요?"
마지막,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을까. 맘바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피는 맘바의 한 손은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고 자신의 오른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서로 몸이 가깝게 밀착된 탓일까, 맘바는 답지않게 움직임이 뻣뻣했고 하피는 그의 그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재밌었다.
이 남자,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구나.
하피는 맘바를 만난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더 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주인을 향한 충성심과 거기서 나오는 강직한 모습은 분명 남자답고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싶은 것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당신이 감추는 것, 당신이 숨기고 싶은 것, 당신의 가장 부드럽고 그 연약한 모습들의 전부.
그 모든걸 보여줄 수 있는 허락받은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어쩌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와 시간 속에서 만났다면 우린 정말로 멋진 연인이 됐을지도 몰라요.
달빛이 은은하게 세상을 적시고 바람은 이따금씩 찾아와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서툴었던 스탭도 부드러워지고, 딱딱하게 굳었던 손길은 이내 따스함을 쥔 채 서로의 육신을 감쌌다. 밤의 공기는 적막감으로 그들을 감싸며 잠시동안 이지만, 완전한 안녕을 고했다.
파괴당한 공포와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도시의 어둠은 그저 작게 웅크리며 두 영혼을 응시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멜로디를 막을 수 없으리라.
"수고했어요, 맘바 씨. 생각보다 잘 하시네요."
"이 몸이야말로 즐거웠다, 하피. 하지만 술은 적당히 하는게 좋을거라 생각하는데."
하피는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지금껏 그것에 대해서 맘바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 들켰나요?"
"물론이다. 이 몸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은거죠?"
"일부러 묻지 않았다. 뭔가 잊고 싶은 것이 있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세심하네. 전혀 생각못한 모습에 하피는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내가 보고 싶었던건 바로 이런 것이었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겐 비록 어금니를 드러낼지라도, 나에게는 부드럽게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하피는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다시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밤은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하피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눅눅한 공기가 계속해서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숨을 내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멈출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눈 앞에, 왕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적, 아스타로트 웨폰을 쓰러트리기 전 까지는.
검은색과 보라색이 서로 어지럽게 뒤엉킨 공간에서 그는 왕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피...... 우리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보군."
맘바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처음 만날 때부터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정말로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였기 때문에 애써 눈 앞에서 외면 해왔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그녀에게 마음을 뺏길줄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피, 나의 모든 마음을 내 준 인간의 여자여. 비록 그대라 할지라도 이 몸은 이 몸의 혈족을 위해서 물러설 순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맘바 씨. 난 이제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에요. 난 지금 내 의지로 당신의 앞에 서 있어요."
"그런가. 어쩔 수 없군."
맘바는 잠시 눈을 감은 뒤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허공을 찢은 그의 손은 천천히 날카로운 검 한 자루를 뽑고 있었다.
"하피, 이 몸이 직접 그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요청한다. 부디, 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는가?"
"어머, 춤이요? 이거 정말 영광이네요. 당신이 제게 직접 그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는걸요."
"그대와 춤을 춘 그 밤은 이 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시 한 번, 그때와 같은 춤을 추고 싶다."
맘바는 검은 똑바로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 끝에는 어떠한 망설임이나 후회도 없을지니.
하피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늘 빈 껍데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이왕에 죽는다면 그 누구도 겪어** 못한 최고의 스릴을 느끼며 죽고 싶었다.
그 날, 예전의 자신은 완벽하게 죽었다. 그리고 홍시영의 그림자 라는 또 다른 자신이 태어났다.
웃기 싫어도 웃어야 했다. 울고 싶어도 웃어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춰야만 했다. 그 과정에 자신의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난민들에 의해 다시 한 번 구원을 받으며 그녀는 어둠 속 괴도라는 이름의 영웅이 되었고, 비록 조금 다를지 몰라도 이렇게 자신의 성을 가진 멋진 왕자님을 만났으니까.
이제 여기를 나가면, 어떤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늘 언제나 내 마음대로 풀린 적이 없었지. 결국 이번에도 날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를 내 손으로 죽이게 될 줄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야, 정말. 그렇다면 차라리.......
"그래요, 맘바 씨. 당신같은 분의 요청이라면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죠."
하피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차원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 이 공간, 이 시간에서 우리는 현실과 작별을 고한다. 오로지 당신과 내가 같은 의지를 품은 이 시간.
달빛이 울리던 그 날 처럼, 서로의 검과 검이 날카로운 멜로디를 만든다.
그들의 몸짓은 하나의 언어가 되어 공기 속을 유영했다.
검이 얼굴을 향하고, 몸을 뒤로 젖힌 하피가 재빠르게 맘바의 다리를 노리면 맘바는 뒤로 물러선 뒤 다시 그녀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돌적으로, 때로는 서로에게 떨어져 움직임을 주시하며 날카롭게.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도록, 오로지 상대방을 눈 안에 가득 담는다.
어차피 사랑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면, 이것 또한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숨소리와 맞닿는 서로의 검이 만들어 내는 그들의 기묘한 화성(龢成).
길고 긴 춤이 끝난건 하피의 검이 맘바의 가슴 한 가운데를 찔렀을 때였다.
맘바는 손에서 검을 떨어트린 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닌 차원종 이기에 상대적으로 더 버틸 순 있겠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맘바는 전혀 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금 그 일격에서 그녀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기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왕좌로 향했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하피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상대방에게 더 이상의 전투의 의지는 없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이 왕좌에 앉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혈족을 위해 선대 용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스스로가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곧 혈족과 함께 황혼의 등 위에 타고 저물 것이다.
그녀에게 춤을 권한건 정말 잘한 일이야. 이렇게나 자신있고 생명력이 넘실대는 춤이라면, 그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는 그녀의 모습이라면, 이 몸의 육신 따위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으리라.
"하피, 이 몸은 너무나도 기쁘다. 그대의 춤은 이전보다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그것이, 이 몸은 너무나 기쁘구나."
하지만 하피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입가에 지어지는 쓴 웃음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맘바 씨, 당신은 제게 너무 많은 걸 줬어요.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때 당신이 했던 말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뭔가 갖고 싶은게 있다면 말해줄래요?"
"그렇다면, 이 몸의 손을 잡아주지 않겠나?"
맘바는 왼손을 들었다. 하피는 그에게 다가가 천천히 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포개듯이 감쌌다.
약간은 서늘하고 거친 감촉이 느껴졌지만, 크고 남자다운 강인함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은 다른 시대에 만났다면, 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고 있지 않았을까요.
맘바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난, 그렇다면 정말 행복했을 것 같은데.
"아, 따뜻하구나. 이렇게나 따뜻한 손이었다면, 훨씬 더 오래전에 그대의 손을 잡아줄 것을...... 크흡! 자, 이젠 이 곳을 떠나다오, 하피. 이 몸은 혈족과 함께 잠에 빠질 것이니......."
맘바의 가녀린 숨은 너무나 조용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피는 그의 뺨을 손으로 살짝 쓰다듬은 뒤,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맘바 씨, 사실 당신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어요. 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만약 이 곳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홍시영은 바보가 아니다.
아마 뭔가 또 다른 수를 썼을 것이다. 아직 그녀를 떨쳐내기에는, 남은 시간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습된 무력감은 그녀의 날개를 무겁게 짓눌렀다.
땅은 자꾸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하늘은 받아줄 수 없는지 계속해서 밀어내기만 했다.
이제는 이 재미없는 게임을 끝내야만 할 떄가 온 것이다.
'나는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하피는 자신의 왼팔을 맘바의 목에 두르고 몸의 왼편을 그의 허벅지 위에 살짝 걸쳤다.
땅이 서서히 흔들리더니 이내 곧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소녀는 왕자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왕자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소녀는 왕자님과 함께 영원히 눈을 감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왕자는 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소녀 역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왕자를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니까요.'
-fin.
써클원 중 한 명이 맘바 하피를 워낙에 좋아해서 보여줄 겸 썼는데 나름 마음에 들게 나온 것 같네요
(사실 완성된건 여름에 진작 완성된게 함정)
일이 이래저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안 나네요 =_= 나타랑 레비아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따로 구상해둔게 있는데 그건 또 언제 쓰게될지... ㅇ<-<
귀중한 시간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날씨가 추워지는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