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12. 보이콧 -

Articulus 2016-09-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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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


 

  "뭐라고요? 슬비가 다시 사라졌다고요?"

  "응. 점심 이후에 사라져버렸더군. 연락도 되지 않고."

 

  김유정의 표정은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듯 굳어 있다.

  그것을 전하는 제이의 표정은 그녀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담담했고.


  이미 이전에도 그녀는 단독행동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이세하를 만나기 위해 단독적으로 신서울 곳곳을 찾아다녔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전에는 연락이라도 되었지만 이번엔 그것조차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그녀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띠리리- 띠리리-

  매우 기본적인 휴대폰 벨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유정의 휴대폰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그녀는 잠시 실례라는 말을 남기고 카페의 바깥으로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 그녀가 카페에서 나간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서야 자리에 풀썩 앉았다.


  "아저씨, 슬비가 어디갔는지 아시죠?"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자의 직감은 확실하니까."

  "하, 참. 그래, 알아. 하지만 유정 씨에게 이걸 보고했다간, 분명히 슬비는 '그곳'으로 가지도 못했겠지."

  "'그곳'이요?"

  "너희들도 몰라도 된다."

 

  제이는 카페의 폭신한 쇼파의 등허리에 등을 기대고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서 풍차처럼 돌아가는 공기순환용 선풍기의 큰 날개들을 보면서 제이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 것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기에.

  18년 전의 차원전쟁 때에도 차원종의 세력에 가담한 인간들은 꽤나 많았지만, 클로저가 차원종 세력과 결탁하여 이렇게 큰 일을 벌인 적은 없었다. 물론 클로저가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누님으로 통하는 그녀가 있었기에 큰 일로 번지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겠지만.


  하지만 상황이 우습게도, 그녀의 아들이 이제는 차원종의 세력과 결탁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 아이의 어린 마음에는 데이비드의 배신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던 것이겠지만, 적어도 제이가 아는 데이비드는 세하가 이해하는 그런 데이비드와는 다르다. 그저 그가 광기에 휘둘려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추측은 분명했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이것은 사실이겠지. 그가 알지 못하는 18년 간의 세월이 그를 변하게 했다는 것만이 사실이고, 그 변화 또는 변질에 따라 데이비드가 이런 일을 주동해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정말로 인류의 멸절을 원하는 것일까?

  칼바크가 말한대로 그는 정말로 인류의 멸절과 소수만이 남은 인류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데이비드 답지 않다. 데이비드와 합일한 그 차원종의 힘, 분명히 아자젤이다. 그것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그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내린 것일까? 진실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데이비드가 아무런 생각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배신이라고 칭하는 건 사실 그들 - 유니온 - 뿐일지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나 모르겠어. **, 이러다가 애도 못봤다고 누님한테 혼나는건 아닐지."


  혼잣말을 하며, 제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더 이상 외부 차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모양이군요. 그게 정부의 뜻인가요?"

 

  그 물음에 돌아온 답을 듣고, 김유정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물었다.


  "좋아요. 이 계획대로 실행되어서 스트라이커를 쓰러뜨린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 피의 책임은 어디로 돌릴건가요? 늑대개 팀인가요?"


  다시 돌아온 대답.

  그녀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래, 이래야 유니온답지.

  유니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여 떨어져나간 데이비드, 그리고 이세하.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받은 김유정은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작게, 하지만 그 안에는 허탈함이 가득하게

  웃음이 그치고 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유니온과 정부는 하나인가요?"


  이번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전화가 끊어질 뿐.

  통화가 끊어지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듯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가 전화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일거수일투족 검은양 팀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미 붙어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미 세하가 늑대개 팀에게 공격을 당했고, 그들의 단체공격으로 이세하는 격퇴되어 이차원으로 도주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위상장비를 잃게 되어 극도로 약해진 상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만간 그의 목숨을 거둬갈 예정인 모양이다.


  업무 계획에 대해 통보를 받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가 유니온과 손을 잡은 이상, 세하의 목숨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이차원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유니온이라면 분명히 이차원 탐사를 진행하여 그를 직접 찾아내서 죽이려고 하겠지.


  늑대개 팀이 이렇게나 빨리 세하와 접촉할 줄은 그녀도 미처 알지 못했다.

  늑대개 팀이 이세하의 처리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들은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나타가 회복된 이후로부터 늑대개 팀은 단독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니온은 검은양 팀보다 늑대개 팀을 더 신뢰하는듯 했고, 그것은 그들을 감시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깨달은 지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듯 했다.


  유니온의 이러한 처사에 그녀는 매우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유니온의 부당위한 처사를 모두 덮어준 것이 검은양 팀인데, 그들은 오히려 검은양 팀을 쉬쉬하고 있다.

저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김유정의 자문(自問)에 답해줄 사람은 없다.
  이제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검은양 팀에게 유니온의 지시를 거부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비굴하게, 양처럼 온순하게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지.


  ◆ 12-2


  "와하하핫! 요원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 오랜만이에요, 김가면 씨."
  "그런데 다른 검은양 팀원들은 모두 어디 계십니까? 게다가 이세하 요원님이 차원종의 편을 들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네. 저도, 믿기지 않아요."

 
  이슬비는 대화를 끊었다.
  매우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지만, 그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바빠서 먼저 실례할게요."
  "요원님, 바쁘시지만 한 마디만 드려도 될까요?"

  무척이나 근엄한 목소리이다.
  자신을 신강고 학생으로 위장하고 있는 이 중년의 남성은, 아마도 그녀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벌처스의
신임사장이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에 벌처스는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은 매우 선한 기업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미지 쇄신을 위한 그의 마케팅 전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사람의 본성을 대충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무척이나 사람이 좋은 남자.
  그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이겠지.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곧바로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세하 요원님을 찾으러 가는거, 맞죠?"
  "…"
  "당신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유니온이 아무리 이세하 요원님을 모함해도, 분명히 그 속에는 이세하 요원님의 뜻이 담겨있었으리라 저는 믿거든요. 그래서 저는 요원님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세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요원님,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저나 요원님이 이세하 요원님을 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더라도, 세간은 그렇게 바라** 않아요. 특히 데이비드 전 지부장의 배신을 또 다른 사건으로 덮고 싶어하는 유니온과 정부는 한통속으로 움직이고 있죠. 유니온에서는 이미 늑대개 팀을 통해서 이세하 요원님을 죽이려고 한다 들었습니다. 
  이미 정부 측 사람들이 이곳을 한 번 다녀갔습니다. 이것 저것 물어보고 가더군요. 만약 검은양 팀이 이곳으로 올 경우에는 곧바로 신고를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하고 간 상태입니다. 정부 쪽에서도 유니온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모양입니다."

  유니온은 한 나라의 정부에 휘둘릴 정도로 약하지 않다.
  다만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와 협력관계를 긴밀히 맺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차원종 처리와 관련된 업무이다. 이세하를 차원종으로 규정한 유니온의 의중을 살펴보면, 정부 역시 그에 맞추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고마워요, 김가면 씨. 하지만 저 가야만 해요. 세하를 이대로 놔두면, 세하는 정말 차원종이 되어버려요."

  가면을 쓴 중년 남성은 눈을 감은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조심하세요. 이 플레인 게이트를 통해 이차원으로 간다고 해도, 이세하 요원님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어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비밀은 철저히 보장하도록 하죠."
 
  슬비는 그의 손 위에 또 다른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려준 후, 미소를 보여준 뒤 플레인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엇갈리게 회전하는 두 개의 원형 장치가 맞물릴 즈음, 그녀의 몸이 사라진다. 곧바로 이차원으로 이동한 것이겠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김가면은 기도하듯이 말했다.

  "무사히 일이 끝나기를 빕니다, 요원님."

.
.
.

  "정말 재밌군. 야생에 방사하면 역시 개도 늑대가 되나**?"
  "그러게 말이야. 설마 이렇게 당하고 올줄은 몰랐어."

  눈 앞의 사람을 비웃는 둘.
  애쉬와 더스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세하를 향해 잔뜩 조롱을 흘렸다.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처참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늑대개 팀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전략을 짰을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트레이너라는 그 남자, 그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었다. 보통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그와 맞딱뜨렸기에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 시덥잖은 인간들의 무기는 버리라고. 너의 그 고집이 결국 이렇게 패배를 불러온거다. 우리들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굴욕적인 패배도 없었어." 
  "애쉬의 말이 맞아. 어차피 잘 됬어. 그 무기, 아마도 넌 끝까지 버리지 않았을테니까. 이렇게 부서진게 더 잘된 일일 수 있어."

  꺄르르 웃던 더스트가 세하의 앞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땅과 부딪혀 쨍강, 하는 날붙이의 소리를 냈다.

  이세하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들어온 그것은, 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블레이드와 같이 총탄을 쏘는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찌르고 베는데에 있어서는 더욱 효과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검이다. 검붉은 색이 감도는 그 무기에는 무척이나 오싹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차원종의 위상력을 사용하기에 적당한 무기이겠지.

  사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색상의 갑주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거부감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막상 입고 나니, 매우 편안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이질감이 우스울 정도였다. 아마도 이 검 역시 마찬가지이겠지. 오히려 그의 힘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건블레이드보다 이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가 건블레이드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었을 적, 처음 그가 이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을 때의 다짐을 잊지않기 위해서이다.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이성이 조금씩 조금씩 차원종의 정신에 먹혀들어가고 있음을. 그렇기에 인간으로서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일종의 아티팩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좋든 싫든, 그는 이제 이 무기를 들어야 한다.

  "자, 어쩔거야? 이 무기를 들고 '놈'을 죽일거야, 아니면 '놈'에게 죽을거야?"
  "선택은 네 몫이야, 이세하."
  "…뻔한 걸 왜 물어."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그 검을 잡아 들었다.
  검의 손잡이 부분을 잡을 때,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대신 뭔가 알 수 없는, 오싹한 기운이 그의 몸을 맴돌다가 머리 위로 점점 올라가더니 얼굴까지 창백해지게 만들고선 사라져버렸다.

  그 나쁜 기분에 마른 기침을 연거푸 그는 토해냈다, 검도 땅에 다시 떨구고서.
  기침이 그치자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애쉬와 더스트는 여전히 차갑게 미소짓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조금 더 네가 우리가 된 것일 뿐이야. 아아, 느껴져,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게."
  "히힛, 정말 기분이 좋아. 이렇게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야." 

  조금더 그들과 같아졌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떨어뜨렸던 검을 다시 주워들 무렵, 그는 어두운 검날에 흐릿하게 비치는 그의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금세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음에도, 유독히 그의 머릿카락만큼은 분명하게 보였다.
  완벽하게 탈색된 것처럼 희게 변한 그의 머릿카락. 예전에 차원종이었던 레비아도 이런 머릿카락이었다. 특히 애쉬와 더스트가 가지고 있는 그들의 머리색과도 완벽하게 일치했다. 정말로 그는 아주 빠르게, 그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스트가 기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때, 우리가 느껴지지 않아?"
  "물론, 느껴져."
  "어떤 느낌이야?"
  "매우 역겨워."
  "ㅁ, 뭣?"
  "다시 말해줘?"
 
  애쉬가 말을 끊는다.
  "아니, 충분히 알아들었어. 하지만 그건 우리를 향한 감정이 아니야. 인간을 향한 감정이 되어야지."
  "내 말을 잊은 거야? '놈'을 죽인 후에는, 반드시 너희를 먼저 죽인다는 걸."
  "아아, 물론 아니지. 건방진 네놈의 도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하지마."
  "역시 너랑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애쉬."
  "역겹군. 역겨워. 지금 너는, 네 어미와 똑같은 말을 했어. 때가 되면, 그 말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그 입부터 찢어주마."
 
  세하와 애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세하가 인간이었을 시절에도 애쉬는 그를 싫어했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쓸데 없는 다툼은 그만 두지. '놈'을 찾아가니 거기에는 이미 없었어.
  대신 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놈'의 행방을 알아줄 수 있어?"
  "재밌군. 뭐, 좋아. 알아봐주지. 하지만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뭐지?"
  "저쪽 세계와 가까운 곳에, 외부인의 기척이 느껴졌어. 잔챙이들은 금방 쓰러질테니, 네가 나가봐주어야 겠어. 가서 겁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 녀석에게 이곳의 끝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를 보여줘.
  "네가 나가있는 동안, 우리도 놈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할게. 그러니까 가서 그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와야해?"  
  "침입자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침입자가 너와 만나게 되면 그 일대를 10배의 차원압으로 봉쇄하도록 하겠어. 그렇게 되면 침입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겠지. 그 건방진 유니온의 개에게 너의 힘을 마음껏 뽐내봐."

  남매의 말을 듣고서, 말 없이 이세하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어두컴컴한 이계에서 그가 향하는 곳은 이곳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인공구조물 근처이다. 흔히 붉은 차원으로 알려진 그곳은 알 수 없는 붉은 빛으로 가득찬 신전과 대지의 공간이다.
  그곳에 겁 없이 침입한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침입자를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라면, 목표를 위해서라도 이 임무를 달성해야만 한다.
  
  그에게 이 임무를 준 이들은 침입자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세하는 그들이 침입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겠지.
  시야에서 이세하가 사라지자 남매는 중얼거렸다.

  "'놈'은 이미 신서울을 떠났어. 머나먼 얼어붙은 땅까지 갔지."
  "그러니까 쫓을 생각은 하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여자와 실컷 싸워봐~"






  ◆ 12-3

  "제이 씨, 슬비가 간 곳 알고 있죠?"
  "응? 난 모르는데, 유정 씨." 
  "시치미 떼지 마요. 슬비라면 당신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았겠죠, 적어도 유니온 때문에 속이 썩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테니까."
  "흐음~ 유니온 직원이 그런 위험한 말을 입에 담아도 되는건가?"
  "괜찮아요. 우리 검은양 팀은 지금 이 순간부터, 유니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테니까요."
 
 
  조용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수선하게 바뀐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건 유리였다.

  "언니, 그 말 진심이죠? 네? 정말이죠?"
  "그래. 지금과 같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유니온의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갔다가는 우리나 세하나 모두 상처만 받을 뿐이야."
  "맞아요. 우리가 힘을 모으면 세하 형을 구할 수 있어요!"
  "응, 미스틸테인.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어."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이가 딴지를 걸듯 말했다. 말투는 이러한 것은 유정의 속내가 진심인지 떠보기 위한 것이겠지.
  "그래서 유니온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면? 뾰족한 수라도 있는거야?"
  "아직까지 방법은 없어요. 하지만 구해보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정도연 씨에게 또 다른 방법을 부탁해 놓았으니, 만약 아무런 희생 없이 세하를 구할 방법이 생긴다면 먼저 연락을 줄거예요."
  "음…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네?"
  "그 방법이 나오기 전에, 대장이 먼저 손을 쓸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죠?"
  "대장의 행방을 물었었지. 대장은 지금 외부 차원으로 떠난 참이야, 플레인 게이트를 통해서."
  "네!? 아, 안돼요!"

  제이의 말을 들은 김유정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척이나 놀란 것으로 보인 그녀를 바라보며 제이는 의문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러는거야, 유정 씨?"
  "플레인, 게이트는…, 오늘 폐쇄될 예정이라고요…"
  "뭐엇!?"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제이는 곧바로 카페 밖으로 나가려는듯 외투를 챙겼다.
 
  "어디 가려고요?"
  "플레인 게이트! 이대로 놔뒀다가는 대장이 외부 차원에 갇히게 된다고!"
  "아저씨, 같이 가요!"
  "언니, 이대로 놔둬선 안돼요. 슬비부터 구하는게 급해요!"
  "으, 응!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 수순을 최대한 늦춰볼게. 모두들 플레인 게이트로 출동해서, 슬비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줘. 부탁이야!" 
  "네, 언니!"

  서유리와 미스틸테인도 곧바로 카페 밖으로 움직인다.
  역시 검은양 팀은 임무가 주어졌을 때가 가장 활발하다. 하지만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임무이다. 김유정은 시간이 맞기를 바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김유정입니다. 지금 플레인 게이트……"

.
.
.



  "하아아아앗!"

  분홍빛의 광선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플레인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슬비는 푸른 차원과 붉은 차원 중, 그녀가 지난 신서울 사태 때 보았던 용의 군단에 속해있던 차원종들이 나타나는 붉은 차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간다고 해서 그녀가 만나고 싶어하는 그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붉은 차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신전의 제단 부근까지 도착한 것 같다. 항상 이곳까지 탐사한 후 돌아가야만 했었는데, 사실 여기에서 더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있다. 그렇기에 그를 찾기 위해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 이후의 지역은 전혀 탐사가 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어떤 차원종이 출현할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그녀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에게는 두려움 따위 없었다. 오직 그녀가 바라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희생할 생각도 있었기에, 그녀에게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고 보는게 맞겠지. 

  물론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유리가 세하에게 당하고 세하가 그녀에게 던졌던 말, 그 말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기에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어쩌면 세하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조심스레 그녀는 해보았다.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왜 이렇게 그의 앞에서는 감정이 먼저 앞서는지, 결국 그를 구해야겠다는 의지만으로 그녀는 이곳에까지 발을 내딛었다.

 
  신전의 입구로 보이는 이곳, 아마도 이곳에는 차원종의 병기인 우상신 모락스가 등장할 것이다.
  꽤나 골치아픈 보스급 병기이지만, 이미 수도 없이 처치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신전의 입구에 들어서기 전,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두 손에 맞잡은 페이즈 나이프를 꽉 쥐었다.
  스스로를 격려하듯 기합을 넣고서 그녀는 발걸음을 안으로 떼었다.

  그녀가 붉은 빛이 감도는 어두운 신전의 입구 안으로 발을 완전히 들여놓은 순간, 그녀 혼자 느낀 것 같은 강한 진동을 느꼈다. 땅이 흔들리는 일도 없었고, 몸이 흔들린 적도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쿵쾅- 이런 것 같은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강력한 차원압에 그대로 노출된 것처럼 말이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왜 이러지?"
 
  그녀는 조심스레 신전 입구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마치 입구를 경계선으로 삼기라도 하고 결계라도 쳐진 듯이 그녀의 손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이상 밖으로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밖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무언가가 벽처럼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입구를 따라 이 신전을 완벽히 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지?"

  그 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함만이 감도는 이곳에 그녀 외에 누군가 나타난 것이다.

  이상하다. 이곳에 본래 나타나야 할 것은 우상신 모락스일텐데, 그것의 덩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발소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그 보스급 기계는 고정형이라 움직일 수도 없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그녀는 무언가 평소와는 다르게 이 안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서, 눈 앞에 나타날 상대와 전투할 준비를 갖추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신전 안은 꽤 어둡다.
  그래서 가시거리가 채 10미터도 되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말라가는 목에 침을 겨우 넘기면서, 긴장 속에 상대를 기다렸다. 강력한 차원압이 느껴졌을 때의 쿵쾅 거렸던 진동과 비슷하게, 그녀의 심장이 긴장해서인지 계속해서 쿵쾅거린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을 가라앉힌다.

  조금씩 인영이 나타나는 듯 하다. 실루엣만을 보았을 때는, 인간형이다.
  인간형의 차원종은 꽤나 그녀가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리 신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인간형의 차원종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에 겨우 가라앉혔던 긴장이 다시금 살아 올라온다.
  그런데 왜일까? 처음 보는 낯선 존재일텐데도, 그녀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한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지?

  "유니온은 이 상황에서도 외부 차원의 탐사를 진행하는거야? 이쪽 차원을 침공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서, 친근한 목소리이다.
  비록 정이 깃든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가 그토록 찾는 그 남자의 목소리이다. 며칠 만에 다시 들은 그의 목소리이기에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지 않았음에 감사하였다. 그녀는 결국 이곳까지 와서 그를 찾아내었다.
 
  그녀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놀랐기 때문이겠지.
  그저 상대가 건네오는 말을 계속해서 듣기만 할 뿐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고. 여기서 죽어라, 침입자."
 
  날선 말을 너무나도 쉽게 건네며 그는 다가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인가 검이 뽑혀 들려있었는데, 그가 무기를 잃었다는 소식과는 달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녀가 대답도 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낯선 존재의 발걸음은 서로 충분히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그도, 소름끼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이슬비… 너, 어떻게, 여기까지…"
  "세하야."
  "가까이 오지마! 말했지, 날 찾지 마라고!"
  "입장 바꿔서, 너라면 그랬을 것 같아?"
  "이 고집불통! 도대체 너는 왜!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처먹는거야!"

  아무리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험한 말을 던지는 것일까? 아마 평범한 연인같은 경우는 바로 여기에서 싸움이 났겠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이 정도로 상처주고 상처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세하, 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성공하면 너는 더이상 차원종으로서 고통받지 않아도 돼."
  "뭐?"
  "네 위상력을 너에게 주입하면, 차원종의 위상력이 분리될거래. 그렇게 되면 더이상 너는 차원종의 힘에 짓눌릴 일도 없어지겠지."
  "미쳤어? 지금 그 말은, 네가 죽겠다는 말이잖아!"
  "……"
  "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적으로 만나더라도, 서로 살아있는게 더 나아!"
  "아니, 난 죽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
  "그게 그렇게 간단한 줄 알아? 이걸 봐, 내 머리를!"

 
  이세하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서야 눈치챈 거지만, 세하의 머리는 짙은 고동색이 아니라 윤기가 하나도 없어보이는 백색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저절로 애쉬와 더스트의 머리색을 생각해낸 그녀는, 세하가 그들과 점점 더 동일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정도면 너도 알겠지? 더 이상 나는 희망이 없어. 난 이제 정말 차원종이 되어가고 있어. 아무리 슬비 네가 힘을 쓰더라도, 무모한 일이야.
  그리고 만약 성공해서 내가 인간으로 돌아가면? 유니온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과연 이적행위를 한 나를 유니온이 가만히 놔둘까?"
  "이세하, 너 혼자 있는게 아니잖아."
  "…… 정말이지, 너는 말로는 안돼."

 
  세하가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미처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슬비에게 근접하여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잡은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여러 상황에 훈련된 슬비이기에 미처 의식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여 세하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뒤늦게 세하가 자신을 공격했음을 안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세하야, 왜 이래!"
  "애쉬와 더스트가 말했어. 침입자를 없애야 데이비드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으…크윽…"

  아무리 단련된 클로저라고 하지만, 태생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힘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위상력에 각성한 클로저라고 해도 신체의 상태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힘대결에서 슬비가 세하에 뒤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슬비의 근접전 능력이 결코 뒤쳐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넘을 수 없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를 슬비는 조금씩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며 실감하고 있었다.
  식은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져 간다. 있는 힘껏 세하의 검을 밀어내보려고 하지만, 도저히 밀어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약한 신음을 흘리며 겨우 버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침입자 - 너 - 를 없애야 해. 그러니까 이슬비, 쓰러져 줘."
 
  너무나도 매정하게 말을 던진 후, 세하는 있는 힘껏 슬비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린다.
  미처 그것은 방어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복부를 강타당한 슬비는 몇 번이고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고 튀어나온 암석에 긁히고 부딪혀 굴러간 후에서야, 흙먼지를 한 가득 일으키며 자리에 멈춰섰다.
 
  "끄으으, 이럴 수가…"
  "그렇게 여유부릴 시간 있어?"

  가까이 다가오는 그 살기어린 바람소리.
  슬비는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이어질 공격을 짐작하고, 몸을 굴리는 것으로 자리를 겨우 이탈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내뺀지 채 1초도 되지 않아서, 카앙- 하고 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세하의 검이 공중에서 그녀가 있던 자리를 내려 찍었다. 분명히 세하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진심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분명히 슬비는 죽을 수 있다.

  그녀는 통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하에게 너무나도 세게 걷어 차인 복부는 마치 장이 찢어진 것처럼 너무나도 아파서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다. 아니, 이미 눈물은 흘리고 있었다, 울지만 않을 뿐. 너무나도 아픈 배를 왼손으로 감싸듯 부여잡고서, 그녀는 울먹거리며 물었다.

  "세하, 너… 진심이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겠어? 다시 말해줄까?"
 
  세하의 대답에서는 결단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었다. 그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은 그녀는 더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먼저 세하와 싸워서 그가 정신을 잃게 만든 후에 계속해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그와 그녀, 단 둘 뿐이다. 서로 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싸워야만 한다. 그것이 이곳에서의 유일한 진리.

  "아니. 괜찮아. 네 뜻은 충분히 알았어. 그러니까, 나도 진심으로 싸울거야. 각오해."
  "이제야 이슬비답네. 어디 보여줘봐, 너의 잘난 그 실력을."
  "작전 개시. ''을 섬멸합니다." 

  마치 자기 암시처럼 언제나 작전시작 때마다 하던 그 말을 입에 담는 그녀는,
  자신의 뒤로 수많은 비트들을 생성해내고 일제히 이세하를 향해 사격하듯 쏘았다.

  수많은 칼날들이 이세하를 노리고 매섭게 쏘아졌고,
  두 사람의 싸움은 이제 시작되었다.




  ◆ 12-4

  "아, 글쎄 저는 모른다니까요?"
  "어이, 벌처스의 사장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진짜라니까요. 왜 이렇게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정말이지, 홍시영 전 사장 덕분에 나라꼴이 엉망진창이 된 후로도 변한게 하나도 없군요, 당신들은.
  아직도 당신들 벌처스에게는 정부가 호구로 보이나 보죠?
  "그 사건은 당신들도 똑같이 연루가 된 일이 아니었습니까? 벌처스는 쇄신을 거듭했지만, 이 나라 정부는 아직도 구태로군요. 당신들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말 통하는 걸로는 홍시영 사장이 더 나은 것 같군요. 당신은 전혀 말도 통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예, 전 원칙주의자라서요. 옳은 건 옳다하고 틀린 건 틀리다고 할 뿐입니다. 볼 일 없으면 그만 가시죠, 정부 요원님들."
 
  김가면의 말을 듣고서, 미소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꽤나 거슬리는지 가면을 쓴 중년 남성이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겁니까?"
  "당신은 명령권자도 아닌데,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니 우습지요.
  뭐, 좋습니다. 이슬비 요원이 저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우리야 더 쉽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겠죠."
  "무슨 일을, 말입니까?"
  "무슨 일이긴요?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 절차죠."
  "옛!?" 
  "아니, 왜 그러십니까? 저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비웃음섞인 남자의 말에, 김가면의 가면 속으로 땀이 흘렀다.
  여기에서 사실을 말하자면 분명히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이고, 이슬비 역시 징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말한다면, 저들은 분명히 거리낌없이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 절차를 따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슬비는 저 안에서 탈출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절대 이 사람이 집행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지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말라가는 목에 침을 넘기며 김가면은 물었다.

  "왜 이리 갑자기 일을 시작하는거죠? 유니온에서도 플레인 게이트는 꽤 이차원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강남 사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존해오고 있는데요. 유엔의 회원국이 유엔의 산하기구인 유니온의 결정을 이렇게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을 받은 남자는 쓰고 있는 안경을 고쳐쓰며 대답했다.
 
  "네, 그렇죠. 일개 유엔의 회원국이 유니온의 결정을 마음대로 바꿀 힘은 없지요. 하지만 이 또한 유니온의 결정이라면?"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유니온에서는 신서울 사태 이후 계속해서 이차원과 연결된 이 공간을 운영함으로써, 실제로 이차원의 차원종들이 플레인 게이트를 통해 다시 신서울로 침공하려고 했던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정보 차단으로 인해서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저희는 논외죠.
  유니온도 더이상 이렇게 위험한 물건 때문에 처지가 곤란해지는건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희도 같은 생각이고요. 그러다보니 어찌 생각이 맞게 되어, 유니온과 정부는 모두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유니온의 연구원들도 있다고요!"
  "음? 모르고 계셨나요? 유니온 측의 사람들은 모두 플레인 게이트를 빠져나간지 오래입니다. 한 번 주위를 잘 둘러보시죠. 당신들 - 비관계자 - 빼고, 과연 누가 있는지를요."

  남자의 말대로이다.
  정말로 이 부근에 남은 것은 김가면 자신과 벌처스의 관계자들 뿐이다. 열심히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소영같은 경우는 민간인이니 예외로 치고, 실제로 박심현이나 최보나와 같은 유니온의 직원들은 모두 이곳에 없다.

  "그러니 이제 당신들도 이만 ?"
  "이이, 이 사람들이!"

  분에 찬 김가면이 무엇이라 더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유니온이 동의한 이상, 더이상 어떤 말이 필요하리?
 
  게다가 이 정부의 요원들은 보통 요원들이 아니다.
  국가의 어두운 일을 담당하는 최전선에서 일하는 자들이다. 마치 과거에 벌처스에서 운영했던 처리부대와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아마 겉으로는 숨겨진 이들일 것이고, 정부조차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부를 위해 일하며, 국익을 위해 충성한다. 스스로를 나라를 위해 쓰고 버려지는 물건으로 자부하는 이들이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이들은 감당할 것이다.

  즉 아무리 김가면이 저항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해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플레인 게이트를 폐쇄시키겠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김가면이기에 시름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에는 반드시 구원자가 나타나는 법이다.
  "거기까지 하지, 정부 나으리들."
  "칫."
 
  선글라스를 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지, 안경을 쓴 사람의 얼굴이 변했다.

  "검은양 팀의 제이, 씨지요.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를 막으러 왔어. 당신들이 집행자인가**? 여기는 우리 검은양 팀에게 넘기고, 이만 철수하는게 어때?"
  "거부합니다. 당신들은 일개 유니온의 요원입니다. 유니온의 결정에 따라 폐쇄 수순을 밟을 뿐인데, 당신들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권한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일개 정부 소속의 공무원들이 말이야. 플레인 게이트의 폐쇄는 우리가 담당하도록 하지. 그러니 이만 철수하도록 해. 당신들은 저 안에서 나오는 이차원의 분진에만 닿아도 오염되니까."
 
  일개 라는 말에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인지, 안경을 쓴 남성은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잠시 제이를 쳐다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시선을 자신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사람들에게 주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와 같이 움직이는 팀원들인 모양이다.

  "혼자인가."
  "아니, 우리는 항상 팀으로 움직이지."

  분명히 혼자 들을 정도로 작게 말했는데, 그것을 알아들은 제이가 그의 말을 받아치자 남자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이의 뒤로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도 제이의 뒤를 따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도 저 남자는 제이가 혼자였다면, 그를 제압하고서라도 본 임무를 완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제이는 그것을 정확히 짚어냈다.

  "나 혼자였으면, 제압이라도 하려고 했나?"
  "흥, 유니온의 클로저를 제압할 정도의 힘이 우리에게 있을리가요."
  "내가 아는 바와는 조금 다르군?"
  "뭐, 좋습니다. 우리 같은 '일개' 정부 소속 공무원이 나서는 것보다 유니온의 '일개' 클로저들이 나서는게 더 좋겠죠. 당신 말대로 '일반인'인 우리가 이차원 분진에 감염되어서는 곤란하니까.
  현우 씨, 나현 씨, 이만 철수합시다."

  그것이 뒤에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인가보다.
  두 사람은 안경을 쓴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고, 남자가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아마도 이 지하 공동에서 나가려는 모양이다.
  그들이 옆을 스쳐지나갈 즈음 제이가 묻는다.

  "당신들, 어디 소속이지?"
  "…… 행정자치부 소속이라고 해두죠."
  "이름은?"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알려줘야 하나요?"
  "뭐, 좋아. 얼굴만 기억하면 되겠지."
 
  기분나쁜 웃음을 아주 잠깐 지은 남자는 금세 그들을 지나쳤고, 완전히 플레인 게이트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물론 그의 뒤에 있는 이들까지도.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김가면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요원님들 아니었으면, 플레인 게이트가 폐쇄되고 이슬비 요원님이 저 안에 영영 갇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슬비가 안에 들어간지 얼마나 된거죠?"

  유리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김가면이 곧 답을 내놓았다.
  "아마 한 시간 쯤 되었을 겁니다."
 
  그의 답에 제이가 말을 이었다.
  "한 시간이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플레인 게이트 탐사를 진행했을 때, 하나의 구역을 클리어하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야. 설마 대장,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이슬비 요원님은 확실히 이세하 요원님을 찾으러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이세하 요원님을 만나러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제이는 이 느낌을 결코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유리야, 테인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슬비를 찾을 수 있겠니? 나까지 들어가게 되면, 저 녀석들이 다시 와서 플레인 게이트를 폐쇄하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여기 남도록 하겠어."
  "하지만 아저씨, 혼자 계셔도 괜찮겠어요? 그 사람들이 더 사람들을 데려오면 어쩌려고요?"
  "괜찮아. 이래뵈도 아직은 퇴물이 아니니까."
  "그럼 아저씨, 미스틸과 다녀올게요. 슬비 금방 찾아올게요."
  "그래, 다녀와. 슬비를 찾는대로 바로 데리고 나와야해, 너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날 지는 나도 모르니까."
  "알겠어요. 가자, 미스틸."
  "네, 유리 누나!"

  두 사람이 맞물리듯 회전하는 두 원형 장치 사이로 들어가자, 곧 그들의 몸이 사라졌다. 아마 이차원으로 이동한 모양이겠지.
  제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이 무사히 슬비를 데리고 돌아오기를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쉴새 없이 날아드는 칼날들이 이세하의 신경을 긁어놓는다.
  벌써 이슬비와 대치하고 싸움을 시작한지 30분 가까이 흘러가지만, 이슬비의 기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그가 너무 그녀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더 한 수 위였다.

  지친 기색 없이 이슬비는 자신과 근접해가는 이세하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전자의 폭풍이다!"

  그 말과 함께 세차게 몰아치는 전류들.
  얼마나 강한 전류인지 눈에 선명하게 그 푸른빛이 보일 정도다.
  그녀와는 몇 번이고 작전을 뛰어봐서 잘 아는 기술이다. 만약 저 공격의 범위 안에 들어가면 상당히 처참한 꼴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류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가 최고의 타이밍이다.

  전류의 공격 범위 밖에 있는 이세하는 지금의 공격으로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슬비는 전류가 소멸하기도 전에 강제로 소멸시켜 방사시키고, 대신 자신의 주위로 10개 정도의 칼날을 재생성한다. 아무래도 더 범위가 큰 공격을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좋다. 이세하에게 그 정도의 공격은 두렵지 않다.

  매우 빠른 몸놀림으로 슬비에게 근접한 그는, 지근거리에서 검 끝으로 위상력을 쏘아냈다.
  예전에는 총탄에 실어 위상력을 뿜어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자신의 위상력을 담아 분출한다. 그가 애쉬와 더스트에게 받은 이 검은 무척이나 위상력을 다루기에 쉬웠다. 적어도 위상력을 다루는 기술만큼은 차원종이 인간보다 더 우위라고 하던데, 실감해보니 사실인듯 하다. 훨씬 위상력을 응축하여 실어보내기 좋은 무기이다.

  바로 정면에서 쏘아진 검푸른 위상력에 그대로 노출된 슬비는 미처 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대로 세하의 날선 위상력에 휘말린 그녀는 꽤 심각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세하의 위상력은 열을 다루는 능력이니 분명히 그의 위상력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불에 타는 느낌이라고 하니, 꽤나 아픈 공격일 것이다.

  슬비를 감싸듯 검푸른 불길이 몰아쳤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슬비는 결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세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란 그는 뭔가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고있음을 직감하고 바로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다. 만약 그녀가 반격한다면 꽤나 골치아파지기 때문이다.

  세하의 예상대로 그가 있는 자리에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는 거대한 두 개의 기둥이 낙하하여 지상과 충돌했다. 그녀의 특기가 염동력이다보니 가능한 능력이다.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를 공격대상의 상공에서 곧바로 낙하시켜 압사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꽤나 무섭다. 조금만 방심했으면 저기에 깔렸을 자신을 생각하니, 저절로 그에게는 소름이 돋았다.

  충돌로 인해 잔뜩 흙먼지를 일어나, 두 사람의 사이를 가린다. 서로의 인영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그 때 슬비는 매섭게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염동력은 물체를 원거리에서 이동시키는 힘으로서, 특정 위치로 위상력을 집중시키면 끌어당기는 성질도 부여할 수 있다. 그녀는 그런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 원리에 따라서 염동력을 한 점에 집중시키면 공간을 압축시킬 수 있는데, 공간이 압축되면서 주위의 물체들은 저절로 한 점으로 모이게 된다. 적은 저절로 특정 위치로 끌려오는 동안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할 것이고, 그 특정 위치로 쏘아지는 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당하고 말 것이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이미 여러 번 그녀가 실전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기에, 이세하가 결코 모르는 공격 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막상 공간 압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공격이 통할지 통하지 아니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공격이라도 이어가지 못하면 전투의 주도권을 이세하에게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결코 공격을 하지 않을 생각은 없다.

  "하아아앗!"
  "윽, 이런!"

  그녀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염동력의 범위 내로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끌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공격을 이어갈 차례이다. 세하가 끌려오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퍼부을 다음의 공격을 준비했다.
  응축의 임계점까지 끌려온 그 순간, 그녀는 소환하고 있는 비트들을 일제히 쏘아내었다. 반발력을 가지고 튕겨나가는 비트들은 염동력에 의해 끌려온 전자기력까지 사용하여 음속에 가까운 속도를 발휘한다. 공기와의 마찰열로 인해 비트들의 상당부분은 녹겠지만, 아직 녹지 않은 부분은 열로 치환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상대를 그대로 관통해버린다.
 
  10개의 비트가 모두 쏘아져 7개의 비트가 적중한다.
  한 번 씩 관통당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에 세하는 비명을 지른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너무나도 큰 고통이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한다. 그는 알고 있다, 만약 여기에서 자신이 쓰러지면 그녀가 어떤 일을 벌일지를. 분명히 바보같은 짓거리를 하겠지.
  결코 그런 일을 그녀가 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 그것 하나만으로 그는 견뎌냈다. 그를 끌고가던 염동력은 한계에 달한 건지, 더 이상 끌어들이는 중력은 포기하고서 지금까지 끌어당겼던 공간을 일제히 내뱉었다. 그 순간 세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나간다.

  튕겨져 나가며 공중에 부유하고 있던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싸움이 길어지고 격화되는데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고 있는가. 언제나 차원종의 의식에 그렇게 쉽게 잠식당하던 그가, 지금은 왜 잠식당하지 않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지금 싸우는 상대에게는 이성을 잃고서 싸워선 안된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의지 때문에 그는 의식을,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이 땅을 구른다.
  격하게 튕겨져 나온 몸이 지상과 충돌할 때의 아픔은 컸다. 특히 관통당한 상처가 꽤나 컸다. 7발 정도 공격을 당했는데, 그 중 관통상을 입은 건 옆구리와 왼쪽 다리 곁을 스쳐지나간 정도의 관통상이었고, 나머지 공격들은 세하가 입고 있는 갑주에 가로막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트들의 운동에너지는 일제히 세하의 몸 곳곳을 강력하게 때렸고, 그 고통은 마치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맞은 것만 같은 아픔이다. 아마도 맨살만 보면 몸 곳곳에 멍이 들었을 것이 뻔하다.

  여러 타박상과 적은 수의 관통상을 입었기에 어떻게보면 그녀의 공격을 선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공격에 입은 상처들은 몸의 움직임을 방해할 정도로 크다. 설마 했는데 이슬비의 실력은 장비의 차이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끝없이 노력하고 끝없이 도전하여 목표를 이루는 그녀의 성격처럼, 그녀는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사람이다. 세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슬비를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했다.

  그리고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수를.

  그녀의 근접전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접전에 돌입했을 때 만큼은 순수하게 체술로 무기를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그 때만큼은 그에게 밀렸다. 그녀는 계속하여 안정적인 거리를 벌리고 계속적으로 공격을 투사함으로써 안정거리를 유지하는 식의 전투를 이어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과 가까이 접근하는 그를 언제나 견제하며, 다시 거리를 벌리는 식으로 전투를 이어왔다. 애초에 그는 원거리 전투보다는 근거리 전투를 선호한다. 그것을 잘 살려내야만 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검을 들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몸의 곳곳에 상처을 입은 지금은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계속된 싸움에 숨이 헐떡거린다.
  세하를 저멀리 날려보내긴 했지만, 바로 다음 공격으로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세하의 위상력이 가지는 열에 그대로 노출된 그녀는 보이지는 않지만 꽤나 큰 화상을 입었다.
  움직이면서 옷에 피부가 닿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그녀가 위상능력자와 직접 싸움을 해본 경우는 국제공항에서 이리나 페트로브나를 상대할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것도 1대 1로 싸우는 경우는 세하와의 전투가 처음이다. 그것은 세하도 마찬가지일테고.
  둘은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힘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의지를 놓지 않기 위해서, 두 손의 단검을 꽉 쥐던 그녀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지금에서야 알아챈 거지만 페이즈 나이프를 쥐고 있는 두 손바닥이 갈라진 것인지, 그녀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은 피로 질척하게 젖어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지도 않고 계속 싸움에만 집중하다니, 아카데미에서 이러했다면 바로 큰 소리를 듣고 호되게 꾸중들었을 것이다.
  언제나 전투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가며 임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들었던 그녀이지만, 어느새인가 이세하와의 전투에 집중하면서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결과 이런 지경에 이르렀고.
  지금 이 상태로는 근접전 상황에서 세하의 검을 맞받아칠 수도 없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도 무척이나 버겁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강제로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어느새인가 세하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치는 공격을 막아야 하는데, 도저히 무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그녀는 피해야만 했다. 급하게 자켓의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캡슐을 뒤로 던짐으로써, 그녀는 웜홀을 통해 그의 공격으로부터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뒤로 물러난 슬비가 다시 세하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약간 놀랐다.
  그의 손에 들려있어야할 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공격은 맨손으로 한 공격이라는 걸까?

  "뭐야, 왜 무기를 버린거지?"
  "그러는 너야말로 무기는 어디간거야?"

  서로 감추려고 하고 있지만 알고 있다.
  이미 둘은 충분히 지쳤다. 그리고 무기를 쓸 만큼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
 
  "이슬비, 넌 언제나 재능이 떨어진다고 했었어. 그리고 바보같이 그 떨어지는 재능을 노력을 메꾸는 녀석이었지."
  "그래. 나와 달리 너는 재능이 뛰어났었지. 하지만 너의 노력은 어머니 덕분에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래. 위상력에 기대하는건 바보같은 짓이지. 그럼에도 순수하게 나만을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었어. 순수하게 한 명의 클로저로서 '나'라는 이세하를 바라봐준 클로저는, 이슬비 네가 처음이었지."
  "옛날 일이야. 그리고 넌 더이상 클로저가 아니야, 이세하."
 
  딱 잘라 말하는 이슬비.
  옛날을 생각하게 되면, 그녀는 더이상 그와 싸울 수 없게 된다. 지금 상황에서 옛 감정은 잘라내어야만 한다.

  "그래, 네 말대로 난 더이상 클로저가 아니야. 그러니 위상력 따위에 연연해하지도 않겠어."
  "무슨 말이야."
  "이런 뜻이지."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인 이후, 이세하의 움직임은 그가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욱 민첩해졌다.
  분명히 멀찍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는 능력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세하는 그런 움직임을 평소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어느샌가 눈 앞에 다가온 세하는 슬비를 향해 정권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는 분명히 힘이 있었고, 그녀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충분히 이해한 그녀는 양 팔을 교차해서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서 말했다.

  "좋아. 체술로 겨루자는 거지?"
  "이해가 참 빨라서 좋아."
  "내가 근접전을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아서 오해했나본데,"

  그녀는 양 팔로 막아낸 그의 주먹을 왼팔을 펼쳐 옆으로 밀쳐내고, 상대의 옆으로 비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세를 숙이고서 그대로 오른팔의 팔꿈치로 그의 명치 바로 아래를 가격했다. 예상 외의 움직임에 세하는 놀란 모습을 보였고, 그녀의 공격에 의해 그의 몸은 저절로 구부려졌다.
 
  "아카데미에서는 체술도 배우거든!"
 
  자신이 제대로 헛다리 짚은걸 알아챈 세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순수하게 체력만 가지고 싸운다면 절대적으로 남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대로 물러나는건 그의 자존심도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자기가 지켜주어야할 사람으로 생각한 그녀에게 도리어 자신이 지킴을 받을 정도로 약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라고 할까?

  그는 무방비하게 있는 그녀의 등허리를 내려치는 것으로 그녀에게 받은 공격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는 있는 힘껏 어깨로 그를 들이받음으로써 다시 복수하고, 그에 답하듯 그가 다시 공격을 하고. 마치 서로 사생결단을 내야만 하는 원수인 것처럼 두 사람은 집요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엉켜서 싸우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누가 이길 것인지 알 수 없는 승부가 되었다.


  ◆ 12-5

  "징계를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방식대로 해서는 적만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는 걸 당신들은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긴 말 할 필요 없어요. 끊겠습니다."

  전화 너머의 상대가 아직 말도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김유정은 전화가 다 끝난양 통화종료 버튼을 꾹 눌러버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전화 너머의 상대도 김유정의 고집을 충분히 알아서였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가다간 그녀와 그녀가 관리하는 검은양 팀 전원이 징계를 받을 것임은 분명하다. 공직 사회에서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건 어떤 경우라도 징계 사유가 된다. 비록 법에서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 대한 거부권에 대해 명시하고 있어도, 형식상의 것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징계는 빠르면 오늘 중으로, 늦어도 며칠 내로 그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최소 감봉에서 최고 직위 해임까지 받을 수 있는 사안이다. 견책과 같은 징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간절히 바라기로는 이 문제가 최대한 빨리 끝나서, 더이상 누구하나 상처받지 않는 일상이 돌아오기를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가 강남 GGV의 뒷골목을 아주 잠깐 울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을 알턱없는 사람들은 주위만 두리번거릴뿐이다.

.
.
.

  근접 격투는 생각한대로 풀려만가지 않았다.
  세하는 검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격투술에도 능했다. 이렇게 몇 번이나 치고박고 싸우는데도 그는 전혀 밀릴 줄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도 간간히 그녀의 공격에 신음을 토하긴 했지만, 사실 그녀가 느끼는 고통보다 덜할 것이다. 온 몸이 화상으로 인해서 타들어갈 듯이 고통스러운데, 몸을 직접 사용해가며 싸우는 행위는 절로 아플 수밖에 없다. 공격을 하건 공격을 당하건, 어느 쪽이든 그녀는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치고박는 중에 몇 번이고 비트가 적중한 곳을 가격했음에도 세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녀는 자신이 시시로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한 번 정도 공격을 더 당한다면 그대로 끝이겠지.
  어떻게든 빨리 결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녀는 계속하여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면서 빈틈을 살핀다. 잠시 소강상태인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 그도 계속하여 그녀의 빈틈을 살핀다.

  그럴 즈음, 신전 입구의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 것을 확인한 슬비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과 같은 팀원들이 등장한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슬비의 시선이 세하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자, 그 사이를 노리고 곧바로 그가 달려들었다.
 
  "체크메이트."
  "꺄악!"
 
  바로 앞에까지 달려든 세하를 미처 ** 못한 그녀가 그의 기척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목이 그의 오른손에 사로잡힌 후였다. 그의 오른손의 악력이 그녀의 갸느다란 목을 눌러오면서, 동시에 그녀는 천천히 바닥과 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에 의해서 천천히 몸이 들어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교수형을 당하는 자세와 같아서 그녀는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져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만, 헛된 노력이었다. 이것으로 그녀는 완벽히 세하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는 겨우 눈을 내려 세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다. 승리에 기뻐하는 것이 아닌, 너무나도 비참해서 울 것 같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그런 얼굴로 정말로 애써 감정을 지우며 말했다.

  "게임 오버."
  
.
.
.

  "이세하! 당장 슬비 못 놔!?"
  "세하형, 슬비 누나를 놔주세요!"

  들릴리가 없는 저 너머로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은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그들도 모두 보고 있었다. 세하와 슬비가 벌이는 대결을, 그리고 슬비가 세하에게 패배한 것도.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신전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두 사람 모두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서로 공격을 주고 받으며 싸웠던 것일까.
  두 사람의 얼굴과 몸 곳곳에 난 상처들은 치열했던 결투의 흔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더욱 유리와 미스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려야만 한다.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세하로부터 슬비를 떼어놓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신전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들은 그 벽이 차원압에 의한 것임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계속해서 그 벽을 두들기며 호소하고 있었다.

.
.
.

  "말했지, 날 찾으면 좋은 꼴 ** 못할 거라고."
  "큭… 차라리, 죽여, 줘."
  "죽여? 너를?"
  "…"
  "아, 맘 같아선 여기서 널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 남아있으니까…, 도저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네."
  "이세, 하… 컥컥! 꺅!"

  이세하는 이슬비를 있는 힘껏 보이지 않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넘을 수 없는 경계는 무척이나 단단해서 거기에 뒤를 부딪혀버린 그녀에게는 아픔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처음에 그녀가 그것을 손댔을 때는 마치 돌에 부딪히는 것과 같았는데, 지금은 약간 얼어붙은 물에 닿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은근히 자신의 몸이 그 벽을 통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벽에 붙이자, 이세하는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쉬와 더스트가 보고 있었어. 다치게 한건 정말 미안해."
  "뭐?"
  "부탁이야, 제발 날 찾지 말아줘. 만약 다음에 또 이렇게 나를 찾는다면, 그땐 널 죽이고 나도 죽을거야."
  "세하야, 잠깐만 너 뭐하는 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등 뒤를 받쳐주고 있었던 단단한 벽이 물컹해지는 것과, 그녀가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하다가 통과해버리는 느낌을 느꼈다.
  이세하가 밀어내는 힘에는 분명히 차원종의 기분나쁜 위상력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위상력을 사용해서 이 보이지 않는 벽을 강제적으로 철거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그대로 뒤로 밀려났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쓰러진다.
  그것을 그녀의 동료들이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잡았다! 슬비야, 괜찮아?!"
  "이세하 형! 도대체 슬비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랜스를 겨누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미스틸테인은 이세하에게 윽박질렀다.
  그에 대해 돌아오는 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경고하는데, 이곳에 다시는 찾아오지마. 너희도 저 꼴이 나기 싫다면 말이야."
  "용서 못해요! 예전엔 유리 누나를, 이번엔 슬비 누나까지! 용서 못해요!"
  "용서 못하면 어쩔건데? 데이비드 놈 따위한테 무능한 도구라고 소리들은 주제에."
  "뭐라, 고요?"
  "아냐, 흘려들어버려. 그리고 어서 **버려."
  "이이이, 가만 두지 않을거…!"

  미스틸테인이 자신의 랜스가 이세하를 향해서 힘껏 내지를 것처럼 크게 뒤로 뺐다. 그 순간도 아주 잠깐이라, 곧바로 이세하는 방어하지 않는다면 랜스에 꼬챙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스틸의 공격을 유리가 저지했다.

  "미스틸! 그만 둬!"
  "네?"
  "아저씨가 슬비를 찾는대로 바로 돌아오라고 했잖아.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빨리 돌아가야할 것 같아."
  "…… 어쩔 수 없죠.
  세하 형, 다음에 또 저희를 공격한다면, 그때는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철수하려는 그들을 공격할 마음은 없는 것인지, 이세하는 몸을 돌려 신전 안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유리는 슬비를 등에 업은 채로 미스틸테인과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에 업힌 슬비가 얼굴을 돌려 이세하가 있는 신전 쪽을 바라보았을 때, 이세하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유리의 등에 업힌 채로 빠져나가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세하와 싸우기에는 자신의 힘이 아직도 약하다는 것을 말이다.
  더욱 강해져야만 한다. 그를 넘을 수 있을 때에서야 자신이 그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척 큰 피곤이 몰려왔다. 그녀는 미안하지만 탈출을 유리와 미스틸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뒷 일을 맡기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을 때, 그대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고된 전투로 인해 체력이 방전되었기 때문이겠지.

  동료를 업은 채로 유리는 전력질주하여 30분 정도는 가야할 거리를 10분내로 주파해내었다.
  그리고 본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속도를 줄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스틸과 함께 플레인 게이트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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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참하네요. 너무나도 늦게 올렸습니다 ㅠ
  죄송합니다. 8월이면 덜 바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이 더 늘어났네요.
  연재 속도 올리기가 참 힘드네요... 그래도 기다려주시고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세하가 무기까지 맞춤으로써 세하가 드디어 암광 10셋을 모두 맞췄네요. 
  아마 당분간은 전투씬이 없을 겁니다. 대신 다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갈 거예요. 슬비 이야기가 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우리 슬비와 세하가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는데
  이번 화를 쓰면서 두 사람이 결혼해서 부부싸움을 하는 걸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음... 심각할 것 같아요. 그래도 세하슬비는 진리입니다.

  다음 화에서 뵈어요~!


  P.S. 공홈에서 올리는거, 저번 화 명전 올라갔네요;; 감사해유.... 저도 보고 깜짝놀랐어요;;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2024-10-24 23:11:0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