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go
요우쇼우 2022-01-07 9
※ 개인적인 설정 및 날조가 존재합니다.
00.
이번에 빵집이 자리 잡은 곳은 프랑스의 가장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도 파리(PARIS)였다. 루시와 루시의 부모님이 파리에 자리를 잡아나가던 시기는 파리는 곧 다가올 – 아직 4년 정도 남은 거 같은데 말이다 - 전 세계적인 축제의 준비로 모두들 열광하고 있었다. 이 흐름 속에 섞이지 않았던 것은 이삿짐을 푼 다음날에 빵집을 오픈하는 준비를 하는 플라티니 가족뿐이었다.
어제 이사를 와 아직 파리의 거리를 어느 정도 익히기 위해 이곳저곳을 걷던 루시의 눈에 문득 ‘PARIS 2024’라고 크게 인쇄되어 있는 포스터들이 보였다.
포스터들은 문구만 같을 뿐, 포스터에 바탕이 되는 그림들은 저마다 다른 것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달리기를 하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 메달을 들고 환호하는 어느 흑인 여성의 모습, 에펠탑에 알맞게 오륜기가 걸려 있는 듯한 수채화 등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통일성도 없었고 게다가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크기마저 작기까지 했다. 홍보의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살짝 난감하지 않았나 싶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것이었고 루시 또한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루시는 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포스터가 너무 눈에 띄었던 탓에 걸음을 멈춘 것은 아니었고, 오래된 흑백 사진을 사용한 듯한 포스터 속의 사람이 쓴 월계관이 문득 루시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루시의 기억 속에 있던 ‘그 왕관’도 저 월계관의 형태와 비슷했다. 왕관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겠지만 지체 높은 어떤 사람이 썼던 왕관이었다.
저 포스터 속에 사람은 그래도 관을 머리에 쓰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루시가 기억하는 왕관은 저것과 정반대의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왕관의 주인은 티아라를 내려놓아야만 했었다. 그리고 떠나야만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작점은 거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시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왕관을 스스로 반납하고 떠나야만 했을 때의 그 심정을 제3자에 가까운 자신이 함부로 가늠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시는 어느 누군가에게 자그맣게 사과했다.
“제가 이렇게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할게요.”
물론 루시의 사과를 받아줄 사람은 당연히 지금 그 자리에는 없었다. 그래도 루시의 이 혼잣말이 전혀 무용지물이었던 건 아니었다.
아마 소녀는 지금 꿈을 꾸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파리라고 하는 곳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꿈...같은 걸 말이다.
01.
유니온 바그다드 지부. 요 며칠 동안 정말 별의별 일들과 사건이 일어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평화롭기는 하였다. 그 평화를 즐기는 방식도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 철수와 은하는 자신들의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고, 미래는 수현에게서 무언가를 설명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네 명의 사람들과 약간 멀찍이 떨어져서 앉아 있는 루시의 손에는 머그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든 달달한 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이번 평화에 대한 루시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이 달달한 음료수에 루시는 흠뻑 취해 있었다.
“아! 땀을 흘린 뒤에 마시는 라씨는 정말이지 황홀할 정도로 달콤하군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 루시는 그곳의 관리요원 카딤에게 대접받은 라씨를 벌써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일단락이 되었고 가벼운 임무 수행 이후의 잠깐의 티타임, 이런 것이 바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일까?
아니, 애초부터 달콤한 것은 이 세상의 진리였다! 그렇다 보니 달콤한 음식이나 음료를 먹을 때 루시는 행복하였다. 그리고 행복하면 저절로 루시의 얼굴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가 새겨졌다. 그 미소를 보며 어느 사이 다가온 카딤이 루시에게 말을 걸었다.
“입맛에 잘 맞으시나 보군요.”
“아, 카딤 씨!”
그러는 동시에 카딤의 시선은 앉아 있는 루시에게로 향했다.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는 루시의 머그컵을 보며 카딤이 한 잔을 더 권했다. 다만 라씨가 아닌 홍차도 괜찮냐면서 말이었다. 루시는 디저트와 즐기는 홍차도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그 대접을 받기로 하였다. 고급 홍차라면서 카딤이 보여준 상표에 루시는 반색했다.
“아, 이 홍차는...!”
“루시 양이라면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이 마셔도 보았고,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이기도 해요. 아, 파리...”
포장지 상자에 인쇄된 장미꽃 문양과 대놓고 써져 있는 파리라는 문구를 보며 루시의 눈가는 향수에 젖은 듯 촉촉해졌다. 그러면서 루시가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향 생각나네요...”
고향.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것. 그런데 카딤은 루시의 입에서 파리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어투가 나오자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도 이 땅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추억하고 있음에도,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파리를 고향으로 두면서 추억하는 것은 누가보아도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물론 카딤은 루시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언행의 차이가 왜 존재하는지 얼추 이해는 하고 있었다.
카딤이 루시를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티타임을 즐기기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카딤은 루시에게 최초의 위상능력자라고 여겨지는 루시의 본체, 어느 왕녀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카딤의 이런 열망은 처음에는 최초의 위상능력자로 각성한 그녀의 일생이 마냥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점토판에 적혀 있는 왕녀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간략하고 결과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4,000년 전 존재했던 소녀의 모든 것을 추론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루시가 지나가듯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왕녀는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원망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인에게 직접 말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적어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마침 좋은 화제 돌림도 되었겠다, 카딤은 본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루시에게는 파리가 고향이라고 여겨질지라도, 왕녀는 분명 이 땅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 애정이 단순히 얕지만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 모든 것을 걸며 카딤은 루시에게 감히 부탁했다.
“사실은 루시 양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이요?”
“예.”
사뭇 진지한 카딤에게 루시는 웃었다.
“그럼 이 홍차는 뇌물인 건가요?”
“뇌물이 아니라 호의라고 봐주시죠.”
“카딤 씨가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아요.”
루시는 카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 아이...자기 이야기를 제가 남들한테 떠들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하거든요.”
“그런가요...”
낙담하고 있는 카딤에게 루시는 쐐기를 덧붙였다.
“제가 막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고 다녔다고 화를 낼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요.”
점토판에 쓰여진 이야기, 그리고 루시에게서 느껴지는 성품 – 고대의 수메르 왕녀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낼 때,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자기 자신일테니까 – 을 통해 카딤은 왕녀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루시가 말하는 왕녀가 화를 낼거라는 포인트는 전혀 다른 거였나 보다.
“그 아이는 자신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이어서 루시는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저는 그 아이가 존경스러워요. 단순히 제가 본체의 분신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 아이는 무척이나 대단한 일을 한 걸요.”
“그럼 루시 양이 말하는 그 소녀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제 시점에서 보는 자신이 많이 우상화된 거라고 싫어하는 거예요.”
자신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마음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루시에게도 그것만큼은 자신의 감정인 것 마냥 계속 계승되고 있었다.
“그래도, 들려주십시오.”
하지만 카딤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그 당사자가 없는 이상, 그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전해줄 매개체는 루시뿐이었다. 그걸 루시 본인도 잘 알았다. 게다가 루시는 아무리 자신의 본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는 정말 힘을 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눈을 뜬 그 아이가 자신이 했던 일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자신 또한 본체의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면서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도움을 받았기에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그 죄책감이 온전히 ‘그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걸 인정하는 것이 많이 힘들 뿐이지. 인정하는 순간, 무척이나 착하고 고운 심성을 가진 ‘그 아이’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자책할 테니까.
아무튼 이 어려운 작업을 본체 없이 ‘혼자서’ 시작해야 하는 루시는, 문득 본체를 향해 투정을 부렸다.
“저는 사실 언젠가 눈을 뜬 ‘그 아이’가 자신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좋은 의견 교차가 될 것 같군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안 듣는 걸로...”
“마지막 투정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카딤은 웃어보였다. 이미 다 다짐을 해놓고 마지막으로 재차 확인하는 어투라는 걸 카딤은 알고 있었다. 그러자 루시는 못 이기는 척 두 손을 들더니, 이런 제안까지 하였다.
“그러면 팀원 전원과 감찰관 분도 불러야겠어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수록 좋으니까요.”
또, 외롭지도 않을 테고.
02.
재앙과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 중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온 것은 재앙인 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은 제대로 된 영양 섭취를 하지도 못하여 굶어 죽어갔다. 잠에 빠지는 순간이야말로 그것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이 사태의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정성껏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계시가 하나 내려왔다.
동서쪽에 악재의 원흉이 있으리라.
이 신탁을 들은 왕은 즉시 파견단을 꾸려 동서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렇게 출발한 파견단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견단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왕국에 있는 사람들은 동서쪽에 있을 거라는 원흉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파견단이 떠난 지 일주일 후, ‘그것’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왕국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왕국 내 사람들은 처음 보는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다만 용의 형상과 비슷하였고, 계시에서 저 용을 악재의 원흉이라고 표현했기에 ‘사악한 용’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사악한 용이 다가올수록 왕국은 급속도로 멸망을 향해 갔다. 저 사악한 용이 사람들을 영원한 잠에 빠지게 한 원흉임이 틀림없었다. 잠에 빠져가는 사람들은 점차 많아지고 나라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깨어 있던 극소수의 사람들 또한 사악한 용이 부리는 사역마 같은 괴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것들은 창, 활, 검과 같은 것으로 쓰러뜨리기에는 무척이나 강하였다. 석창 따위로 그들의 가죽을 뚫어 생채기조차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풍경에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서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면서 기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에 기적이 강림하였다.
한 소녀가 엄청난 힘으로 사악한 용의 사역마들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녀는 더 나아가 사악한 용의 앞까지 당도해 용을 땅 속 깊이 봉인시켰다.
왕국은 그렇게 한 소녀에 의해 구제받았다. 사람들은 소녀를 빛의 힘을 가진 사자(使者)로 떠받들며 다시 되찾은 평화를 굳건히 하기 위해 왕국 재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사악한 용은 심성마저도 그릇된 것을.
그렇기에 자신이 사는 세계에 깊은 애정을 가진 소녀에게, 소녀 스스로 재앙이 되는 영겁의 저주를 내린 것을.
자신이 사악한 용과 다름없는 무지막지한 존재가 되어버린 걸 인지한 소녀는 왕녀의 신분을 스스로 내려놓고 왕국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왕녀를 다시 되찾고자 사방으로 파견단을 보냈지만 왕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슬퍼하며, 왕녀가 자신들을 구원해준 이야기만큼은 남기기 위해 점토판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새겨나갔다. 그리고 왕녀가 언젠가 다시 자신들을 보러 와주는 것을 바라며 커다란 건물 하나 전체를 왕녀에게 바쳤다.
그럼 사람들의 소망과 다르게 왕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작은 왕국이 있던 자리에는 여러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하였다.
그러면서 4,000년의 시간은 흘러 왕녀의 이야기가 담겨진 점토판이 겨우 발견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세간에 ‘그나마’ 알려진 이야기.
03.
사악한 용이 당도하기 약 반 년 전만 해도 이 작은 왕국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이 시기의 어느 왕국이 다 그렇듯, 두 줄기로 흐르는 강 근처에 자리를 잡았기에 농토는 풍요로웠다. 매년 풍년이었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제 소임을 충실히 행하였고, 백성들 또한 왕족과 신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다른 왕국에서의 침입은 일절 없었고, 그렇게 평화는 지속되었다.
그 왕국에는 온 백성들로부터 어여쁨을 받는 왕녀 한 명이 있었다. 왕녀는 본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왕녀는 답답한 왕성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왕궁 밖을 좋아했기에 근위병들 몰래 왕성 밑 마을로 내려가곤 했다.
그 날도 왕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몰래 담을 타고 왕궁 밖으로 나왔다. 이제 커다란 관문은 다 넘겼다고 생각하는 왕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를 그렇게 가니?”
“...!”
왕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부른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그러면서 같이 난처한 표정도 지었다.
“오라버니...”
“어디를 그렇게 신나게 가려고 하니?”
그녀의 첫째 오라버니가 왕궁의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며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말이 없는 자신의 동생을 대신해 첫째 왕자가 막내 왕녀에게 질문했다.
“또 마을로 내려가려고 했니?”
“...”
“호위병도 없이 혼자 내려가는 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니?”
“그렇게 되면 매일 마을로 갈 수가 없잖아...”
그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첫째 왕자도 알고 있었다. 역시 이런 것도 여러 번 해본 사람이 더 잘 안다고...하지만 왕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동생을 꾸짖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천방지축이 태어났는지.”
“이 나라의 첫째 왕자님을 닮았나 봐. 어머니 말로는 오라버니도 현행범 수준...”
“현행범까지는 아니야!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선 시찰도 필요한 법...!”
“그렇다고 몰래 마을에 내려가는 건 안 되지?”
오히려 자신이 한참이나 어린 여동생에게 꾸중을 듣게 되니, 왕자는 이제야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자칫 잘못된 일을 겪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래.”
“다들 절 너무 오냐오냐 키우신다니까?”
“나는 물론 밑의 동생들도 다 같은 마음일 거야.”
“그래서 내가 왕성 안이 지겨운 거야.”
위험 하나 없고, 안전하기만 해서. 왕녀는 조금 스펙터클한 삶을 원했다. 이런 철없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동생은 좀 무방비한 감이 있었다. 이제 와서야 호위병을 데리고 오는 데에는 시간도 걸리고, 그 시간이 걸리는 틈에 동생이 도망칠 것 같아서 첫째 왕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오늘은 나도 같이 갈까?”
“받으셔야 할 후계자 수업은 어쩌고?”
“오늘 하루만 파업하지, 뭐.”
“아바마마가 우시겠다...”
“혼나더라도 너도 같이 혼나는 거야.”
“나는 왜...!”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막상 내려간 마을은 막내 동생의 말처럼 왕성 안보다 훨씬 재밌기는 했다. 시장에서 파는 온갖 과일들과 장신구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짝을 지어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신선했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왕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누나!”
만약 여기에 고지식한 왕성 관리인들이 있었으면 무슨 하대냐며 그 아이를 꾸중했겠지만 왕녀는 그렇게 고지식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하게 화답했다. 왕자가 보기에는 자기 동생은 저 무리들과 한 두 번은 아니고 여러 번 논 것 같았다. 어쩐지 흙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는 날들이 많다 했더니 이유가 다 있었다.
동생에게 말을 걸어주는 그 아이를 향해 왕자도 손을 같이 흔들어주었다.
“안녕?”
“옆의 분은 누구에요?”
“첫째 오빠.”
담백한 소녀의 설명에 아이는 왕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러면 이 나라의 첫째 왕자님이세요?”
“...?”
당연히 동생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이 아이들과 노는 줄 알았던 왕자는 – 자신이 마을을 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그랬기 때문에 - 순간 많이 놀라버려서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희, 내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니?”
“당연히 알죠! 이 나라에서 왕녀님 얼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많이 마을을 나갔다 왔다는 말과, 딱히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었다. 이 시대의 왕족들은 신들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기에 이렇게 보통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조차 크나큰 결례로 행해지던 시기였다.
아무리 허물려고 해도 태생적으로 있을 그 높낮이를 이렇게 거리낌 없이 허물어버리는 자신의 동생의 재주에 왕자는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시장에 있던 어른들도 자신의 동생만큼은 인간 대 인간으로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자신은 은근히 껄끄럽게 여겼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오늘은 말고 다음을 기약하며 놀자는 아이들의 무리를 뒤로 하고 왕자는 자신의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적, 많았구나?”
어찌 보면 이건 자신의 태생을 한없이 낮추는 그릇된 행동이었다. 혼자서 왕성 밖으로 나가는 것 – 그것은 무료함을 달래지 못한 잠깐의 이탈 행위였다 - 과는 달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체제를 충분히 뒤흔드는 것이기에 분명하게 혼내야 할 사안이라고 왕자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까처럼 그냥저냥 넘어가지 않을 작정으로 왕녀의 이름을 엄하게 불렀다.
그런데 왕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똑같으니까.”
왕자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왕녀가 재차 설명해주었다.
“이 왕국이 이렇게나 평화로운 건 아버지의 노력도 있지만, 저 사람들의 노력도 그만큼 있는 거야, 오라버니.”
“...”
“각자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있어. 그렇기에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지면서 살고 있어.”
그렇기에 뜻깊은 것이고.
혼자서 이룩할 수 있는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속뜻을 그제야 이해한 왕자가 자신의 동생에게 말했다.
“너는...특별하구나.”
겨우 이 말만 하고서 그 어떤 해결책도 주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낙담하고 있는데 왕녀는 그조차도 자신을 ‘그나마’ 이해해주는 구원자를 찾은 것과 같았나 보다.
“틀린 생각이라고 안 해줘서 고마워.”
“...!”
“보통은 다르다고 생각 안 하고 틀리다고 무작정 비난하거든.”
왕녀는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이해는 못 했어도 비난하지는 않았다고.
감회가 될 수는 있지만 비난을 한다고? 그게 가능키는 할까. 왕자는 의문이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자신의 막내 동생은 나이에 맞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새가 지나치게 성숙했다. 아니, 이걸 성숙하다고 하는 정도로 과연 끝나지는 것이기는 할까?
왕자는 그 복잡한 생각은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하였고, 다른 화제로 돌리기로 하였다. 이를 테면, 아주 그냥 잘 맞는 점(占)과도 같은 동생의 ‘꿈’이라던가.
“요 근래 재밌는 꿈 꾼 건 없니?”
“그거 재밌는 꿈 아니야...나, 놀리는 거지?”
왕녀는 왕자의 말을 굳이 정정해주었다. 왜 왕자가 이때까지 막내 동생이 꾼 꿈이 ‘재밌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막내 동생이 꾼 꿈은 도저히 이 세상에서 없을 것 같은 공상의 어디 한 부분 같았기 때문이다.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 바벨탑과 같은 철탑이라든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무당벌레라든지.
그 중 몇 개는 현재의 시대의 아주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꿈이기는 했다. 그리고 거기서 말하는 왕국의 미래는 평화 그 자체였기에 막내 동생이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길한 징조이기보다는 오히려 유쾌한 징조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것이 ‘재밌는 꿈’이라고 명명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재밌는 꿈’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계속 밝았던 왕녀의 얼굴이 이번만큼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끝내 입을 다물었다.
최근의 왕녀는 뒤숭숭한 꿈만 꾸었다. 알 수 없는 검은 형체가 점점 용의 형상을 갖추더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꿈. 이걸 섣불리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그간 꾸었던 꿈과 내용들이 너무 상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시간이 좀 걸린 탓이었다. 자신이 ‘예지몽’을 꿀 수 있고 ‘예감’이 예리하다는 걸 왕녀는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나이였다. 제 아무리 첫째 왕자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왕녀는 아직 많이 어린 나이이기는 했다.
게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붕괴 – 용이 등장하는 꿈은 대부분 세계가 멸망하고 끝이 났다. 마치 그것을 보는 자신의 의식마저 끊기기라도 하는 듯이 - 를 믿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작용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들이 그러한 ‘꿈’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것만큼은 왕녀 자신이 꼽는 자신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 자신이 미래를 예지한다는 확정적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 생전 왕성 안에서 과한 보호를 받으며 석창조차 쥐어본 적 없던 아이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위압감 앞에 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짐도 하고 각오도 하는 것을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었을까?
만약 했다고 하더라도, 곧 들이닥칠 용의 습격을 왕국의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용에 대한 대비 자체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재앙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격이 다른 이계의 존재였다.
04.
첫째 왕자와 막내 왕녀의 외출로부터 약 반 년 후, 사람들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점토판에서 표현하는 ‘재앙’의 전조였다.
그리고 사악한 용이 자신의 모습을 유유히 드러냈다.
이계의 존재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대부분 아득한 ‘공포’일 것이다. 대부분의 왕실 사람들은 그러했다. 왕녀도 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궁 발코니에서 그 용을 처음으로 본 왕녀는 자신이 꿈에서 본 장면과 똑같다는 것에 경악했다. 그 후로 들었던 마음은 동서쪽에 보낸 파견단에 속해 있던 첫째 왕자에 대한 애도였다. 저것의 압도적인 존재로 보건대, 그들이 평온한 죽음 따위 겪지 못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용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왕성에서도 사악한 용의 권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왕국의 멸망은 이미 기정된 사실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힘만을 가진 이들이 저 용을 타도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려고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신에게 기도를 했지만 나아지는 사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점차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자신의 주변을 보면서 왕녀는 점차 다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바뀔 법도 한데 왕녀는 그러지 않았다. 파견단 신분으로 동서쪽으로 떠나기 직전에 자신의 첫째 오라버니가 했던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불길한 꿈을 또 꾸었기에 왕녀는 왕자에게 파견단에 들어가지 말 것을 부탁했다. 보기 드물게 울며 떼쓰는 자기 막내 동생에게 왕자는 언젠가 동생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말했다.
-똑같다면서.
-...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은 혼자서 유지되지 못한다고 네가 그랬지?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굳건히 해내가고 있기에 유지된다고. 왕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자는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자신이 파견단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죽어가고 싶어.
살아 돌아올게, 라는 말은 애석하게도 해주지 않았다. 왕자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듯 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
첫째 오라버니처럼 무기조차 잘 다루지 못하는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왕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기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자신의 죽음만은 면제해달라는 옹졸한 기도가 아니다. 그토록 이기적인 기도를 이 상황에서 올릴 정도로 왕녀는 아직,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왕녀는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인 자신의 혈육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저항이라도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런 저항이라도 하기 위한 티끌만한 힘이라도 달라고. 검을 쥐고 어떻게든 휘두를 수 있는 근력이라도 달라고.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목숨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게 해서 남은 이들을 모두 지켜만 낸다면, 자신은 더 이상 거릴 것도 없다고.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05.
“그렇게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루시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루시의 그 모양새에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던 루시 주변의 사람들이 그제야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굉장한 이야기군요.”
“그러게요. 굉장한 이야기예요.”
제일 먼저 감상평 같은 것을 한 건 카딤이었다. 이에 세린도 카딤이 했던 표현을 똑같이 쓰면서 동의했다.
루시가 마저 덧붙였다.
“‘그 아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사랑했어요. 그렇기에 그토록 간절했던 거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걸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사람은 적어요.”
“제 본체도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 점만은 명확히 해야만 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생각과 행동을 동시에 하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전자가 루시 본체, 즉 왕녀가 생애의 전반적으로 가졌던 것이라면 후자는 그 고뇌의 끝에서 겨우 행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본인 스스로가 아닌 주변의 도움, 아니 희생을 알게 되면서.
왕녀는 제각각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이 그 때 당시에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데에는 다소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왕녀는 그걸 두 번째로 후회했다. 후회를 했다는 루시의 설명에 미래는 의문을 표했다.
“후회를 해? 사악한 용을 쓰러뜨렸잖아.”
“좀 더 빨리 힘을 각성할 수 있었는데, 라고 후회한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지켜낸 사람들이 있지 않나.”
김철수의 반문에 루시가 오묘하게 미소 지었다.
“김철수,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조금 이상하네요.”
“그런가?”
“아무튼 김철수, 당신이 한 말이 옳아요. 그 아이는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지켜냈어요.”
하도 못해 발악만이라도 하게 힘을 달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사악한 용을 영구에 가까운 봉인을 하게 만들었다.
루시 본체의 힘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굉장히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사악한 용을 봉인한 것만으로 이 이야기는 오롯이 끝나지 않는다.
“이 부분이에요.”
오히려 루시는 다시 한 번 이 부분을 강조했다.
“이 부분이, 제 본체가 자신은 실패했다고 여기는 부분이에요.”
끝나지 않을 악몽이 지나간 후에, 역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06.
역병은 땅을 오염시켜 경작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였고, 물을 메마르게 만들었고, 공기 중에 떠돌면서 사람들을 병에 걸리게 만들었다. 과연 이것을 역병이라고 표현이나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나마 ‘역병’이라고 불렸던 것은 사악한 용과 같이 도저히 이 세상의 논리 그 자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왕녀는 자신이 역병의 근원지임을 반 년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 직후, 왕녀는 사악한 용의 조롱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쳤다.
‘역시, 사악한 용이라는 거군요.’
심성도 사악하기 그지없어요. 왕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악한 용은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게 짓밟힌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봉인에 대한 발악으로 왕녀에게 영겁의 저주를 걸었다. 왕녀가, 왕녀가 사랑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세계를 부수는 재앙이 되라는 저주를 말이다.
가장 먼저 땅이 황폐화되었다.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적어졌다. 강을 메마르게 했다.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이 없어졌다.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은 공기 중에 떠도는 ‘역병’으로 인해 죽어가게 되었다.
왕국 내의 화장터는 인산인해였다. 맑은 날씨가 여러 날 계속됨에도 화장터의 검은 연기로 인해 사람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자신이 어떻게 지켜낸 것들이 자신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왕성의 발코니에서 지켜보던 왕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이런 지경으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 때, 신에게 발악으로 올렸던 기도문이 잘못 되었던 걸까?
어떻게든 자신 주변에 남은 소중한 이들을 모두 지켜만 낸다면, 자신은 더 이상 거릴 것도 없다, 라고 기도했었다.
그게...잘못이었던 걸까?
이내 왕녀는 고개를 도리질을 쳤다.
그 기도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호기였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지.
자신이 ‘이 힘’을 잘 운용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에 특화인 이 힘을 적절히 사용했다면 사악한 용의 저주 따위, 자신의 몸 주변을 보호막을 치는 방식으로 진즉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왕녀는 그렇게 세 번째 후회를 하였다.
자신이 미숙한 탓에, 무고한 사람들이 또 희생되었다.
이 힘이 왕녀의 몸에 깃들었을 때, 왕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마저도 넘쳤었다.
하지만 왕녀에게 깃든 이 힘은 여러모로 굉장했지만, 치유 능력만큼은 없었다. 자신의 몸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남을 치료해주는 그런 이타적인 행동만큼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간호라도 하기 위해 다가기도 못하였다. 자신이 그 ‘역병’의 근원이었으니까.
진퇴양난의 상황 속, 왕녀는 어느 날 자신이 왕성 안에서 늘상 쓰고 다녔던 왕관만을 방 안에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편지 하나조차 남기지도 않았고, 그녀의 주변인들에게 언질조차 없었다.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혀졌다. 사악한 용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왕녀의 행방불명은 당연하게도 이들에게 크나큰 사안이었다. 왕은 파견단을 즉시 꾸렸다.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파견단에 자원하였다. 이렇게 적지 않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왕녀의 행방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향간에서는 이런 소문까지 떠돌게 되었다. 왕녀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건, 이미 왕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 추측이 점차 사실로 여겨지게 되면서 왕녀에 대한 추도비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왕녀의 사원마냥 여겼는데, 이 건설을 추진한 인물은 왕녀의 또 다른 혈육이었다. 건물은 오랜 시간 걸려 만들어졌고, 건물이 완성되자 왕녀의 둘째 오빠였던 당시 왕이 추도문을 읊었다.
추도문의 마지막 즈음, 왕은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고 목맨 목소리로 끝까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당신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입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던 왕은 자신의 동생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렸다.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러니 끝끝내 혼자였을 그 마지막이 많이 힘들었을 동생에게 던지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니, 향수에 젖거든 언제든 주저 말고 다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 가슴 절절한 문구 또한 점토판에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07.
왕녀는 무작정 동서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약 일주일 동안 쉬지도 않고 열심히 달린 끝에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자신의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지한 후에야 비로소 왕녀는 웃었다.
‘이 곳이라면 아무도 못 찾겠지...’
쓸쓸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나았다. 이상하게도 자신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의 영향권 밖이었다. 똑같이 오염된 물과 음식을 먹는 데에도 자신은 탈조차 나지 않았다. 똑같이 오염된 공기를 마셨어도 숨을 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걸 인지했을 때 왕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처럼 더 많은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독함 쯤이야.
왕국을 떠난 지 반년 쯤, 왕녀, 아니 소녀는 문득 이런 계시를 받았다. 아마 자신에게 이 힘을 준 어느 존재에게 받은 계시인 것 같았다.
그 계시 – 사악한 용이 먼 미래에 다시 부활하려고 한다는 계시였다 - 가 마냥 낙관할 것만은 아니었다. 소녀는 계시를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자신을 봉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을 끝이 보이지 않는 수라에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소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존재부터가 ‘기적’이었다. 이 기적이 자신과 같이 계속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살아가는 세계를 지키기 위한 – 차마 구하기 위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었다 - 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왕녀는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 하나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지만 그래도 최근부터는 여러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향과는 동떨어진 파리라는 곳의 거리를 이곳저곳 걸어 다니는 꿈 같은 것 말이다.
그랬기에 마냥 적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콧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즐거운 꿈들뿐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신기한 것들 투성이였으니까.
08.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모든 이야기를 마친 루시는 속이 후련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본체가 전하고 싶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는지도 궁금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 ‘루시 플라티니’로서의 감상평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야 뭐...괜찮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해해줄 것이었다.
먼저 감상평을 남긴 것은 이 이야기의 시작을 만들어낸 카딤이었다.
“우선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루시 양. 그리고 그 소녀에게도.”
“카딤 씨...”
“제 예상보다도 더 굉장한 분이셨군요.”
카딤의 목소리는 순수한 감탄뿐이었다. 뒤이어 세린도 감상평을 하나 작게 내놓았다.
“그 분이 왜 최초의 위상능력자로 각성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요.”
현재의 유니온에 소속된 클로저들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을 이미 충분히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미래는 감찰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철수는 아직도 루시의 이야기에 대한 전율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보였다.
처음 이야기의 시작부터 가만히 경청만 하고 있던 은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루시를 향한 질문이었다.
“나도 하나만 질문할게, 루시.”
“무엇인가요, 은하 씨?”
“루시가 생각하는 루시의 본체는 어때?”
“에? 무슨 말씀이신지...”
질문의 의도를 영 찾지 못하는 루시에게 은하가 조금 친절하게 풀어주었다.
“네 본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말이야.”
“...꽤 어려운 질문이네요.”
난감하기도 하고요. 은하는 이대로 루시가 자신에 대한 질문을 답을 마저 안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루시가 웃으며 말하길,
“아마 저도 여러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을 할 거예요.”
“...”
그렇게 얼렁뚱땅한 대답. 대답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다. 루시의 고도의 대화 기술에 은하는 살짝 감탄했다.
하지만 루시는 본체에게 평가는 아니더라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 딱 하나 있었다.
“저는 본체에게 따로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냈다는 포인트는 아니었다. 그것도 충분히 예의를 표하며 감사를 전할 것이기는 했지만, ‘루시 플라티니’이기에 전해야 하는 또 다른 감사의 말이 있었다.
“이 멋진 세상에서, 여러분들과 같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서요.”
Comment : 루시와 루시 본체의 이야기. 개인적으로 루시라는 캐릭터보다는 최초의 위상능력자라고 하는 루시 본체에게 더 끌리더라고요. 루시 본체와 관련한 스토리는 아직 많이 풀린 것도 없어서(오디오무비와 루시의 에픽 초반 언급뿐) 루시 본체의 설정(가족 관계, 성격, 가치관 등등)은 대부분 글쓴이가 임의로 설정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클로저스 글이라서 부족한 점이 있네요. 루시의 본체가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이 세상(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강한 열망이지 않았나 하는 주제에서 이 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잘 표현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모전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 원하시는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