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니름! G타워 클리어 이후 감상 요망] 요원 오세린의 우울 - 전편
쿠드폴 2015-02-01 3
그 날의 강남 하늘도 이렇게 화창했던 걸까.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변해가려하는 기억의 끝자락을 애써 붙잡으려 하며, 오세린은 G타워의 옥상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서 멍하니 데미 플레인이 사라져 간 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강남을 복구하러 모두가 하나되어 힘을 쏟는 때.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모토 아래 밑으로는 고등학생, 위로는 유니온의 간부까지 하나가 되어 미증유의 위기를 돌파해 나간 후의 이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게끔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유니온의 B급 클로저 오세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흔히들 괴로워 하는 데스크 업무도 데스크 업무지만, 최근 개화하기 시작한 차원종 지배능력이 여러 번의 훈련을 거쳐 어느덧 마나나폰 까지도 지배할 수 있게 되자, 일손으로서 현장에도 불려다니게 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나나폰은 조종하는 스캐빈저가 문제였지, 단일 개체는 엄청나게 게으르고 느긋한 녀석이라서 오세린이 잠시 떨어진다고 해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햇빛이나 쬐곤 하는, 그런 보기드문 순한 계열의 차원종인데다, 힘은 세서 복구작업에 이용하면 충분히 누구보다도 큰 힘이 되는 녀석이었다. 어디까지나 특경대 요원들 같은 일반 인간에 비해서, 였지만.
그리고 지금은 쉬는 시간.
조금씩 익숙해 졌다곤 하지만 아직 마나나폰 같은 C급 차원종을 장시간 지배하에 두기에는 무리였기에,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50분 지배에 10분 휴식, 그리고 점심시간은 2시간을 반드시 엄수하기를 데이비드 국장님에게 전해들은 대로 충실하게 지키는 오세린이었다. 또한, 클로저 1명을 꼭 동반하고 다닐 것. 역시 사고를 대비해서다.
“여어, 오세린이. 오늘도 여전히 예쁜데?”
“서, 선배님?”
그리고 오늘 자신을 담당하는 클로저가 된 오세린의 선배 – 정식요원 제이가 옥상의 문 근처에서 오세린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오늘은 좀 많이 피곤했나본데?”
“아하하….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쌓였나 봐요. 여기서 바람을 쐬고 있자니 멍해지네요.”
“이런이런, 귀여운 후배님이 피곤해지면 선배로서도 마음이 아프지. 자, 여기 내 특제배합 건강 드링크라도 어때?”
그러면서 오세린의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 걸터앉은 제이는, 항상 휴대하는 힙색에서 한 병을 꺼내 오세린에게 넘겨 주었다.
“저기…. 선배님, 이 음료수 말인데요, 왜 이렇게 색이 용암같이 붉은거죠?”
“오, 눈치 챈거야? 이걸 보면 그것 만으로도 용암과도 같은 힘을 낼 수 있으니까 특별히 신경써서 제작했단 말이지! 하하핫, 오세린이 눈썰미가 좋은데?”
“아하하…. 네에….”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지만,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제이의 말에 오세린은 눈 딱 감고 마셔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 자신을 지키며 시가지를 누비던 그의 뒷모습을 본 이후, 오세린은 그가 설령 사약을 내린다고 해도 얼마든지 들이킬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맹세한 터였으니까.
꿀꺽꿀꺽.
약간 점액질과도 같은 묘한 느낌이 목을 지나갔지만, 오세린은 묘하게도 다 먹고 나자 몸 안에서 힘 찬 기운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제이의 전투를 모니터링 할 때 가끔씩 들려오던 ‘그래! 이 맛이야!’ 같은 말을 들을때마다 관리 요원 유정씨와 함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지만, 실제로 마셔보자 ‘그렇구나, 이런 느낌이라면 절로 그런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어’란 생각이 든 오세린이었다. 역시 뭐든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고마워요 선배님. 저도 이걸 마시니까 기운이 좀 나는거 같아요.”
“천만에, 귀여운 후배가 침울해 있는데 선배로서 가만 있을수는 없지 않겠어?”
“아이 참, 저 안 귀여워요. 저번에도 그랬지만 제가 호박인건 저도 알아요. 김기태 요원님이 항상 그랬….”
그러면서 조용히 말을 끊어버린 오세린의 분위기에서, 제이는 그녀의 분위기가 침착해진 이유를 얼핏 엿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나?”
“아, 아뇨! 아니예요. 전 그냥 지쳐서….”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이 본능적으로 오른쪽 위로 향한다더군. 알아두는게 좋아.”
“아으으….”
오세린은 다 들켰다는 걸 깨달은 건지, 가볍게 쓰고 있던 베레모를 양손으로 누르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써봤지만,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가려질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짧게 한 숨을 내 쉬었다.
“네, 선배님 말이 맞아요. 한 때 상관이었던 그 분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빌딩 밖으로 내민 발을 살짝 뒤로 빼면서 양 무릎을 세우고, 무릎을 감싼 채 거기에 고개를 살포시 올리면서 오세린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세린이. 내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녀석은 자기자신만 알고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데다, 종국에는 차원종에게 들러붙은 쓰레기 같은 녀석이었어. 알고 있지?”
“…네. 저도 선배님과 함께, 이번 사태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었으니까요. 모를 리가 없죠.”
“그런데도 아직도 그 녀석을 생각하고 있다, 라.”
제이는 힙색에서 자신이 항상 마시던 드링크를 꺼내 한 모금 마시고 난 후, 가만히 세린과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데미 플레인이 사라져 간 그 곳을.
“선배님, 한 마디도 안 하시네요?”
“음? 뭘 말이지?”
“이렇게나 혼나고, 배신당하고, 버려지고, 그리고 사라졌는데도 아직도 그 분을 떠올리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하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역시 제가 쓸모없는 클로저니까 실은….”
“오세린이. 내가 말했지? 다음부터 나와 애들 앞에서 자신이 쓸모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아….”
옆에서 가만히 자신을 타이르는 제이의 말에, 오세린은 아차,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심한 자신을 혼내고 싶어졌다.
“죄송, 해요.”
“자신의 역량을 파악하는 건 클로저들에게 아주 중요해. 그걸 파악하지 못 한 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오기나 만용을 부리는 순간 목숨은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전우들을, 나는 수십, 수백명을 보곤 했지.”
“그 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제이는 드링크를 홀짝이며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세린은 그걸 바라보고 나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야, 그 두려움에 취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야. 사람이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만큼, 사고가 그걸 벗어나지 못 한채 제한 당해버리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건 주박으로 말이야. 이것 역시, 클로저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역시, 선배님은 대단하시네요. 전 그런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니 뭘, 이 말은 사실 나도 윗 사람한테서 들은 거라 말이야. 터미네이터로부터 말이지.”
“터미, 네이터요?”
오세린이 옛날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제이는 손사래를 쳤다.
“알려고 하지 마. 그리고 세하 그 녀석한테는 내가 이 말 했단 건 비밀이다.”
“이세하 요원말인가요? 그 아이가 무슨….”
“에잇, 여하튼 말하지 말라고. 내가 곤란한 사태가 되니까.”
“아, 알겠어요. 선배님….”
그렇게 오세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는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귀여운 후배를 향한 설교는 이 쯤으로 해두지. 그리고 내가 오세린이, 네가 김기태를 떠올리는 거에 아무 말도 안 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
“이유요?”
“그래. 지금의 난 이번 사태가 된 이후에야 처음으로 그 녀석을 만났지만, 넌 이전부터 주욱 그 녀석의 부관이었지?”
“네, 그 분의 부관으로 들어간 지 꽤 시간이 흘렀었어요.”
“그렇다면 그건 당연한거야. 누구에게도 사람이 옛 기억을 떠올리는 걸 제지할 권리는 없지. 무언가를, 누군가를 되돌아 보는 그 행동에 선악은 없어. 그 대상이 무엇이던 간에 말이야.”
오세린은 그런 말을 하는 제이의 옆 모습에서 지금도 그가 자신과도 같은, 아니. 자신보다도 더한 괴로움과 쓰디쓴 기억을 곱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아마, 최고간부인 데이비드 국장님보다도 더할지도 모르는.
“그것도 체험하신 건가요, 혹시?”
“후우…. 후배님은 역시 눈썰미가 좋단 말이지. 하지만 대답은 노 코멘트로 해두겠어. 어른에겐 아이들이 모르는 어른의 비밀이 있는 법이니까.”
“우후후, 저도 어른인걸요? 그럼 괜찮지 않나요?”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뭐 됐어, 후배님을 애 취급한 건 아니야. 방금 말은 적어도 오세린 요원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거 같군. 취소해두지.”
“아하하, 부끄럽네요.”
어느샌가 병을 비우고 난 후 옥상에 놓여져 있던 쓰레기통으로 병을 휙 던져버린 제이는, 그대로 옥상에 드러누운 채 오세린과 함께 하늘을 쳐다보았다.
화창한 하늘. 온순한 바람. 살짝 차가운 기온.
이런 신서울의 도시에서 이런 자연의 기분을 만끽하는게 과연 얼마만 일까.
제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좋은 분이셨어요.”
그리고, 마치 조심스럽게 비밀을 전하는 듯한 조곤조곤한 귓속말과도 같은 한 마디.
그 말이 옆에서 여전히 무릎을 껴안은 채 신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오세린의 한 마디였다는 걸 깨달은 제이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들어주지, 후배님의 추억을.”
“…고마워요. 그럼 잠시만, 제 추억 이야기에 함께 해 주세요.”
“얼마든지. 시간은 많으니까.”
그렇게 오세린과 김기태의 옛 이야기를, 제이는 조용히 음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