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J-
보리수나무 2015-01-31 1
처음으로 죽였던 차원종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근육투성이의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6개의 검은눈이 무거운 빛을 띄던 놈이었다.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차원종을 도륙하던 동료의 모습도 기억한다.
정리하지 못해 거칠게 난 수염과 피로에 찌든 눈이었지만 매서운 안광을 발하던 중년의 클로저
헬멧사이로 갈라진 입술밖에 본 적이 없지만 항상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던 특경대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압도적으로 차원종을 도륙하던 아름답게 빛나던 여성.
그 모두를 기억한다.
음울한 도심, 시끄러운 총소리와 초연, 보이지 않게 울리고 격돌하는 위상력, 때때로 비명 그리고 고함소리
나를 영웅이라고 말해주던 사람들, 나를 괴물이라고 말해주던 사람들, 그저 아무말 없이 두려워하던 사람들..
내질러지던 주먹도, 후려쳤던 차원종의 무기도, 무너지는 건물도 모두 기억하는데
어째서
그 시절의 내 모습은...기억이 나질 않는지....
싸움이 싫었다. 전쟁이 싫었다. 차원종이 싫었다
어째서 나냐고, 어째서 이렇게 해야하냐고 남몰래 울던 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증오에 불타고 유실에 화를내며 분노하던 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그 동료들과 별 시덥잖은 농담에 미소짓던 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싸움이 싫었다. 전쟁이 싫었다. 차원종이 싫었다
난...왜 차원종을 싫어 했었지...?
아 그래...내가 전쟁에 나갔던 이유. 내가 싸움에 나섰던 이유
맞아 나는....차원종에게...
"제이 씨?"
"...아...?"
"제이 씨. 일어나세요. 역삼동 골목길로의 출동명령이 떨어졌어요"
J...?
관리요원,유정씨....
출동........
............!!
꿈이 남겨놓은 상념을 흘려버리고 그 자리에 재빨리 이성을 채워놓는다.
순간적으로 현실파악을 못할 정도였다니..
아무래도 새로 블랜딩한 수면제가 생각보다 효과가 강했던 모양이다
"이미 다른 얘들한테도 출동대기를 지시했어요. 제이 씨가 합류하면 바로 출발할 겁니다. 서두르세요"
"알겠어 유정씨 조금만 기다려. 바로 합류하지."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몸을 푼다.
자면서 꽤 옛날일을 꿈 꿔버린것 같다. 오랜만에 기억 속의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나쁜기분은 아니 었지만
"그래도...역시 그 때 내모습은 기억나질 않는구만."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것은 힘 뿐이니까.
하지만 기억나질 않는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내가 했던 그날의 결심, 그날의 분노, 그날의 슬픔 모두가
그저 타인의 이야기처럼 떠오른다.
그녀는 내게 나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었다.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들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유년기는 끝났고, 슬슬 젊다는 소리도 어색해지는 나이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은, 나도 얘라는 거구만."
뚜둑거리는 무릎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다시 돌아온 나의 전쟁터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