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해서 - 2 -
피누스 2015-01-29 2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을 보거나 느끼지 못했으며 그 모습을 보고도 잠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아 있었다.
말 그대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그 존재를, 이질감을 가장 처음 눈치 챈 것은 서지수였다.
차원종들이 물러난 유럽의 대지 위에서 소년은 홀로 오연하게 서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멋이 있는 검은 쇼트 헤어.
핏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하다 못해 새하얀 피부.
모든 색깔을 덧칠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깊고 질퍽한 분위기의 눈동자.
기묘한 문양이 음각된 검붉은 코트에 푸른 바지를 입은 소년.
나이는 인간으로 치면 십대 중 후반 정도일까.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 소년은 기묘한 분위기를 흘리며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어느 순간 서지수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 역시 승리에 기쁨에서 깨어나 이 공간자체를 지배 하는 것 같은 묵직한 느낌을 깨달으며 소년의 존재를 인식했다.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붉은 기운.
그것은 틀림없는 위상력이었으나 클로저 요원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종의 그것과 동일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느껴지는 위상력의 양으로는 겨우 B급의 차원종 정도였지만 소년이 내뿜는 기묘한 분위기에 그곳에 있는 인간들은 조금전까지 전투의 승리에 환호하던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단 한명 그녀, 서지수를 제외하고는.
“굉장하더군. 우리 이름 없는 군단의 최강의 군단장이라는 헤카톤케일과 대등할 정도의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구의 그것도 서지수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의 언어였다.
“너는 누구지?”
서지수의 목소리는 전형적인 여성의 고음이지만 자신감에 찬 당당함과 알 수 없는 기백이 담겨 있었다.
삼일에 거친 대 접전으로 인해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지만 서지수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무기를 들어 소년이 있는 방향으로 겨누었다.
“내 이름은 라그나마타. 서지수 네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로 하자면 허무(虛無)란 뜻이지. 그리고…….”
소년, 라그나마타가 허공에 손을 휘젓는 순간 서지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라그나마타의 손끝에 작은 차원문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상급 차원종은 고사하고 최하급 차원종도 넘어오지 못할 정도로 작은 차원문이었지만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단순히 손을 휘젓는 동작만으로 차원문을 연 그의 능력에 서지수는 경악하면서도 감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에 잠겼다. 차원문을 일으키는 저 능력은 지근까지 본 어떤 차원종에게서 본 적이 없는 능력이다. B급 이상의 차원종이 하위 차원종들을 소환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떠한 원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위상 변곡율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차원문을 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의 모습을 한 차원종은 가벼운 손짓만으로 작기는 해도 차원문을 연 것이다.
만약 저 존재가 자신의 의지로 더욱 큰 차원문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문제는 커진다. 그렇다면 저 존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처리해**다는 결론에 그녀는 다달았다.
라그나마타는 차원문에 손을 넣었다 잠깐의 틈과 함께 다시 손을 꺼냈다.
그 손에는 차원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그림자를 잘라 만들어 낸 듯 한 명암 없는 검은 검이 들려 있었다.
“너희가 차원종이라고 명명한 이름 없는 군단의 1군단장이자 총 사령관직을 가지고 있지.”
그의 손에 들린 입체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칠흑의 검에 붉은 위상력이 감돌며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을 서지수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향해 겨누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미인과 기묘한 소녀. 그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장면에 주변에 있던 클로저 요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묵을 유지했다.
“서지수. 이 차원 최강의 인간이자 우리의 최대의 적이여. 내 것이 되라. 그렇다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주마. 방금 전 네가 싸운 헤카톤케일조차 가볍게 짓누를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
라그나마타의 말에 침묵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보며 라그나마타는 말을 이었다.
“그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 영겁의 시간동안 내 겉에 있어라.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두 번 다시 이 차원에 대한 침공이 없을 거라 약속해 줄 수도 있다.”
“하아.”
라그나마타의 말을 들은 서지수는 검을 내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력하기 그지없던 최초의 S급 차원종 헤카톤케일과 그 군대를 쓰러트린 순간 나타난 새로운 적. 본인에 말에 따르면 차원종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인간의 모습을 한 차원종의 등장과 그에 의한 영웅 서지수에 대한 기묘한 요청에 주면의 클로저 요원들은 침을 삼기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존재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녀의 선택에 따라 차원종과의 전쟁이 막을 내릴 수도 있는 순간이며 저 요청을 거부하더라도 저 차원종을 쓰러트리기만 한다면 차원종과의 전쟁은 이긴 것과 마찬가지.
역사를 **봐도 우두머리를 잃고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제대로 된 길을 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일촉**의 상황을 깬 것은 서지수였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프로포즈네. 거절이야.”
“……이유를 물어 봐도 될까?”
서지수가 자신의 제한을 받아들일 것이란 자신이 있었는지 그녀의 대답에 라그나마타는 조금이지만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에 서지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원래 청혼을 할 때는 조건이나 직위 같은 걸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게다가 차원종이 되기는 싫기도 하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힘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음……. 그런가.”
서지수를 말을 들은 라그나마타는 눈을 감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눈을 뜨고는 보석같이 빛나는 칠흑빛의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다. 한눈에 반했다.”
“고백 고마워. 하지만 난 아직 너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가 별로 그런 감정도 없고 무엇보다 우린 지금 적으로 만났잖아?”
“그런가. 그럼 이렇게 하지.”
그 말에 라그나마타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논리에 따라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의 부탁을 듣는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무엇보다 난 이미 충분히 지친 상태라고? 이런 날 이겨도 나보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데 말이야.”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어떨지 몰라도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 말에 라그나마타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네가 지친 상태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난 소규모 차원문을 통해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차원문의 크기에 맞게 대부분의 힘을 봉인하고 있는 상태지. 지금 내 위상력은 일개 장수급, 너희들이 매긴 등급으로는 B급 정도에 불과하다. 이정도면 타당한 선이 아닌가?”
그 말에 서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저 소년은 조금 전의 괴물, 헤카톤케일보다도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겨우 저 정도의 위상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의문점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답으로 인해 그녀는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렇네.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
“다른 자였으면 몰라도 네 물음이라면 무엇이든지 답해주지.”
“여기서 만약 네가 죽는다면 너희 차원종, 네가 지칭한 이름 없는 군단은 어떻게 되지?”
“나는 이름 없는 군단 안에서 강한 구심력이자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방금 전 헤카톤케일이 죽음으로 2군단장이 된 아스타로트를 비롯한 여러 군단장들이 자신들이 더욱 큰 권익을 얻기 위해 내분을 일으킬 확률이 적어도 8할. 그렇지 않아더라도 최소 10년 이상은 지금같은 지구로의 대규모 침공이나 활발한 활동은 불가능하겠지.”
“그래? 그것만 해도 어디야. 너한테 이기기만 하면 우리 인간은 너희들에게서 10년 이상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잖아?”
“…….”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지.”
자신의 승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이 활발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서지수.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둘의 시선이 교차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위상력을 방출하며 몸을 날렸다.
둘의 신형이 사라지고는 잠시 방금까지 있던 곳에서 족히 수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둘의 검이 격돌했다.
위상력을 방출하는 것으로 얻는 추진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두 인영. 둘의 무기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상대를 향해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앗!”
헤카톤케일과의 접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위상력을 사용했지만 아직 고갈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상대도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몸 안에 잠재된 위상력까지 모조리 끌어올린다면 장기전은 무리더라도 단기전으로 밀고 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서지수의 판단.
그녀는 남아있는 모든 위상력을 개방함으로서 지금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전력을 발휘시켰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푸른 광휘, 위상력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평상시의 이할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힘이지만 다른 클로저 요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최고의 컨디션이라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 같은 양의 위상력이었다.
“과연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힘.”
지쳤다고는 해도 여전히 괴물 같은 양의 그녀의 위상력에 비해 라그나마타의 경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위상력은 겨우 B급 차원종의 레벨. 지금의 그녀와 비교해도 절반이하의 양이었다.
라그나마타는 그 힘의 차이를 정교한 위상력의 이용으로 메우고 있었다.
서지수와 같이 전신으로 눈이 부실 정도의 위상력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강화시킬 정도의 양만을 몸 내부로 순환시키며 남은 모든 위상력은 손에 쥔 검으로 향한다.
그 결과 라그나마타의 몸에서는 은은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에 비해 그의 검은 검에서는 붉은 위상력이 용트림을 일으키며 서지수를 압박해 나갔다.
둘의 검이 격돌할 때마다 그 충격으로 인해 제어력이 약해진 위상력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또한 거대한 두 힘의 격돌이 만들어낸 돌풍은 주변의 모든 자연물을 비롯한 그 싸움을 보고 있던 모든 클로저 요원들을 덮쳤다.
이전의 대전으로 인해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클로저들은 그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실 끊어진 인형과 같이 멀리 날아가는 상황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 둘은 다른 사람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허공을 박차며 검격을 교환했다.
매 초마다 겸격을 나누면서도 라그나마타는 얼굴이 붉어지거나 숨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처음과 같은 상태로 서지수에게 말을 건넸다.,
“너희 위상력에 눈을 뜬 인간에게 있어 위상력이 갑자기 돋아난 날개와 같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압도적인 힘을 주는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날개. 하지만 갑자기 생겨난 신체 기관을 다루는 데에는 당연하게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반면 서지수의 경우에는 연전으로 인한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체력적 부담으로 인해 숨이 조금 거칠어진 상태. 그러면서도 그녀의 검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날카로움과 스피드를 가진 체 공방을 이어갔다.
“우리들에게 있어 이 힘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지. 그 때문에 멍청한 부하 녀석들은 무의식중에 위상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 제대로 가다듬고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않아. 그 결과 녀석들과 너희 위상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익힌 클로저들과 그 운용 면에 있어 별다른 차이가 없지. 하지만.”
그 순간 갑작스럽게 라그나마타의 몸이 사라지며 서지수와 거리를 벌렸다.
서지수는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그것이 특수한 차원종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공간전이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경험상 사라진 라그나마타가 나타날 장소 역시 알 수 있었따.
‘갑작스럽게 위상력이 생성되거나 일그러지는 공간.’
자신의 후방의 14미터 상공 5미터 지점.
재빨리 라그나마타가 모습을 드러낼 위치를 파악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공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아니 전신을 강타하는 불길한 느낌에 그 즉시 공격을 중지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라그나마타를 응시했다.
공간전이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라그나마타의 검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위상력이 사방으로 분출되며 마치 위상력으로 된 소용돌이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모양의 불붙인 폭죽과도 같은 강력한 위상력의 흐름. 그 모습을 서지수는 알 고 있었다.
클로저가 사용하는 기술 가운데는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관리요원이나 상부에 허가를 맡아야 할 정도로 강력하거나 특수한 것들이 있다. 유니온에서 결전기라고 명명한 그것은 고위 클로저의 경우 주변의 지형조차 바꿀 수 있을 정도이며 고위 클로저들의 취급을 전략병기 수준으로 올린 장본인이다.
지금 라그나마타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바로 그녀가 유니온에 정식으로 등록한 결전기 중의 하나, 조금 전 헤카톤케일의 가죽과 함께 그 심장을 꿰뚫은 최관(最貫)의 일격.
“……위상폭파?!”
하지만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위상폭파는 압도적인 양의 위상력을 최대한 압축, 응집하다가 한 순간 의도적으로 제어를 놓음으로 강력하고 패도적인 위상력의 폭발을 일으켜 높은 관통력을 얻는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 저 모습은 패도적이기 보다는 부드러우며 아름다운 위상력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의 검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막대한 양의 위상력이 제어권을 놓침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양의 위상력이 너무나 정교한 나선형의 움직임을 보이며 그 활동성과 파워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위상력을 갈고 닦은 군단의 간부급들의 경우 너희들의 위상력 운용 능력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그 순간 붉은 위상력을 휘감은 칠흑의 검이 서지수를 향해 돌진했다.
공기를 찢어**며 낙하하는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불태우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유성을 연상시키는 일격. 그 공격을 서지수는 뒤나 옆으로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날아오는 라그나마타의 쪽으로 몸을 날렸다.
허벅지, 종아리, 발에 이은 위상력의 방출. 발이 닿아 있던 대지에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의 위력과 비례해 그녀의 몸은 순간적인 가속력에 의해 날아드는 라그나마타의 검의 아래 부분을 스치며 그의 아래로 지나가며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이끌하나 없는 아름다운 등에 불에 덴 듯 한 상처가 길게 생겨나며 입고 있던 검은 유니온 요원복의 상체가 완전히 찢겨져 나가 새하얀 피부와 볼륨감 있는 가슴이 드러났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순간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운은 없었다.
“아까 네가 사용한 기술을 모방해 봤지. 너희 식대로 이름 붙이자면 결전기 유성검 정도려나?”
서지수는 재빨리 자세를 다잡으며 라그나마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흙먼지가 사라지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의 일격으로 인해 생겨난 수 미터는 되는 크레이터와 그 위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는 라그나마타의 모습이었다.
“쳇.”
사용된 위상력의 양은 자신이 사용할 때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지만 나타난 결과는 자신이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위력에 그녀는 공포나 두려움보다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였을까. 갑작스럽게 이 살벌한 분위기와는 관계없는 엉뚱한 말이 튀어 나온 것은.
“……날 좋아한다더니 내 몸을 보고도 별로 아무 생각이 없나봐.”
둘이 벌린 전투의 여파로 모든 클로저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관계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 있는 상대는 오직 눈앞에 있는 라그나마타 뿐.
평소 남자 같고 털털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 그녀의 성격상 동료나 인간도 아니고 다른 종족, 그것도 적에게 맨 몸을 보이는 것은 별로 거부감이 일어날 정도의 일은 아니다.
개와 고양이에게 몸을 보인다고 부끄러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지금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라그나마타에게 묘한 기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그녀의 몸은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누구나 인정할 만한 외모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한다고 한 것은 네 굳건한 의지와 강한 힘이니 외모 따위가 아니니 별 느낌은 없군.”
“헤에. 그건 또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인걸. 어디가서 꿀린다는 소리를 들은 몸매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라그나마타.
적의나 살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행위에 서지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그나마타를 응시했다.
한걸음만 더 디디면 서지수의 몸과 겹쳐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온 라그나마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지수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검붉은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
“네가 신경 쓰인다고 한다면 이정도의 배려는 해 주지. 나도 누군가 네 몸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싫고.”
“……아, 응. 고마워.”
여성치고는 키가 큰 서지수와 아직 십대 중반 정도의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한 라그나마타였기에 그 코트는 그녀의 허벅지까지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찢어진 것은 상체의 옷 뿐이니 그것을 가리기에는 충분할 정도.
반면 코트 안쪽에 셔츠를 비롯한 어느 상의도 입지 않았는지 적당히 근육이 붙은 라그나마타의 상체가 들어났지만 둘 모두 그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시 싸움을 시작해 볼까.”
자신이 걸쳐준 코트를 제대로 입고 복장 정리를 끝낸 서지수를 향해 라그나마타는 그렇게 말했다.
+
서지수와 라그나마타의 공방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흙먼지가 겉히며 길면서도 짧았던 승부의 결과가 드러났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라그나마타의 코트를 입고 손에는 산산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은 건블에이드를 든 서지수.
그리고 오른팔을 비롯한 상체의 절반이 날아간 라그나마타.
어느 누가 봐도 극명한 승자와 패자.
“……내 패배인가. 설마 내 검이 부서질 줄이야. 설마 백열일곱 번의 검격을 내 검의 같은 위치에 맞출 줄이야.”
“하아……. 하아……. 결전기…… 질풍폭렬참. 백열……일곱이 아니라 백스물네번이야.”
허무하다는 듯이 말하는 라그나마타의 말에 서지수는 붉어진 얼굴로 조금 전 토해낸 입가의 피를 닦았다.
“내 인식조차 속였나. 그럼 내기대로 네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군. 말해봐라.”“좋아. 내 소원은…….”
『그렇게는 안 되지.』
상기된 얼굴로 라그나마타를 향해 자신의 요구 조건을 말하려는 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와 함께 서지수는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밀친 라그나마타의 손과 그가 있던 자리에 떨어져 내린 청염색의 위상력.
정상일 때의 자신이라도 무방비하게 적중당할 경우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포격. 라그나마타를 덮친 포격에 경악하면서도 고개를 돌린 그녀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백발의 소녀의 모습이었다.
으드득.
차원전쟁 초기 때부터 항상 그녀를 방해했던 간부급 차원종 남매 중 하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항상 붙어 다니는 남동생 쪽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소녀를 이름을 불렀다.
“더스트!”
『안녕 서지수. 그리고 라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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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