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소년은 손에서 놓지 못한다.

OLMOOA 2014-12-09 0


 거인의 거대한 팔이 전방을 휩쓴다. 그 팔은 무식하지만 강력하여, 산과 숲을 초토화 시킨다. 여기 서의 공략법은,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거인의 발 위로 올라가는 것. 발에 올라가 딜까지 넣을 수 있으니, 플레이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패턴 top 3 중 하나다.


 "세하!"

 …….


 거인의 발구르기가 대지를 진동한다. 수십 갈래로 대지가 나뉘어 지며,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모양이 된다. 하지만 이 패턴은 오히려 쉽다. 땅이 갈라지는 부분이 미리 표시가 되기 때문에, 조금 안목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바로 안전구역으로 빠질 수 있다. 발을 구른 후에는 다음 스킬까지 움직임이 둔하므로, 딜을 왕창 넣을 수 있다. 좋아. 이걸로 검피다……!


 "세에에에에하아아아아아!!!"


 시끄럽다. 나이스! 왠 떡이냐. 다시 팔을…….


 "안돼───!!!!!"


 …….

 죽었네. 아. **.
 하하.
 죽어버렸다. 무려 37시간만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잡는 법을 알아내서, 전 재산을 전부 퍼부어서 겨우 공략에 들어간 보스였는데.
 패턴이라고 할 것도 없는 팔 휘두르기 한 방에 죽어버렸다. 팔을 휘두르기 전에는 크아아악 하고 무식한 울음 소리를 내서, 피하지 못하면 X신 소리 듣는 공격에.

 어떤 **야!!

 ─라는 말은 물론 입 밖으로는 결코 내뱉지 않았다.

 "불만 있습니까?"
 "뭐."
 "그 눈은 아무리 봐도 불만이 있다는 얼굴인데요?"
 "그래. 있다."
 "뭡니까."
 "어차피 일도 다 끝나가는데, 굳이 나를 쳐서 37시간의 노력을 허투로 돌아가게 해야 했냐?"
 "분명히. '일' 중에 게임은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

 이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상황은 거의 다 마무리 되어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홉고블린 몇 개체 정도. 그나마 나머지도 거의 쉬엄쉬엄 하고 있고, 몇 년 전에 합류 한 서유리 라는 여자애가 마무리 하고 있다.
 더 이상의 일이라고는 결코 보이지 않는 상태. 지금 상황도 사실상 서유리란 애의 힘을 측정하기 위한 거라, 실질적으로는 상황이 이미 끝났다고 봐야 했다. 선배 클로저들도 이미 손 뗀 상태니까.

 대체 이런 상황에서, 내게 뭘 더 하라는 건데.

 라는 의미를 담아서 나의 37시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이슬비라는 초등학생 슬기로운 생활에나 나올 법한 이름을 가진 여자를 노려본다.

 "분명히 '계약서'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을텐데요."
 "물론,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상황은 이미 끝난 상태이고, 실제 싸움에서 성과도 제 성과과 다른 선배 분들에 비해서 결코 모자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를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해**만, 이슬비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가 없다.
 역시 언제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다. 그냥 상성의 차이랄까. 분명 이 여자랑은 태어났을 때부터 싸웠으리라.

 "그렇다고 일을 하는 중에 게임을 하라는 법은 없지요."
 "다른 선배……분에게도 분명……허락을 받았는데."
 "단장인 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만."

 으드득.
 입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얼마 전부터 약간씩 이 하나가 흔들리더니. 그게 부서진 것 같다. 끔찍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이 정도 통증은 이 '검은양'에 소속된 클로저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참고 자시고 할 문제 자체도 안 된다. 틈만 나면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게 우리니까. 다치는 일은 시도 때도 없이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단.장."
 "그러세요."

 두고 보자.

 -

 ……레이드에 들 돈과 재료를 마련하려면 또 37시간을 허비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전보다 레벨 자체는 많이 높아졌으니까, 훨씬 수월할 거다. 실제로도 필요한 돈의 30% 정도는 하루만에 전부 모았고. 이번에는 아마 10시간 내외면 모으고도 남겠지.
 그래도……역시 시간이 아까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번 보스만 잡으면, 드디어 원하는 칭호를 얻어서, 적어도 내 전력의 20%는 상승되었을 텐데! 만약에 장비를 얻었으면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을 거고! 크아악! 그 망할 년! 저주할텐다! 평생 혼자 살면서 외롭게 쓸쓸하게 죽어가라! 이름 처럼 이슬로 허무하게 사라져버려라!!!!

 "여어~ 세하. 어제부터 뭐, 도전한다더니 깼냐?"
 "죽을래. 그 말투 좀 고치라고."
 "핫, 너무하다능……."
 "죽인다."

 이 완벽한 오타쿠의 전신인 이 녀석의 이름은 구가태. 참고로 외모도 흔히 생각하는 그런 외모 자체다. 다른 오타쿠와 다른 것은 이 녀석도 '클로저'라는 것. 외모와는 달리 힐러 계열의 힘을 가졌다고 들었지만, 도저히 믿기지는 않는 얘기다.

 "뭐야? 또 ***?"
 "망할. 이슬처럼 사라졌으면 좋을 여자가 하나 있어."
 "단장?"
 "거의 다 깨가던 중이었는데. 검피라 수 대만 더 치면 죽는 체력이었는데!"
 "너……."

 구가태의 눈길이 변한다.
 역시. 비록 게임에 한해서지만 이 녀석 만큼은 나의 마음일 이해할 수 있는 건가. 이런 측에서라도 통한다는 것이 솔직히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복잡쓸쓸한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학교 내에서는 이 녀석 밖에 없겠지!
 구가태는 불길이 확 이는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역시 이해하는 거구나……이자식!

 "또 단장님하고 같이 임무 뛰었냐!!!!!!"
 "……뭐?"
 "이 더러운 자식! 아무리 우리 나라가 빽이 다인 나라라지만 이 세계에서 마저 빽을 이용하다니! 나도, 나도 네 녀석 같은 어머니를 둬야 단장하고 같이 임무를 뛸 수 있는 거냐!!!"
 "아니. 야."
 "나는, 나는 한 번도 우리 이슬쨔응과 임무를 같이 뛴 적이 없는데!! 왜 너는!!!"
 "그렇게 좋으면 네 녀석이 그 이슬 쨔응이란 녀석하고 같이 임무를 뛰라고!!!!"
 "나도 뛰고 싶은데 같이 배정이 안 나는 걸 어떻게 해!"

쿠오오오오.
 오타쿠가 폭주했다.
 분홍색 오로라가 사방 천지에 가득하다.
 엄청난 기운이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녀석과 분홍색 위상력은 너무 어울리질 않는다.

 "……이상 수치의 위상력 발생 확인. 즉시 처리 조치 들어갑니다."

 그리고 항상 학교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 아줌마(?)가 나타나 구가태를 제압, 데리고 간다.

 "흐, 흐아아아아악!!!"
 "내일 보자. 구가태."
 "두, 두고보자능!"
 "하필 짜증나게 내가 했던 말 똑같이 하지마!!"

 -
 
 학교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위상력을 이용한 훈련을 받는다.
 물론 '차원문'가 열릴 경우에는 수업이든 아니든 출동해야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유난히 차원문이 자주 열렸었는데, 오늘은 하필 또 안 열린다.
 지금 훈련 하러 가면 또 그 여자를 보겠지?
 그건 절대로 사양이다.

 원래 이러면 규칙 위반이기는 하지만…….

 휴대폰을 조작, 그 망할 여자의 번호를 전부 수신 거부한다.
 이러면 영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연락하지 않겠지. 그 여자도 사실 날 보기는 껄끄러울 거 아냐? 임무 중에 싸우지 않은 걸 꼽는 게 더 빠를 정돈데.
 내가 훈련 빠지는 게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 진혁 형이 별 말 안하면 이대로 땡땡이 칠 수도 있겠지.
 게임이나 하자.


 게임을 하고 있을 때면, 잠시지만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뭐가 이렇게 울려? 쩝. 진혁 형, 결국 실패한 걸려나. 하긴. 그 여자가 워낙 집요해서 말이지. 어제 일도 있었고.
 아무래도 몰래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던 것 같다.
 또 엄청나게 잔소리 듣겠지……. 듣자하니 어머니가 그 여자한테 뭘 부탁한 것 같더니. 역시 이런 ㄱ……뭐지? …….

 망했다.
 또 게이트 오픈?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무슨 하루도 안 되서 또 열리고 난리야……. 아. 이번 건 엄청나게 잔소리 듣겠지. 쩝. 쯧. 할 말이 없다. 또 감봉인가. 아. 다음 달에는 신작이 좀 많이 나와서 감봉당하면 안되는데. X바.
 아. 무리. **. 그냥 가지 말까……아니, 그러면 그건 또 엄마한테 뭐라고 소리 듣겠지. 그래. 개한테 물리고 말지. 호랑이한테 먹힐 수는 없는 법이니까.
 에휴…….
 다음 달 신작은 포기해야겠네.


 우리 '검은 양'에는 여러 팀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팀은 굉장히 상위층에 속한 팀이었다.
 일단 검은 양의 단장인 이슬비가 있었고, 유별나게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입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베테랑 급에 속하는 선배들 상당 수가 속해 있었다.
 그에따라 당연히 팀이 좀 더 어려운 임무에 투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까지는.

 안 좋은 일은 항상 예고 없이 나타난다. 라고 한다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팀원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피를 흘리고, 피를 을리며, 심하면 신체 어딘가를 잃은 상태로.

 그리고 그 중앙에, 괴이한 거인이 있었다.
 3층 짜리 건물 정도의 크기정도가 될까. 하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괴물들과는 천차만별의 모습. 거대한 그것은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고, 온 몸을 두른 보라빛 천에는 괴상한 문양이 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이슬비와 얼마 전 들어온 신입 두 명. 아니. 상대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 일지도 모른다.

 둘은 그저 버티고 있었다.
 등 뒤의 팀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나 때문인가?
 아니. 나보다 훨씬 강하고, 능숙한 선배들도 당한 적이다.
 내가 있든 없든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고작 삼십 여 분 지났을 뿐이 아닌가.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다.

 나 때문이 아니다.
 내 잘못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넌.'

 미안해. 하지만 난, 정말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당신은 책임감을 좀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렇잖아?
 어제까지만해도 그냥 웃고 떠들던 하루였는데, 갑자기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냐고.
 어차피 이제야 내가 끼어든다고 해도, 뭐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그냥, 다른 클로저들이 올 때까지…….

 숨어지내는 것이, 원래 내가 선택할 일일 텐데.



 "세하씨……."
 "미안. X바. 내탓이야. 아니, 내 탓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미안."
 "……감봉이에요."
 "아. 그건 제발 좀. 다음 달에 돈이 좀 필요한데."
 "저 녀석, 엄청나게 쎄."
 "그건 방금 온 나도 대충 알 수 있겠다."
 "무지하게. 적당히 하고 도망 가자."
 "……그럴까?"
 "도망은 안 됩니다."
 "아니, 저거 못 이겨."
 "그렇대."
 "여기서 우리가 도망가면, 피해는 더 커질테니까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너, 융통성 좀 길러라."

 우리가 잡담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괴물이 괴성을 지른다.
 아. 화까지 나게 해버렸다. 망했네.

 "미안."
 "늦네요."
 "아까도 했잖아."
 "다른 의미니까요."
 "……쓸 데 없이 예민하다고."


 -


 이 일로 평생 먹고 살  생각 따위는 없다.

 정의감이 철철 넘치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내게는 그런 사명감 같은 건 없으니까.
 그냥 용돈 벌이. 내가 원하는 걸 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하는 것 뿐이다.

 그래도.

 ……게임보다 즐겁다면,
 현실보다 더 몰입할 수 있다면……또 모르는 일이지만.

 -


 심심해서 써봤는데 괜찮은지 잘 모르겠네요.

 게임을 직접 해봐야 전투씬을 쓰고 하는데, 게임을 전혀 모릅니다...OTL 오베 나오면 꼭 해봐야겠네요.
2024-10-24 22:20:4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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