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세하슬비] [冬] Blue

루이벨라 2016-05-04 5

(反) 「언제나 내 곁에」와 이어집니다.

※ 타이틀은 세유인데, 실질적으론 세슬.

※ 세하가 엄청 많이 불쌍합니다.

※ 슬픈건 이제 다 지나갔고, 이어질 소설이 4편 정도 남았습니다.

※ 막장주의




 '눈 오네...'


 아침에 일어나고보니 창문 너머로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눈을 발견했다. 대량의 눈이 올거라는 기상청의 예보와는 다르게 눈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마치 잠시 있다갈거라는 손님처럼 차분히 내렸다.


 창문을 약간 열어보았다. 따뜻하게 열이 들어와있는 방에서 갑자기 찬 바람을 맞으니 뺨이 다 얼얼했다. 약간 소란스러운걸 보니 눈이 왔다며 즐겁게 방방 뛰고 있는 아이들이 밖에 몇몇 있나보다. 살짝 발코니 천장 밖으로 나가 손을 뻗어보았다. 눈 한송이가 손에 사뿐히 내려오더니 차가운 기운만 남기고서 관찰한 틈도 없이 금방 사라졌다.


 금방 사라졌다. 여기서 마음이 아려왔다.


 ♬~


 경쾌한 음의 전화벨 소리 덕에 눈 구경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전화에 찍힌 이름은 '이슬비'. 아마도 유니온 관련된 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여보세요."


 이상하게 가뭄 때문에 갈라진 논두렁에서 나올법한 소리가 나와버렸다.


 -세하야, 깼니?


 부드러운 이슬비의 말투. 이슬비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늘 녹기 쉽거나 깨지기 쉬울거 같은 작은 유리잔을 대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 이슬비의 태도가 변했을 때 당황스러울 법도 했는데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오늘 <검은양> 팀 회의야. 10시에 시작이니까 시간 잘 챙기고. 눈오니까 길조심하고 옷 단단히 입고 와.

 "어."


 일일히 지시를 내리는 이슬비에게 잠깐 뚱했다. 내가 무슨 초등학생 어린애인줄 알아?


 오늘 회의라고 했으니까, 요원복을 입고 가는게 제일 낫겠지. 추울테니 그 위에 겨울용 코트를 하나 걸치면 완벽할 것이다. 카키색의 코트를 꺼내입는데 옆에 내가 입고 있는 코트와 비슷한 디자인의, 그러나 네이비 색이고 사이즈가 더 작은 다른 코트가 하나 더 보였다. 왠지 심술이 나버려서 옷장 문에 화풀이하듯 세게 닫아버렸다.


 요새 사물이나 차원종 같은 거에 화풀이를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집을 나서는데 문득 돌아본 집이 너무 쓸쓸해서 나도 모르게 한마디 뱉고 말았다.


 "...다녀올게."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것도 링거까지 꽂은 채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옆에서 이슬비의 감탄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깨어났어요!"

 "오오!"

 "세하야, 괜찮은거니?"


 내가 익히 아는 몇몇의 얼굴이 갑자기 내 시야에 사로잡힌다. 제이 아저씨, 미스틸, 이슬비, 그리고 유정이 누나. 다들 똑같은 약속이라도 한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그리고 왜 제가 침대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죠?"

 "너, 정말 기억 안 나는거야?"


 기억이 안 난다니? 난 분명 이슬비의 전화를 받고 회의를 하러 유니온 본부로 갈려고 집을 나섰는데...


 ...기억이 안 난다...


 "회의를 하던 중, 갑자기 차원종이 나타나서 출동했었잖아. 너, 그러고보니 오늘 좀 이상했어. 멍하기만 하고 말이야...쨌든, 차원종은 다 처리했는데 네가 안 나타나길래 찾다가 쌓여있는 눈에 파묻혀있는걸 제이씨가 발견한거라고.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온거야."


 이슬비의 차분한 설명에 난 머리에다가 커다란 돌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 기억이 안 난다. 밖으로 나선 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끊기다가 갑자기 돌아오는 증상이 있었다. 책을 읽고 있다가 어느 순간 보면 내가 된장국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어떤 때는 샤워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침대에 누워서 깨어버리기도 했다.


 지금도 딱 그런 상황이지 않은가.


 심각해진 내 표정을 보며 이슬비가 다시 물었다.


 "세하야...너...정말 괜찮은거니?"


 아니, 안 괜찮아. 아니, 그전에 너무 이상하다고...!


 위험해.


 기억이 혼란되기 시작했다.




 진단을 받아봤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후유증 같다는 생뚱맞은 결과물을 받았다. 의사가 물었다. 최근에 엄청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냐고. 그 말에 나와 이슬비는 답하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 이슬비가 나한테 말했다. 요즘의 내가 이상하기는 했다고. 혼자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거 같은 눈빛에다가, 동문서답을 하는 식의 대화 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새 총체적으로 너무나 기운이 없었다고.


 이슬비가 나를 살살 대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도대체 그 지경이 될때까지 무얼 한거야?"


 그러게. 난 도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얼 한걸까. 아, 이 사태에 대해서 한가지 기억나는 건 있었다. 어디 책에서 본거 같은데...


 가장 쉽게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미쳐버리면 된다.


 나약한 사람들이나 쓸법한 방법이라고 흘러서 보냈것만, 내가 그 나약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슬비."

 "왜 그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까?"

 "..."


 이슬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 이 누군지 알고 있는게 분명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했는데..."


 활짝 웃으며 나에게 손짓을 하던 서유리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나도 어느새 바보가 되었네."

2024-10-24 23:01:2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