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夏] (反)언제나 내 곁에
루이벨라 2016-04-27 10
※ 전편 읽고 와주시기 바랍니다.
※ 전편과는 컨셉이 반대입니다.
※ 과거 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 세하유리 「4季」단편 부작 중에서 「夏」부작이 끝났습니다. 나머지 계절에 대한 단편도 쓸 예정이니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은 댓글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잔혹하다. 그걸 난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리고 말았다.
나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차원종의 마녀, 차원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클로저였기 때문에 세상이 나에게 거는 기대 또한 엄마의 기준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높은 수치의 위상력이 잠재되어있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역시 알파퀸의 아들, 이라는 소리를 내게 해대고 다녔다. 만약에 내가 위상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명색이 알파퀸 아들인데' 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가지 말 모두 나에게 커다란 짐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책임감, 후자의 경우는 죄책감. 지금의 난 전자의 경우였지만 '알파퀸의 아들인데?' 라는 말도 같이 듣고산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어린시절부터 그런 류의 시치미가 나에게 따라붙었던거 같았다. 알파퀸의 아들. 사람들은 날 '이세하' 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이름은 형식적인것뿐, 난 언제나 '알파퀸의 아들' 이라는 시치미로 불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얘! 이름이 뭐니?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이였다.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에, 그와 같이 쌍을 이루고 있는 자연스러운 검은색. 그 아이의 모습을 보자 가짜로 물들어진 내 검은색 머리와 보통 한국인과 다른 파란 눈동자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못 들은척 무시하고 가려고 했지만 아이는 내 앞으로 바짝 따라오더니 아예 길을 막아섰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잖아! 너, 보니까 바로 우리 옆집에 사는 애 같던데!
-...
그렇다면 이 아이를 이번에 처음 보는거 같은 이유도 이사를 왔기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며칠전에 옆집에 있던 노부부께서 이사를 가 몇달 동안 비워져있던 집에 이사를 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한번 말 걸고 싶었는데 자꾸만 피해다니더라고. 너, 이름이 뭐야? 난 서유리라고 해!
서유리.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 듣던 첫 순간이었다.
-이세하...라고 하는데.
마지못해 형식적인 이름을 알려주었다. 어차피 이름을 가르쳐주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파퀸의 아들' 이라는 칭호로 이 아이한테도 불릴테니 말이다.
그러자 서유리라는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손을 내민 의미를 모르기도 했고 그 아이의 환한 미소가 너무나 눈부셔서 잠시 넋이 나가기도 했다.
-세하라고 하는구나! 정말 이쁜 이름이다! 그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세하야~
그제서야 손을 내민 의미를 알아챘다. 내가 과연 이 손을 잡아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환하게 웃는 저 모습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겨우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그럼 같이 집에 가자! 어차피 집 방향도 같잖아!
-어, 어...!
그 날은 처음으로 게임기를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첫날이었다.
* * *
'-...아, 꿈이었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유리와 처음으로 만난 꿈을 꾸었다. 어제 일어난 일인듯 아주 생생하게 말이다. 과거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유독 유리와 만났던 날은 뚜렷이 기억이 났고, 가끔은 이런식으로 꿈으로 다시 되새기곤 했다.
유리와 만난게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전환점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거니까.
누가 그랬던가. 아무런 근심이 없는 잠이 들때의 모습은 누구라도 다 천사의 모습이라는 걸. 곤히 자는 얼굴을 보니 장난기가 생겨버려서 잡티가 없는 하얀 볼살을 아주 살짝, 톡하고 건드려보았다.
아주 조금 건드려본건데도 잠이 깨어버린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크게 들썩이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 장난기가 생겨버려서 귀찮을 정도로 왼쪽과 오른쪽 볼살을 번갈아가면서 찔러본다. 결국 항복한건지 잠에서 깨기 위해 뜬 맑은 벽안(碧眼)과 눈이 마주보게 되었다.
-안녕~
-으응~안녕...
아직 잠은 들 깬듯 하다. 분명 여러모로 잠에 방해되게 귀찮게 굴었는데도 유리의 얼굴에는 짜증이나 그런 부정적인 표정은 없었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으응...신기하네.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하가 바로 옆에 있네.
-그렇게 신기해?
사실 나도 신기하다는 건 비밀이다. 유리가 어째서인지 계속 내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왜 그런가했더니 유리가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해주었다.
-세하는 파란 눈이어도 잘생겼는데...왜 구태여 렌즈를 끼려고해?
아, 지금은 방금 일어나서 컬러렌즈를 안 꼈구나...사실 난 엄마와 닮은 외모가 콤플렉스였다. 그래서 머리도 짙게 염색했고 눈은 컬러렌즈를 끼고 다닌다. 유리와 처음 만난 이후로도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건 내 파란 눈에 유리가 내 정체를 알아버릴거 같아서. 그래서 멀어질거 같아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사라질 거 같아서.
-알잖아.
-그 소리 들으면 아줌마가 서운해하시겠다.
어느 정도 잠이 다 깬거 같은데 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유리가 내 팔을 베고 있었기에 유리가 움직여야면 움직일 수 있었다. 유리는 이불을 한껏 끌어올리더니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하야~모처럼 휴가인데 좀 더 자자~
-음...그럴까?
-헤에...세하 품 따뜻해서 좋다.
뭐가 좋을까...지금은 푹푹 찌는 여름의 한가운데라는 시간에 서 있는데...하지만...
이렇게 붙어있는게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나만을 바라보는 바보 같아서...그저 웃음이 나왔다.
* * *
"..."
일어나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것도 아닌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런데...내가 어제 무슨 일을 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다. 의식이 끊긴듯 군데군데 기억의 공백이 있는 거 같은 느낌. 갈증을 느끼는 몸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냉큼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이 곳 별장은 서유리와 여름 휴가 때마다 찾은 곳이다. 열대야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득한 신서울에서 잠시 벗어나자는 취지에서 왔었다. 신서울을 떠나본건 처음이기에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었던 서유리도 어느새 별장 갈까? 라는 말을 하면 좋아하며 따라오게 되었다.
티브이 하나 없는 이 별장에서 심심해할거 같은 서유리를 위해 그네도 달았다. 초저녁쯤에는 거기에 앉아서 시내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같이 나누어먹었다. 밤에는 2층에 올라가 생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천체 관측도 했다. 기껏해야 별자리 몇개 찾아보는 거에 불과했지만.
낮에는 우거진 숲속으로 작은 피서를 떠났다. 별장에서 10분 거리에 작은 계곡이 있었는데 계곡이라고 하기엔 발목까지 닿는 얕은 곳이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피했다. 가끔은 수박이나 복숭아 같은것도 들고가 시냇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먹기도 했다.
문득 창문 쪽을 보니 내가 달아놓았던 풍경이 아직도 있는 걸 확인했다. 시원한 바다색을 가진 일본풍 풍경은 우연히 시내로 나갔을 때 발견했는데 보자마자 서유리가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구매를 했다. 딸랑거리는 맑은 소리를 들으면 더위도 가실거라는 시덥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서유리의 눈총을 받으며 풍경을 달았더랬다.
...저게 아직도 있네...
-세하야! 이 풍경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
저렇게 말하는 서유리의 목소리를 지금 들은거 같았다. 하지만 서유리가 있는지 근처를 돌아보진 않았다.
지금 이 별장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으니까. 서유리가 여기 있을리가 없다.
항상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항상 내 옆에서 있어주면서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다' 라는 감정을 알게 해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사랑' 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고귀하고 책임감이 있는지에 대해 내게 알려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 빌어먹을 '클로저' 라는 직책으로 인해 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사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하야, 나 위상력에 각성했대. 그래서 대회에서 실격당했어~
-...그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도 되는거야?
"..."
이건...환상인가. 위상력에 각성한 직후의 서유리와 그런 서유리 앞에서 게임을 하는 내가 보였다. 그때의 나는 무책임하게도 게임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리의 표정은 지금에서야, 제3자의 모습으로 보니 확실히...
울 거 같았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클로저 일을 해볼까해. 마침 유니온에서도 제의가 왔어.
-...어.
나는 참 바보였다. 저런데서 시덥지 않은 게임에나 열중하고 있다니. 지금 서유리는 한눈에 봐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데. 금방이라도 대성통곡을 할거 같은 사람인데.
-그럼...나도 세하랑 같은 일을 하게 되는거네?
서유리는...저 말을 하면서 안 아팠을까? 검도라는 목표 하나를 쫓아가던 서유리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눈부신 사람이었다. 동경했던 이였다. 그리고 나한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이였다. 그런 사람의 아픔을 어찌 나는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저때의 나는 서유리가 저렇게 된거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서유리가 죽으면서 난 뫼비우스의 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때 서유리가 클로저가 된다는 걸 반대했더라면, 아니면 그냥 아무 말없이 안아주기라도 했더라면, 적어도 결혼을 하고나서 클로저를 그만두게 했더라면...
지금 서유리는 살아있었을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서유리의 흔적은 아직도 나한테 남아있었다. 작게 본다면 이곳 별장 안에서도 서유리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함께 잠을 청하곤 했던 침대, 같이 별을 관측했던 발코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초저녁의 바람을 느꼈던 그네, 서로에게 기대어 같이 바라보곤 했던 풍경 등...
잊어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서유리, 라는 이름을 부르면 '왜? 세하야!' 하면서 달려올거 같은 그녀인데...
없다는게 정말이지 허전할 수가 없었다.
이제 다 끝난 일인데 말이다.
아니, 이젠 끝내야만 해.
그런데도...그런데도...!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서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