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2. 개선(凱旋) -
Articulus 2016-02-26 4
※ 국제공항 이후까지의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므로, 램스키퍼 함교 에피소드까지 클리어하지 않으신 분들 중 스포일러를 보기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클로저스의 기존 설정에 기반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공항 이후의 스토리는 완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하므로, 본작의 에피소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2-1
정말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다.
집에서의 휴식은 그 어떤 때보다 달콤했다. 돌아보면 매우 바쁜 한 주였다.
플레인게이트의 탐사에 열을 한참 올리고 있던 우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로 국제공항에서 약 일 주일 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그 한 주는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좋건 싫건 나는 그동안 나와 같은 사람을 적대했고,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을 수없이 쓰러뜨렸다. 나는 최대한 그들을 다치지 않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간혹 계속해서 달려드는 적들로 인해 실패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아마 작전 중 쓰러뜨린 테러리스트들 중에서 내 손에 죽음을 맞은 사람들만 열 명 가까이 된다.
그 결과를 내가 좋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사실도 최종적으로 이리나 페트로브나가 공항에서 철수하고 난 직후에서야 어렴풋이 특경대를 통해서 듣게되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지, 유정 누나나 은이 누나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심리적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한 그녀들의 배려이겠지만, 왜일까?
나는 오히려 그들이 속이고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뻔한 이유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배신 이후, 나는 어른들을 다시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두 누나의 배려는 오히려 안하는 만 못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누나들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저 어른들이 다 그렇지, 이런 생각만 잔뜩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가 집에서 밥을 해주었다.
엄마가 밥을 차려준 것보다 내가 밥을 차려서 엄마를 먹여준 것이 훨씬 많지만 -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 내가 차린 밥을 먹는 것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것이 훨씬 맛있는 것은 사실이다.
돌아왔어요 라는 말과 함께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너무나도 기뻐하셨고, 지난 한 주간의 일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셨다.
밥을 먹으면서까지도 계속해서 물어보시는 엄마의 천진난만함은 여전하다. 나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다.
반 유니온 단체 - 베리타 여단 - 가 국제공항을 점거했지만, 검은양 팀과 벌처스의 전 처리부대였던 늑대개 팀의 활약으로 국제공항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는 이야기만을 엄마에게 말했다.
밥을 다 먹고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엄마는 뜻밖의 이야기를 나에게 물어왔다.
"세하야, 데이비드는?"
"…"
"들었어. 데이비드가 배신했다면서."
참 빨랐다.
내가 그의 배신을 알아차릴 때까지 적어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의 배신 직후 소식이 벌써 민간인인 우리 엄마에게까지 알려졌다니.
생각해보면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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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내가 공항 외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때의 일이다.
"아, 이세하 군! 마침 잘 왔네!
최서희 요원이 나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네! 어서 최서희 요원을 막아주게!"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최서희 씨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함도 없이 말했다.
"제가 언제 지부장님을 공격하려고 했단 겁니까, 지부장님?
저는 다만… 당신을 체포하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나는 반문했다.
"네…? 데이비드 지부장님을 체포하시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조사해 본 결과, 대위상 안드로이드, 신형 이너포털 등의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주도했던 건, 데이비드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데이비드는 그렇게 완성된 안드로이드와 이너포털에 관한 기술을 빼돌려, 테러리스트 측에 전달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증거들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저는 당신이 지난 신서울 사태를 뒤에서 조종하고, 모든 죄를 전임 지부장에게 떠넘겼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물론 이에 관한 증거도 확보해 뒀습니다.
이제 당신은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하시죠, 데이비드 지부장님."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최서희 씨의 계속적인 추궁에 결국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추악한 본 모습은, 위상력을 숨기고 있던 사기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일격에 최서희 씨를 쓰러뜨리고는 그곳을 이탈해 도망쳤다.
나는 그대로 쫓고 싶었지만 쓰러진 최서희 씨의 상태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쫓아가지 못했고, 그녀를 데리고 다시 거점으로 귀환했다.
그 후 유정 누나와 이것에 관해 보고를 하고 무슨 일인지 묻던 차에, 그 배신자는 무전 재킹으로 우리에게 연락해왔다. 그리고는 램스키퍼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화이트팽의 블랙박스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협박했다.
"자, 유정 씨. 어서 블랙박스의 위치를 가르쳐 줘. 당신이 공항 어딘가에 그걸 숨겨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안드로이드 생산 플랜트나, 램스키퍼에 관련된 데이터는 확보했으니,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 뿐이야.
그러니 어서 블랙박스를 우리에게 넘기라고, 유정 씨. 만일 계속 넘기지 않을 작정이라면, 우리도 최종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어."
물렀던 그 때 당시의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지부장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비수와 같이 차갑게 날아와 꽂혔다.
"닥치게, 이세하 군."
"네…?"
"방해하지 말아주겠나? 지금… 나와 유정 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야."
할 말을 잊었다.
그의 날선 말에 나는 무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기 혼자의 말만 더 하더니 이내 무전 재킹을 끊어버렸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우리 - 검은양 팀 - 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우리를 놀려줄 생각으로 벌인 상황이라고 믿고 싶었는데도, 그 작은 희망마저 완전히 박살내어버린 어른들의 더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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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이야기는 왜요."
아무리 엄마의 물음이라고 할지라도, 대답하기 싫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남자'에 대해서 말하기 싫었다. 그 더러운 어른에 대해서는 더이상 내 입에서 길게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정말 배신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그래."
"네. 그 사람은 분명히 우리를 배신했고,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에요. 램스키퍼에 탑승한 늑대개 팀과 유니온 감찰국의 특수요원들이 놈을 계속해서 추적하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아 잡히겠죠."
그렇게만 대답하고 나는 그대로 일어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리고 PSP를 집어들고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2-2
"학교 다녀올게요."
듣지 안들을 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언제나와 같이 학교 나서는 길은 이렇게 인사만 하고 나왔다.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할 수 있도록 토스트를 만들어두고 나왔으니, 아마 엄마가 잠에서 깨어나면 알아서 찾아서 드시겠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 이세하."
"하아… 이슬비, 도대체 너는 언제 온거니."
"10분 전에 도착했어."
"왜 온거야? 어차피 너, 사는 곳이 여기랑 꽤 멀텐데."
"그, 그저 학교 가는 길이었을 뿐이야! 다른 생각은 없어! 없다고!"
"아… 네, 네. 그러세요?"
우리 팀의 리더치고는 재미있는 반응이다.
작전 중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니 지금이라도 실컷 보아둬야지.
나와 슬비는 발걸음을 맞추어 학교를 향했다. 정확히는 학교까지 갈 버스정류장까지 걷는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순수하게 버스만 탔을 때 한 시간. 환승시간이나 아침 출근시의 러시 아워 등을 고려했을 때, 30분 이상의 여유를 둘 필요가 있다. 통상 등교시간이 9시인 점을 고려했을 때, 내가 집을 나서는 시간은 7시 20분 정도. 오늘은 평소 때보다 5분 정도 더 일찍 나왔는데도 이 녀석은 나를 10분이나 기다렸다니, 조금 더 일찍 나올걸 이라고 후회하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말없이 걸어가던 중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미안해."
"…?"
"기다렸잖아. 내가 좀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는데, 미안해."
"미안할 것 까지야."
쿨하게 넘어가는 슬비.
사실 잔소리꾼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사전에 예고없이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사전에 예고된 것이었으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말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한참 잔소리를 들으며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슬비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나저나 들었어?"
"뭐를?"
"늑대개 팀이 데이비드 전 지부장의 행방을 거의 찾아낸 것 같아."
"그게 정말이야?"
"응. 제이 씨에게서 아침 일찍 연락이 왔어. 아마 유정 누나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한 모양이야. 나는 당연히 이걸 너희에게 전파하는게 일이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드 리, 그는 위상능력자일지 모르지만 고작해야 한 사람의 위상능력자와 같이 팀을 이뤄 움직이고 있다. 유니온에서 괴물들이 우글거린다는 감찰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들은 얼마 안있어 체포될 것이 뻔하다.
그 녀석이 체포된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찾아가, 그놈이 갇힌 철창 앞에서 우리를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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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울 역 앞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그대로 우리가 탄 버스는 동작대교를 건너 학교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신강고등학교의 입구. 학교는 비록 보수공사로 인해 조금씩 달라졌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반기는 이 교문의 교패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 한 달 전 쯤이었음을 생각할 때, 정말 많은 일이 그동안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벌써, 한 달이라니."
"그러니까. 벌써 한 달이 지났어."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이슬비.
그녀도 내심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에 놀라고 있을 것이다. 그 한 달은, 정말로 우리를 많이 변화시켜놓았다. 우리의 몸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정신도.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은 그 녀석처럼 그리고 유니온의 고위층처럼 더러운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코 내가 그 인간들처럼 되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교문 안으로 나와 슬비가 들어서자, 곁의 학생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신서울 사태를 해결한 주역들이니, 강남의 구원자라니 등등… 온갖 낯 간지러운 소리 뿐이었다. 계속되는 학생들의 공세에 떠밀려 우리는 좋든싫든 빠르게 교실로 들어갔고, 2학년 교실이 있는 3층에서 나와 슬비는 헤어졌다. 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와 같이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랜만의 나의 등교에 놀란 친구들이 내 자리로 직접 찾아와 안부까지 묻기까지 했다. 한 명 한 명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주 짧게 딱 두 마디 정도로 줄여서 이야기해주고는 그들을 다시 돌려보냈는데, 벌써부터 힘들다. 평소에는 그렇게 친한 척 하지 않던 녀석들까지 와서는 친한 척을 해대니, 어색한 것도 있지만 무어라고 말해주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놈들 중에는 평소에 내가 위상능력자임을 알고 일부러 비꼬는 녀석들도 있었기에 그 어색함은 배가 되었다.
그래도 모두를 자리로 돌려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교실 옆 중앙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HR 시간까지는 아직 5분 정도 남아있었다.
어차피 게임은 못하니 잠깐 음악이라도 들어볼까? 내 이어폰이 분명히 왼쪽 주머니에 있을텐데.
그 때 마지막 방문객이 찾아왔다.
우정미다.
"야, 너 이세하. 지금까지 뭘 하다 온거야? 테러리스트와 싸우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테러리스트들과 싸운 건 우연이 겹친 일이고."
"도대체 다른 어른들은 뭘하는 거야? 왜 너나 유리나 슬비같은 학생들이 나가서 그런 험한 일을 해야하냐구?"
"나인들 알겠어? 그리고 유니온의 클로저라면 누구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복도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빠르게 무언가가 질주하는 소리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우리 교실의 뒷문 앞에서 쾅! 하는 소리와 멈췄다.
그리고 스으윽, 하고 플라스틱 미닫이문이 열렸다. 곧 이 소란의 정체가 밝혀졌다.
"안녕안녕! 안 늦었지? 어휴, 하마터면 교문에서 잡힐 뻔 했어!"
서유리다.
이 녀석은 위상력이 각성하기 이전에도 이런 모습이었지만, 클로저가 된 후에는 더욱 왈가닥하는 모습으로 변한 것 같다. 이 녀석의 자리는 마침 바로 내 옆 자리인지라,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왔다.
좀 일찍일찍 다니라는 말을 해주려고 하기도 전에, 유리는 나보다 먼저 내 옆의 우정미를 보고 눈이 뒤집힌 것처럼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 정미정미, 잘 지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정말이지, 응, 우리 정미정미가 보고 싶어서…"
"저리, 떨어져, 서유리. 부끄럽게 무슨 짓이야!"
"설마… 내가 싫어진거야? 그런거야?"
"아, 아니야! 계집애, 왜 울려고 그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줄 알았어. 예를 들면, 이세하라든가…"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상하게 정미는 유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하면서 더이상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품에 가까이 다가가서인지 그 어느때보다 저 바보는 기분이 좋은 것처럼 얼굴이 금세 평온해졌다. 좋게 말하자면 천진난만하기로는 테인이만큼인 이 바보는 곧 정미를 떠나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왔다.
"잠은 잘 잤어?"
"넌?"
"모르겠어. 사실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아, 새벽 5시나 되어서 잠이 들었으니까."
"과연… 그러니 지각할 뻔 했지."
"하아암, 그러니까 수업은 내 몫까지 잘 들어줘, 세하야. 난 이만, 잘게."
그대로 이 바보는 책상에 웅크린채 잠에 빠져들었다.
이 녀석도, 나름대로 그의 배신에 마음이 많이 쓰라렸구나.
◆ 2-3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 정도의 스피드로 급식실로 향하는 모습만 보면, 누가 위상능력자인지 일반인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다. 이 모습을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본다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노리며 달려드는 좀비떼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섬뜩하기도 하다.
배고픔을 해소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결코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도 꿈의 세계에 빠져있는 이 바보녀석을 이 세계로 다시 불러올 시간이다.
여자애답지 않게 이 녀석은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자고 있었다. 교실 뒤의 사물함 위에 올려져있는 휴지를 몇 장 빼와서 주는게 좋으려나?
그 때, 열린 교실문으로 안경을 쓴 어떤 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형광색의 밝은 초록빛 가디건을 셔츠 위에 입은 채로 그 위에 자켓을 걸쳐 입은 차림의 남학생. 꽤나 쾌할하게 생겼으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있는 이 아이는 누구지? 적어도 같은 학년이라면 모르는 아이는 없을텐데.
내 시선을 눈치챈건지 이내 완전히 모습을 내보인채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세하 선배님!"
"어… 아, 안녕. 그런데 미안하지만, 누구지?"
"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신강고 1학년이자 학생회 서기인, 한휘성이라고 해요."
"학생회? 너, 학생회 소속이었어?"
"네! 게다가 전 검은양팀 선배님들의 열렬한 팬이고요. 이렇게 만나뵙게 되다니 정말정말 영광이에요."
한 번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1학년의 한휘성, 컴퓨터 분야에서는 만능으로 알려져 있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앗, 저, 저기! 저분, 혹시 서유리 선배님?!"
"응. 왜?"
"여, 역시… 들은 대로 미인이시네요! 이런 분이라면 남자들이 줄서있겠는걸요?"
"음… 글쎄. 성격만 달랐다면야 그랬겠지."
"역시 제가 조사한대로네요. 하지만 말이죠, 서유리 선배님께는 숨겨진 남자친구가 있다는 정보도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님, 혹시 선배님이 서유리 선배님의 그 숨겨진 남자친구 분이신가요?"
"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이 녀석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건가? 내가 서유리의 남자친구였다면, 벌써 싸우고 헤어졌을거다. 그러면 이렇게 같은 팀으로 있지도 못했을테고.
이 파렴치한 후배에게 한 마디 해주어야겠다.
"저기, 난 서유리와 그런 관계도 아니고, 그런 마음도 전혀 없다고. 그리고 난 다른 여자를…"
"선배님, 그렇다면 서유리 선배님은 제가 차지해도 되는 건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임자가 없으면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죠!"
"하아암, 잠 자는데 왜 시끄럽게 구는거야…"
방금 전의 소란으로 드디어 바보가 깨어난 모양이다.
굳이 깨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이 바보는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 안녕하세요! 서유리 선배님!"
"어? 응, 안녕! 그런데 누구야?"
"저는 1학년 한휘성이라고 해요. 학생회 서기로 일하고 있고요. 또 선배님의 열렬한 팬이기도 해요."
"어, 정말? 하하하, 부끄럽네."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님. 혹시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나처럼 확 달아오른 서유리의 얼굴은 그녀가 대답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바보만큼이나 바보인 후배는 이런 말을 무척이나 쉽게 꺼낸다.
"선배님, 혹시 제가 남자친구로 괜찮으시면 저와 사귀실래요?"
"자, 자, 잠깐만! 그건 또 무, 무슨 소리야! 아직 그런거 생각도 안해봤어!"
"음, 거절당한 것 같네요. 하하, 멋지게 차여버렸어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런 소란을 겪은 서유리의 마음은 아직 진정되지 않은듯 하다.
빨리 이 낯 뜨거운 대화주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근데 한휘성, 여기는 무슨 일이야?"
"아, 사실 제가 '벌처스'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거든요."
"벌처스? 거긴 왜?"
"자세한 사정을 말하자면 조금 길어요. 그냥 뒷덜미를 잡힌거라고만 알아두세요.
제가 선배님들을 찾아온 이유는 사장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에요. 사장님께서는 지금 차원종과 관련된 어떤 현장에 나가계시기 때문에 검은양 팀과의 연락이 직접하기에 어렵워요. 그래서 저를 통해서 검은양 팀과 종종 연락을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벌처스의 블랙마켓을 이용하시려거든 제가 중개해드릴 수도 있어요."
벌처스.
신서울 사태의 숨겨진 흑막이다. 하지만 그 때의 모든 책임을 지고 벌처스는 명실상부 유니온과의 거래 1순위의 회사의 자리에서 내려와 평범한 기업으로 돌아섰다.
그 사이에 사장이 몇 번이 바뀌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사장이 강남의 복구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벌처스는 과거의 그것과는 환골탈태한 정도로 달라지긴 했지만, 역시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니만큼 뒤에서는 무언가 구린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사장님이 전하려고 한 이야기는 뭐야?"
"음… 검은양 팀이 모두 모인 곳에서 직접 전달해드리고 싶었지만, 아마 그건 선배님들이 용납해주지 않으실 것 같고요. 그러면 대신 리더이신 이슬비 선배님께 전달해주세요.
모두 모이신 곳에서 뜯어보시면 될 거예요."
자켓 안에서 어떤 편지봉투를 꺼내서 녀석은 나에게 건넸다.
평범한 흰색 봉투. 그 안에 A4지 한 장 정도가 접혀 들어간 정도의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사장이 직접 쓴 편지이거나, 아니면 공문서이거나.
이 편지봉투를 전달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지, 이내 그 1학년은 우리와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다. 아마 점심을 먹으러 이제 식당으로 향하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던 참에, 그 녀석은 멈춰섰다.
"아, 참. 이세하 선배님, 하나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요."
"응. 뭔데?"
"잠깐 말씀하셨는데, 그 '다른 여자'분이 누구죠?"
맙소사. 내가 그런 말을 꺼냈던가?
마음 속에 있던 말이 그대로 나와버린 모양이다.
빨리 이 녀석을 돌려보내야겠다.
"자, 장난이지. 너가 계속 나를 서유리와 그런 관계로 몰아가니까…"
"아, 그래요? 아쉽네요. 전 또 혹시 이슬비 선배님인가 추측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너! 계속 그런 이상한 말 할래?!"
"헤헤, 장난이에요, 장난! 그러면 다음에 또 뵐게요! 그 때는 꼭 사진이라도 팀 전체와 같이 찍게해주세요!"
말을 마치고는 곧장 녀석은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녀석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그런데 이런 막무가내인 차원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을 안본 지도 꽤 오래된 듯 하다. 그 녀석, 아니 그 녀석들은 어디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유리야, 옥상에서 팀의 모임이 있어. 슬비가 전달할 말이 있대.
점심은 슬비가 직접 도시락을 싸왔다고 하니, 같이 그걸 먹자."
"슬비표 도시락?!"
서유리의 눈이 반짝인다.
그리고 곧장 얼굴과 책상에 묻은 침도 닦을새 없이,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도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런데서 위상력 쓰지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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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하! 분명히 저 '다른 여자'는 나일거야. 안 그래, 애쉬?"
"글쎄. 내 생각으론 오히려 이슬비 양 같은걸?"
"…… 이슬비, 그년이 감히 나의 이세하에게 꼬리를 치는걸 이대로 볼 수만은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누나. 이세하, 그 녀석이 나의 이슬비 양에게 마음을 두는 건 도저히 볼 수 없겠는걸."
방금 전까지 세하와 유리가 있던 교실의 창문 바깥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의 가지에 걸터앉은 두 남녀.
평범한 사람들이 입을 것 같은 복장이 아닌 보랏빛과 잿빛의 의상을 입은채, 두 남녀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린 남자가 말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그 때까지 잠깐의 평온을 누려두라고, 서지수의 아들."
그 말을 남기고 어린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져간다.
그리고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만이 가지 위를 휘돌았다.
BGM 있는 것을 보고 싶은 분들은 유니온 네이버 카페로 가시면 됩니다.
기존 연재분은 여기까지고 지금 계속해서 연재중이니 다음화도 기다려주세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