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Waltz
카페인의노예 2016-02-01 3
"아저씨, 우리 다음엔 저거 타요!"
"쿨럭! 저기, 유리야? 미안한데 조금만 쉬었다가......."
"아이 참! 그럴 시간 없어요!"
제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숨기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아끌며 눈 앞의 롤러코스터를 가리켰다.
그래도 유리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다니, 이건 반칙이잖아. 너무 좋아하니까 힘든걸 이야기 하기도 왠지 미안할 정도라고.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제이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저 웃음을 옆에서 지켜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
"저, 아저씨 좋아해요!"
이제 막 초여름의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들 이런저런 볼일로 자리를 비우고 임시 본부에는 제이와 유리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유리는 정미와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느라 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지만.
올해도 덥겠군, 하며 신문의 건강식품 광고를 보던 제이의 머리속을 울린건 짝을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아닌 유리의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그 충격은 차원전쟁 시절 알파퀸 서지수가 혼자서 차원종 무리를 휩쓰는걸 본 것보다 더한 것이었지만.
"저, 저, 저기, 유리야? 내가 방금 뭔가를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아, 내가 요새 기가 허해서 그런가? 어디 보자, 내가 약 봉지를 어디 뒀더라?"
"농담 아니에요. 나 정말로 아저씨 좋아해요."
유리는 보기 드문 진지한 얼굴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이성의 고백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보살피는 아이라니! 이런건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표정을 보니 유리는 진심인 것 같았다. 아니, 진심이 맞을 것이다. 순수하리만치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 하는 아이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아니, 언제부터?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었던가?
머리속을 휘젓는 수 많은 의문들을 끄집어내 말로 표현하려 해도 무얼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아무 말도 못 한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은 제이였다.
"저 장난하는거 아니에요. 그 동안 쭉 지켜보고 있었다구요."
그 말을 시작으로 유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저 처음엔 허당 아저씨였고, 그래도 가끔씩 보여주는 든든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설레였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눈으로 제이를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들.
어찌보면 너무나 유리다운 이야기였다. 꾸밀 줄 모르기에 순수하고, 서툴어서 더 솔직했다.
그저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그렇기에 그 사람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조금 더 욕심내서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첫 번째가 되고 싶어요.
유리의 푸른 눈동자는 창 밖에 펼쳐진 하늘만큼이나 맑았다. 만약 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면, 그것만큼 죄책감을 지게 하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후...... 저기 유리야, 그게 말이야."
"알아요. 아저씨랑 나이 차이 많은 거. 근데 저는 그런거 별로 신경 쓰고싶지 않아요. 복잡한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아
저씨가 좋아요. 아저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
뭐라고 거절을 해야할까. 정말 백 번 양보해서 내가 이 아이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괜찮지만, 이 아이는 과연 쏟아지는 그 시선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제이는 대답에 대해서 '잠시 시간을 좀 달라'는 말로 보류했다.
이후로 유리는 틈만 나면 자신을 어필했다. 사실 제이로서는 시간이 지나면 유리가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한때의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런 치기어린 고백을 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유리는 계속해서 진심으로 그를 대했고, 그러는 사이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구김없이 웃어주는 유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제이는 유리의 고백을 받은 이후 한동안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지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유리에게 상처를 줄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주말에 "놀이공원에 놀러가요!" 라는 그녀의 말에 오늘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
사실 그 동안 이런 저런 일에 바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한 적이 없었던게 많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라 기대한 유리였다.
그리고 제이로서는 그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
"아저씨, 괜찮아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 제이에게 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매점에서 사온 이온 음료가 들려 있었다.
"하하, 괜찮고 말고."
물론 괜찮을리 없지만 속으로 미리 청심환을 먹어두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제이였다. 롤러코스터 등의 자극적인 놀이기구만 골라서 타는 유리 덕분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유리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분명히 자신 때문에 무리한다며 자책할 아이가 분명하니까.
제이는 유리에게 받은 이온 음료를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 마셨다.
스스로는 머리가 좋지 않다고 해도 누구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지켜주려 하는 그런 착한 아이니까.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좋아하는 제이였다.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는거 아니죠?"
유리는 걱정하는 기색이 잔뜩 서린 큰 눈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을까.
제이는 살짝 웃으며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
유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제이의 손에 붙은 반창고의 질감 때문에 살짝 거친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언제나 이 손으로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든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뺨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바람과,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은 따스한 햇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 간직할 수 있는 이 비밀스러운 시간이 영원하다면 정말 좋을텐데.
태양이 노을을 카페트 삼아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 차창밖의 세상은 오렌지 빛의 왈츠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신나게 놀고 지쳤는지 유리는 제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곤히 잠든 상태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세상 모르게 자는 그 모습을 제이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사진을 찍어두고 혼자 간직해두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 움직이면 유리가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이 모습은 그저 자기 혼자만 기억해두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
벌써 어두운 밤이 되어 제이는 유리의 집에 바래다 주기로 했다.
시간이 너무 빨라서 아쉽다며 작게 투정을 부리는 유리에게, 제이는 다음에도 또 놀러가자는 말을 건넸다. 물론 아쉽기는 본인도 마찬가지 였지만, 어른으로서 똑같이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보다 더 믿음직한 '남자친구' 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줄어들어 갑작스런 정전이 찾아오자 제이는 어쩔 줄 몰라했다.
무의미하게 괜히 주머니에 넣어둔 약병을 손으로 만지작 거려도 뭔가 좋은 이야기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유리의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 대체 그 때까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괜히 무리 안해도 돼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유리야?"
깜짝놀라 유리를 바라보니 유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 보였다.
뭐, 뭐야? 내가 말 없이 있었던게 그렇게 잘못한거야? 아니, 혹시 무의식중에 무슨 실수라도?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제이로서는 좋은 수가 생각날리 없었다.
"나, 사실 알고 있어요. 아저씨가 주변 시선 의식하는 거. 아저씨 눈에는 그냥 나도 세하나, 슬비나, 미스틸처럼 어린 아이로 보이는 것도. 그치만, 난 그래도 아저씨가 정말 좋은데......."
미처 달랠 틈도 없이 유리의 볼을 타고 투명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깨가 흔들리고 고개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 내가 원하는 건 이런게 아닌데......!
"유, 유리야, 그게 아니야! 사, 사실 나도 니가 좋아. 그치만, 뭘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그런 것 뿐이야! 정말이야, 믿어줘."
"하지만 지금까지 내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잖아요. 굳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랬어요. 그래도, 그런걸 요구하면 더 어린애 같으니까...... 아저씨가 날 여자로 봐줬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굳이 말 안한건데...... 언젠가 먼저 해줄거라 생각했는데......."
"......."
제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 소심했다는 걸. 이 아이가 너무 소중하니까,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움츠리고 있었다. 너무 세게쥐면 깨어질 것 같은 구슬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이는 그저 말 없이 유리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유리야. 사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고, 니가 너무 소중하니까. 혹시라도 내가 욕심을 내면 네가 싫어할까봐,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겁이 났어. 단순히 그것 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널 좋아해."
"아저씨......."
"줄곧 곁에 있는데도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곁에 있어도 외롭게 해서 미안해."
유리가 고개를 들어 제이를 올려보았다. 제이는 살며시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주의 별을 모두 다 담아도 이 눈보다는 아름답지 못하겠지. 그저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단 둘만의 우주속에 남고 싶었다. 이대로 시간도 비껴가면 좋으련만.
우리의 이야기는 그저 구름 뒤에 숨은 저 달만이 알고있는 이야기로 간직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유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서, 설마! 드라마와 영화에서나 보던 그 '장면' 이 나에게 현실로 다가온 걸까?
갑작스런 상황에 제이의 심장은 미칠듯이 뛰기 시작했다. 차원전쟁때 처음으로 A급 차원종을 맞닥뜨렸을 때보다 훨씬 더 세차게.
살짝 고개를 숙이니 뭔가 낯선 이질감이 느껴져 아래를 보니 유리가 까치발을 하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걸 주먹까지 쥐며 참아야 했다.
"저기, 유리야?"
살며시 눈을 뜬 유리의 눈빛엔 궁금증과 실망의 기색이 살짝 엿보였다. 분위기도 좋은데 왜 그러냐, 라고 말하는게 보였다.
제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기 손으로 유리의 양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이러면 조금 더 편하지?"
"아저씨......."
유리의 손이 부드럽게 제이의 양 볼을 감쌌다. 손가락 마디에 검도로 인해 생긴 굳은살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앞으로도, 그게 아주 먼 미래가 된다해도, 이 손의 주인은 내가 지켜줄 테니까.
-fin.
정~말 오랫만에 팬소설 게시판에 다시 왔네요 =ㅂ=
에...사실 이런 오글거리는 글은 이제 좀 자제해야지~ 했는데.뭔가 쓰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찰나 왠지 제이랑 유리를 커플로 설정하면 참 재밌을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뭐랄까 너무 오랫만이라서 그런지 손이 좀 굳은 느낌이....후 ㅇ<-<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게임만 한게 너무 컸나보네요
귀중한 시간에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꼐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