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장 이세하] 운증용변 STD(雲蒸龍變 Seha The Dragon) 【 17 】
가람휘 2015-12-15 4
처음 느낀 방향성을 잃어버린 모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얘기로는 많이 들었었다. 대놓고 어떠한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위상능력자가 되기 전까지의 나도 비슷한 입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자, 이것이 얼마나 지나친 처사인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아마 유 하나 사건 때의 학교에서 세하와 했던 것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는, 학교에서 정미와 만났을 때 정미가 험담을 했던 때로 기억한다.
“저기, 세하야. 그… 괜찮아? 정미가 이유 없이 저럴 애가 아닌데….”
혹시나 세하가 정미의 욕을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해져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세하에게 말을 걸었었다.
“딱히 신경 안 써.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하니까.”
“익숙…해?”
“응. 클로저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엄마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기대하고, 클로저를 좋게 ** 않는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고 욕했었으니까. 겨우 이정도로 멘탈 못 잡았으면 진즉에 폐인이 되었을 걸.”
세하는 가볍게 말했었지만, 솔직히 내게는 ‘내가 멘탈을 잡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를 만큼 힘든 일을 겪어왔다.’라는 걸로 밖에 들리지 않았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곧바로 임무가 시작된 탓에 잊었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오른 이유는 아마 세하가 말했던 ‘겨우 이정도’의 일을 내가 겪었기 때문이리라.
세하나 슬비, 제이 아저씨였다면 이 정도 일에는 신경도 안 쓰고 커피라도 마시러 가지 않았을까 싶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직 그런 것은 무리다.
“후….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여기저기 걸어 다녀 보았지만, 다리만 아플 뿐 기분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앞 공원에서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앗…!”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쓰러진 이를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사람을 부르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차, 차원종!?”
“인간의 전사인가….”
그곳에 쓰러져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원종, 드라군 블래스터였다. 바로 얼마 전, 학교를 습격했던 바로 그 드라군 블래스터.
“하필 이런 때에 인간의 전사를 만나다니…. 하늘도 나를 버린 모양이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드라군 블래스터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온 몸의 갑주는 대부분 부서진 상태고, 들고 있던 검 또한 이가 전부 나가서 검보다는 톱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너…다친 거야?”
“후후. 보다 시피. 거짓된 용이라 해도 용은 용.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뱀이 용에게 대항한 결과가 이것이지.”
그 드라군 블래스터는 일어날 기운도 없는 듯,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했다.
“죽일 테냐? 그렇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저 거짓된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 다만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지들이 너희 인간들을 습격할 것이다. 그것은 각오하도록.”
학교를 습격했던 차원종. 저 차원종 탓에 수많은 아이들이 다치고, 죽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을 다치게 하고, 죽이겠지. 하지만─
“죽이지 않아.”
“…어째서지?”
“너, 다쳤잖아? 왠지 널 죽이면 후회할 것 같아. 그냥…느낌이 그래. 그리고 넌 용하고 싸우는 중이잖아? 적으로 적을 잡는 게 제일 좋댔어. 그… 이열치열?”
뭐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지금 저 차원종을 죽이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비였다면 겨우 그런 느낌 하나 때문에 차원종을 살려 보내느냐고 화를 낼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느낌이 들었을 때는 대부분 느낌에 따르는 게 옳았다.
클로저가 되기 전, 검도를 할 때에도 그랬고, 클로저가 된 뒤에도 대부분 그러했다.
“이이제이다. 뭐, 뜻은 비슷하니 상관은 없겠지.”
“…차원종한테 인간의 말을 지적당하니까 진짜 괴로운데.”
어째서 차원종이 나보다 사자성어를 잘 아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왠지 그 대답을 들으면 차원종보다 부족한 자신의 지식에 절망해 버릴 것 같기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너를 죽이면 사람들이 습격당한다며? 그럼 공격할 수 없어.”
차원종 하나를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과, 차원종 하나를 살려 보내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
굳이 비교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전사여.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나?”
“뭔데?”
마주치자마자 견제를 위해 뽑아 들었던 페이즈 건을 내리며 차원종의 대화를 받아들였다.
설마 차원종과 평화롭게 대화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너는 어째서 전사가 되었는가.”
“어째서냐고 해도 말이지…. 원래는 클로저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역시 그거겠지?”
전사, 즉 클로저가 된 이유. 구체적으로 깊게 생각 해 본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바로 얼마 전에 그것을 생각할 기회가 있었으니까.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어.”
아스타로트 사태 당시, 애쉬, 더스트와 대화하며 스스로 내린 결론. 내가 클로저가 된 이유이자, 지금 싸우고 있는 이유.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서 주저가 보이는 군. 결심이 흔들린 건가.”
“…….”
바로 조금 전 느꼈던 사람들의 환멸. 그것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심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클로저를 괴물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세상 어느 괴물이 자신들을 구하고 지켜줄 거라 생각한단 말인가.
애당초 클로저가 없었더라면, 위상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이 사람들을 위해 싸워주지 않았다면 인류는 진즉에 차원종에게 유린당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 허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간의 전사여. 내 이야기를 조금 하도록 하지. 나는 형제들 중에서 유독 성장이 더딘 편이었다. 그 탓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을 숨기고 힘을 모으는 수 밖에 없었지.”
형제. 신강 고등학교에서 적대했던 두 크리자리드 블래스터와 G타워에서 적대헀던 드라군 블래스터. 아마 그 개체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힘을 모아서 드디어 **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허나 모셔야 할 용은 이미 죽고 없을뿐더러, 참모장이 만들어낸 거짓된 자가 왕좌에 앉아있더군.”
아스타로트는 죽었다. 우리 검은양 팀이 본의 아니게 애쉬와 더스트의 힘을 빌려 무찔렀다.
허나 문제가 된 것은 그 이후.
애쉬와 더스트는 우리 검은양 팀이 전투를 벌인 이후 그 장소에 남은 잔류 위상력을 모아 자신들의 위상력과 합쳐 새로운 용을 만들어 냈다.
세하의 모습을 한 군단장. 현재의 용.
“나는 결심했다. 거짓된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로. 그 이후 누가 새로운 용이 될 지는 관심 없다. 그저 자격이 있는 자가 용이 되면 그만인 것. 그것을 위해 동지들을 모으고 거짓된 용에게 반기를 들었다.”
가짜 용을 끌어내린다. 그것을 위해 거짓된 자라곤 하나 모셔야 할 용에게 반기를 들었다.
“나는 설령 이 육신이 녹아 사라진다 해도 이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어떤가, 인간의 전사여.”
“나는….”
“그대의 각오는 쉽게 주저할 만큼 약한 것인가? 한때 목숨을 걸고 용께 대적했던, 죽음을 각오하고 용의 앞에 섰던 그 의지는 이 정도로 흔들릴 만 한 것인가?”
아스타로트와의 마지막 전투. 애쉬와 더스트가 멋대로 도움을 주어 승리할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시간을 벌기 데미플레인으로 향했었다.
단어 그대로 목숨을 걸었던 각오.
그것이 과연 사람들의 환멸 한 번에 모두 사라질 만큼 가벼운 것이었나?
“…아니야. 그 때의 각오는 이 정도로 흔들릴 만 한 게 아니었어.”
실제로 그 때, 누군가가 나를 질책하고 경멸했어도 내가 했을 행동은 같았으리라. 겨우 이런 일 한 번에 사라질 만큼 가벼운 각오가 아니었으니까.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는 그 각오에 따라 행동하면 될 뿐이지 않는가, 인간의 전사.”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차원종에게 충고를 받지 않더라도, 마침 결심을 한 참이다. 그의 도움이 컸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런데 너, 지난번에 학교에서는 자기 동료를 발판이라고 하면서 방패로 삼고 버리지 않았었어?”
그 때 문뜩 든 의문 한 가지.
그는 분명 얼마 전 학교에서 붉은 드라군 블래스터와의 전투에서 세하와 슬비의 협공을 동료인 드라군 가디언을방패로 삼아 막아냈었다.
거기에 그것이 동료가 아니라 용이 되기 위한 발판이라 말하기까지.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느낌이 다르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차원종 같은 느낌.
“─그는 스스로 몸을 던져 나를 구했다.”
“그럼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그럴 필요는 없던 것 아냐?”
“그곳에 용의 사자가, 붉은 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뱀, 붉은 드라군 블래스터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봉기가 실패한다면, 용은 틀림 없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남은 용의 군단인 우리는 전멸하고, 가짜 용이 만든 거짓된 군단만이 남게 되겠지.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한다.”
현재의 용이 만든 용의 군단. 기존의 용의 군단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종들로 가득한 그 군단을 이 드라군 블래스터는 ‘거짓된 군단’이라고 불렀다.
“다른 동지들은 어쩔 수 없이 내게 협력한 것뿐이다. 약자는 강자에게 복종하고, 나는 그들보다 강했을 뿐이다. 용이 그렇게 인식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최악의 경우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악역을 자처한다.
“실제로 가짜 용과 붉은 뱀은 내 동지들에게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 그저 나만을 거슬리게 여길 뿐.”
“…그런 걸 내게 말 해 줘도 되는 거야?”
내가 암만 멍청하다지만, 저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선 안 된 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용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의 동료들은 모조리 몰살당할 것이다.
그런 것을 동료는커녕 적일뿐인 내게 말해줄 이유가 있을 터가 없다.
“그러게 말이군. 아무래도 부상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 같다. 잊어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며 드라군 블래스터가 휘청휘청 일어났다.
“저기! 너, 이름은 뭐야?”
“이름? 아아, 참모장들이 애쉬와 더스트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그것 말인가…. 딱히 없군. 괜찮다면 네가 지어주지 않겠나?”
“음… 뭐가 좋을까.”
아지다하카나 우로보로스, 티아마트는 모두 전설에 나오는 용의 이름이라고 했었다. 헤카톤케일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인, 아스타로트는 악마의 이름이라고 했었다.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지만, 신화나 전설 같은 것 중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제우스나 단군 같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니까.
“음… 뱀이니까 보아 어때? 보아 뱀.”
“보아? 이 세계의 뱀의 이름인가? 나쁘지 않군. 뭐, 그걸로 하지. 어차피 식별할 수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덜덜 떨리는 다리를 두 팔로 꾹 누르며 힘겹게 일어선 보아가 그대로 휘청휘청 걸어서 이 공원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아! 이 검은 가져가야지!”
이가 다 나가 톱이나 다름없게 된 검. 그 검이 공원 바닥에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네게 선물하도록 하지. 날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아준 답례다.”
그렇게 말하며 보아가 검으로 손을 뻗자, 검의 형태가 리펄서 블레이드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도록 하지, 인간의 전사.”
그 말을 끝으로 보아는 몸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