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 복음의 시작 [2화]

톨스토이 2015-12-12 0

그리고 소년이 죽음을 직감한 순간, 하늘에서 검을 든 한 명의 천사가 강림했다.


'샤캉!'


스캐빈져 무리의 날카로운 손톱들이 연약한 소년의 몸을 난자하기 직전,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소년의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한 줄기 반짝이는 빛살과 함께 나타난 한 명의 여성.
아니,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라고 지칭해야 할 정도로 앳된 외모를 가진 그녀는 검은 색과 청색, 그리고 흰 색이 잘 어우러지는 한 벌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현재 저러한 형태의 제복을 입고 다니며 폐쇄지역인 구로에 등장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초국가적 대차원종 조직, 유니온의 정식 요원.
그녀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속도로 스캐빈져 무리와 소년의 사이 앞을 가로막았고, 소년을 향해 달려드는 차원종 무리를 향해서 빼어든 한 자루의 검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휘둘렀다.


"바람 가르기!"


외모에 걸맞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속도로 스캐빈져 무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녀의 검은 바람을 가름과 동시에 스캐빈져 무리 모두를 가르고 지나갔다.
절삭력의 성질을 지닌 위상력을 검에 담아 그대로 적을 향해 내뿜는 참격 앞에 C급 랭크에 해당하는 스캐빈져는 단 일격에 모두 반토막이 나버렸다.


"쿠르르륵!"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양단된 스캐빈져 무리는 덤벼들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후두둑 떨어져내렸고, 참격으로 인해 힘과 생명력을 모조리 소진한 그들은 맹렬히 그들을 거부하는 내부 차원압의 반발로 인해 마치 몸이 불에 타 사그라지는 것처럼 새카만 재가 되어버렸고, 그 재마저 차원압 덕분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후, 이걸로 또 한 건 해결이네."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허리에 찬 검집에 자신의 검을 납도한 다음 그녀는 자신이 구해준 소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좀 전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눈을 한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소년.
그녀의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한 차례 크게 뜬 소년은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찰랑거리는 은발이 엉덩이를 넘어 다리까지 내려와있었고, 위상력의 영향인지 눈동자의 색 또한 은색으로 변화했지만 전체적인 외모는 아주 예쁜 편에 속하는 그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쓱쓱 쓰다듬었다.


"응, 다친 덴 없어.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무지 세구나. 고마워."


누가봐도 자신보다 어려보이기에 본능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준 소년.
물론 소년의 키가 그 나이대의 남자들 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고, 그녀의 키는 소년의 가슴팍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얼굴까지 아주 앳되보였기 때문에 소년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있었다.
소년의 그 행동에 터질듯이 빨갛게 달아올라 버린 그녀의 얼굴.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볼 때, 아무리 봐도 그것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것이 아닌,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활화산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가..."


"응?"


"누가 어린애란 거야!"


머리를 쓰다듬는 소년의 손을 격하게 후려치며 소리지르는 그녀.
아무래도 소년의 말과 행동이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 듯 그녀의 표정은 분노에 차 있었다.


"이래보여도 난 스물 한살이라고! 너같은 꼬맹이보다 훨씬 더 연상이란 말이야!"


"엑??!! 나보다 누나라고?"


그녀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뱉은 소년.
아무리 봐도 그녀의 외모는 기껏해야 초등학생, 잘 쳐줘봐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소년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앳되보이는 얼굴, 그리고 작은 체구, 마지막으로 절망이 느껴질 정도로 없다시피 한 가슴 부위...


'빡!'


"그래! 덩치도 작고 가슴도 없어서 미안하다!"


소년의 눈초리가 닿는 곳을 알아챈 그녀는 잽싸게 들고 있던 검으로 -물론 검집 안에 들어가 있는- 소년의 머리를 정확히 내려쳤고 난데없는 그녀의 일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소년은 머리를 감싸쥐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말은 하지도 않았잖아!"


'찌릿!'


"요..."


나름대로 항변을 해보았지만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는 소년.
그 모습에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년의 뒷덜미를 부여잡고는 그대로 질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아야! 왜 이래요!"


"몰라서 묻니? 여긴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야. 여기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처벌받을 수 있어. 비록 너 같은 꼬맹이라 할 지라도 말이야."


"그..그렇지만..."


완벽한 정론 앞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소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을 이렇게 질질 끌고가는 것에 대한 답변이 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의 불만을 담아 그녀에게 얘기하였다.


"여기에 왜 들어왔는지 대충 어떤 이유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자세히는 묻지 않을게. 내가 입구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앞으로 이 곳에는 다시 오지 말아. 알겠지?"


"네..."


현직 유니온 소속 클로저 요원. 그것도 정식 요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그녀의 말이니 이 곳에 몰래 들어온 것은 무마될 수 있었지만 정작 들어온 가장 중요한 이유를 실패하였기에 소년의 말에는 힘이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녀도 무언가 느꼈는지 자신의 주머니를 살짝 뒤지는 가 싶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들었고, 그것을 투명한 봉지 안에 집어넣더니 그것을 그대로 소년에게 건넸다.
마치 보석처럼 영롱한 무지개빛을 발하는 그 물건을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다보았다.


"자, 받아가."


"이건..."


"차원 결정이야. 차원종을 처치하면 가끔 나오는 건데 네가 구로에 확실히 왔다 갔다는 증거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걸? 어차피 이 곳에 오는 민간인들은 대부분 그런 걸 구하기 위해 들어오거든."


그녀의 호의 앞에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원종에게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준 것도 모자라 무례를 저지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챙겨주다니.
비록 자신이 이 곳에 들어온 목적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정말 용케 그것을 잡아내고 자신에게 이런 것까지 건네준 그녀의 모습에 소년은 부끄러움과 고마움, 그리고 창피함이 뒤섞인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이 정도야 뭘. 그러고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내 이름은 세필리아. 유니온 소속 정식 클로저 요원이고 지금은 한국 신서울 지부에 파견 중. 꼬맹이 네 이름은?"


그녀의 말에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칼바크...턱스..."


소년의 이름을 듣고 묘한 얼굴이 되는 그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기는 했지만 외형은 전형적인 금발벽안의 서양 소년이었기에 소년의 이름을 듣자 작은 의문이 생겨나는 건 그녀로써도 어쩔 수 없었다.


"외모로 봐선 한국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거야?"


그녀의 질문에 소년은 이제껏 그런 질문은 질리게도 들어왔는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그녀의 질문을 담담히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미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지만 나고 자란 곳은 한국이에요."


그 모습에 그녀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 더 이상 캐묻지는 않을게. 이제 입구로 데려다 줄 테니 꽉 잡아야 해."


"네? 그게 무슨?? 으아아아악!!"


칼바크의 의문섞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힘을 두 다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클로저들의 전유물인 위상력의 발현.
그것은 그녀의 두 다리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어 그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소년을 공중으로 띄우기에는 충분했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부유감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꽉 잡아! 안 그럼 떨어질 지도 몰라!"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그녀와 소년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한 줄기 바람과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필리아와 칼바크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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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오랜만에 글을 다시 잡으니 빡세군요.
재밌게 봐주세요 ^_^
2024-10-24 22:42:1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