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는 양떼 -27(3)완-

엘세이드 2015-12-04 10

*[주의] 전편이 있습니다.


전편을 보시면 이해가 더욱 잘 되실겁니다.


이 작품은 '엘세이드' 와 'PhantomSWAT' 의 합작입니다





           [흩어지는 양떼 -1-]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436



           [흩어지는 양떼 -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1459



           [흩어지는 양떼 -3-]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7&n4articlesn=1469



           [흩어지는 양떼 -4-]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1574



           [흩어지는 양떼 -5-]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609


          

           [흩어지는 양떼 -6-]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633



           [흩어지는 양떼 -7-]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4&n4articlesn=1652


          

           [흩어지는 양떼 -8-]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4&n4articlesn=1701


          

           [흩어지는 양떼 -9-]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1744


       

           [흩어지는 양떼 -10-]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1865



           [흩어지는 양떼 -11-]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1958



           [흩어지는 양떼 -1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2046



           [흩어지는 양떼 -13-]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2123



           [흩어지는 양떼 -14-]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2497



           [흩어지는 양떼 -외전-]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2264



          [흩어지는 양떼 -15-]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2790




          [흩어지는 양떼 -16-]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3065



          [흩어지는 양떼 -17-]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3244




          [흩어지는 양떼 -18-]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3504




          [흩어지는 양떼  -19-]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3733




















         

           [흩어지는 양떼 -25-]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ec%96%91%eb%96%bc&n4articlesn=5104






           [흩어지는 양떼 -26-]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n4articlesn=5332






           [흩어지는 양떼 -27(1)-]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n4articlesn=6008






           [흩어지는 양떼 -27(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WriterName&strsearch=%ec%97%98%ec%84%b8%ec%9d%b4%eb%93%9c&n4articlesn=6112




















머리가 아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 걸까. 어느새 주변은 더욱 푸른 색으로 변한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멍하니 펼쳐진,


아니. 멍하니 보이는 눈앞에 펼쳐진 색채들이 검푸르다기 보다는 이제 어느정도 푸른 쪽에 가까워져 있는 이유는 아마 하늘에


낀 먹구름 때문일 것이었다. 아까 밖에서 새벽하늘을 보았을때 하늘은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의구


심이 들며 문득 몸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주려 하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정말 표현의 어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녀는 '손끝 하나도' 못 움직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의 시야는 앞을 똑바로 보고 있


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정신만은 조금 선명해진듯 사고 능력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배짱 좋게 침대로 돌아와 쓰러졌는지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아쇠를 당긴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어가보자, 어느새 공중에서 춤추는 먼지들이 보일정도로 시야는 회복 되었다. 간신히 무거운 머리는 움직일 수 있


을정도로 회복 된 모양인지 약간 목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의식을 처음 되찾았을때는 큰 폭발음 때문에 반 강제적으


로 몸이 반응했었다. 그때도 똑같았다. 이 침대에서 눈을 떴었다. 왜 어울리지 않게 침대에 눕혀져 있나 솔직히 말해 당혹했지


만, 그녀의 눈앞에 들어온 방수시트의 귀퉁이에 적힌 메모를 보고서야 소은은 그가 그녀를 데리고 이 먼 거리를 걸어왔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그가 교전하고 있다는것을 할고 즉시 석궁을 들었고, 세월이 녹슬게 만든 베란다 문이 열리지


않자 전통에서 뽑은 화살로 후려쳐 유리를 깬 다음...그 뒤로부터는 정말 기억이 흐릿했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은채 파편처럼 잠깐 떠올랐다 스러져가는 단편적인 장면만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잠깐 혀를 움직여 보았다. 입


안에서 이상한 맛이 나는것을 느끼고는 곧 그것이 앰플의 향이라는것을 느꼈다. 앰플?


"윽..."


천천히, 손을 침대에 짚으며 일어났다. 스프링이 찌걱대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세상이 빙빙 도는것 같았지만 어느정도 안


정을 찾고 나자 다시 몸을 움직이며 흐려졌던 시야도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머리에 걸쳐진 넝마조각이 아직 후드


의 역할을 하고 있나 확인했다. 그렇지만 시야가 어지러워서인지 흐릿한 천조각만이 보일 뿐이었다. 띵하는 둔한 고통이 밀려


들어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렀다. 피로감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을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는것


을 간신히 떠올리고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신은 이곳은 아직 전장일지 모른다고 외치고 있었


지만, 몸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머리 속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형체가 있었다.


"...이세하."


마치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어린 소녀처럼, 지금껏 억양 없던 그녀의 말투에 억양이 묻어나온것을 자신이 듣고 자신이 소스라


치게 놀랐다. 이러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머릿 속에는 그 생각보다 더 먼저 소년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급히 몸을 움직여


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창이 박힌 채로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결코 적지 않았다. 게다가 그 무리한 움직임은 그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상황으로 상처를 악화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려


하자 무언가가 그녀의 다리께에 올려져 있다는것을 어렴풋한 감각으로 느끼고서야 그녀는 자신의 이불에 덮힌 다리를 애써 주


시했다. 촛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한참을 들여다 보자 그것이 이곳저곳 구멍난 검은 요원용 장갑을 쓴 손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이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애타게 그녀가 찾던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즉시 그


녀는 그 손을 잡기 위해 양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 만으로도 정신을 못차릴정도로 어지러웠지만, 그녀의 손에 닿는 뜨거운 손


의 열기는, 급히 짚어본 맥에 뛰는 심장 박동은,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엎드린 채로 잠에 빠진 것인


지 움직임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주변에 널려있는 몇병의 빈 앰플 통은 그가 그녀의 옆에 누워 쉬기 전에 어떠한 일들을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저분한 치료팩의 포장지나 건블레이드가 방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는것을 보자, 그가 입었


던 상처들이 생각났다. 그의 상처를 앰플로 치료한 것일까. 신체 회복 앰플은 어느새 동이 나있었다. 위상력 회복 앰플도 마찬


가지였는데, 뚜껑이 피때문에 잘 열리지 않았는지 건블레이드로 부숴버린 입구도 눈에 띄었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소년


의 상처를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잡은 그의 손을 다시 한번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곳저곳 까진 상처에 엉겨


붙은 피딱지는 거칠었다. 소년의 가는 선을 가진 얼굴과는 맞지 않을 것만도 같은 상처였지만, 그것이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


엔 없었던 상처라는것을 생각해내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생긴 상처였다.


어떤 감정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게 어떠한 것인지 순간 머리는 파악을 거부했지만, 그게 오래전에


더 이상 느끼지 말자 다짐했던 감정의 덩어리라는 것이 기어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야 말았다. 그 사실에 흠칫 놀라


잠깐 눈이 크게 떠졌지만, 곧 그녀는 소년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상처에 잠을 잔다기보다는 거


의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그 자신에게 앰플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건 나중의 회복을 약속


할 뿐이지 당장 닥친 고통의 퇴치를 약속하진 않았다. 그녀는 문득 그의 손을 쓸어 내렸다. 투박한 남자의 손에서는 놀랍도록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수고했어."


짤막한 한 마디만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후드를 눌러 썼다. 이젠 눈마저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헤졌지만, 그것이 그녀와 세상을 단절하는 둑이자 벽이었다. 왜 그걸 지금 만지고 있는지 그녀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저 습관인걸까. 그리고 그때, 짤막한 신음성이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힘겹게 고개를 이쪽으로 향하는 소


년의 얼굴을 왠지 모르게 마주 볼 수 없어 소은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깨어 났니."


질문이라기엔 끝말이 너무나도 낮아 차라리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조용한 말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세하가 슬쩍 미소


짓는것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옅게 보였다.


"네. 죽을 것 같네요."


정말 과장 하나 없이 말한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그는 잠시동안 움직일 엄두도 못내다가 천천히 어깨를 움직이고 침대를 짚으


며 허리를 세웠다. 잠깐 몸의 감각을 살펴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각은 온전하게 통증을 그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하긴, 치료를 그렇게 했으니까.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쓴 물이 뚝뚝 배어나올정도로 쓰디쓴 웃음이었다. 손에서 말라붙은


핏물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도 않은 채 검붉은 흔적만을 남겼다. 소매는 피에 굳었는지 딱딱하게 각이 잡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소은을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막 등을 기대고 일어난 그녀의 옆모습은 창을 등지고 있어 마치 검푸른 하


늘 속에 녹아 들려 하는듯 아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그의 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손끝 하나라도 움직였다가


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어 따라올것을 각오 해야만 했다. 그런 몸 상태임에도 그는 전혀 신음 소리나 비명소리조차 내지 않았


다. 그것은 일종의 각오이자 속죄다. 그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앰플을 쓴것 같네, 조금만 참아."


소은의 말에 세하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릴뻔했다. 아니, 기어이 웃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기침으로 어떻게듯 웃음을 무마시키


며 그는 큭큭거렸다. 앰플이라. 그랬다면 지금쯤 몸은 이것보단 나았을것이었다.


"네."


그의 짤막한 대답 뒤로는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하늘은 어느새 아침을 알리듯 더욱 푸른 채도가 높아진 채였다. 그렇지만 하


늘로부터 비치는 햇빛은 우중충했다. 비라도 쏟아질것 같은 먹구름이 잔뜩 낀 채 천천히 바람에 몸을 맡겨 그 비대한 몸뚱아리


를 흘러가게 하고 있었다.


"쪽지 잘 읽었어."


그녀의 말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말하는것마냥 멀게만 들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것인지 그의 입은 갑자기 벌려졌다가 닫


혔다. 그런 그를 주시하지도 않으면서 소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구나."


억양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에게 말하는것을 멍하니 들으며 그는 다시 미소지었다. 차원 독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시간이


없는 정도가 아니에요. 언제 사라질지. 언제 이 독이 날 죽일지. 언제 이 죄 많은 내가 죽을지 모른다구요. 그의 그런 소리없는


말대꾸는 그의 목 속에서 눈녹듯 녹아버렸다. 그녀에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네."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은 아직 잘 못움직이겠으니까, 조금 있다가 출발하자."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도 그는 그저 쓴 미소만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조금 전에 이미 그 결정을 내린


뒤였다.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소은은 점점 이상하게도 머리가 몽롱해지는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비볐다. 하지만 거의 파도처럼 그녀에게 밀려오는 기운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피로를 주었고, 세하의


목소리가 들린것은 그때였다.


"누우세요. 그 편이 더 나을거에요."


소은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점점 더 다가오는 피로가 온 몸을 덮으며 그녀를 땅으로 끌어 당기는 듯 했다. 그리고 그때 세


하가 다가오는것을 느끼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등을 받히며 그녀를 천천히 눕혀주는 세하의 손길에 저항할수 없음을


깨닫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세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다시 들려왔다.


"아까 화살 쏘신것 덕분에 살았어요. 혹시 어떻게 됬는지 기억 나시나요?"


당연히 기억이 날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고, 세하는 나직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쏜 화살 덕분에 놈들은 다 날아갔어요. 정말 엄청나던걸요."


감탄한 기색이라기엔 나직했지만 그만큼 그녀의 좋지 않은 몸 상태를 파악하는것인지 예민해진 귀에도 큰 거부감 없이 세하의


목소리는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흐릿한 시야앞에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그의 입술을 벌렸다 닫혔다를 반복했지만, 다음


말을 잊지는 못했다.


"그렇구나."


그녀의 그 조용한 대답을 듣자 세하의 마음 속에서 더욱 요동치는 거무죽죽한 무언가가 숨막히다는듯 비명질렀다. 그 발톱이


그의 가슴속을 할퀴고 비집고 나오는 듯 한 환각이 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듯 했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어느새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토해내고 있었다.


"왜...왜 움직였어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 말을 이어야했다.


"왜, 나같은 것 때문에 그렇게...혼절할정도로 위상력을 뽑아 쓰고, 상처는 상처대로 벌어졌어요. 왜 그렇게 나같은 놈 구하는


데 무리하세요, 왜!"


마지막은 고함이었다. 자신 따위를 구하느라 다시 상처가 벌어지고, 쓰러져버린 그녀의 모습은 납득하기 어려울정도로 창백했


다. 위상력을 한계까지 쓰고 난 이후의 후유증은 세하 역시 잘 알았다. 일반적으로 견딜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위상력을 한계까지 써보고 사흘동안 잠만 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도 약물치료를 받으며 가까스로 회복했었다. 물론 당


시에는 많이 어렸기도 했지만, 형용할수 없는 무게추가 그의 몸에 달린듯 움직일수조차 없는 고통이었다. 앰플 사용을 했음에


도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물며 소은은 막 기절에서 깨어난, 상처투성이 몸으로 다시 한번 몸을 한계


로 몰아붙였다. 겨우 그를 구하기 위해서.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같은거 구하느라 그렇게 녹초가 될 필요 없어요.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고요!"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그녀는 죽을 뻔했다. 그가 가까스로 몸을 팔로 땅을 짚으며 기어와 그녀에게 앰플을 모조리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 기력 소진으로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위상력의 소진은 엄청난 기력을 뺏어갔다. 그럼에


도, 베테랑이라 자부할만한 정예요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신을 죽을때까지 몰아붙인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난 약해요. 그래서...그래서 당신같은 사람도...내가 지키고 싶은것들도 못지켰어요."


목구멍을 찢고 올라오는 말이 자꾸만 새어나가는것을 참지 못하고 그는 손을 움켜 쥐었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그런...그런 내가 왜...당신에게 지켜져야 하는거에요. 난 죽었어야 해요. 이제는 곧 죽을거에요. 그런데 왜 나를 구하려 했어


요, 대체 왜!"


가만히 있었다면 그가 차원종에게 살해당하고 나서 그녀는 기력을 회복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쪽지에 자신


이 SS급 차원종을 유인하면 유리와 슬비를 데려간다 했지만, 그녀는 그저 그대로 이 지역을 이탈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팀


페가수스는 사실 대한민국의 정예요원들이기 때문에 작전이 잘못되었다는걸 그녀가 빠져 나가 알리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서 정찰기나 헬기등이 편대로 서로를 엄호하며 이곳을 한번 지나다녀 찾아 낼 수 있을것이었다. 더 한다면 마을을 괴멸시켜버


릴 부대를 투입시킬수도 있었다. 그 '마을' 에는 불법적인 체류를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 별것 아닌 범법자, 정치범죄자 등이 살


고 있었으므로 탈세등의 명목 이외에도 명분은 차고 넘칠정도로 충분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그녀가 아닐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위해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대체 왜. 그는 어느새 자리에 누운 소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은의 눈동자 역시 정확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청색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난...난 죽어도 싸요. 내가,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으니까...내가, 내가 약해서...!"


점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말할 단어를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뒤 져 봐도 하나도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가 없었다. 흡


사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마냥 모든 감각이 흐렸다.


"내가 약해서!"


그가 약해서. 그가 약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유리와 슬비가. 검은 양 팀이, 페가수스 팀이, 소은이. 알파퀸이. 그가


사랑하던 모든 이들이 등돌려 떠나가는 환상에 사로잡힌적은 벌써부터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 꿈에서 깨어 보면


온 몸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그 자신의 무력감에 젖어 광소했던적도, 어쩔줄을 모른 채 제자리에서


방황하던 적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며 최후만을 생각하던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약한 책임을 그가 받겠다는


데, 그 말고도 소은이 고통을 받는다는건 절대, 절대로 용납할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끓어오르는 새빨간 무언가가 터져 나갈듯


욱신거렸다. 이는 서로 부딛히며 빠드득 하고 갈리는 소리는 낸다. 꽉 쥔 주먹에서는 아물려 하던 상처가 갈라저 피가 흐르고,


손톱이 파고든 자리는 멍이 든다. 그리고 그때, 서늘한 감촉이 그의 손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격정적인 말투와는


상반되는 조용한 말이 그의 귓가에서 들렸다.


"괜찮아."


순간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과 함께, 형용할수 없는 감정이 그를 뒤덮었다. 무슨 감정일까. 무슨 생각일까. 다시 서늘


한 감촉이 꼭 그의 손을 쥐는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정적이 흘렀다. 고요한 자장가처럼 정적은 나직히 어떠한것도 아닌 선율을 연주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하


늘은 회색빛에 쌓여 더욱 묘한 색채로 변하고 있었다.


"난 악해요."


조용하게 세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소은은 가만히 들었다. 격양된 말투는 어디갔는지, 어느새 조용하게 바뀐 그의 말


투는 혼잣말이라도 하듯 나긋했다.


"난 악해요. 당신까지 이 일에 끌어들이고, 팀 페가수스도 날 도우러 왔죠. 유리와 슬비는...검은 양 팀은 끝까지 날 저버리지


않았어요. 난...!"


무슨 말인지 갈피조차 못 잡을 말이었지만, 소은은 알아들었다는듯 고개를 위 아래로 살짝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난 지독해요."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이 정적이 꺼내기 힘든 말을 해버린 그의 마음 속을 달래주는 공백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


다. 아니, 아니었다. 달래주는게 아니라 더욱 찢어놓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을 갈가리 부숴놓는 이 공백과 정적은 단 한번도


죄의 고백을 한 적이 없다가 막 그 죄를 저지른 이가 나라며 고한 이의 그것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니, 추악하게도 곧


그에게 닥칠 멸시의 말을 기다리며 환희에 떨고 있었다.


"넌 악하지 않아."


세하는 그녀가 다른 쪽 손마저 그의 한 손을 감싸 쥐었다는 사실을 피부가 맞닿아 전해지는 서늘한 체온으로 알았다. 정적은


오래지 않아 소은에 의해 끊겼다.


"끝까지 남을 위하고, 끝까지 네 죄라는 걸 생각하며 너 자신을 혹사시킬 필요는 없어. 너도 사람이잖니."


그녀는 세하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것을,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입을 닫는것을 보고서 그녀는 가만히 그의


손을 쓸어내렸다.


"슬플때도, 아플때도 있어. 사람을 죽여서 평생을 죄책감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을 지키지 못해서 평생


을 자조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지금 나와는 다르게 끝없이 고민하는 너는 악하지도, 약하지도 않아, 세하야."


그 순간, 세하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아아..."


마치 댐이 무너지듯 갖혀있던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아아, 이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이 말에 얼마나 목말랐는가. 악하


지 않다고.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가 얼마나 절실했던가. 그의 끝없는, 답없는 고민의 결론은 언제나 모든 일의 원흉


이자 악의 근원은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 참을 수 없는 아픔과 혹독한 자해는 쳇바퀴처럼 이어져 그를 뭉개었었다. 흉칙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는 꿈을, 괴상한 짐승이 되어 사랑하는 이를 갉아먹는 꿈을 꾸었던 적은 언제적부터였을까.


"나는 그런 네게 구원받았어."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하는 팔에 파묻었던 고개를 흠칫 들었다. 의아함보다 가장 먼저 그의 눈 앞에 들어온 장면이


더욱 깊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하늘이 펼친 검푸른 그라데이션에 물들어가는 빛은 어두우면서도 밝았고, 그녀의 뒤로부터


마치 달빛처럼 은은하게 비춰내리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을만큼 무언가가 속으로부터 치밀어 올라왔다.


"사람을 죽이고, 언니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젖어 자살까지 해보려던 적이 있었어.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죽을 용기조차


없는 걸 알았지. 그때부터 난 감정을 숨겼어. 그게 내 유일한 속죄였거든. 그리고 무서웠어. 내가 사람을 죽여놓고도 사람을 죽


였다는 죄책감보다 복수를 했다는 쾌감이 먼저 느껴진다는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듯 무심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어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후드에 가린채 그로부터 조금


옆으로 돌아 있었기에 세하는 그녀의 표정을 알수는 없었다. 그녀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을때까지 이 무서운 나를 가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를 보면서 나도 조금은 달라진것 같아."


소은은 무언가 더 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자꾸만 밀려오는 피로감때문에 다음에 그녀


가 말한것은 짧디짧은 한마디였다.


조용히 말하는 그녀의 말이 조금 떨린것 같이 느껴져 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막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소리에 들


려 그렇게 들린거라고 단정지었지만, 그 짧은 바람소리가 멎기도 전에 세하는 입을 열었다.


"...원망하지 않아요?"


잠깐 그의 말이 좁은 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무언가는 그에게 더욱 질문하기를 명령했다.


"날 원망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아니라 검은 양 팀의 동료를 대려갈수도, 아니. 나 혼자 갈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당


신에게 가자고 했다고요. 당신이 따라올걸 알면서도! 전투의 효율성? 그런건 따지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떠올린 구실이지. 그


냥 난 나 혼자 죽기 싫어서!"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그 오물덩이, 검은 짐승이. 아니,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던간에 생각할 여유


조차 없이 꿈틀거렸다. 하지 말라 부르짖는 그것은 더욱 세게 그의 심장을 움켜 잡는듯 미치도록 세하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곧바로, 억양의 변화 조차 없이 그의 귀에 들려온 대답에 그는 그 자신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빛, 푸른 연회청색빛 하늘이 정갈하게 내리비치는 창 밖 풍경에 녹아 있는 것인지, 먼지조차도 그 푸른 하늘에 휩


싸여 신비로이 보이는 방 안의 풍경에 자리 잡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눈 앞에, 그 풍경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


리는 그녀는 힘겨이 말했다.


"알고 있었어. 이슬비와 서유리라는 두 아이가 네게 소중하다는것도, 내게만 그 이야기를 한 이유가 그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


서라는것도-"


그녀의 눈을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역광에 베일 드리워진 얼굴을 바라볼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그런 심정에도 불


구하고 그녀의 목소리, 더 이상 억양이 없다고 말하기 힘든 목소리는 다시금 그의 귀에 내려 앉았다.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더 이상 괴로워 하지 마."


다시 한번 주변이 핑 도는것을 느끼며 소은은 살짝 압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이 짓뭉개지는 느낌조차 둔하게 느껴졌다. 차가


운 손발은 움직이기를 거부하는것 처럼 뻣뻣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그에게 말하리라 마음 먹었던 말이니 만큼, 무언


가가 아주 조금은 그녀의 내면에서 녹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그러니까..."


조금 녹은 마음, 조금 부족하리만치 공허한 그녀의 마음 속 무언가가 크게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녀가 한 고백은 그


녀 자신의 마지막 한계선이었던 무언가를 넘어버린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이윽고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떨렸다. 물기가 어렸다. 더 이상 말을 잇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에겐 해야만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왔던 차갑게 잠든 이성과 감정은 더욱 매섭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울먹이는 소리인지, 기쁨에 찬 목소리인지, 당황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억양이 없던 그녀의 말에


서는 황무지에서 피어난 작고 여린 꽃같이 미약하지만 뚜렷한 무엇인가가 확실히 섞여있었다. 잠을 자라고 아무리 애원해봐도


도저히 그치지 않는 요동은 결국 그녀의 얼어붙은 심장 밖으로 터져 나와버리고야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턱에 맺


혀 아롱거렸다. 얼마만에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기억의 파편들이 녹아 버린것인가, 아니면 얼어붙어있던


가슴 속의 감정들이 녹아버린것인가. 그치라고 다그쳤지만, 더욱 더 서럽게 흐느끼는 무언가를 주체할 수는 없었다. 견디기 힘


들어 그 감각마저 잊어버렸을 만큼 기나긴 겨울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힘이 빠져버린것인지 생각했지만, 곧 부르트고 상처 투성이인 손이 그녀를 잡아 끌어 당긴단 것


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느새 세하가 그를 끌어 안고 있었다.



"정말...미안해요."


그것이 무엇이던, 그녀를 끌어 안은 두 팔이 수백년동안 찔린 채 얼어붙어가는 고통을 감수해온 심장에게 이젠 괜찮다고 속삭


이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다정한 손길이 얼마나 필요했던가. 이 온기가 얼마나 필요했던가.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저 미지근하기만 했다. 한동안 말 없이 그에게 안겨있자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


다. 온 몸에 도는 온기에 아찔한 기분조차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은은 그를 안고 있는 세하 역시 조용히 울고 있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온기에 취해버린 것인지 점점 졸음이 다가오는 듯 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미안해요. 정말로...정말로 미안해요..."


울음 섞인 그의 목소리는 따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한 구석 역시 따듯한 기운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세상은 짙푸른 색의


색으로 덮였고, 먼지들에 휩쌓인 파랑은 애처롭게 둘을 위로하려는듯 잔잔히 춤췄다.


부드러운 선율이 어디선가 소은의 귀에 들려왔다.


아픔을 노래하는 목소리, 슬픔을 노래하는 목소리, 지친 삶을 노래하는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녹아버


린 그의 마음 속 얼음 송곳들이 보내는 작별 인사라는것을 깨달았을때, 그녀의 피곤한 귀에서는 더없이 따듯한 목소리 하나만


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그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짚던


그녀는 그것이 소년이 그녀에게 작별인사로 썼던 메모의 마지막 부분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래, 분명히-그런 말이었다.


"정말...정말 고마워요. 소은 누나."


그래, 정말로 그는 그에게 구원받았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그녀는 미소지었다. 천천히 이불을 덮어주는 소년의 형체가 아련하게 보였다. 부드럽게 둘렀던 팔을


푸르고 베게를 머리에 대주는 손길에게 말하려 했지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마지막으로 들려온 한 마디만이 그녀에게 나직


이 인사했다.


"...많이 무리 하셔서 피곤하실테니까, 조금만 주무세요."


순간 소년의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주사기에 꽃힌 약물 카트리지가 수면제라는 사실을, 응급 키트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흔


하디 흔한 강력한 수면제란 걸 깨달았을 때, 그녀의 의식은 멀어졌다. 그리고 **가는 시야 속에 마지막으로 조용히 그의 목


소리가 울렸다.


"일어나시면, 다 끝나있을거에요."


잠들 수는 없었다. 그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끝까지 나약했다. 혼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걸을 자신이 없어


그녀를 끌어들였음에도, 결국 그는 지금 그 혼자서 발걸음을 떼려하고 있다는걸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다. 아아, 막아야 했다.


가게 두면 안되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이가, 어느새 부턴가 가장 소중한 이로 자리잡은 그를 지켜야만 했다. 도움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좀체 움직여 지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며 흐릿해지는 형체들이


이윽고 완전히 닫힌 그녀의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을때, 마지막으로 그녀의 귀에 세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누나."


붙잡을 수 없는, 그리고 그녀에게 그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안타까울정도로 애처로운 그 목소리가 방 안을 물들인 하늘색처럼


아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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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둔해져가는 손 발의 감각을 되 찾기 위해서 세하는 손을 마구잡이로 비벼대었다. 곱아드는 손가락들은 찢겨질대로 찢겨


진 장갑에 숭숭 뚫린 구멍들 때문일 것이었다. 슬피 우는 새소리가 왠지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어 놓는것 같아 자신도 모르


게 마주 비비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김을 불었다. 후욱 하고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새하얀 수증기로 변해 날아가며 그 온기


의 일부분을 그의 손에게 넘겨주고 갔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곱아든 손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득 언제부터인가 종


적을 감춰버린 햇살들은 이제 하루 내내 먹구름에 둘러 쌓였던 우중충한 하늘을 더욱 회색빛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주 짙


은 회색도 아닌 주제에 거기에다 파랑 물감 한통을 끼얹은 듯 한 하늘의 색깔이 놀라우리만치 맘에 든다는것을 깨닫고 세하는


의미 모를 헛웃음이 흘러 나오는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하하..."


소은을 방에 눕이고서, 그 방문과 창문을 단단히 용접해 놓고서야 그 건물을 빠져 나와 움직인 그였지만, 이제는 움직일 힘조


차도 그다지 많이 남아 있는것 같지 않았다. 온몸 그 어느곳에서도 아픔을 호소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창에 관통당한 상처


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왼쪽 어깨의 상처는 다시 한번 격렬한 전투로 터져버려, 고름에 눌러 붙어버린 붕대를 어쩔까 고민하


다 그는 그냥 그대로 붙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 상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는가.


"큭....하하하."


웃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크게 숨을 들이 쉬자 폐부분에서 어김없이 통증이 엄습해왔다. 아까 몸에 고슴도치처럼 박혔던 창들


도 뽑아 붕대를 감아 놓아서, 흡사 미라같이 생긴 자신의 몰골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고통들은 이제 추위와 더불어 그를 점점


파먹고 있었다. 작전요원복은 나노섬유질 어쩌구라는 미래소재를 적용시켜 왠만한 방한복보다도 더 큰 방한효과를 자랑하며,


여름엔 통풍이 매우 잘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들은 마치 한기를 빨아들이는 구멍처럼 그의 몸


깊은곳까지 추위를 들이켰다. 오싹한 전율이 그를 휘감았지만, 그는 그래도 입가에 어린 자조의 결실인 미소가 가시지 않는단


것을 깨달았다.


"하아..."


들이 내쉰 숨이 차가웠다. 머릿속은 차가워진지 오래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마음만은 조금 가벼워


졌다. 그는 소은의 목숨을 지켰다. 그녀의 의중이 어떠했건, 그에 의해 그녀가 죽는다는 결말을 용납할수야 없었다. 그것은 어


쩌면 그 혼자만의 욕심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사라질 터였다. 죽을 터였다. 그를 위해, 혹은 그 어떠한 이유라도


그의 죽음의 길을 그녀와 같이 걸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없어졌다. 처음 죽음이라는 길을 걸어간다 생각했을때 떠올렸던 뿌


리 깊은 두려움과 공포들은 이제는 어느새 그의 심장을 먹어 치워버린것인지 더 이상 그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인마냥 미약히 고동쳤다. 그래, 곧 죽을 이에게 심장의 고동은 왜 필요하겠는가.


곧 죽을 이에게, 동반자로써 소중한 이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 그는 이렇게 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가 결정한 최선의, 최고


의 선택이었다. 입꼬리는 얼어붙어버린듯, 아니. 말라 붙어버린듯 쓰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정말 마


지막 하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 다리가 심하게 격통을 호소했지만, 그것따윈 알 바 아니었다.


"크윽..."


이를 악물고는 옆에 풀어 놓았던 건블레이드로 땅을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 섰다. 걸음걸이까지 지팡이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


었지만, 다리를 굽히는 동작에 고통이 뒤따랐기에 일어서는 동작만큼은 지지가 필요했다. 마치 악몽같은 고통들이 그의 머리


를 어지럽혔다가 누그러드는것을 반복했다. GPS는 방금 꺼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는 GPS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보낸 지점


에 도착할 것이었다. 만일 소은의 짐작이 틀렸다면 낭패인 셈이지만, 그의 본능적 직감이 그를 확신에 차게 만들었다. 점점 가


까워지는 존재는 죽음일까, 아니면 그 강대한 힘을 가진 SS급 차원종일까 고민하는것도 그만둔지 좀 시간이 지난것 같았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문득 배가 고픈것 같아 비상식량의 캔을 주머니에서 뒤적여 꺼내 포장을 뜯었지만, 이내 먹을


것을 먹는것 조차 하기 싫어져 봉투 째로 땅에 버렸다. 음식을 먹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금 시린 손을 녹이기 위해 주머니


에 손을 넣어 뒤적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걸려 그는 그것을 꺼내어보았다. 게임기. 아마 배터리조차 방전되었을 그의 익숙한 게


임기. 세하는 천천히 그것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젠, 더 이상 그런건 그에게 필요 없었다.


문득 그의 생각에 가끔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밥이 생각났다. 훌륭한 식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간소한 식사들이 주로 대부분


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맛있는 밥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에 물기도 어린 듯 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다.


어머니, 알파퀸인 그녀는 사실 그에게 있어 모성애 넘치는 부모가 되지는 못했다. 분명 노력하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하


는 애정 표현은 간혹가다 짧게 입맞춰주거나 짧은 포옹 정도 뿐이었다. 그마저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이 어렴풋했다.


"아아..."


이유 모를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니, 그저 그런 아들이라서, 당신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이어서 얼마나 속을 졸


였는지 몰라요. 얼마나 노력해야 당신을 따라갈 수 있을지 아득해졌을때 난 도피했죠. 내가 당신을 조금만 닮았다면 얼마나 좋


았을까요. 힘을 가져서 내 친구들을, 다른 이들을,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원망하고, 그렇게 증오까


지 했던 존재이며 동시에 그 너무나 아득한 우상이던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 담긴 그 말은 무엇


에 감싸져 있는 듯이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녀를 떠 올릴때마다 그가 입 밖으로 그것을 내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야 말로 왠지 그는 말할 수 있을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입을 반쯤 벌렸다.


"어..."


이상한 음색이 마치 라디오의 노이즈 마냥 거슬렸다. 적막한 숲속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는 바보처럼 나약했고, 그가 잘 아는


그 자신처럼 치졸하고 음험했다.


"엄마..."


왜 나는 당신의 밑에서 태어났을까요. 왜 나는 엄마의 밑에서 비교 당해야 할까요. 왜 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권리를 얻지


못할까요.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할까요. 그렇지만 그런 말들보다 가장 그의 깊은 내면 속에서 언제 한번 꺼내 보았던


말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퇴색되고 빛 바랜 그 단어 한마디가, 그의 생명이 꺼 져가는 이 시점에서조차 잘 나와지지


않았다.


"엄마...!"


고함지르듯 외쳐**만 그 다음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밑에서, 엄마의 그림자 아래서, 엄마를 벗어나기 위해서, 엄마


에게 칭찬듣기 위해서 해 왔던, 그리고 항상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통해 성장한것이 엄마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흡한


실력밖에 되지 않았다는것을 꺠달았을 때도 느꼈던 권태감이 점점 그의 몸을 옭아매었다. 도대체 몇개의 감각이 지금의 그를


휘감고 있는지 그는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구렁이처럼 부드럽게 숨통을 조이는 그 감정들은 이미 그를 반쯤 미치게 할 정도였


다. 그렇지만, 그 혼탁한 의식속에서도 그는 기어이 마지막으로 꺼내야 할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랑해요."


아아, 사랑한다. 어머니를, 내 우상을, 내 증오의 대상을 사랑한다. 마을에 남아있을 슬비와 유리 역시 그는 사랑했고, 팀 페가


수스를 사랑했고, 소은을 사랑했고, 검은 양의 모두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느끼는 사랑을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표현조차 하지 않고 있었냐는 그 자신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 와서야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들, 얼글에 지어진


웃음들, 표정들.


"...사랑해요."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그것을 들은 이는 없을 터였다. 이 며칠 사이에 후회라는것을 뼈져리게 느껴버린지라 더 이상의 가슴이


무너지는듯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저 공허한 가슴에 휘몰아치는 싸늘한 바람은 그의 온 몸을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


의 진심조차 전해듣지 못한 그의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하는, 듣지 못할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었다. 이윽고 완전히 해가


사라지고 주변에 내려앉은 어둠의 장막은 다시금 그의 앞을 검게 물들였다. 시간으로는 오후 8시 정도 될 터였다. 손목시계의


라이트 기능으로 시간을 확인해 볼까도 했지만, 그다지 그럴 필요가 없어보여 그는 건블레이드를 등에 매고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기껏해봤자 한시간


남짓의 거리, 그것도 험난한 이 폐허도시 일대의 노면상태를 감수했을때의 이야기었다. 곧 있으면 이제 이 기나긴 이야기의 끝


이 보일 터였다. 그래, 끝이. 사랑하는 이들과의 진짜 작별이.


마음 속에서 끝없이 그를 괴롭혔던 검은 짐승은 체념한 것인지 더 이상 그 이빨을 드러내지조차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던 간


이제 그것 역시 그의 끝을 예감한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끝을 내리라. 이 모든


악몽의 원흉이자, 악몽의 근원인 자신의 목숨은 이제 사라져야만 했다. 그의 사랑하는 이들이 어차피 죽을 그에 대해 감정들을


정리할 기회를 빨리 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그리 해야 했다.


저벅, 저벅, 모래가 그의 신발에 짓씹히는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한걸음, 한걸음을 뗄 수록 그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차곡


차곡 정리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양되었던 공포는 차갑게 가라앉았고, 끊임없이 불합리하다 외치던 그의 마음속 한켠의


정**를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 떨어질것만 같던 별들이 이젠 보이지 않았다. 도시와는 다르게 이 곳에서


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밤하늘이 보였었다. 신서울이랑 떨어진 위치가 얼마 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많은 별을 보


며 짧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낸 그에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무래도 먹구름 때문일 듯 했지만, 아무런 빛조차 없는 밤하늘 아


래를 너무 많이 빛이 비치지 않도록 얇은 종이 수건으로 앞부분을 감싼 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것


은 고역이었다. 문득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답답해, 너무나도 답답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스읍, 공기를 들이 마시


는 것 만으로도 찬 기운이 밀려 들었다. 부족해, 부족하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리고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한


그 순간, 세하는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무언가 느껴졌다.


'철컥'


이미 그의 손은 그의 벨트로 가 있었다. 문득 익숙한 혁대에서 그의 건 블레이드를 뽑으려 하던 그는 건 블레이드를 등 뒤에 매


어 놓았다는것을 깨달았다. 등 뒤로 메어둔 건블레이드의 무게가 묵직하게 그의 뒤를 잡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


게 짧은 감회가 들었다. 정식 요원이 되고 나서는 조금 다른 운용법만 익혔을 뿐, 약간 상향된 성능같은 기능들을 사용하면서


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새삼 이 지역으로 파견되어 몇차례의 전투를 치뤘던, 그의 등 뒤에 묵묵히 걸려 있는 그


것의 존재감이 무거워졌다.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가 그것을 뽑으려 한다는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만


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저항하리라. 결코 이기지 못할 상대를, SS급 차원종이라는 괴물을, 모든 이들의 마지막 도착점에게 저


항하리라. 죽음으로 아무런 발버둥도 없이 끌려가지는 않을것이다. 부서지기 전까지 저항하리라.


이윽고 잠시 허벅지께에 머물러 있던 손끝이 천천히 올라갔다. 아주 느리게 올라가는 그의 손끝이 어둠을 느릿이 가로질렀다.



날개접은 어둠이 움찔하는듯 공기가 살짝 요동쳤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어깨까지 손이 올라갔다. 미약하게 꿈틀대는 위상



력이 벌써부터 요동치려 하는듯 한 느낌이 뼛속 깊이 작게 느껴지는듯,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모든 감각을 느



끼며 그는 다시 숨을 들이 쉬었다. 모든 한기가 밀려들었다 나가는 감촉이 쓰라릴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것



인지도 몰랐지만, 어딘가에서 분명히 통증이 밀려왔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그의 손에 느껴졌다.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그



의 손이 건블레이드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맞서 싸우리라. 분명 그는 이곳에서 죽을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건블레이드를 뽑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푸른 위상력이 폭사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위상력의 순환을 그는 온 몸 깊숙히


느꼈다. 아아, 지긋지긋한 위상력. 온몸을 휘감는 형언키 힘든 힘들의 축제. 그래, 이걸 그는 증오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위상력이 밝게 주변을 비추었다. 동시에, 귓청이 찢어질만큼 소란스러운 소리가 사방을 요동


쳤다. 검은 밤에 밝게 폭사하는 위상력은 차원종들의 잠을, 혹은 신경을 건드린 것이리라.


차원종들의 비명소리. 고함소리, 호통소리. 포효, 포효, 포효들.


'크아아아아악!'


'키에에엑!'


뒤얽혀 수많은 소리를 자아내는 근원들는 어둠에 감싸여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은 무서웠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적은 무


섭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발을 떼었다. 덤벼라. 끝까지 그는 싸우리라. 수백개의 안광이 어른거렸다. 수천개의 살의가 그를 감


쌌다. 차원종들, 일대의 모든 차원종들, 말로만 듣던 SS급 차원종들의 수하인지, 낮에는 보이지조차 않던 차원종들 모두가 그


를 향해 적의를 보내는듯 했다. 육감은 그에게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라 경고했지만, 앞으로 다음 발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


은 결단코 흔들리지 않았다.


한걸음, 두걸음. 발자국을 디딜때마다 더 광폭해지는 울음소리에는 차라리 광기마저 깃든듯 보였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검은


형체들이 어렴풋이 보인것 같았지만, 어둠의 장막 속에서 움직이는 그들을 분간해 낼 수는 없었다. 세걸음, 네걸음. 누렇게 빛


나는 달빛이 구름에 가려진 채 살몃 그의 주위를 비추는것이 마치 조롱처럼 가증스러웠다. 건블레이드에 이미 휘감긴 푸른 위


상력은 웅웅 울어대고 있었다. 어서 덤벼. 삶에 미련이 생겨버릴것 같잖아.


온몸의 근육이 죄어들어 긴장했고,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고통마저 희미해져갔다. SS급 차원종까지의 거리


는 마지막으로 확인한  GPS의 신호로 어림잡아 계산하건데 약 300m정도. 사이킥 무브를 사용하면 단박에 좁혀질 거리였지만,


그것 하나로 이젠 더 이상 남아있지도 않은 엠플로도 충분히 충당하지 못할정도의 위상력을 소모해버릴 것이 뻔했다. 그는 장


기전으로 이 싸움을 이끌어야만 했다. 더 멀리, 더 먼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SS급 차원종을 이끌고 서울로


간다는것은 말도 안됐다. 그렇다고 마을방향으로도 절대 갈 수 없었다. 북으로, 위로 끌고 올라가야만 한다. 수없이 되새긴 그


의 마지막 임무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이제 결말의 시간이었다.


"그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짓쳐든 고요함이 너무나도 괴상해서 세하는 문득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죽어버렸나 하고 잠


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오르는 푸른 위상력은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고요함으로 변한 주변은 더 이상


살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이유가 방금 들려온 그만이라는 소리에 의해서라는것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


었다. 그 말고 인간이 있었던가? 아니, 인간이 명령하면 차원종이 복종한다는것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인간의 말이었


기에 더더욱 그가 무언가에 홀린 것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목소리 역시 또렷했고, 이 침묵 역시 확실했다. 그


때, 구름에 가려 싯누렇기만 하던 빛에서, 구름이 잠시 달을 놓아 준 것인지 창백한 겨울의 색을 비추듯 하얀 달빛이 사방을 내


리 비추었다.


놀랍게도,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살기의 원흉들은 꿈이라고 생각되었을 정도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뭉개


진 풀숲이나, 짓이겨진 흙들, 간간히 보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진 광경만이 그가 환청을 들은것이 아니


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연이어 그의 앞으로 쭉 뻗어있는 도로, 아니. 도로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아스 팔트와 흙들의 혼


합덩어리로 이루어진 길의 끝에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불분명한 형체였지만, 분명히 사람의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영에 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사람?


"누구지?"


내리 찍는듯한 어투. 강압적인 힘이 실려 있지만,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을때, 그것이 그 인영으로부터 들려


온 이야기라는것을 깨닫고 세하는 건블레이드를 자신도 모르게 살짝 내렸다. 너무나 권위적인 말투였지만, 놀라울만큼 자연스


러웠기에 그는 자연스레 대답할뻔 한 자신의 입을 호되게 질책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죠?"


세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생각보다 위압적이지 않은 자신의 말투에 담겨있는 위축된 자신을 깨닫고는 크게 놀랐다. 설마 저 인


영의 목소리에게 압도된 것이란 말인가.


"나를 말하는건가?"


이상한 대답이었다. 주변에 세하와 그녀밖에 없었음에도 그렇게 답해온 인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걸어


오며 흙과 나무조각, 깨진 아스 팔트들의 조각이 부딛히는 소리가 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것을,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세하는 알아 차렸다.


"어떤 대답을 원하지."


역시 강압적인 말투였다. 그의 주변을 휘감고 있는 밝은 위상력이 있었음에도 그것조차 신경쓰지 않으며 어둠 저편에서 이쪽


으로 천천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인영 ㅡ 언제부터 여자라 판단할 수 있을만큼 가까워졌는지 모르는 ㅡ 의 눈동자만이 뚜렷


히 세하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쏘아지듯 노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세하는 말문이 막혀버


렸다.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순간 그는 자신의 손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그


런 반응이 원초적인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엔 시간이 얼마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떨리는 손을 침착하


게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쌍수로 붙잡은 건블레이드를 천천히 옆으로부터 들어 올려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어쩌면 이미 그는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날 죽이러 온건가?"


이번에도 말은 그 인영으로부터 들려왔다. 세하는 묵묵히 검에 위상력을 더욱 불어 넣었다. 말이 필요 없기도 했지만,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기도 해서였다. 그만큼 위압감이 그녀가 그에게 한발자국씩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배가 되어 늘어나는 것 만 같


았다. 맑고 강압적인, 그러나 경박하지 않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데."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의 형체가 구분될 정도의 거리가 되자 그제서야 세하는 그녀의 모습을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처럼 흰 백색의 머릿칼이 종아리까지 내려 와 물결치고 있었고, 피부는 병약해 뵐정도로 창백했다. 혈색이 돌지 않


는 얼굴은 망자의 그것과도 같이 무기질적이었지만, 동시에 형언할수 없을정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세계의 것


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세하는 그가 그녀를 약간 올려다 보고 있다는것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그녀가 얼마나 장신인지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 멈추지 않고 그에게 똑같은 걸음걸이로 역시 똑같은 느린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단 한시도


그의 눈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가 어둠속에 밝게 타오르는 푸른색이라는것을, 그리고 그것이 고양이나 맹금류의 그것


처럼 길쭉한 타원형이라는것을 깨달았을때는 몸서리쳐 지도록 그의 몸에 공포가 스쳤다. 어느새 그녀는 그와 다섯발자국 정도


의 거리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온 상태였다. 이 이상 접근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건블레이드를 잡은 손은 도저


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질 못했다. 아니, 몸 전체가 얼어붙은듯 몸 전체가 땅바닥에 달라붙어버린 발도, 못박힌듯 그 자리에 가


만히 멈춰버린 다른 몸들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해."


시릴정도로 맑은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깊게 찔러들었다.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거부할 엄두 역시 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죽여야만 해요."


"왜?"


"그래야만 하니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렇지만 아무런 말 없이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이 당연한 것인 마냥, 세하의 몸 역시 못박힌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한 발자국, 아니, 그것보다 더 가까이 그의 앞에 선 그녀는 여전히 그의 눈을 똑바


로 주시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하의 사고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SS급 차원종이었다. 확실하다. 위압감, 중압감. 손끝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을 듯 한 막대한 위상력의 양. 숨을 쉬는것 조차 그녀의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한 듯 한, 질식할것만 같은


위상력의 양. 왜 이 위상력을 진작에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피부로, 뼈 속으로 전해져 오는 그 막대한 양의 위상력은 그를 위


축되게 만들었다. 알파퀸, 그의 어머니와 마주 대하면서 웬만한 절대적인 우위에 서있는 자의 위상력에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


던 그였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맞서 싸운다고? 그런 꿈같은 소리를 과연 그 자신이 했었단 말인가? 이런 괴물에게?


"그럴수 있을것 같아?"


"아니오."


즉석에서 답이 나왔다. 달빛이 사납게 구름을 뿌리치고 싯누렇던 빛에서 하얀 빛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밤중에 내리


비치는 흰 빛은 몽환적이다 못해 악몽 같았다. 그래, 악몽.


"그런데 왜?"


왜?


수없이 그가 던졌던 질문이었다. 수많은 시간을 그 질문 하나를 대답하기 위해 고민하는데 허비했다. 끊임없이 자문했지만 결


국 돌아오는것은 큼지막한 물음표 뿐이었다. 왜, 왜?


"...대답할수 없어요."


"어째서?"


"답을 나도 모르니까."


정적이 다시 흘렀다. 날카로운 침묵이 그의 머릿속을 후벼 파는것 같았다. 고통스럽다. 추웠다. 손끝부터 감각세포들이 모조리


굳어져버리는것 같았다. 아프다, 괴롭다. 왜인지 모르지만 불길처럼 치솟아오르는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익숙한 몸놀림으로 거칠게 그의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것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짐승이 아 가리를 벌린


채 크게 포효하고 있었다. 내보내 줘, 내보내 주란 말이다!


"...인간은 정말 이상하지."


참아라, 인내해라, 인고해라.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무렵에는 어느새 그녀의


손이 천천히 그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조각처럼 달린 손톱의 끝이 뾰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하는 그것이 자


신의 심장을 꿰뚫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점점 그녀의 손은 거리를 둔 채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리가 있지도 않았다. 딱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거리만 남겨둔 채, 그의 몸의 굴곡을 전부 따라가며 올라


가는 그녀의 손 끝은 그를 위 아래로 해부하려는듯 정확했으면서도 동시에 무기질 적이었다.


"날 죽이러 왔던 인간들은 많았어. 10년동안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죽이러 오는 이들은 전부 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명으로 가득 차 있었지."


많았다고? 그가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건 그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 끝은 어느


새 목을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것만 같은 심장소리는 마치 이번 한번의 고동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는 공포에 질려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크게 쿵쿵 울렸다.


"넌 왜지?"


이윽고 그녀의 손이 그의 이마에서 멈추었다. 천천히 검지손가락 뿐만이 아니라 다른 손가락 역시 펴지는것을 보며 그는 도저


히 몸이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위상력으로 그를 묶어버린것인가? 하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


저 움직이지 못하는것일 뿐이었다. 곧 얼음장같이 차가운 푸른 금빛의 색이 그녀의 손 끝에서 어른거리는것을, 세하는 본 것만


같았다. 살짝 요동쳤던 공기가 멈추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끝, 손톱의 뾰족한 부분은 세하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니,


짓뭉개고 있었다.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예리한 감촉만은 마치 검 끝을 들이 댄 듯 위협적으로 입맛을 다시는듯 했


다. 그렇지만 살갖만 약하게 누른 채 그녀의 손가락은 더 이상 그의 뇌를 뚫어버릴 생각이 없다는듯 멈추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시야에 창백한 금빛 빛무리가 휘몰아쳤다.


"큭..."


갑자기 온 몸의 위압감이 풀린듯, 두세걸음 뒷걸음질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세하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번 건블레이드를 옆


으로 흩뿌렸다. 몸이 반응을 한다는 사실이, 가위에 눌린듯 한 그 무력감으로부터 어느정도 자신감을 되찾아 준듯 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눈을 감고 있었다. 공격해, 도망쳐, 뭘


하려든 지금이야. 시끄럽게 외치는 검은 짐승이 그의 속에서 날 뛰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심장을 잡아 뜯을듯 울어댔다.


그렇지만, 그의 건블레이드는 다시금 허공에 못박힌듯 멈춰버렸다.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었다. 잠시간 정적이 다시 한번 둘의


사이로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정적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세하는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지만, 감


히 어떠한 행동조차 취하지 못한 채 이를 갈고 있었다. 그것이 분한지 더더욱 요동치는 검은 짐승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할것


만 같아 그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혈향과 함께 씁쓸한 액체가 혀를 적셨다.


"네 기억은 정말..."


갑작스래 눈을 감은채 입만 벌려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세하는 건블레이드를 움찔 하고 움직였다. 그렇지만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를 생각하느라 그는 순간 망설였고, 다시 건블레이드는 멈춰버렸다. 그녀가 눈을 떴을때, 세


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더 이상 금빛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의 위상력의 색처럼 푸르렀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려다 그는 이내 그만 두었다. 상대는 고위 차원종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던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 어디에서인가는 계속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듯 보이지 않는 형체로 거


칠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정말...아름답군."


푸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익숙한 그의 위상력의 색과 똑같았다. 무표정한, 그렇다고 무기질적이지는


않은 목소리로 그녀는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의 기억, 내 동족의 기억, 모든 사물, 모든 것들의 과거를, 추억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너같은 추억을 가진 이는 없


었지. 정말 아름답군."


"아름답다고?"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이 어딘가 흉측하게 느껴졌다. 과거를 볼 수 있다고? 그녀가 그의 생각을 읽은 것인가? 허세나 빈 말로는


뜬금없는 저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모든것이 이상했다. 애초에 차원종이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마음 속에


서 요동치는 검은 짐승을 틀어 쥘 수가 없었다. 제어를 벗어난 그것은 그의 입으로 외치기로 작정하기로 한 모양인지, 아무리


그가 말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어도 결단코 닿지 않는듯 했다.


"이게, 내 기억이! 아름답다고!!!"


어디가 맘에 안드는것일까. 그렇지만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검은 구정물은 멈추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건가? 아름답나, 이 무엇보다도 추한게?"


어둠에 삼켜져버린 이성의 끈은 날아가버린 듯 했다. 침착과 냉정을 고수하려 했던 그의 철칙따위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


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옆으로. 옆으로 돌아서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 동작


이 마치 늑대가 사냥감을 둔 채 빙빙 도는것만 같아 그는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말을 멈출 마음은 없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내가, 얼마나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죽는것조차도 허용 되지 않아! 이 짐은, 이 죄는


다 내것이다. 내 몫이란 말이야!"


그래, 그거였다. 그것을 그는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 더러운 검은 짐승은 붉게 물든 입을 찢어놓은 채 괴상하게 웃었다. 더,


더 울부짖어라. 말이 제대로 문장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쌓여진 구정물들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내가, 슬비와 유리를 죽였어. 죽게 만들고 있다고!  검은 양이라는 팀은 사라지겠지. 소은 누나는 곧 죽을 운명임에도 그렇게


나를 위해서 싸웠어, 이 지독하게 많은 죄를 짊어진 나를!"


아아,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갈증이 일었다. 더 말해. 더 말하란 말이다, 검은 짐승아. 이제 통제할 필요도, 갖혀있을 필


요도 없다.


"어머니, 내 어머니는 이런 지독한 아들을 두었어. 도망쳐버리면서 마음 속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외치던, 내가 마지막까지 최


선을 다했다고 합리화를 시키던 지독하게 오만한 아들을! 팀 페가수스의 모두는 나 때문에 이 숲속 어딘가를 상처입고 지친 몸


을 끌고다니고 있겠지. 그들도 다 나 때문이야, 내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격양되어 외치는 세하의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지만, 마치 그는 자신이 회색 건물들에게 외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천천


히 다음 걸음을 그의 주변에 그려놓은 원의 금을 밟듯 걷고 있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 움직임의 뒤를 흰 머리칼이 미약한


바람을 머금고 마치 잔상을 남기려는듯 한 방향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내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과, 결국 선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사랑하는 이들을 죄다 불행으로 몰아넣은 내가, 내 추억이라고!"


말이 이상하다고는 느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별로 상관 없는 것만 같았기에 그는 건블레이드를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옮


기기 시작했다. 몸이 차가웠다. 격양된 심장은 두근대며 미칠듯이 날뛰는 짐승을 방관하고만 있었고, 불타오르는 뇌는 더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고함질렀던 목소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나직이 마지막 말을 내뱉


었다.


"그런데도 이 추억이 아름답다고 말하는건가?"


기억을 볼 수 있는 이,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이여, 대답해 보아라. 어느새 상하관계가 뒤바뀌어버린듯 그의 마음 속에서는


사악하게 웃고 있는 짐승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자, 말해봐. 아름다운건가? 이 추하기만 한 내 추억들이?


"아름답지."


쩡,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것만 같았다. 반문하기도 전에 그의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악취미적인 농담이라도 분수


가 있었다. 조롱에 가까운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무기질적이었지만, 그것이 진담인지, 아니면 그녀의 본심인지조차 알 수 없었


다.


"그래, 아름답단다, 세하야."


믿을 수 없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낸 그녀를 돌아보았다. 분명 긴 백발이었던 머리는 어느새 어깨까지 늘어뜨린


긴 갈색 머릿칼로 변했고, 늘 손에 들고 있던 차트는 여전히 당연하다는듯 들려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목소리를 들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유정누나!"


어떻게 된 것인가, 방금 전의 일들은 죄다 꿈인것인가. 하지만 주변의 회색빛 건물들과 검은 밤하늘들은 여전히 그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꿈이라고 믿는것이 더 편할 이 광경 속에서 그가 뭐라고 반응 하기도 전에 유정은 몇 발자국 더 걸음을 떼었


다.


"왜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걸까?"


어느새 목소리는 바뀌어있었다. 알아 차리기도 전에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로 바뀐 그녀, 아니, 그의 목소리는 은발과 노랑 고


글을 치켜 올리는 제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제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넌 네가 그렇게 추하다고 생각하는거지, 동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고글 뒤에 숨겨진 눈동자만은 제이의 그것이 아니라 그의 위상력을 닮은 푸른색이었다. 똑바로 그를 주


시하는 제이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겨움을 느끼게 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멀어보였다.


"내가 힘이 없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니까."


"네가 힘이 없는게 정말 네 추함과 관련이 있는거니?"


목소리는 세하의 뒤에서 들려왔다. 제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고, 뒤를 돌아보자 설화의 모습이 그의 앞에 보였다. 한


쪽 손을 라이플을 늘어뜨리고, 다른쪽 손은 허리춤에 얹어놓은것이 꼭 그녀같았지만, 여전히 눈동자의 색만은 달랐다.


"그게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어느새 그의 건블레이드는 다시 푸른 위상력을 폭사하기 시작했다.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한


채, 저것은 그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게 내 나약함 때문이란 말이다!"


앞으로 돌진. 위상력을 담아 빠르게 움직인 그의 모습은 일반인이 보았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정도로,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


이' 에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가 막 건블레이드를 휘둘렀을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연이어 그의 왼쪽에서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나약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을 구하려는 네 모습은 추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고개를 거칠게 젖혀 보자, 그곳에는 예화의 모습이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청초한 웃음이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았던 그녀였지


만, 지금의 웃음은 어쩐지 껍데기만 웃을 뿐, 진짜 즐거운 웃음은 아닌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야!"


그쪽으로 건블레이드를 빠르게 장전, 일발 격발. 굉음과 함께 날아간 푸른빛 탄환이 길게 궤적을 남기며 그녀에게 쇄도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진 채였다.


"제가 말하고 싶은거요? 간단해요."


어느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은채, 뒤에서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는 뒤로 확 몸을 젖혔다. 작은 키에 단발곱슬머리를 한 소


년, 미스틸테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분명 녹안이었을 눈동자는 역시나 푸르렀다.


"세하 형은 열심히 했어요."


그때, 미스틸테인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는, 옆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도 넌 왜 그렇게 널 몰아붙이는거지? 역시 인간들은 놀랍군 그래."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이번에는 데이비드의 모습이 보였다. 안경을 벗어 옷 소매로 태연히


닦는 그의 모습 역시 푸른 빛 눈동자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잖나, 이세하 요원. 자네의 몸에 들어있다는 위상 독, 그것도 사실은 그게 아니란걸 자네도 알텐데? 위상력


자들은 자신의 위상력에 대해서 민감한 법이지, 위상 독이 아무리 통증이나 기타 감각등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클


로저들은 이상함이라도 느꼈을 법 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나?"


퍼뜩 들이 닥친 어떠한 생각이 그를 강타했다. 그래, 이미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위상 독이란게 어떤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많지 않았고, 그를 쫒아온 추격자의 말만 맹신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일 그가 차원독에 정


말로 감염 된 것이라면, 자신의 심장쪽으로 다가오는 검은 위상력들은 이미 진작에 그를 먹어 치웠어야 했다. 아무리 위상력의


질이 높더라도, 차원종들의 독 공격들은 침투 속도가 더뎌지는 경우도 드물었다. 스피더를 마지막으로 공격 했을때, 놈의 체내


에서 이상한 가스비슷한것이 내 뿜어져 기절하긴 했어도, 그를 진찰한 자는 아무리 군의관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클로저들의


위상력을 전문적으로 다뤄온 의사였다. 오진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건, 자네의 머리색과도 관계가 있을 텐데. 그렇지 않나?"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그는 건블레이드를 강하게 휘둘렀다. 푸른 빛무리가 고함지르는듯 보였다. 말하지 마. 그렇지만 당연


하다는듯 데이비드의 형체는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옆에 나타난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열심히 했어 세하야, 나도 그걸 아는걸."


도저히 믿을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 색만이 이질적으


로 푸른색을 띄고 있었기에 세하는 비교적 빠르게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듯, 너


무나도 어머니같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네가 머리색이 변하지 않았다는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아니란다."


도저히 들을 수가 없어 이를 꽉 깨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의 잠재 능력이 높은것이 아니었다. 위상력의 질은 좋았고, 선천적


으로 남들보다 높은 위상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정말 몸을 아끼지 않는 훈련들을 한 끝


에 그의 위상력의 색과 머리 색이 변하는 제 1차 세포변이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스피더와의 결전 이후 슬비에게 들었었


다. 그래, 그런거였다.


"네겐 그저 죽고싶지 않아 하는 자신을 재촉할만 한 핑계거리였겠지. 그렇지 않니."


민혁의 목소리.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세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위상력의 변환과정은 차원독의 침투 과정과 비슷하지. 네 몸속의 검은 위상력은 그저 네 푸른 위상력이 변이로 인해 검은 위


상력으로 변하는 과정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너 자신을 합리화 시킨 이유는 뭘까. 나는 그게 궁금할 뿐이란다, 작은


인간아."




수진의 목소리. 어느새 마을을 탈출하기 전에 보았던 그녀의 카리스마가 담긴 얼굴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푸른색 눈


동자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마주보고 있다는것을 깨달았을때, 그는 그것이 그녀가 아니란것을 깨달았다.


"왜 죽음으로 달려왔니. 인간아.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인간아, 왜 널 그렇게 몰아 붙이는거니."


차원종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차라리 그를 실성한 괴물처럼 아무 말 없이 쫒아오기만 했다면 편했을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임


무만을 수행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무언가가 작게 움직이고 있다는것을 느꼈


다.


"왜...냐고?"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의 어깨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손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해봐, 이세하."


단발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잠깐 눈앞을 어지럽혔다. 밤 하늘 아래에서 보는 분홍색은 어쩐지 모르게 명시성이 있는것만 같았


다. 슬비의 모습을 한 그녀는 푸른 눈으로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죽..."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해야 했지만, 이것마저 말해버린다면 안되었다. 정신 차려라, 상대는 SS급 차원종이


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뭘 하는 꼴이란 말인가. 어서 그 건블레이드로 찔러. 건블레이드로 공격을 해야지만 이런 가짜가 아니라


진짜 이슬비가 산다. 진짜 모두가 산다. 하지만 그렇게 암시를 걸어보아도 소용 없었다. 이미 그의 입은 반쯤 열려버리고 말았


다.


"말해보라니까, 세하야? 괜찮아."


말하면 안된다. 검은색 머릿결이 물결치며 그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답지 않은 서늘한 손이 그의 목 뒤를 살짝 깍지 낀 채 매


만지고 있었다. 자주 그렇게 허물없는 장난을 치고 했던 그녀의 습성까지 모조리 똑같았지만, 결정적인것은 날카로운 눈빛이


었다. 그래, 진짜 이들이 아니라면, 진짜로 그가 말하면 안되는 대상들이 아니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라, 말하면 안된다. 말하게 되면 너는 무너지게 된다. 그 결심을 하고 나서 어떻게 버텨왔나를 생각해라. 수없이 외치는 이


성의 소리를 들었지만, 끝내 그의 입은 한순간에 열리고야 말았다.


"...죽고싶지 않아!"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 지 않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봇물터지듯 흘러나오는 말은 멈출 방법이 없었


다. 목구멍이 뜨겁게 막혀왔다.


"죽고싶지 않아! 난...난 죽고싶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죽어서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최악의 결과만 막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대로 괜찮은 결말일거잖아!"


차라리 투정부리는 듯 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결심을, 죽겠다는 결심을 지켜오기 위해 얼마나 무디게 행동하려


노력했던가. 죽는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폭력에 휘말려 죽는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비록 수천


갈래로 차원종에게 찢어지는 꿈을 그가 꾸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면 티를 내면 안되었다. 이미 남


들이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었으므로, 그가 감정을 표출해봤자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음을 못박았다.


그렇기에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죽어서도 살고싶을 뿐이었어..."


흐느끼는듯 한 목소리가 그의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것이 그에 입에서 나온 소리란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어느새 턱


까지 흘러내려온 눈물이 그의 시야를 덮었다. 얼마만의 눈물이던가. 소은과 마지막 인사를 할때도 울었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그래, 죽어서도 살고싶다. 그가 죽어서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고 싶다. 그것이 그가 죽어서도 사는 길이었다. 그 누구도 이해하


지 못하리라. 죽어서, 살아야했다.



죽어서-살아야했다.


드디어 짐을 내려놓은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무거워서 압사해버릴것만 같은 짐을. 어느새 그에게서 두 세걸음 떨어진 곳


에는 기다란 흰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황금빛 눈동자로 돌아온 그녀가 서 있었다. 어쩐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은 조금 풀어진


듯 보였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 밖에서 달빛에 어른거리는 그녀를 보고, 세하는 문득 그녀가 달의 여신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하죠? 날 죽일거면서, 사냥 전에 당신은 특이한 취미가 있는건가요."


되도록 냉정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묻어있는 물기어린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느


껴지는 위압감을 모조리 감쇄해놓았다.


"그러면, 넌 내가 왜 널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는거지?"


뜻밖의 말에 세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뭐라고?


"단지 나는 내가 10년동안 있었던 세상에 살던 종족에게 조금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다."


이제는 헛웃음까지 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그는 이를 꽉 깨무는것으로 막아버렸다. 호기심?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그럼 왜 10년동안 그 궁금하던 종족을 피해있었죠? 왜 이런 외딴곳으로 들어왔냔 말이에요."


거의 시비를 거는 듯 한 말투였다. 공격적인 말투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너희들이 차원압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고, 나는 다른 내 동족들에 비해 그 영향을 더욱 많이 받는다. 가장 이 차원


압력을 견디기 쉬운 형태가 너희, 인간의 모습이었기에 난 그 모습을 따라한것 뿐이다. 더군다나 널 사냥한다고 말했던가? 나


의 특기는 살생이 아닌 기억을 읽는것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속의 사람들로 변할 수 있지. 물론 너와 같은 인간들을 마음만 먹


는다면 죽이겠지만, 굳이 내가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또한 차원 압력 덕에 나는 이곳에서 움직이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백짓장처럼 새하얘진 그의 머릿 속에서 맴도는 그녀의 말이 공허하게 떠돌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


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왜요, 당신에게는 목숨이 중요하지 않나요!"


"내 생명을 중요하지 않게 여겨본적은 없지만, 너는 조그만한 날벌레가 주변을 날아다닌다고 해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니 그


것을 기필코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나?"


발악에 가까운 고함이었지만, 그녀의 즉답에 의해 그는 다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날벌레, 그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


재가 바로 그였던가. 이런 상대를 맞서 싸우려 했다니,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생각이 재차 들어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난 당신을 죽여야만 해요.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내 모든것들이 부서져버려요. 그게 아니면, 당신에게 내가 죽거


나."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 침묵 역시 일방적이었다. 그녀는 잠시 손을 턱에대 대고 매만졌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인간다워서 세하는 문득 그녀가 정말 차원종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차 한잔을 다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무렵에야 그녀는 입


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을 원하는거지?"


바람이 조금 세게 불었다. 서늘한 감촉이 온 몸을 쓰다듬고 지나가 세하는 자신도 모르게 악문 이에 더 힘을 주었다.


"내가 죽고싶진 않아요."


"그래서, 날 죽이기를 원한다는건가?"


"네."


짧은 대답들이 오간 이후에도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생각을 끝마친듯 다음 순간 천천


히 그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렇지만, 세하는 여전히 건블레이드를 움직이지 못했다. 왜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음에도, 그는


어쩐지 모르게 그녀가 아파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차원종에게 병색이 있다고 그런다면 모두가 웃을것이 뻔했지만, 창백한 얼


굴은 인간으로 치면 죽기 직전의 얼굴과도 비슷한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마침 잘 온것 같군. 나는 곧 있으면 이 차원압력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 내 체질상의 문제겠지만, 이곳에서 내가 원


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어떻게 해도 없다."


그녀의 믿지 못할 말은 세하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어놓았다. 뭐라고?


"선물을 주지."


갑작스럽게 그녀가 손을 뻗자 그는 흠칫 놀랐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그가 옆에 비껴 들고있던 건블레이드를 잡아 천천히 그녀


의 배에 가져다 대는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쩌자는거죠."


자신도 모르게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람이 한번 다시 세게 불었다. 검은 공간을 비집고 그와 그녀


를 스쳐지나간 바람은 그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한 것인지, 서늘하기만 했던 바람이 약간은 누그러진 듯 한 기분만이 들었


다.


"찔러라. 난 더 이상 너희들이 위상력이라 부르는것을 사용할만한 힘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찌른다면, 나는 죽는다. 어차피


죽게 될 테니 처음으로 만난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세하는 잠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또렷한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처음보다 어쩐지 조금 매서운 기가 사라진 것도 같았다.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서요."


"다른 이들의 기억을 볼 수 있는 나로써는 너희와의 가치관이 틀리다. 그 사물에 속한 추억으로 남는것이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나를 죽이러 왔던 인간의 기억을 읽어 인간을 학습한 나로써, 그들을 죽였던 내 기억속에 남은 그들은 살아있고, 내가


너에게 죽음으로써 너의 기억 속에 나는 살아있다."


잠시 쉬었다가,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가 모두를 위해 죽으려 하는것 처럼, 그것이 내가 죽어서도 사는 방법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곧 죽는다 하더라도 끝까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인간인 그로써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라고 그


는 생각했다. 단순이 그런 정신론적인 문제만이 아닌, 그의 기억속에서 그녀, ss급 차원종은 살아갈터였다. 그것이 그녀가 사


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죽어서도 사는 방법이라는 그녀의 말에 세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너의 추억 속으로 살겠다. 이곳에 와서 가장 유일하게 내가 한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르겠어."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것 같았다. 세하는 그녀가 어느새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약했지만, 분명 웃음이


었다.


"어쩌면 너희와 우리는 꽤 닮은건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천천히 건블레이드를 그녀의 배에 밀착시켰다. 그것을 쥐고 있는 세하는 서서히 손가락을 방아쇠로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지, 작은 인간아."


그녀의 모습이 한번 더 변했다. 금빛 빛무리가 머무른 그 자리에는 그녀가 변한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변한 그녀의 모습


을 보고 세하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래, 그건 정말로 큰 선물이었다.


"고마워요."


문득 그를 스쳐 지나간 겨울 바람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보인 듯 했다.


이윽고 희게 검은 하늘을 물들이며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사방을 메웠다. 그 눈송이 하나하나마다 그는 그가 이곳으로 오며 거


친 모든 이들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제이는 천천히 뒤돌아서 걸어갔다.




데이비드는 서류를 정리하다 눈을 비비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미스틸테인은 크레파스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슬비는 늘상 그랬던 그녀처럼 당당한 자세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유리는 그런 슬비를 보며 다시 도발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티없이 웃었다.



소은은 막 잠에서 깨어나 후드를 찾다 다 헤져버린 후드가 찢어져 버려 없어진것을 깨닫고 당황했지만, 이내 조용히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 섰다.




우현은 여전히 스탠드 빛만을 켜 놓은채 대한민국 하반기 경제전반 보고서를 들여다 보며 한숨쉬었다. 그러던 그의 핏발선 두





눈은 시선을 돌려 잠시 쉬려는듯 잠시 창 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막 차원종 하나를 방패로 막고는 총으로 놈을 쏘아버렸다. 생채기 가득한 대형 권총을 재장전하면서도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화는 혼자 투덜거리면서도 잠자리를 마련하고는 야영의 준비를 끝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다시 날아가버린 방수시




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녀는 피워둔 모닥불 앞에 펼쳐놓은 침낭 위에 앉아 주변에 그녀의 와이어로 쳐 놓은 그물이자 경계망을 주시했다.




설화는 무전기에 반응하는 신호가 있는지 부상당한 팔을 응급처치 한 채로 살펴보았다. 거의 움직일수 조차 없는 팔이었지만, 상비하고 다니던 앰플 덕에 덧나는것만은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고통때문에 그 고운 얼굴이 찡그려져는 있었어도,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팀의 리더답게 결코 얼굴에 나약한 빛을 띄우지는 않았다.





수진은 슬비와 유리를 가둬놓은 방을 창 밖으로 내보다 이내 소리없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한검에게 작게 손을 내 저었다. 그 말에 더 이상 자신의 숏소드를 쓸 일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그는 상처입은 팔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조금은 과장되게 검을 돌려 검집에 꽂았다.




어머니, 서지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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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시 뉴스는 떠들썩했다. 병원식을 먹으면서 세하는 막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마음먹


었다. 벌써 하루 남짓 흘러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몇백, 몇천번을 들은것만 같은 뉴스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방송을 해대고


있었다. 기자가 격양된 얼굴로 SS급 차원종의 위상 파동이,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가장 큰 위험요소가 사라졌다고 하는 말을


내뱉는것은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희멀건 국에 묽은 죽을 몇숟갈 먹다 그는 이내 식판을 치워버렸다. 입맛은 별로 없었다.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식판을 옮기는 일도 옆구리에서 갑작스레 짓쳐든 고통때문에 그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 온몸에 덕


지덕지 붙은 생체 재생 치료팩이나 각종 이상한 약들이 발라진 패치 등이 그의 환자복으로 둘러쌓인 몸을 갑갑하게 해왔다.


"도와줄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식판을 올려놓고 편안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딱딱한 간이침대였지만,


침낭속에서 자던 것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편안함 이었다. 그 편안함을 다시 느낄수 있단 사실이 아직 실감조차 나지 않


았지만, 그의 지친 몸은 그 편안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듯 쿠션감 있는 침대로 천천히 파고 들어갔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그곳에는 같은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는 소은이 있었다.


"정말 괜찮은거니? 가장 상처가 심한건 너인데, 세하야."


"아, 정말 괜찮아요."


또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는 한쪽 팔에 무슨 지지대같은것을 감아 놓은 설화가 걱정스럽다는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의 생각에도 그녀의 말은 별로 맞지 않는것 같았다. 그녀는 벌써 팔부분에 수술을 쉬지도 않고 연이어 두차례나 감행했으


며, 간신히 회복세를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지가 불과 두시간 전이었다. 예화의 상태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옆구리를 스친 상


처가 생각보다 깊은곳까지 들어가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설화의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지, 평상시라면 살짝 대화의 틈에 끼어


들었을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깐동안 TV의 소리만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병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


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직이 웃는 웃음소리가 막 신문을 넘기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하하...누가 우리를 보면 정말 웃긴 꼴이겠어. 한 나라 정부의 정예 클로저로 이루어진 팀인데, 한명도 빠짐없이 전원이 이렇


게 입원해 있다니. 어떤 생각을 할까?"


민혁의 목소리에 설화는 살짝 웃었고, 소은 역시 쓰게 미소지었다. 세하는 미소짓는 소은을 보며, 그녀의 표정에 없던 무언가


가 생겨났다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그냥 후드를 벗어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으나, 그것만 가지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리는


없을 터였다. 갈색 머릿칼로 가린 옆얼굴은 그에게 불과 하루 전의 일에 대한 이상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그래도, 우리가 얻은 칭호정도면 모두 입원한 댓가로 좀 양호하지 않아요? 대한민국 경제까지 타격을


입히던 SS급 차원종과 A급 차원종의 토벌. 그리고 그 토벌작전을 맡은 팀 페가수스. 이 정도면 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뉴스와 신문 등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경제, 아울러 국토의 절반을 떼어먹고 항시 경비태세를 갖


추어 놓은 소위 '바리케이트'가 팀 페가수스의 활약을 통해 이제는 필요 없어질거란 전망이 보도되는 중이었다. 특경대와 대


차원종 특수부대들, 육군이 펼치는 '연합 차원종 잔당 소탕작전' 은 세하가 죽인 SS급 차원종들의 휘하에 있다가 그녀가 죽어


버려 어쩔줄 모르고 있는 A급에서 S급 차원종들과 교전을 벌인다는 소식들이 무성했다. 그렇지만 진압작전은 순조롭다는 보


도 역시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얼마 안가 작전은 끝날 터였다.


세하의 말에 민혁은 하하 하며 이불을 끌어 덮었다. 이제 좀 자야겠다는 신호였는지 그것을 따라 설화와 소은도 이불을 부스럭


거리며 끌어 올렸다. 세하가 나직이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말하자 소은과 설화, 민혁이 대답이라고 생각될만한 웅얼거림을


내뱉고 자신들쪽 스텐드를 끄는것으로 모두 취침 준비를 마쳤다. 그 역시 시계를 보자 벌써 새벽 다섯시가 넘은 시각임을 알고


서 스탠드의 불빛을 껐다.  그렇지만 그는 눈을 감아도 쉽게 잠이 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것인지 알 수 없었


지만, 아무튼 한시간 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났을때 그는 몸을 침대에서 조용히 일으켰다. 스프링이 삐걱대는 소


리와 철제로 만든 침대의 뼈대가 조용히 신음을 토했지만, 다른 팀원들을 깨울 정도는 아닌것 같았다. 숨소리만이 가득한 병실


안에는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팀원들이 죽은듯 자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둠에 쌓여 잘 보이지 않는 병실 안을 둘


러 보며 세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SS급 차원종을 죽여 작전이 끝났을때, 얼마 있지 않아 뜬 헬기와 대


차원종 특수부대, 연계작전을 펼친다고 들었지만 여지껏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손각시 팀의 완장을 찬 팀원들이 어렴풋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났다. SS급 차원종의 위상력이 사라지자 바리케이트 밖의 막대한 위상밀도가 감소했다는것을 관측했다는 뉴스


의 보도로 어떻게 그렇게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 졌는지 알 수 있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단지 그가 병원으로 이송


되어 도착 했을때, 그곳에는 막 도착한 소은과 함께 슬비와 유리도 있었다. 그것이 무려 7시간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는것을


감안했을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은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는 잠든지 얼마 되지 않아 깨어났다고 한다. 당연했다. 클


로저들은 분명 강력한 최면제에 내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성에 대한 이야기이지, 개별적 정신력에 따른


각성은 그들 개개인이 사용하는 기술의 운용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을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어남과 동시에 재빨리


전통에 남은 화살이 없음을 깨닫고, 널브러진채 죽은 차원종의 시체로 직접 가 화살을 뽑은다음, 회복된 위상력으로 사이킥 무


브를 사용해 슬비와 유리가 있는 마을로 곧장 도착해 바로 경비병을 제압하고 슬비와 유리를 빼내었다고 했다. 그녀가 상처를


깊게 입어 그런 식의 기습은 하지 못할것으로 생각했었던지, 그녀와 그를 쫓아왔던 한검이라는 추격자는 생각보다 늦게 그녀


를 쫒아왔으나, 헬기와 구조대가 온것을 깨닫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것인지, 예의 그 정중한 인삿말과 함께 돌아


갔다고 했다. 아무튼 슬비와 유리 역시 옆 방에서 잠들었을것이 뻔했다. 서로 만나서 떨어질줄을 모르고 이야기하던 검은양들


은 몇시간 전만 하더라도 팀 페가수스와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어색함은 금세 깨 버린채 이야기 했었다. 그가 이야기의 주된


연결점이었고, SS급 차원종과의 사투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냐는 물음에 그는 그저 쓰게 웃는것으로 답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는 외투를 걸쳐입었다. 약하게 온풍기를 틀어놔서인지 옷의 촉감은 그럭저럭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


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복도의 바람이 그를 마주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큰 병원이라


그런지 분주히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낮보다는 덜했다. 수백명의, 수십종류의 사람들이 그와 팀 페가수스를 보


러 ㅡ 주로 인터뷰를 위해 ㅡ 찾아왔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만 듣고는 가버렸다고 전한 팀 페가수스의 관리요원 민준의


얼굴은 지긋지긋하다는듯 반 사색이 되어있었다. 오로지 그를 만나러 올 수 있던것은 제이나 미스틸테인, 그리고 그의 어머니


와 데이비드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 이제는 끝났다. 막 그가 병원의 정문을 열고 나가자,


수많은 아직까지도 그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차에서, 혹은 담요등을 덮은채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깨닫고는 급히 외투의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어둠이 그의 얼굴을 가리는데 한몫 해주었는지, 병원의 비교적 한적한 주차장쪽으로 나올때 까지 그는 별


달리 방해받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을 보자, 아직까지 내리는 흰 눈이 그의 시야를 조심스레 덮어왔다.


"이세하 요원."


갑작스래 들려온 말이었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자, 어둠에 가려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를 그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곧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축하한다는 말이 늦어 미안하네. 고생했네."


위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말투였다. 세하는 천천히 고개를 조금 숙였다. 목례인지, 그게 아니라 그저 평범한 몸동작인지 그


자신조차 모를 행동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꽤 짙은 어둠 속이었다.


"네."


다시금 불어온 한줄기 겨울바람이 그를 휘감았다. 정신이 조금 든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눈들 사이 저편으로 남자


는 다시 말을 이었다.


"위선자라 생각하지 말아주게. 나는 진심으로 자네에게 존경을 담아 말하고 있는걸세."


"네."


더 이상 무언가 대답은 필요치 않을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무언가를 아직 말하고 싶어 하는듯 했고, 그것은 조금 후, 그가


말을 이음으로써 짐작이 사실이라고 확인하게 해주었다.


"차원종은...SS급 차원종은 어땠나."


"내게 선물을 줬죠."


급작스럽게 튀어나간 말에 그조차도 놀랄지경이었지만, 그는 조용히 입술을 살짝 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마지막


에 준 것은 선물이었다.


"선물?"


약간 의아함을 담은 물음에 세하는 잠시 침묵했다. 설명을 할 필요도, 설명을 할 마음도 없었지만, 저 남자에게는 설명이 필요


했다. 그는 잠깐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더 이상 차원압력덕분에 살지 못한다는것을 말하고, 선물을 주겠다며 내게 자신을 죽일수 있게 했죠. 그


리고,마지막에 그녀는 나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지요."


"같은 모습이라고?"


우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했다. 하지만 세하는 그에게 생각할 틈을 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기억을 읽을 수 있었어요. 내 과거를, 내 추억을 들여다 보고는 나를 시험했죠. 그래, 시험. 그건 별다른 표현방법이 없


을거에요. 시험했죠. 그리고 나를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합격점을 준 듯 해요."


무슨 말인지 그는 이해를 하지 못한듯 고개를 갸웃거릴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우현은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별로 놀란기색도 없는 그를 보는 세하의 눈동자도 침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녀는...내가 나를 죽일 수 있게 해줬어요."


"지극히 차원종답군."


인간하고 다르다는점이? 아니면 다른 어떤점이? 알 수 없는 이야기었다. 누구보다 차원종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 인


간 중 한명인 그가 그렇게 말한것을 보고도 세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인간은...차원종하고 다르더군요."


"그렇지."


차원종에 의해, 차원종에게 모든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얼마나 많은 권력 암투


를 거쳐왔을지, 어떤 도움도 없이 그 자리까지 올라왔을지 알 수 없을 그의 말 치고는 상당히 자조적이게까지 들리는 말이었


다. 다시 눈이 휘날렸다. 어느새 눈은 쌓여가고 있었다. 매서운 날씨가 다음주부터 계속된다는 일기예보가 맞을 것 같기도 하


다고 그는 잠시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자넨 어쩔건가."


우현의 말에 세하는 어둠 너머 저편의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정도 적응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의 어투는 사실상 감정을 잃


어버린채 말하는것만 같았다. 그에게 마음을 열기 전의 소은과도, 아니. 그보다 더욱 심했다. 그런 무기질적인 억양이 차라리


이젠 그에게 편하게 느껴졌다.


"자네에게 나 역시 작은 선물을 주고 싶네. 금전적인 보상이나 명예는 이미 자네에게 충분히 돌아오게 될것이니, 내가 자네에


게 해줄수 있는걸 해주고 싶네."


그의 말을 거짓이라고 세하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작게 귀띔했다. 어쩌면 그는 그를 구출하지 않을 수 있었을것이었다. 처형


을 정말 집행해야 했다면, 구조는 굳이 필요 없었다. 아니, 사실 그는 특수부대가 그를 처음 발견했을때 맞서 싸우려고 결심한


상태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숙청당할수도 있었다. 그, 이우현에게 반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것이 바로 그였다. 명령


거부를 했음에도 정의롭게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는 어쩌면 그에게 최대의 걸림돌일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팀 페가수스'의 우월함을 알려주기 위한 포장 전략인지도 몰랐지만, 겨우 그것때문에 처음


부터 끝까지 이성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그가 그런 행동을 하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의 실루엣이 점점 밝게 물드는 배경에서 유일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새벽이 온다.


"글쎄요."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기다렸고, 세하는 잠시동안 흩날리는 눈발만을 주시하는듯만 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둘


다에게 다른사람들이라면 어** 보였을 이 침묵이 전혀 어색하다고 느끼는 기미는 없었다. 이윽고 세하는 입을 열었다.


"검은 양떼가 있었죠."


정적. 그렇지만 오래가진 않을 정적이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흰 양들과 다른 다섯마리의 양떼는...갑작스럽게 들이 닥친 맹수들에게 놀랐어요. 양치기는 오히려 양떼를 포기했죠. 검은 양


떼로 맹수들의 배를 채우면 흰 양들은 희생시키지 않아도 될테니까. 그에게 맹수를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세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잠시 우현의 주변을 맴돌다 밤바람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뒤에서 떠오르는 엷은 푸른빛이 그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하는듯 점점 그 채도를 더해갔다.


"그래서 양떼는 서로 살기 위해 도망갔어요. 맹수를 피해서."


세하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그래, 그랬었다.


"양치기가 없는 양은 흩어질수밖에 없죠. 살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지조차 못했어요. 서로를 아꼈지만, 그 마음때문에 더


더욱 비참한 결과가 도래할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도우며 도망쳤죠. 바보같긴, 맹수는 빠르게 쫒아오는데도 서로를 포기 못해


서 잡힐뻔했죠."


그는 막 떠오르는 푸른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새벽하늘의 싸늘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 그는 무심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게 그 결말이죠. 결국, 다 살았어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살았어요."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구름들이 흩어져나가며 태양으로부터 달아나는 양떼같이 보이는 순간, 그는 무심코 코웃음


을 흘렸다. 하하, 그래. 이거면 된거야.


"양떼는 흩어졌죠."



양치기에게 시간은 돌려달라 할 수 없다는것 도, 맹수를 죽인다는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아는 양들이었기에 그 이상으로 무


언가를 양치기에게 요구할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 선물을, 보상을 바랄 마음도 없었다.



그래, 양떼는 흩어졌다.


어느새 그친 바람에 재게 움직이는 하늘의 회색 구름들을 보며 문득 세하는 진심으로 그 구름들이, 양떼같은 그 구름들이 다시


모이기를 짧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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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양 완결입니다. 드디어...반년만에 완결되었군요.

한검님 일러 덕에 글이 좀 산것도 같습니다. 일러 그려주신 한검님께 다시한번 감사하단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페베르님, 한검님, 흑신후나님, 일러 그려주시는 Key님들과 같은 이 흩.양을 읽어주시고 아껴주신분들 덕분에 완결까지 저와 팬텀님이 올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후기글로 다시 뵙겠습니다.

올리겠다고 한 자작 피아노곡은 아직 미완으로, 총본편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미흡해 가독성을 떨어뜨릴것 같더군요.


즐겁게 보셨다면 댓글로 감상평과 비평,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럼, 정말로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흩.양, 마치겠습니다. 다시한번 흩.양을 보아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설마 댓글이 안달리겠습니까, 마지막 화인데...이거 쓰느라 죽을뻔했는데 제발 비평이라도...)

2024-10-24 22:42:0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