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 me - 세하의 이야기
카페인의노예 2015-11-27 1
"후, 이번에도 별로 건질만한 건 없군."
제이는 신문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가로운 가을날의 오후,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 새로운 건강 식품이라도 찾아보려 했건만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하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세하가 깊은 한숨을 쉬며 들어왔다. 얼굴에는 훈련으로 인한 피로와 귀찮음 외에도 복잡한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뭔가 또 깊은 고민이 있군. 이럴 땐 이 형님이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줘야지.
제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 뭔가 깊은 고민이 있나 보군?"
"네, 뭐 그냥......."
"그런건 이 형님에게 다 털어놓으라고."
세하는 그렇게 말하는 제이가 솔직히 그닥 미덥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마땅한 사람도 없었고, 그래도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어른이니 어쩌면 답을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 들기는 했다.
"그게, 지난 주말에......."
세하는 잠시 한숨을 쉰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세하는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오후 2시 24분 전. 경기장까지 가려면 여기서 최소한 2시 15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긴 하지만 미리 가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날엔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 기대도 되고.'
아침부터 여자애를 만난다는 이야기에 세하의 엄마인 서지수는 부지런히 그의 옷을 코디해줬다.
결과적으로는 '이럴땐 깔끔한게 최고야!' 라며 청바지에 검은색 옥스포드 셔츠로 끝내긴 했지만.
물론 세하는 알고 있었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엄마도 평소에 옷을 그렇게 잘 입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약속 장소인 역 앞은 주말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커플이 많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그런것 따위 신경 안 쓰고 기다리는 동안 게임기를 꺼냈겠지만, 오늘만큼은 일부러 게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게임에 집중했을 것이다.
두려움, 경외심, 혹은 기대에 찬 그 무미건조한 시선들을 피하기에는 게임만큼 좋은 것도 없었으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세하는 한숨을 내쉰 후 스스로 머리를 헝클어 트렸다.
짜증나. 왜 옛날 생각을 해버린거지.
다시 오늘 일을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 근데, 만나면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하지?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으, 응? 뭐야, 왔으면서 사람 놀래키지 마."
혹시라도 기대하고 있는걸 들키진 않았을까, 하며 세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슬비는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분홍색의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와 하얀색 니삭스, 그리고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다. 확실히 옷이 날개구나. 이렇게 입고 있으니 천상 여자네.
"왜 그렇게 쳐다 봐? 내 옷이 그렇게 이상해?"
"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대회 보러 가는건데 열심히 꾸몄구나 싶어서."
"쓰,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슬비의 눈빛에 실망의 기색이 엿보였다.
'아니, 이게 아닌데!'
사실 평소보다 예쁘게 입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세하였다. 그렇지만 너무 긴장한 탓일까, 자꾸만 자기 마음과는 다르게 엉뚱한 말이 나오는 스스로가 멍청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오늘 만난건 다름 아니라 같이 게임 대회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훈련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 우연히 이야기가 나왔기에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은건 나름대로 신의 한 수 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대로 과연 경기에 집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가는 동안 별 것 아닌 잡담이 오가긴 했지만 그래도 세하는 마음이 심란했다.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언제부터 인지는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마음에 직면했을때 나는 리더니까, 라고 말하는 그 얼굴 뒤에 가려진 그늘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힘들면서, 혼자서 무리하는 그 작은 어깨를 이제는 자신에게 기대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만 혼자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에게 난 그저 말 안 듣는 팀원에 불과하겠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세하 자신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팀원이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서 네 곁에 서고 싶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슬비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머리속이 복잡해져 자신도 모르게 게임기를 꺼내고 있었다. 일단 어떻게든 머리속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뭘 그렇게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슬비는 이상하다는 듯 살짝 갸우뚱 했지만 별 상관 없다는 듯 다시 앞을 바라봤다.
혹시 들킨건 아니겠지? 세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멍 한 얼굴로 쳐다본 것 같았다.
아아,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지만 이미 원망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저 신경쓰지 않고 지나치기를 바래야지.
***
경기는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확실히 TV중계로 보는 것 보다는 직접 현장에서 보는게 훨씬 생동감있었지만 세하는 도저히 집중할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계속해서 슬비에 대해서 수근거리는 남자들의 말 들이 신경쓰였고-대부분은 귀엽게 생겼다는 칭찬과 그 옆에 있는 자신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아무 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선수들의 운영과 해설자의 말에 집중하는 슬비의 옆 얼굴을 훔쳐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결국 경기는 하나도 못 봤어.'
그래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무언가에 집중하여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런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신비로운 곡선을 그리는 콧잔등과 살짝 흥분했는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볼과 여린 턱 선, 그리고 왠지 부드러울 것 같은 느낌의 작은 입술.
"생각보다 꽤 재밌었어."
슬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확실히 TV로 보는거랑 현장에서 보는건 다른 것 같아. 드라마 촬영장은 이거랑은 또 전혀 다른 느낌이겠지."
경기장을 나서며 슬비는 앞으로 팀의 운영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머리속에 팀에 대한 생각밖엔 없는걸까. 물론 그 점이 지극히 그녀답긴 하지만.
문제는 이 다음 계획은 전혀 잡아둔 것이 없었다.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머리 속에서는 '이 데이트는 내가 캐리해야 돼!' 라고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막상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상황을 위한 공략집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덧 없는 상상까지 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엄청 좋아하네? 의외인걸."
"뭐, 뭐 어때서? 사실 이런곳에 오는건 처음인 걸."
슬비는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살짝 들뜬 자신을 세하는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사실 세하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대로는 그저 팀원과 리더, 앞으로 아무리 잘 해봤자 그저 좋은 친구 사이에 불과할 뿐인데.
'내가 어떻게 하면, 너의 곁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지나치고 있을 때, 갑자기 슬비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극장 앞. 슬비가 좋아하는 드라마 <XYZ 파일>의 극장판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응? 저거 니가 좋아한다는 그 드라마 아냐?"
"마, 맞아. 맙소사, 내가 저걸 놓치고 있었다니."
슬비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극장 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미처 표를 예약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듯 했다.
"잠깐 기다려."
"응? 야, 이세하! 어디가?"
세하는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소에 문의를 하니 운 좋게 남은 두 자리 표를 끊을 수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슬비에게 달려갔다. 어쩌면 그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슬비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한 손에 콜라, 한 손에는 팝콘을 든 채 어린아이처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극장 안으로 향하는 그녀는 마치 구름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세하는 하늘이 돕는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기에 영화의 내용 같은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 옆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
세하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슬비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고는 진지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럴때는 그냥 마음가는대로 해도 돼. 지금 우리는 임무를 하려고 온게 아니잖아."
"그, 그치만......."
"모처럼 재밌게 놀려고 나온거잖아?"
".....그래. 왠일로 맞는말도 하는구나?"
"나도 게임만 하면서 사는건 아니라고."
영화가 시작한 이후 슬비는 마치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정신없이 감상하기 시작했다.
세하는 사실 영화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나 집중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우면 어린아이처럼 노래도 부르는 그런 슬비의 의외의 모습들을 본 것들이 더 좋았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서 시간을 보내고,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서로의 모습을 조금 더 알아가는 그런 미래를 바랬었는데.
물론 일단은 그녀에게 이 마음을 전하는 것이 먼저겠지. 하지만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위기가 좀 더 좋았더라면, 혹은 우리가 정말로 사귀는 사이였다면 아마 지금을 틈 타 손이라도 살짝 잡아줄텐데. 넌 내가 널 바라보는 것도 분명 모르겠지.
세하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이 순간이 과연 앞으로도 얼마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앞으로는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후, 그렇단 말이군."
제이는 입에서 잔을 떼며 그렇게 말했다. 세하는 그가 마시는 특제 건강차의 녹색빛 색깔을 마치 오크의 타액(?) 처럼 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게임은 부딪치고 실패해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두려웠다. 만약 이대로 깨져버린다면 두 번 다시 예전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서로 얼굴을 볼 때마다 어색하게 굳어버린 공기를 억지로 들이마셔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분명 주변에서도 눈치챌텐데. 그걸 해명하는 일은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동생이 이런 고민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건가, 하하."
"웃지 마세요. 전 지금 정말 심각하다구요."
제이는 나도 얼마 전까지는 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분위기가 한몫한 시점이었기에 다행히도 유정 씨가 고백을 받아주긴 했지만, 세하의 경우에는 자신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연애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자신이 그런 세하에게 해결의 열쇠를 쥐어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겠지만.
"후, 이럴때 생각나는 명언이 하나 있군."
"그게 뭔데요?"
제이는 진지한 세하를 쳐다봤다. 보기 드문 그런 모습에 세하도 짐짓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고 상대가 알아주는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동생. 만약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할 수 밖에 없다면, 일단 시도는 해보고 후회하는게 더 나을수도 있어."
세하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닮은 바람이 어지러이 부는것이 느껴졌다.
-to be countinued
케릭터명 NoirSoleil 을 쓰던 사람입니다! =ㅂ= 사실 예전에 쓰던 닉네임은 워낙 대충 지은 느낌이 강해서 (.....) 꽤 오래전부터 쓰던 닉네임으로 변경했어요.
사실 이번 이야기는 제 나름대로 꽤 고민을 많이 했어요.개인적으로는 유리가 좋긴 한데 정미도 나름 재미있을듯 하고,하지만 설정상으로는 슬비가 또 가장 어울리고....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_-a)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엔 슬비로 결정했습니다.귀여운 검은양 리더 슬비..비록 플레이는 안하지만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케릭터에요.
이번에는 내용이 좀 길어서 일부러 2화로 나눴어요!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음번엔 슬비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귀한 시간에 이런 부족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