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봄이여 오라
NoirSoleil 2015-11-06 12
'넌 전쟁이 끝나면 뭘 할거야?'
소녀가 물었다. 언덕 위에 누워있던 소년은 그런 소녀를 슬쩍 바라보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딱히 무엇을 하고싶다고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단지 오늘 하루도 나와 내 곁의 전우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기에도 너무나 빠듯한 시간들이기에 소년은 그저 밤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푸른색 밤 하늘을 보고 있으니 마치 심해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분들이 들었다.
볼을 가볍게 간지럽히는 바람과 자기들끼리 소근거리듯 작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보는 소녀.
아,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이 멈추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말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소년은 소녀의 말에 무심한 척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다. 대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질투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사이가 나쁜건 아닌데, 왠지 나 혼자 좋아하는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해.'
그게 차라리 나였다면. 그렇다면 난 널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텐데.
'지금도 솔직히 고민이긴 해. 확 내가 먼저 말해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가 차이기라도 하면 나중에 어떻게 얼굴을 볼지 고민이기도 하고.'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행동하고 나서 후회하는게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라고 소년이 말했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는 응, 그것도 그렇네, 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소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입 안에서 천 가지의 말이 맴돌고 있었지만 소년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만 가지의 뜻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해?'
***
제이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4시를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다.
왜 그때의 꿈을 꾼걸까. 분명 잠이 잘 오도록 자기전 따뜻한 우유를 마셨을 텐데.
아무튼 확실한 것은 지금으로는 다시 잠들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아무것도 못 한 겁쟁이었어."
제이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무리 후회하고 애원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다. 지나온 길의 발자국을 따라서 다시 거슬러 올라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날의 나를, 이제는 놓아주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
***
"하, 이제 좀 쉬어도 되겠지."
제이는 허리를 두드리며 벤치에 누웠다. 유니온 본부 내부의 시설에서 하는 훈련이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프로그램 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완료하고 싶어도 어째 요즘들어 더 힘겨운 느낌만 가득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눈물이 날 정도로 매서웠던 겨울 바람들의 기세도 이제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곧 바람을 타고 춤추는 꽃잎들을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꿈이 또 다시 생각났다.
눈을 감아도 눈 앞에서 아지랑이 처럼 자꾸만 떠 오르는 그녀의 모습.
"하아, 힘들어.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싶은데."
세하의 목소리였다. 세하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제이의 머리맡 쪽에 털썩 앉았다.
"왜 그래, 동생.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데? 지금쯤이면 동생이 벌써 게임기를 꺼낼 타이밍이잖아?"
"뭐, 그건 그렇죠."
세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하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이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분명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가 보고싶은 것은 다른 것이 분명했다.
제이는 지금껏 살아온 직감으로 그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봐 동생, 그렇게 좋으면 그냥 남자답게 고백하는게 어때?"
"네,네? 그,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세하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채 손을 내저었다. 역시, 확실하군.
"무슨 소리긴. 좋아하잖아? 그 얘."
"아니, 그러니까, 저, 그게...... 어떻게 아셨어요?"
분명 평소와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달랐다. 세하가 그 얘를 바라보던 시선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마저.
닮았거든, 그 때의 나와.
제이는 그 말은 목 안으로 삼켜버렸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나약했던 스스로를 떠올리기 싫었다. 결국 그녀를 지키지 못했던 자신을.
"기운 내라고, 동생. 여자는 말야, 용기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나중에 어차피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해보고 후회하는게 나아."
"아저씨의 그 조언, 믿어도 되는거에요?"
"쿨럭! 무, 물론이지! 아무튼 잘 해보라고, 동생. 진심으로 축하해 줄테니까."
아마 지금 세하는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이 낯선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몸은 커버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버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분명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 혼자만 바뀐 그런 느낌.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세상을 바꿔 나가는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런 특별한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제이는 더욱 세하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것 만큼은 미리 막고 싶었다.
제이는 세하와 슬비, 유리, 그리고 미스틸을 볼 때마다 늘 그 생각 뿐이었다. 보기 드물게 너무나 바르고 착한, 보석같은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신처럼 망가지고 깨어지는걸 봐**다면 그땐 정말로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제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게임기를 꺼냈다.
그래, 이래야 동생답지, 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뭐 사실 나도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처음엔 그저 장난스럽게 다가간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물론 예전에 술에 취했을 땐 정말 딴 사람 같아서 좀 당황스러웠지만, 나름대로 꽤 귀여웠지.
"야, 이세하! 너 또 메뉴얼 안 보고 게임하니?"
당차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 슬비였다. 얼굴에 짜증난 기색을 전혀 지우지 않은채 팔짱을 끼고 세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한 판만 하고 보면 안 될까?"
"아까 훈련 전에도 그렇게 말했던걸 벌써 잊었어?"
"아, 네, 네."
"어휴,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아 참, 제이씨. 유정 언니가 찾으셨어요."
제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깜빡하고 무릎에 파스를 붙이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날씨 탓인지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윽, 무릎이...... 얘들아, 늘 말하지만 무리하지 마라. 건강이 제일이야."
"아저씨만 건강하면 돼요."
"제이씨만 건강하면 돼요."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렇게 한 마디 툭 던지고 제이는 뒷목을 두드리며 유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최근 이것 저것 일이 많다고 늦게까지 남아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었지.
임시본부로 향하면서 제이는 머리속으로 피로회복에 좋은 것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딸기랑 고구마가 피로 회복에 그렇게 좋다는데. 물론 제일 좋은건 홍삼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비싸니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군. 음, 와인도 좋다던데 이걸 핑계로 데이트?'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제이는 꿈 속의 소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때의 나는 어째서 용기를 내지 못 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저 후회만 밀려왔다.
물론 그 때는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기엔 너무나 어렸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존재는 자신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아주 작은 꽃잎처럼 너무나 가녀리고 여리게 보여 행여나 쥐면 꺼질까 마음대로 손을 댈 수도 없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우주가 되어있었다.
'그만 생각하자. 이제 지나가버린 일인걸.'
우주가 무너진 날, 소년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법을 잊어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 처럼.
***
"유정 씨, 있어? 나 들어갈게."
똑똑, 살며시 노크를 해봤지만 응당 있어야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인건 책상에 엎드린 채 곤히 자고있는 유정의 모습이었다. 이렇다할 난방기구도 없어서 살짝 사늘한 공기가 감도는데 세상 모르고 자는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것 같다.
"큰일이구만, 이 아가씨. 요즘 겨울 감기가 얼마나 독한데 이렇게 자다니."
입버릇처럼 또 혼자 건강 챙겨야지, 라면서 제이는 다가가 자신의 쟈켓을 벗어주었다.
창문 너머로 햇살 조각들이 유정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딱딱한 적막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오로지 유정의 숨소리만이 생명력을 가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의외로 긴 속눈썹,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코와 예쁘게 혈색을 띄고있는 입술.
제이는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유정씨의 얼굴을 이렇게나 자세히 관찰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마치 한 편의 음악처럼 제이의 귓가를 맴돌았다.
'나...... 이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래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 때의 기억은 결국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다. 흉한 그것을 지우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늘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특히나 밤에는 이런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은 있는가, 하는 생각에 끊었던 술 생각이 나 몸서리 쳐지는 일도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가로등 아래 웅크린 외로움과 미련을 끌어안은 자신을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다.
"으음...... 아, 제이 씨?"
정신을 차려보니 유정이 반쯤 감긴 눈을 힘겹게 비비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일어났군.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일부러 깨우지는 않았어."
"미안해요, 불러놓고 자 버려서. 너무 피곤해서 그만......."
"아아, 괜찮아. 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 했는걸."
유정은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하는 표정으로 그를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제이는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유정 씨, 자면서 침 흘리던걸?"
"네, 네? 지, 진짜에요?"
"아니, 뻥이야."
"아이 참, 정말! 매일 장난이나 치시고!"
제이는 웃으며 그녀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피로회복제를 건넸지만, 역시나 유정은 단칼에 거절했다. 물론 어느정도 예상은 한 반응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즐겁다, 진심으로.'
이 사람과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좀 더 이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다. 지금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면서 웃고 싶다.
물론 제이는 차마 입으로 말 할 순 없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지금의 안락함에 금이 가 결국 그 틈으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이 밀어닥칠 것 같았다.
겁이 났다.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할 텐데, 그럴 때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 공기를 난 감당할 수 있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꿈 속의 소녀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이대로 혼자 정리하면 편해질까?
그게 정말 내가 원하던 것들일까? 그저 지금처럼 시시하고 재미없는 '평화'에 만족하며 쓸쓸히 사는게 정답일까?
'나중에 어차피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해보고 후회하는게 나아.'
자신이 세하에게 했던 말이다.
제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아서 였기 때문이다.
난 내가 한 말을 지키지 못 할 정도로 비겁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 버린걸까.
"응? 왜 그래요, 제이 씨?"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유정 씨."
조금 더 시간을 갖자. 이 사람에게 내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자. 무엇이든 서두르면 그르친다는 걸 몸으로 깨달은 제이였다. 그러니 괜히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자.
제이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 소리를 들킬 것 같았기 때문에.
톡톡,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선가 뻗어온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창문에 부딪치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 날을 기다린 것 처럼 가지에 자그마한 연녹색 새순이 보였다.
톡톡,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fin.
공홈 자체에 글을 처음 써보네요 =ㅂ=a 개인적으로 제이&유정 커플을 격하게 지지하는데 문득 부케로 제이를 하면서 제이의 과거의 첫사랑과 지금을 엮어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검은양 스토리가 엔딩이 나면 제이랑 유정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귀한 시간에 이런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ㅂ=) 개인적으로 따로 또 생각해둔게 있긴 한데...왠지 딥다크한 내용이 될 것 같네요 (심각한 케붕은 덤ㅇ 으브븝ㅂ읍ㅇ)
p.s 노래 제목은 MC Sniper 의 4집에 수록된 동명의 곡에서 따왔습니다.정말 좋은 노래에요!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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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세상에 제가 명전에....!!! ㅠㅠㅠㅠㅠㅠ 잘 읽었다고 달아주시는 댓글들도 너무 기뻤는데 생각도 못한 명전이라니 ㅠㅠㅠㅠ
가문의 영광이네요 ㅠㅠㅠㅠ 으허허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감사합니다아 ㅠㅠㅠ
레비아 이야기도 한참 쓰다가 머리 식힐겸 들어왔는데 명전이라니ㅠㅠㅠㅠ 아 너무 기뻐서 뭐라 말이...어흡
더 노력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 쓰도록 노력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